SF 생태주의
천연적인 거대 괴수와 거대 생체 병기의 차이 본문
[하얀 향유 고래 모비 딕은 거대한 야생 동물이고 동시에 19세기 거대 괴수일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 장르에서 괴수라는 존재는 여러 종류들로 나뉩니다. 크거나 작은 괴수가 있겠고, 포악하거나 선한 괴수가 있을 겁니다. 어떤 괴수는 인간보다 약간 크나, 어떤 괴수는 집채만하고, 어떤 괴수는 초고층 건물에 이르겠죠. 어떤 괴수는 인간에게 우호적일 테고, 어떤 괴수는 신나게 도시를 파괴할 테고, 어떤 괴수는 인간 따위에게 관심조차 없을 겁니다. 육식성 괴수나 초식성 괴수가 있겠죠. 누군가는 사람들을 맛있게 집어삼킬 테고, 누군가는 풀이나 나무를 우적거릴 테고, 누군가는 기상천외한 것에서 영양분을 얻겠죠. 털가죽이 북슬거리는 포유류 괴수가 있을 테고, 우둘투둘한 비늘을 선보이는 파충류 괴수도 있을 겁니다. 아마 외골격이 징그러운 절지류 괴수는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빠지지 못하는 단골 손님일 테고요.
이렇게 괴수들은 여러 종류들로 나뉘고, 이것들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겁니다. 온갖 소설들과 영화들과 게임들에서 각종 사례들을 찾을 수 있겠죠. 괴수를 가르는 기준들 중에는 태생적인 요인 역시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괴수는 천연적일 테고, 어떤 괴수는 인공적일 테죠. 아마 후자는 생체 병기에 가까울 듯합니다.
천연적인 괴수는 말 그대로 인간(을 비롯한 다른 지적 존재들)이 손대지 않은 거대 생명체입니다. 이런 괴수는 인간과 상관없이 오랜 역사를 자랑합니다. 이런 괴수는 인간과 멀리 떨어진 외계 행성에서 살거나 인류보다 훨씬 오래 전에 지구를 활보했을지 모릅니다. 기본적으로 이런 괴수는 야생 동물과 마찬가지입니다. 인류 문명 바깥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동물이죠. 이런 괴수는 일반적인 야생 동물과 달리 크고 위협적입니다. 하지만 인류가 이런 괴수를 바라보는 시각은 야생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도시를 부수는 외계 괴수는 돛단배를 부수는 향유 고래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물론 20세기 이후 사람들은 향유 고래의 씨를 말리다시피했고, 향유 고래를 무섭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겁니다. 하지만 19세기 전에 향유 고래는 함부로 대적하기 어려운 야생 동물이었습니다. 적어도 돛대 세 개짜리 범선으로 대양을 건너야 하는 선원들에게 향유 고래는 괴수와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포경선 에섹스는 향유 고래가 괴수라는 유명한 사례일 겁니다. 모카 딕 같은 괴수는 <백경>에게 영감을 미쳤을 테고요. 만약 대재앙이 일어나고 21세기 인류가 순식간에 13세기 문명으로 돌아간다면, 향유 고래는 다시 위협적인 괴수가 되겠죠.
향유 고래처럼 공룡은 위협적인 괴수가 될 수 있을 겁니다. 현대 인류는 거대한 공룡들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공룡은 향유 고래보다 훨씬 기이한 괴수가 될 수 있겠죠. 공룡은 상상 속의 생명체가 아니라 정말 이 대지 위를 활보했던 생명체이나, 공룡은 수많은 창작가들에게 무수한 영감을 선사했고,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에는 진짜 공룡부터 뻥튀기한 공룡까지, 다양한 괴수들이 무시무시한 위용을 뽐냅니다.
