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바이오펑크 소설들과 반 헬싱의 생체 병기 본문
셜록 홈즈와 함께 드라큐라는 세상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소설 캐릭터라고 합니다. 그래서 드라큐라의 라이벌 아브라함 반 헬싱도 인기가 많죠. 반 헬싱이 드라큐라만큼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드라큐라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무조건 반 헬싱이 나와야 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반 헬싱은 이성과 과학으로 음습한 악의 무리를 뒤쫓는 사냥꾼이고, 이런 사냥꾼의 이미지는 후대 창작물들에게 많은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가령, 휴 잭맨이 주연한 <반 헬싱>도 그런 종류입니다. 드라큐라 이야기지만, 흡혈귀보다 반 헬싱에 더 초점을 맞췄죠. 이름도 가브리엘 반 헬싱으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기반으로 탄생한 <인크레더블 어드벤처 오브 반 헬싱>도 그런 창작물입니다. '반 헬싱의 놀라운 모험'으로 부를 수 있으려나요. <인크레더블 어드벤처 오브 반 헬싱>은 일종의 핵 앤 슬래시 롤플레잉 게임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주인공인 반 헬싱을 조종하고, 드넓은 동유럽의 여러 마을과 산맥과 지하를 탐험하고, 온갖 언데드들이나 악마들과 격렬하고 화끈하고 박 터지게 싸웁니다.
이런 비디오 게임은 원작의 설정을 훌쩍 뛰어넘곤 합니다. 게임 <반 헬싱>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소설 <드라큐라>의 반 헬싱은 학자이자 지식인입니다. 그래서 액션이나 무력은 이 양반의 몫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건 주변의 젊은이들 차지였죠. 하지만 영화 <반 헬싱>은 블록버스터였기 때문에 볼거리와 액션을 강조해야 했습니다. 주인공 반 헬싱은 젊은 사냥꾼이고, 학자나 지식인보다 용병에 가까워 보입니다. 게임 <반 헬싱> 역시 핵 앤 슬래시 게임이기 때문에 반 헬싱은 이리저리 뛰고 뒹글고 찌르고 쏘고 터뜨리고 때리고 두들겨 패고 난리법석을 벌입니다.
이쯤 되면, 원작 소설의 지적인 학자와 비디오 게임의 쌈박질 캐릭터가 무슨 관계인가 의문입니다. 솔직히 이름이 반 헬싱이지만, 비디오 게임의 쌈박질 캐릭터는 원작 소설의 지적인 학자와 하등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저 이름만 빌려왔죠. 반 헬싱의 명성이 워낙 독보적이기 때문입니다. 비단 주인공의 설정만 바뀌지 않았습니다. 작품의 전반적인 설정 자체가 바뀌었어요. 원작 소설은 그냥 19세기의 음산한 분위기만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은 완전히 스팀펑크의 4차원 세계로 날아갔습니다.
게임 <반 헬싱>은 19세기 스팀펑크의 수많은 유산들을 끌어 안습니다. 최첨단 과학, 생체 개조, 자동 로봇, 인공 지능, 강화복, 막강한 화기들, 복잡한 화학물들이 사정없이 튀어나옵니다. 원작 소설과는 아예 딴판이죠. 원작 소설은 생체 개조나 자동 로봇 따위를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가이 리치의 영화처럼) 가끔 <셜록 홈즈>의 리메이크 창작물들도 볼거리와 액션을 위해 스팀펑크로 변하는데, 게임 <반 헬싱>은 신나고 빠르고 화끈한 액션을 위해 스팀펑크의 온갖 요소들을 몽땅 쓸어넣은 것 같습니다. 원작 소설이 그냥 단순한 부침개였다면, 비디오 게임은 온갖 토핑을 우르르 쏟아부은 콤비네이션 피자라고 할까요.
그렇다고 해서 게임 <반 헬싱>이 소설의 명성에 먹칠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이 비디오 게임의 분위기를 꽤나 좋아합니다. 황량하고 적막하고 우울한 동유럽의 황야, 미신과 전설과 기괴한 소문들, 웅장하지만 오싹해 보이는 건축 양식, 마을과 숲 속과 지하로 이어지는 끝없는 탐험, 톱니바퀴가 마구잡이로 돌아가는 각종 로봇들, 고전적인 양식의 강화복, 주술과 흑마법과 정령들, 각종 돌연변이와 개조 생명체들…. 뭐, 진부하고 상투적인 이야기들과 설정들이지만, 그래도 이 게임을 스팀펑크의 종합 선물 세트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스팀펑크 요소들과 <드라큐라>의 음울함이 아주 잘 어울리는군요.
