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거대 괴수와 자연 생태계 본문
[이런 거대 괴수가 무엇을 상징하고 비유할 수 있을까요? 도시 파괴? 그게 전부일까요?]
영화 <퍼시픽 림>은 거대 괴수들을 선보입니다. 이 괴수들은 외계인들의 생체 병기이고, 심해 관문을 통해 지구에 출몰합니다. 외계인들은 다른 차원에서 괴수들을 만들고, 심해 관문으로 괴수들을 내보내요. 그 관문은 지구의 바다와 이어지기 때문에 괴수들은 인류 문명을 짓밟을 수 있습니다. 지구인들은 이를 두고 볼 수 없었고, 거대 로봇들이 출격합니다. 마침내 거대 로봇과 거대 괴수가 박 터지게 싸우고, 이런 열혈적인 싸움은 이 영화의 주된 볼거리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영화를 거대 로봇물이자 괴수물이라고 부르더군요.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정말 <퍼시픽 림>은 '괴수물'일까요.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괴수는 중심 소재일까요. 만약 외계인들이 괴수 대신 전투 로봇을 보낸다면, 영화의 분위기는 어떻게 바뀔까요. 저는 별로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핵심은 괴수가 아니라 거대 로봇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외계인들이 심해의 관문을 통해 외계 로봇을 보낸다고 해도 인류는 거대 로봇을 출격시켜야 하고, 관객들은 박 터지는 쌈박질을 구경할 수 있겠죠.
이 영화의 주인공은 거대 로봇이고, 괴수는 거대 로봇을 부각시키기 위한 들러리입니다. 따라서 인류가 거대 로봇을 출격시킬 구실이 있다면, 외계인들이 괴수를 보내든 외계 로봇을 보내든 우주 구축함을 보내든 하등 상관이 없을 겁니다. 샌드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권투 선수가 중요합니다. 괴수는 샌드백이고, 거대 로봇은 권투 선수죠. 따라서 저는 <퍼시픽 림>이 거대 로봇물일 수 있으나, 괴수물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퍼시픽 림>은 괴수물이 될 수 있으나, 괴수의 본질이나 근본에 다가가지 못합니다. 음, 이런 표현이 더 정확하겠군요.
어떤 SF 창작물에 괴수가 등장한다고 해도 그 창작물이 무조건 괴수의 본질에 접근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나이프헤드나 오타치의 디자인은 정말 멋집니다. 그 기괴한 겉모습, 우둘투둘한 가죽, 빛나는 무늬, 생체 발광체들. 감독과 제작진은 멋진 괴수들을 신나게 작업했습니다. 밑그림들만 봐도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는 이 영화가 괴수의 본질에 다가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괴수의 로망을 잘 살렸으나, 그건 양념에 불과합니다. 결국 핵심은 거대 로봇입니다.
이런 시각을 <퍼시픽 림>만 아니라 <클로버필드> 같은 영화에 적용시킬 수 있을 겁니다. <클로버필드> 역시 호평을 받는 괴수물입니다. 하지만 만약 이 영화에 괴수 대신 다른 존재가 나온다면, 분위기는 어떻게 바뀔까요. <클로버필드>는 괴수의 정체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갑자기 괴수가 대도시에 나타났을 뿐이고, 등장인물들은 왜 괴수가 도시에서 날뛰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런저런 떡밥들이 많으나, 떡밥은 떡밥일 뿐입니다. 관객들은 영화만으로 괴수가 무엇인지 명확히 판정할 수 없어요.
따라서 괴수 대신 다른 존재들이 도시에서 난동을 부렸어도 영화의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만약 기괴한 거대 로봇이나 거대 우주선이 도시를 부쉈다고 해도, 그 산만한 카메라 기법과 각종 떡밥들을 유지한다면, 영화의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지하철 장면 같은 몇몇 부분은 달라질 수 있으나, 전반적인 분위기는 그대로 이어지겠죠. 사실 등장인물들은 괴수를 자세히 파악하지 않고 괴수에게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뭔가 거대한 것이 난리를 피우기 때문에 다들 정신없이 도망칠 뿐입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정체 모를 뭔가 거대한 것. 그게 괴수든 거대 로봇이든 우주 구축함이든, 모두 정체 모를 거대한 것이 될 수 있어요.
[비단 거대 괴수들만 아니라 이런 거대 기계 병기들 역시 얼마든지 도시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클로버필드>는 그런 것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사실 <퍼시픽 림>도 '규모와 파괴'를 중시하고요. <클로필드>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퍼시픽 림>은 거대 로봇을 출격시키기 위해 명분이 필요합니다. 뭔가 거대한 것이 도시에서 난동을 피운다면, 그런 명분을 충분히 제공할 수 있죠. 그게 괴수가 아니라 이상한 로봇이나 공격 우주선이라고 해도 명분을 제공할 수 있어요. 만약 <우주 전쟁>의 화성인 삼발이가 <클로버필드>에 등장했다면, 영화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을까요. 아니,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뭔가 거대한 것이 도시를 부수고, 인류는 거기에 대항하지 못하고, 등장인물들이 열심히 도망치고, 카메라를 신나게 흔들 수 있다면, 삼발이는 클로버 괴수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클로버필드>가 재미있는 괴수물이라고 해도 괴수라는 본질 자체에 접근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클로버필드>가 괴수물로서 실격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영화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괴수의 본질이 이 영화 속에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괴수를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고 해도 영화의 분위기와 감수성을 크게 해치지 않겠죠. 그렇다면 괴수라는 본질은 뭘까요. 그저 뭔가 거대한 생명체가 도시를 때려부수면, 그게 바로 괴수물일까요.