그래서 <콩: 해골섬> 같은 영화는 <잃어버린 세계> 같은 소설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백인 남자들이 득실거리는 강대국 탐사대가 낯선 오지(열대 밀림)를 탐사하고, 그러는 동안 거대한 동물들과 마주치고 싸우고 도망칩니다. <콩: 해골섬>은 흑인도 집어넣고 동양인도 집어넣고 여자도 집어넣으려고 애쓰나, <잃어버린 세계>에 등장하는 챌린저 탐사대의 잔재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아요. 흑인이고 동양인이고 여자고 상관없이, 그저 열대 밀림에서 거대한 생명체들과 마주한다는 내용이 골자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20세기가 무대이고, 소설은 19세기가 무대이나, 그것 역시 별로 상관이 없을 겁니다. 공룡과 달리 킹콩이나 스컬 크롤러는 상상 속의 생명체이고 공룡보다 훨씬 강인합니다. 킹콩은 탐사 헬기 편대를 신나게 두들겨 팼죠.
[킹콩 역시 야생 동물입니다. 킹콩은 아주 초자연적이고 강인하고 거대한 야생 동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킹콩과 공룡은 똑같이 오지에 서식하는 거대 생명체입니다. 영화 제작진이 인정할지 모르겠으나, <콩: 해골섬>은 <잃어버린 세계>를 계승하는 영화입니다. 비단 <콩: 해골섬>만 아니라 쥘 베른과 아서 코난 도일이 창작한 비경 탐험과 거대하고 아련한 생명체를 계승하려는 창작물들은 무수히 많을 겁니다. 예전에 저는 IMDB가 <콩: 해골섬>을 판타지 영화로 분류했다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콩: 해골섬>을 판타지로 분류하고 싶다면, 아서 코난 도일과 쥘 베른 역시 판타지로 들어가야 할 겁니다. 두 작가는 분명히 판타지에 들어갈 수 있겠으나, 한편으로 사이언스 픽션 역시 두드러집니다.
무엇보다 판타지와 사이언스 픽션에 상관없이, <콩: 해골섬>이 <잃어버린 세계>가 제시한 연장선에 서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겠죠. 물론 비경 탐험만 괴수를 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비경 탐험은 인류가 문명 밖을 벗어난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거대 괴수를 묘사하기에 제일 적합한 하위 장르일 겁니다. 쥘 베른이 <해저 2만리>에서 바다가 거대 생명체에게 가장 어울리는 무대라고 말한 것처럼 거대 괴수는 문명 속에서 존재하기 어렵겠죠. 인류가 아무르 호랑이들을 말살한 것처럼 인류와 괴수는 파국적으로 싸울 겁니다.
<듄>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는 괴수를 선보이나 비경 탐험이 아닙니다. 하지만 비경 탐험 같은 면모를 어느 정도 간직했습니다. 일련의 사람들이 깊은 사막을 헤매고 자연 환경에게 압도당할 때, 그런 장면들은 비경 탐험 소설의 맥락과 닿았습니다. 문명에게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자연 환경에게 시달리고, 인적이 없는 대지를 방황하는 과정…. 그 과정은 분명히 비경 탐험입니다. 비록 그런 사람들은 별로 탐험할 생각이 없겠으나, 과정은 꽤나 비슷하죠. 문명과 자연을 명확히 단절하기가 어렵다고 해도 여타 비경 탐험 소설들처럼 <듄>은 인적이 없는 대지를 방황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사람들은 거대한 모래벌레를 목격하고요.
하지만 종종 문명은 괴수를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괴수가 인류 사회에 봉사한다면, 문명은 괴수를 허용하겠죠. 아예 문명은 괴수를 만들거나 개량할지 모르죠. 어쩌면 머나먼 과거에 멧돼지나 들소는 인류에게 피해를 입히는 야수들이었을지 모릅니다. 지금도 멋돼지가 도시에 난입하면, 사람들이 다칠지 몰라요. 하지만 인류는 소나 돼지를 사육합니다. 소나 돼지는 야생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문명에 속했죠.
고대 인류는 유전자 조작을 몰랐으나, 작물이나 가축을 개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만약 인류가 그걸 깨닫지 못했다면, 문명은 덩치를 키우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그런 것처럼 인류 문명은 괴수를 개량하고 이용할 수 있습니다. 거대한 생명체가 공장에서 구동축을 돌리거나 험지에서 화물을 운송하거나 사람들을 태우고 하늘을 날아간다면, 괴수가 인류 문명에 봉사한다고 말할 수 있겠죠. <와인드업 걸>에서 개조 코끼리는 공장을 돌리는 동물입니다. 일반적인 코끼리보다 훨씬 거대하기 때문에 이 개조 동물이 폭주한다면 사방에서 막대한 피해를 끼칠지 몰라요. 동남 아시아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코끼리를 운송이나 수송에 사용하고, 그래서 동물 권리를 비롯한 각종 사고들이 터집니다.
