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인류의 후손 - 육체적 변화와 사회적 변화 본문
[인류를 비롯해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하는 육체적인 변화와 전복, 블러드 뮤직.]
흔히 SF 소설들은 인류 이외에 다른 존재들을 바라봅니다. 외계인, 인공지능, 돌연변이 등은 그런 외부적인 존재로 유명하죠. 하지만 SF 소설에는 외부적인 존재이자 내부적인 존재도 등장합니다. 바로 우리 인류의 후손들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후손이기 때문에 분명히 '내부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비롯했어요. 하지만 인류의 후손은 현재 인류와 너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외부적인 존재'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독자들은 그들을 바라보고 어떤 이질감을 느낄지 모릅니다.
인류 이후 인류의 유지를 이어받은 새로운 존재가 나타나지만, 그들은 인류와 너무 다르고 따라서 전혀 다른 세상을 이룩합니다. 이는 SF 소설의 전형적인 미래 시나리오 중 하나입니다. 어떤 작가들은 이런 미래 시나리오에서 보다 원대하고 이상적인 세계를 꿈꿉니다. 현재 인류는 너무 많은 것들을 학살하고 오염시키고 착취하고 멸종시켰기 때문에 저런 작가들은 인류에게 별로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류 이후 인류의 후손들이 보다 평화롭거나 깨끗한 세상을 만들 거라고 상상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인류의 후손들이 등장할까요. 인류의 후손들은 무슨 과정을 거칠까요. 왜 그들이 등장해야 할까요. 물론 언젠가 인류는 멸망할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인류 멸망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나, 지구 생태계의 역사는 언제나 똑같지 않았습니다. 38억 년 이전에 생명체가 등장한 이후 수많은 멸종과 탄생이 반복되었고, 다양한 생태계들이 지구를 거쳤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대규모 멸종이 새로운 탄생을 위한 준비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생태계의 멸종과 탄생을 고려한다면, 언젠가 현재 생태계와 현재 인류 역시 사라질 겁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인류가 그리 쉽게 멸종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른 생물들과 달리 인류는 진보된 지식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수명을 계속 이어갈지 모릅니다. 100만 년이나 200만 년이 지나면 한 생물종이 사라져야 하지만, 인류는 그런 멸종의 한계를 넘어설지 모릅니다. 과연 인류가 자연적인 멸종을 피할 수 있을까요. 그 누구도 이런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겁니다. 아무도 미래를 함부로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100년이나 200년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100만 년 이후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쩌면 정말 우리는 살아남을지 모릅니다. 100만 년 이후에도 우리는 살아남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모든 생물들이 그랬듯) 우리는 사라질지 모릅니다. 100만 년이 지나면, 호모 사피엔스와 그 유사한 종은 사라질지 모릅니다. 무엇이 정답일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저는 100만 년이든 몇 천 년이든 숫자를 따지는 것보다 인류 이후의 존재들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인류는 사라지고, 인류의 후손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면…. 비록 인류는 멸종했지만, 그래도 뭔가를 남겼습니다. 인류는 사라졌지만, 후손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게다가 그 후손들은 인류보다 훨씬 낫습니다. 인류는 대규모 학살과 멸종을 저질렀으나, 후손들은 평화롭고 이상적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후손들이 등장하는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습니다. 수많은 SF 소설들이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인류의 후손을 이야기하지만, 저는 그런 원인을 두 가지로 나누고 싶습니다. 일단 육체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이 방법은 인류의 생물종을 바꿉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 자체를 다른 것으로 바꿉니다. 그것은 새로운 생물이 될 수 있고, 새로운 기계가 될 수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죠. 만약 인류 전체가 가상 공간에 빠진다면?
만약 인류가 아주 거대한 가상 공간을 구축하고 모두 거기에 접속하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갈까요. 게다가 인류는 그저 가상 공간에만 접속하지 않았습니다. 육체를 버리고 인격만 가상 공간에 전송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인류는 육체적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가상 공간 속에서 하나의 정신적 통합체로 살아갑니다. 이는 뻔하고 뻔한 사이버펑크 소설처럼 들리지만, 이런 가능성이 우리의 미래가 될지 모르죠. 뭐, 가능성의 실현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가능성이 아니라 상상력입니다.
SF 작가들은 기술이 계속 발달한다면 그 기술 때문에 인류의 후손이 등장할 수 있다고 상상합니다. 저 가상 공간 속의 정신적 통합체는 분명히 인류입니다. 내부적인 존재죠. 하지만 저들은 우리와 전혀 다릅니다. 솔직히 저들을 인류라고 부를 수 없을 겁니다. 따라서 외부적인 존재입니다. 저 가상 공간 속의 정신적 통합체는 현재 인류보다 훨씬 이상적인 삶을 살아갈지 모릅니다. 인격만 가상 공간에 올라갔기 때문에 육체적인 탐욕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죠. 어쩌면 누군가는 이런 인류의 후손이 끔찍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이들은 너무 기계에 얽매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 소설은 미래 인류를 묘사하나, 육체적인 전복보다 사회적이고 평등한 전복을 노래합니다.]
반면, 저런 후손들을 긍정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비록 저들은 기계에 얽매였으나, 그래도 훨씬 이상적인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긍정하든 부정하든, 기술의 발달은 우리 인류를 바꿀지 모릅니다. 저런 기계적인 변화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기계적인 변화와 함께 생물적인 변화 또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우리 인류는 <뉴로맨서>처럼 가상 공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나, <블러드 뮤직>처럼 다른 생물들과 통합할 수 있습니다. 인류는 새로운 미생물을 만들고, 이 미생물은 모든 것들을 먹어치웁니다. 대규모 질병이 퍼지는 것처럼 새로운 미생물들은 금방 퍼지고 지구 전역을 뒤덮습니다.