덕분에 주인공 반 헬싱도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그냥 단순히 악마를 연구하는 학자가 아닙니다. 비디오 게임 속에서 반 헬싱은 여섯 가지 분야로 특화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클래스 개념입니다. 특화에 따라 반 헬싱의 특기가 달라집니다. 우선 현상금 사냥꾼(바운티 헌터) 클래스가 있습니다. 현상금 사냥꾼은 말 그대로 총잡이입니다. 다양한 권총이나 소총을 쏘고, 멀리에서 괴물들과 악마들의 심장을 날려버릴 수 있어요. 아마 그나마 좀 보수적(?)인 클래스일 겁니다. 다른 클래스들은 그야말로 원작 소설의 설정에서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니까요.
건조자(콘스트럭터)는 온갖 로봇들을 이용합니다. 로봇 기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거대한 부유(!) 로봇을 만드는데, 악마들과 괴물들을 향해 연이어 포격과 로켓을 날립니다. 악마와 로봇의 싸움을 감상할 수 있죠. 건조자는 이 거대한 부유 로봇 이외에 다른 로봇들도 만들 수 있고, 그래서 로봇 군단을 이끌고 다닐 수 있습니다. 반 헬싱은 안전하게 뒤에서 싸우고, 로봇들이 위험한 전열에서 악마들과 투닥거립니다. 이건 뭐, <퍼디도 정거장>에서 괴물 나방들과 원숭이 로봇들의 싸움을 보는 것 같군요. 로봇 공학을 좋아하는 플레이어라면, 건조자는 아주 탁월한 선택이 될 것 같습니다.
정령술사(엘리멘탈리스트)는 마법사에 가깝습니다. 번개와 광선와 불덩이를 화끈하게 펑펑 터뜨립니다. 마법 보호막을 펼치고 적들의 공격을 상쇄할 수 있으며, 수많은 적들에게 광범위한 공격을 신나게 퍼부을 수 있어요. 우리가 검마 판타지에서 흔히 상상하는, 그런 마법사입니다. 상당히 전형적이기 때문에 화끈한 마법사 플레이어를 위한 클래스 같습니다. 반면, 수호자(프로텍터)는 중무장 보병입니다. 마치 중세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육중한 갑옷과 검과 방패로 무장했습니다.
물론 이건 그냥 평범한 갑옷이 아닙니다. 수호자는 생긴 것처럼 튼튼하고 단단하며, 방패로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습니다. 방패로 밀어붙이고 검으로 두들겨 패고, 주변의 적들을 무참하게 썰어버립니다. 뭐, 건조자나 정령술사, 현상금 사냥꾼이라면 모를까, 수호자는 정말 반 헬싱의 원래 모습과 한참 멀어진 것 같군요. 수호자는 차라리 어디 검마 판타지에 나올법한 클래스입니다. 튼튼한 근접전 캐릭터를 원하는 플레이어는 수호자를 고를 수 있겠죠. 플로지스톤 기술자(플로지스토니어)는 고전적인 양식의 강화복을 입습니다. 아마 플로지스톤 학자는 건조자처럼 19세기 과학을 대변하나 봅니다.
건조자의 상징이 부유 로봇이라면, 플로지스톤 기술자의 상징은 강화복입니다. 당연히 강화복은 폼이 아닙니다. 지뢰를 깔고, 화염 방사기를 휘두르고, 로켓을 발사하고, 역장을 내뿜습니다. 게임 설정에 '위어드 사이언스'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런 강화복을 뜻하는 듯합니다. <스타십 트루퍼스>나 <영원한 전쟁>의 강화복처럼 멋진 물건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19세기니까요. 뒤뚱뒤뚱 걸어다니고, 등에 요상한 굴뚝이 달렸고, 어딘지 허술해 보입니다. 이것도 스팀펑크의 매력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미래의 강화복 개념을 19세기에 외삽하고 싶은 플레이어라면, 플로지스톤 기술자는 좋은 선택이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발상을 좋아합니다. 미래의 첨단 기술을 19세기 스팀펑크에 집어넣는다…. 이게 바로 스팀펑크의 로망이 아닌가 싶습니다. 움브라리스트는 뭐로 번역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름처럼 그림자 기술을 주로 사용하고, 따라서 암살자 분위기를 풍깁니다. 근접전 캐릭터지만, 상당히 민첩하고 교활합니다. 수호자는 대놓고 칼과 방패를 휘두르지만, 이 암살자는 교묘하게 쌍칼을 휘두릅니다. 플레이어가 근접전을 좋아하지만 육중함보다 민첩함을 노린다면, 수호자보다 움브라리스트가 어울릴 겁니다.
