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고지라> - 야생 동물에게 감정을 이입하기 본문
※ 2014년 영화 <고지라>의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어니스트 시튼. 1895년 "The Persuit". 얼마나 자주 우리는 야생 동물들을 바라보고 생각할까요.]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수많은 타인들을 만납니다. 우리는 실제 사람들을 만날 뿐만 아니라 각종 소설들이나 드라마들, 영화들, 게임들 속에서 가상의 인간들과 만나죠. 하지만 인간들을 만나는 만큼 야생 동물들을 만나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겁니다. 실제 야생 동물들을 꾸준히는 만나는 사람은 드물 겁니다. 생태학자나 삼림 순찰대, 동물원 사육사, 서커스 조련사 정도? 게다가 동물원이나 서커스의 야생 동물들은 감옥에 갇힌 것과 다름이 없죠. 그런 동물들을 '야생' 동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야생 동물에 별로 관심이 없을 겁니다. 동물은 인간이 아니죠.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자신이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대상에게 관심을 보이곤 합니다. 사람들은 수많은 타인들에게 둘러싸였고, 구태여 저 문명 밖의 낯선 동물에게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이 지옥이라고 말했으나, 야생 동물들은 그 지옥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야생 동물을 아예 인식 속에 들이지 않아요.
당연히 사람들은 소설들이나 영화들, 게임들 속에서 타인을 만나기 원할 겁니다. 수많은 소설들과 영화들과 게임들은 인간들이나 유사 인간들만 이야기합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나 영화, 게임이 (인간이 아니라) 야생 동물을 주연으로 삼는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창작물을 좋아할지 궁금합니다. 물론 야생 동물을 주연으로 삼은 창작물이 성공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건 드문 사례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창작물들은 사람들이 동물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도록 애쓰곤 합니다. 만약 그 야생 동물의 삶이 뭔가 인간적인 것과 멀어진다면, 사람들은 금방 흥미를 잃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야생 동물을 주연으로 삼는 창작물은 한 가지 고민에 처합니다. 그런 창작물은 사람들이 그 동물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감정을 이입하도록 해야 합니다. 아니면 그 동물이 인간 세상에 크나큰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야생의 부름>과 <죠스>는 각각 상반된 사례일 겁니다. <야생의 부름>에서 주인공 썰매개는 각종 인간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습니다. 썰매개는 인간들과 우정을 나누거나 싸우거나 호되게 당합니다. 각양각색의 인간들은 언제나 썰매개의 곁을 지나갑니다. <죠스>는 반대입니다. 이 소설에서 상어는 여러 사람들을 해칩니다. 상어는 인간들의 삶을 위협하고 바다 그 자체를 공포로 조성합니다.
2014년 영화 <고지라>는 <야생의 부름>과 <죠스>를 적당히 혼합했습니다. 하지만 야생 동물과 인간의 적대 관계는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반면, 야생 동물과 인간의 교류는 꽤나 희미합니다. 이 영화에는 두 종류의 야생 동물들이 나옵니다. 무토 부부와 고지라입니다. 아, 이들은 그저 평범한 야생 동물이 아니군요. 인류 문명은 기존 화력으로 이 동물들을 처치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야말로 괴수라는 명칭은 이들에게 잘 어울릴 겁니다. 하지만 어쨌든 무토 부부와 고지라는 야생 동물이 맞습니다. 그리고 무토 부부는 전형적인 악당형 야생 동물입니다. <죠스>에서 상어가 사람들을 해친 것처럼 무토 부부는 도시를 부수고 사람들을 죽입니다.
반면, 고지라는 사람들을 위기에서 구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고지라가 무슨 슈퍼 히어로처럼 인류의 구원자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슈퍼 히어로들이 명명백백한 의도로 세상을 구원한다면, 고지라는 그저 천적을 없앴을 뿐입니다. 고지라는 인류를 구원한다는 생각 따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영화는 가끔 고지라를 구원자로 추앙하기 위해 비장한 분위기를 연출하나, 그것과 별개로 고지라 자체는 인류에게 아무 감정이 없습니다. 그저 묵묵히 무토 부부만 추적할 뿐입니다.