사실 이건 질병입니다. 대규모 질병 아포칼립스입니다. 덕분에 인류는 멸망하지만, 대신 이 미생물들은 집단 지성을 이룩합니다. 이 집단 지성의 미생물들은 서로 정신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보다 현명하고 지혜롭게 살아갑니다. 지구는 끈적거리고 꿈틀거리는 미생물로 덮였습니다. 누군가는 이걸 징그럽거나 혐오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이 집단 지성의 미생물들이 인류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적어도 이들은 동족을 착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블러드 뮤직> 같은 소설의 분위기는 그리 절망적이거나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가상 공간의 정신 통합체가 사이버펑크의 전형적인 유형이라면, 집단 지성의 미생물들은 바이오펑크의 사례입니다. 많은 바이오펑크 소설들은 신체 개조를 이야기하지만, 종종 어떤 소설들은 이렇게 대규모 멸망과 탄생을 상상합니다. 물론 이런 정신 통합체나 집단 지성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인류는 로봇을 만들거나 개조 동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가 전면 핵전쟁 등으로 멸망하면, 저런 로봇이나 개조 동물이 새로운 세상을 이룩할지 모릅니다. 저들은 분명히 인류의 피조물이고 따라서 인류의 후손이 될 수 있지만, 저들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내부적인 존재이자 외부적인 존재죠.
혹은 우리 인류가 자연스럽게 진화할지 모릅니다. 흔히 우리는 미래 인류가 우리보다 똑똑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래 인류가 우리보다 똑똑할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타임 머신>의 엘로이들처럼. 미래 인류는 우리보다 멍청할 수 있고, 그래서 덜 착취하거나 덜 오염시킬지 모릅니다. 아니면 미래 인류는 커트 보네거트의 <갈라파고스>처럼 될 수 있죠. 개인적으로 이런 변화보다 차라리 집단 지성이 더 낫지 않나 싶습니다. 집단 지성은 징그럽게 보이지만, 적어도 그들은 현명하고 지성적이잖아요.
하지만 이런 육체적인 변화만이 인류의 미래는 아닙니다. 사회학적인 변화도 인류의 미래가 될 수 있습니다. 사이버펑크나 바이오펑크,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인류의 육체적인 변화를 말한다면, 유토피아 소설은 사회학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안드로메다 성운>은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겠군요. 이 소설에서 인류는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이룩했습니다. 이들은 분명히 인류입니다. 생물종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현재 인류와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들은 절대 현재 인류처럼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인류와 전혀 다른 생명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회학적인 변화는 사회 구성원들의 변화를 유발하고, 공산주의 구성원들은 자본주의 구성원들보다 훨씬 지혜롭게 살아갑니다. 이게 바로 왕년에 사회주의자들이 그렇게 좋아했던 '새로운 사회가 새로운 인간을 만든다'는 개념이겠죠. 물론 이들도 실수를 저지르고 이들도 완벽한 세상을 만들지 못합니다. 솔직히 아무리 사회 체계가 바뀐다고 해도 인류는 인류입니다. 인류는 완벽한 세상을 이룰 수 없습니다. 불완전한 동물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적어도 공산주의 유토피아는 대량 학살이나 대규모 멸종을 피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인류의 후손은 가상 통합체나 집단 지성에 앞서 이런 공산주의자들일 수 있죠. 흠, 공산주의 유토피아가 먼저일지, 기술적 특이점이 먼저일지….
그리고 기술적인 변화와 사회학적인 변화가 합칠 수 있습니다. 이안 뱅크스의 컬쳐 시리즈처럼 인류는 엄청난 인공지능을 만들고, 그 인공지능 덕분에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이룩할지 모릅니다. 컬쳐 시리즈는 <안드로메다 성운>과 다릅니다. <안드로메다 성운>은 거의 순수하게 사회학적인 변화만을 이야기했으나, 컬쳐 시리즈는 사회학적인 변화만큼 기술적인 변화를 중시합니다. 그래서 다른 외계인들은 컬쳐 세력이 기계에 너무 얽매였다고 비난합니다. 이런 외계인들은 기계가 인간을 지배한다고 생각합니다. 외계인들은 컬쳐 세력의 인간들이 유토피아의 이상에 젖었기 때문에 그런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아무리 외계인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해도 저는 이런 미래가 현재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 인류는 스스로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이룩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저런 기계나 다른 생물종의 도움을 받아야 할 수 있어요. 그건 서글픈 사실이지만, 이미 오래 전에 카를 마르크스는 박애 정신이나 계몽 따위가 아니라 생산 수단의 변화가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킬 거라고 말했습니다. 아쉽게도 그 말이 사실일지 모릅니다.
[이안 뱅크스는 기술적인 변화와 사회적인 전복을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이건 기술적인 유토피아죠.]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상력이 무슨 소용이냐고 비판할지 모르겠습니다. 맞아요. 인류의 후손보다 현재 인류가 중요하죠. 당장 노동 운동이나 환경 보호 시위가 훨씬 중요하죠. 하지만 이런 좌파적 운동에 참여한다면, 필연적으로 미래를 바라봐야 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도중에 유토피아를 상상하고, 결국 시선이 인류의 머나먼 후손까지 닿게 됩니다. 19세기의 좌파 지식인들이 20세기나 21세기를 상상한 것처럼 좌파적 운동은 머나먼 유토피아와 머나먼 후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