<와인드업 걸>에서 폭주하는 개조 코끼리는 동남 아시아의 사역 코끼리에 유전자 조작이라는 상상 과학을 덧붙인 결과겠죠. 소설 배경이 태국이라는 사실은 이런 설정과 무관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유럽이나 미국 같은 강대국들이 이런 개조 코끼리를 이용하는지 소설은 자세히 묘사하지 않아요.) 여기에서 상상력을 더욱 뻗는다면, 사역 괴수만 아니라 군사용 괴수를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거대 괴수 병기들은 야생 동물이 아니라 개조 생명체들, 인공적인 병기들입니다.]
생체 병기는 그런 상상력이 빚은 결과입니다. 인간보다 약간 크거나 작은 생체 병기들이 있겠으나, 그보다 훨씬 거대한 생체 병기들도 있겠죠. 그런 생체 병기들은 괴수와 다르지 않을 테고요. 소설 <베헤모스>에서 영국 해군이 사용하는 베헤모스는 거대한 바다 촉수 괴수입니다. 이 생명체가 바다 괴수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겁니다. 흔한 촉수 괴수들과 달리 베헤모스는 인류 문명에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류 문명에 복종합니다. 적어도 대영 제국이라는 문명에 복종하죠. (소설 속에서 베헤모스는 터키의 해협 봉쇄를 뚫고 독일 해군 전함을 공격합니다.)
저는 자연과 문명을 단절적으로 가르고 싶지 않습니다. 인류 역시 자연 생태계 속에서 살아가고, 야생 동물들이 멸종할 때 빈민들이나 원주민들 역시 고통을 받기 때문입니다. 야생 동물들이 멸종하는 현상은 그저 환경 오염이 아니에요. 그건 환경 오염인 동시에 계급 수탈이죠.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연과 문명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미사고의 숲>처럼 야생의 괴수는 문명과 적대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여타 거대 괴수들이 문명을 습격하는 야생을 상징하는 반면, 영국 해군의 베헤모스는 그런 적대적인 야생과 별로 상관이 없어요.
물론 소설 속의 어떤 독일 소년이 베헤모스에서 심해의 공포와 강렬한 야생을 느낀 것처럼 문명 속의 괴수 역시 여전히 야성을 뿜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 야성은 인류가 통제할 수 있는 야성입니다. 공룡이나 향유 고래는 인간이 통제하지 못하고 길들이지 못하는 야성이나, 베헤모스는 통제할 수 있고 길들일 수 있는 야성입니다. <미사고의 숲>에서 멧돼지 괴수는 주인공(문명인)과 계속 대적하나, <베헤모스>에서 영국 해군은 베헤모스를 이용해 전력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체 병기는 로망일 겁니다. 아주 거대한 힘을 움켜쥘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고 포악하게 보이는 야성을 자신의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는 기계를 사용하는 것과 다른 감성입니다. 아무리 인류가 거대 로봇을 만든다고 해도 거대 로봇은 죽은 것입니다. 적어도 거대 로봇은 야성을 상징하지 못하죠. 반면, 거대 생체 병기는 살아있는 것이고 야성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는 그런 거대하고 살아있는 야성을 정복할 수 있고 길들일 수 있죠. 아마 승마를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몸 아래에서 육중한 동물이 움직인다는 사실에 쾌감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바로 그런 경험이죠. 아주 거대하고 육중한 생명이 자신의 발 아래에 복종한다는 것.
그래서 저는 거대 생체 병기가 정복 욕구를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살아있는 대상을 자신의 마음대로 길들이고 조종한다는 욕구죠. 똑같이 괴수를 좋아한다고 해도 야생 속에서 멋대로 날뛰는 괴수를 좋아하는 사람과 거대한 생체 병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서로 심리나 사고 방식이 다를지 몰라요. 흠, 좀 더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근거를 들고 싶으나, 여기까지가 한계로군요. 아마 나중에 이런 주제를 또 다른 방식으로 논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