무토 부부는 아주 전형적인 악당형 야생 동물이나, 고지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야생의 부름>에 등장하는 썰매개처럼 가끔 고지라는 인류와 어떤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관계는 제대로 이어지지 않아요. 인간 주인공과 고지라가 시선을 맞춘다고 해도 고지라는 한낱 개인 따위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솔직히 고지라는 인류 전체에게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인류는 그저 성가신 장애물에 불과하고, 고지라는 그 장애물을 돌파할 뿐입니다. 고지라는 빨리 무토 부부를 제거하고 싶어하고, 그래서 이 거대 해양 괴수는 인간들을 별로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지라가 인류에게 피해를 덜 끼치는 것처럼 보이나, 그렇다고 해도 고지라가 인류를 동정하거나 좋아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덕분에 인류에게 보다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는 괴수는 무토 부부입니다. 솔직히 무토 부부는 영화 속의 사건을 주도적으로 끌고 갑니다. 잔지라 핵 발전소를 부수고, 주인공의 부모를 죽이고, 선박이나 기차를 습격하고, 공항을 짓밟고, 기타 등등. 전부 무토 부부의 작품이죠.
[인간들이 따라온다고 해도, 고지라는 상관하지 않아요. 관객들 역시 고지라에게 상관하지 않…을까요?]
이건 크나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제목은 '고지라'이기 때문입니다. 무토가 아니라 고지라가 제목입니다. 사람들은 고지라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을 겁니다. 무토 부부가 아니라. 하지만 고지라는 상당히 수동적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고지라는 사건을 주도적으로 끌고 가지 않습니다. 무토 부부가 뭔가 사건을 일으키면, 고지라는 뒤늦게 그들을 추적합니다. 만약 무토 부부가 깨어나지 않았다면, 고지라는 저 깊고 깊은 바닷속에서 쿨쿨 잠만 잤을 겁니다. 따라서 영화 제목과 달리 고지라는 중심 줄거리에서 어느 정도 떨어졌습니다. 차라리 이 영화를 <무토 부부>라고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 등장 시간 역시 무토 부부가 더 많이 차지할 겁니다. 솔직히 '고지라'라는 영화 제목이 아깝습니다. 만약 고지라의 출현 시간이 꽤나 길었다면 어땠을지 모르지만, 고지라의 출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대략 10분 정도? 2시간짜리 영화에서 고지라는 그저 10분 동안 띄엄띄엄 등장할 뿐입니다. 물론 그 존재감은 엄청납니다. 골판을 내밀고 헤엄치는 첫 모습, 쓰나미를 일으키며 도시에 상륙하는 모습, 공항에 첫 발을 딛는 모습, 금문교에서 포효하는 모습, 뭐, 명장면들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합니다. 고지라는 더 많이 등장하거나 사건을 주도적으로 끌고 가야 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고지라가 야생 동물이라는 점입니다. 위에서 저는 사람들이 야생 동물에게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야생 동물에게 제대로 감정을 이입하지 못합니다. 야생 동물은 말을 하지 않고 표정을 짓지 않고 뭔가 인간적인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팔리 모왓이 <울지 않는 늑대>에서 밝힌 것처럼 동물 연구자들도 야생 동물의 행동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일반 관객이 야생 동물의 행동에 절절히 공감할 수 있겠어요. 고지라는 이 영화에서 대사 한 마디 없습니다. 당연하죠. 야생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리자와 박사는 왜 고지라가 저렇게 행동하는지 일일이 설명하나, 아무리 세리자와 박사가 열심히 해설해도 그건 감정 이입의 장치가 되기에 부족합니다. 고지라 본인이 직접 말하고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다면, 관객은 고지라에게 마음을 쏟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영화가 개봉했을 때, 사람들은 고지라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영화는 자연 다큐멘터리처럼 묵묵히 고지라의 행적을 쫓을 뿐입니다. 그건 이 영화의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정적인 자연 다큐멘터리는 큰 인기를 끌기 힘듭니다. 자극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블록버스터입니다.