현상금 사냥꾼, 건조자, 정령술사, 플로지스톤 기술자, 수호자, 움브라 암살자. 이렇게 여섯 클래스가 반 헬싱의 특성을 결정합니다. 스팀펑크부터 검마 판타지까지 포섭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런 클래스를 보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바이오펑크 요소가 없다는 겁니다. 한 번 생각해 보죠. 19세기 SF 작가들은 바이오펑크를 상당히 중시했습니다. 바이오펑크는 초기 SF 소설에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에서 인조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오귀스트 릴라당 역시 <미래의 이브>에서 인조 인간을 만들었죠. 로버트 스티븐슨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신체 변형 약물을 선보였습니다.
SF 작가들은 그저 인간들에게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허버트 웰즈는 <모로 박사의 섬>을 그야말로 개조 동물 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다못해 아서 코난 도일도 셜록 홈즈 시리즈(기어다니는 남자)에서 신체 개조를 도입했습니다. <기어다니는 남자>는 그냥 빅토리아 시대의 탐정 소설이 아니라 무슨 SF 소설처럼 보입니다. 이렇듯 바이오펑크는 19세기 SF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게다가 게임 <반 헬싱>에도 다양한 돌연변이와 개조 괴물들이 등장합니다. 바이오펑크를 상당히 중시하죠.
하지만 반 헬싱의 여섯 클래스 중 바이오펑크 전문가는 없습니다. 흠, 왜 생체 병기나 개조 동물 전문가가 없는지 모르겠군요. 만약 제가 게임의 설정을 덧붙일 수 있다면, 새로운 클래스를 하나 만들고 싶습니다. 생명 공학자(바이오 엔지니어)라고 부르면 어떨까 싶군요. 너무 평범한가. 그러면 생체 기술자(바이오 리메이더 혹은 바이오 패브리케이터)가 19세기 풍에 어울리겠습니다. <퍼디도 정거장>은 리메이드라는 용어를 쓰고, 스콧 웨스터펠드의 <레비아탄> 시리즈는 패브리케이트라는 용어를 쓰더군요.
게임 속에서 이 생체 기술자 클래스는 개조 동물을 이용합니다. 생체 개조 기술로 거대하고 기괴한 야수를 사육하고, 이 야수를 이용해 악마들과 괴물들을 공격합니다. 생체 기술자는 다양한 기술을 통해 개조 야수를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 이외에 생체 기술자는 개조 거미나 개조 까마귀처럼 좀 더 작은 동물 무리들을 만들 수 있고, 이들을 이용해 적들에게 화력을 퍼부을 수 있어요. 세균전이나 독성 물질도 빠질 수 없겠죠. 이런 생체 기술자 클래스는 허버트 웰즈만 아니라 올라프 스태플던이나 팀 파워스나 차이나 미에빌, 필립 리브 같은 작가의 설정까지 오마쥬할 수 있을 겁니다.
왜 게임 제작진이 저런 바이오펑크 클래스를 빼먹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실제 게임에는 돌연변이와 개조 괴물이 많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반 헬싱도 그런 기술을 써먹을 수 있잖아요. 사실 아브라함 반 헬싱은 원래 의사입니다. 소설에서 수혈 장면이 아주 중요하게 나오죠.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바이오펑크 클래스야말로 반 헬싱의 성향에 잘 어울릴 거라고 봅니다. 어차피 게임은 이미 원작 소설과 안드로메다로 멀어졌지만.
※ <반 헬싱의 모험>을 이야기한 다른 게시글에서 그런 것처럼, 여기에서도 올라프 스태플던을 19세기 작가라고 적었습니다. 제 실수입니다. 스태플던이 유명한 작가임에도, 두 번이나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군요. 착각하신 분이 계신다면, 사과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