프랭크 허버트가 쓴 <듄> 같은 작품은 <클로버필드>나 <퍼시픽 림>과 다릅니다. <듄> 시리즈에는 샤이-훌루드, 그러니까 모래벌레가 등장합니다. 모래벌레 역시 아주 거대한 괴수죠. 그렇다면 <퍼시픽 림>이나 <클로버필드>에서 괴수 대신 거대 로봇이나 우주선을 집어넣은 것처럼 <듄>에서 모래벌레 대신 거대 로봇이나 우주선을 집어넣는다면, 이 작품의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질까요. 음,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샤이-훌루드의 본질은 규모와 파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퍼시픽 림>이나 <클로버필드>의 괴수들과 달리 <듄>의 모래벌레는 아라키스 행성의 '자연 생태계'를 담당합니다. 모래벌레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멜란지 스파이스를 비롯한 아라키스 행성의 자연 생태계가 순환하지 않습니다. <클로버필드>에서 거대 괴수는 대도시에서 난동을 피웠고, 그게 괴수의 역할이었습니다. 그 괴수는 다른 뭔가를 할 필요가 없었죠. 하지만 모래벌레는 스파이스 채취기를 습격한다고 해도 자신의 역할을 모두 수행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모래벌레가 아라키스 행성의 모든 도시들을 때려부순다고 해도 모래벌레의 진짜 역할은 그게 아닙니다. 멜란지 스파이스를 포함한 자연 생태계를 순환시키는 것. 그게 모래벌레의 진짜 역할입니다.
따라서 거대 로봇이나 외계 우주선은 모래벌레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모래벌레는 행성의 자연 생태계에 속했기 때문이죠. 물론 거대 로봇 역시 자연 생태계의 순환에 관여할 수 있으나, 로봇이 자연 환경에 관여한다면, 설정이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생명체와 인공적으로 조립된 기계. 그 두 가지의 위상은 크게 다를 수 밖에 없어요. <듄> 시리즈는 괴수를 필수적으로 이용해야 하고, 따라서 괴수의 본질에 한 걸음 다가갔다고 할 수 있겠죠. <퍼시픽 림>과 <클로버필드>와 <듄>에서 뭔가 거대한 존재가 똑같이 난동을 부리고 사람들을 습격한다고 해도 나이프헤드와 클로버 괴수와 모래벌레의 역할은 서로 다릅니다.
나이프헤드와 클로버 괴수는 반드시 생명체일 필요가 없으나, 모래벌레는 반드시 생명체여야 합니다. 생명체와 달리 기계는 자연적으로 나타나지 못하고, 따라서 자연적으로 생태계에 끼어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생명의 본질까지 정의하지 않겠으나, 적어도 우리 인류가 아는 한, 기계는 스스로 발생하지 못하죠.) 이건 아주 큰 차이입니다. 아마 오타치나 클로버가 모래벌레보다 더 좋은 괴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체로서 거대 괴수의 본질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모래벌레는 기계가 되지 못합니다. 이 괴수가 자연 생태계를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고지라> 같은 영화에 이런 시각을 적용해보죠. 2014년 <고지라>에서 고지라는 그저 도시를 때려부수는 거대한 뭔가가 아닙니다. 무토 부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지라와 무토 부부는 모두 (인류가 등장하기 전에) 까마득한 고대 생태계의 생명체들입니다. 이들은 인류보다 앞서 지구를 활보했고, 그만큼 거대한 자연의 경이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거대 로봇이나 외계 우주선은 고지라와 무토 부부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거대 로봇이 자연계에서 스스로 발생할 수 있나요. 외계 우주선이 자연계에서 스스로 발생할 수 있나요. 아니죠. 누군가가 그 기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반면, 생명체가 발현하고 진화하고 복잡한 생태계를 이룬다면, (영화의 설정상) 거대 괴수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고지라>는 예고편에서 아예 자연의 위력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는 "오만한 인류는 자연을 통제한다고 생각하나, 사실 그렇지 않다."입니다. 즉, 자연계가 중요합니다. 거대 로봇은 자연계와 별반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고지라> 역시 <퍼시픽 림>이나 <클로버필드>보다 괴수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고 할 수 있겠죠.
다시 말하지만, <고지라>가 <퍼시픽 림>이나 <클로버필드>보다 낫다는 뜻은 아닙니다. <클로버필드>에 거대 로봇이 등장해도 그 거대 로봇은 영화의 주제와 분위기를 해치지 않겠으나, <고지라>에 거대 로봇이 등장한다면 그 거대 로봇이 영화의 주제와 분위기를 해친다는 뜻입니다. 솔직히 저는 <고지라>의 그 정석적인 분위기보다 <클로버필드>의 그 음모론 가득한 분위기가 더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클로버 괴수가 괴수의 본질에 맞닿았다고 말할 수 없겠죠.
이 글에서 용이하게 비교하기 위해 주로 통상적인 괴수 영화들을 언급했으나, 아서 코난 도일의 고전적인 <잃어버린 세계>부터 제프 밴더미어의 <소멸의 땅>까지, 이런 시각을 여러 창작물들에 적용할 수 있을 겁니다. 괴수는 기본적으로 생명체(야생 동물)이고, 생명체는 자연 생태계의 순환에 속합니다. 저는 괴수물이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봅니다. <듄>과 <고지라>는 모두 자연 생태계의 순환을 이야기했고, 그래서 저는 이들 창작물이 괴수를 좀 더 중점적으로 활용한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거대한 존재가 도시를 부수는 것…. 괴수물의 본질은 그것만이 아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