만약 고지라가 인간이었다면, (설사 대사가 없다고 해도) 어느 정도 내면 연기를 보여줬을 겁니다. 관객들은 그런 연기에 몰입했을 테고, 고지라가 중심 줄거리에서 다소 멀어졌다고 해도 그 연기를 받아들였을 겁니다. 하지만 고지라는 인간이 아닙니다. 야생 동물의 연기는 사람에게 뭔가를 어필하기 어려워요. 텔레비전의 자극적인 동물 프로그램들은 야생 동물의 행동을 묵묵히 보여주지 않습니다. 성우들은 그 동물의 행동을 열심히 설명하고, 때때로 아예 성우들은 동물들을 연기하죠. 그건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차라리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사람들은 그런 동물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봅니다. 성우들이 동물들을 연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동물이 아니라) 성우에게 감정을 대입할 수 있습니다. 동물들의 삶이 흥미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우가 재미있게 연기를 하고, 사람들은 그 성우에게 감정을 이입합니다. 만약 아무 해설이나 설명이나 연기가 없는 자연 다큐멘터리가 있다면, (자극적인 동물 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걸 외면할 겁니다. 거기에는 어떤 인간적인 감정이 없기 때문에.
따라서 이는 시점의 문제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인간적인 것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 사람은 고지라의 행동이 재미가 없다고 느낄 겁니다. 이 영화는 그런 장치를 마련해야 했으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드 SF 작가들이나 뉴 위어드 작가들의 생명체에 비한다면 고지라는 아주 인간적인 괴수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관객들은 고지라마저 비인간적이고 그래서 재미가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심지어 괴수물 매니아들도 그렇게 느끼겠죠. 그게 과연 감독의 의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2014년 <고지라>를 지루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차라리 <퍼시픽 림> 같은 영화가 훨씬 나을 겁니다. <퍼시픽 림>에는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대상들이 충분합니다. 주인공이 인간이고, 그 인간이 거대 로봇을 조종하기 때문입니다. 관객들은 왜 거대 로봇이 그렇게 행동하는지 명확하게 압니다. 고지라의 행동이 모호한 것과 천차만별이죠. 아니면 <스파이더맨>이나 <캡틴 아메리카> 같은 영화가 훨씬 낫겠죠. 아무리 영화 제작진이 거대 괴수를 만들고 도시를 부수고 난리법석을 부리면 뭐 하겠습니까. 예전에 <갓질라>가 강조한 것과 달리 스케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관객들은 야생 동물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요. 개인적으로 세리자와 박사의 설명을 곁들여 고지라의 행적을 추론하는 과정이 재미있었으나, 이런 것을 재미있다고 여기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을 듯합니다.
[무토 역시 인간들에게 상관하지 않아요. 관객들은 야생 동물에게 어렵게 감정을 이입해야 합니다.]
다행히(?) 2014년 <고지라>는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평가는 그럭저럭이었으나, 이름값 덕분에 흥행에 성공했어요. 하지만 속편 영화가 이런 기조를 계속 유지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속편의 감독은 고지라를 더욱 많이 보여주겠다고 이야기했죠. 확실히 2014년 영화는 블록버스터의 전형적인 공식에서 거리가 멀었습니다. 저는 가렛 에드워즈(2014년 감독)의 방법론이 좋았지만, 블록버스터 영화가 이런 기조를 계속 유지하기 힘들 겁니다. 만약 고지라의 출현 시간이 늘어난다고 해도 2014년의 그 묵시적인 분위기는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