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F 생태주의

지구의 날, 실러캔스 그림, 환경 아포칼립스 본문

생태/문화·기술로서 자연

지구의 날, 실러캔스 그림, 환경 아포칼립스

OneTiger 2019. 4. 22. 19:14

[지구의 날을 기념하기 위한 실러캔스 그림에는 환경 아포칼립스를 비롯해 여러 의미들이 있을 겁니다.]



오늘은 지구의 날입니다. 솔직히 비단 오늘만 아니라 1년 365일은 모두 지구의 날이 되어야 할지 모릅니다. 인류 문명은 지구 자연 생태계를 떠나지 못합니다.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에서 어슐라 르 귄은 인류가 외계 식생을 수탈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이 쓴 소설 <오로라>는 세대 우주선이 새로운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비디오 게임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는 미래 녹색당이 외계 행성을 개척한다고 묘사합니다. 하지만 <세상 숲>과 <오로라>와 <퍼스트 콘택트>와 달리, 2019년 인류 문명은 지구를 떠나지 못하고 지구 자연 생태계를 떠나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구를 사랑하든 싫어하든, 우리는 지구를 떠나지 못하고, 지구 안에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구를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지구 안에서 우리가 살아야 하기 때문에, 1년 365일은 모두 지구의 날이 되어야 할지 모릅니다. 물론 우리는 비단 지구만 아니라 수많은 요소들과 필수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우리는 비단 지구의 날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기념일들을 만들었습니다. 성 폭행들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1년 365일은 모두 세계 여성의 날이 되어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1년 365일이 모두 복잡한 기념일들이 된다면, 달력은 꽤나 혼란스러울 겁니다. 달력은 혼란스러운 기념일들로 가득할 겁니다. 그래서 1년 365일 중에서 지구의 날은 하루입니다.



1년에 하루 지구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포털 사이트 구글 대문은 귀여운 그림들을 보여줍니다. 나그네 알바트로스트에게는 아주 길다란 두 날개가 있습니다. 세콰이어는 엄청나게 거대한 나무입니다. 페도프라이네 아마우엔시스는 가장 작은 척추 동물입니다. 이렇게 구글 대문은 여러 생명체들을 귀엽게 묘사합니다. 가장 거대한 세콰이어 역시 귀여운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립니다. 하지만 예전에 지구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구글 대문은 귀여운 그림보다 신비스러운 그림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을 귀엽게 그리거나 신비스럽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을 그릴 때, 우리는 자연에게서 어떤 특징을 모방하고, 거기에 우리의 사고 방식을 덧붙이고, 그걸 특정하게 표현합니다. 솔직히 세콰이어 나무 그림은 진짜 세콰이어 나무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귀여운 세콰이어 그림을 구경할 때, 우리는 진짜 세콰이어 나무를 머릿속에 떠올릴 겁니다. 왜 우리가 세콰이어 그림을 보고 진짜 세콰이어를 머릿속에 떠올려야 하나요? 우리에게 진짜 세콰이어 나무를 머릿속에 떠올리기 위한 의무가 있나요? 우리에게 그런 의무가 있나요? 진짜 세콰이어 나무에게는 두 눈과 입이 없습니다. 진짜 세콰이어 나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콰이어 나무 그림을 구경할 때, 우리는 그게 세콰이어 나무라고 간주합니다. 그림과 진짜 나무 사이에 유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건 그저 주관적인 유사성에 불과합니다. 옆동네 철수는 "이게 무슨 세콰이어 나무야? 이건 그저 녹색 세모들과 갈색 직사각형에 불과해! 이건 엉터리야!"라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그림은 진짜 나무를 완전하게 반영하지 못합니다. 그림이 나무를 반영할 때, 여기에는 빈틈들이 있고, 그래서 옆동네 철수는 그림이 엉터리라고 반박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세콰이어 나무 그림은 엉터리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웃집 영희는 세콰이어 나무 그림이 진짜 세콰이어 나무의 특징을 제대로 반영했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웃집 영희는 세콰이어 나무 그림이 귀엽다고 좋아할 겁니다. 옆동네 철수와 이웃집 영희 중에서 누가 옳은가요? 세콰이어 나무 그림이 엉터리인가요, 아니면 귀엽나요? 정답은 없을 겁니다. 예술 평론가는 옆동네 철수와 이웃집 영희가 모두 옳다고 말할 겁니다. 예술 평론가는 어떻게 세콰이어 나무 그림이 세콰이어 나무를 반영하고 모방하는지 따질 수 있습니다. 평론가는 세콰이어 그림이 좋은지 나쁜지 완벽하게 판단하지 못할 겁니다. 이건 화가가 아무렇게나 엉터리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랜 동안 수많은 화가들은 여러 표현 방법들을 연구했고 고안했습니다. 이것들은 기준이 되고 공식이 됩니다. 예술 평론가가 그림을 파악할 때, 평론가는 이런 기준과 공식을 들이댈 거에요.



그림 이외에 다른 예술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술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술에는 사조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술에 정답이 없기 때문에 모든 예술이 상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예술에는 정답이 없으나, 예술 평론가들은 예술 사조를 고려합니다. 예술 평론가들은 기준과 공식을 정할 수 있습니다. 소설 <프래그먼트>가 좋은지 나쁜지 이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예술 평론가들은 소설 <프래그먼트>보다 소설 <세상 숲>이 훨씬 뛰어난 필력을 선보인다고 말할 겁니다. 사람들이 어떤 현상이나 어떤 대상이나 어떤 사물을 표현할 때, 사람들은 공식과 기준을 따릅니다.


구글 대문의 실러캔스 그림을 봅시다. 실러캔스 그림에는 수각류 공룡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수각류 공룡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는 이런 수각류 공룡이 없습니다. 고생물학자들이 시간 여행 장치를 타고 중생대로 돌아간다고 해도, 고생물학자들은 이런 수각류 공룡을 찾지 못할 겁니다. 적어도 이제까지 고생물학자들은 이런 수각류 공룡을 확인한 적이 없습니다. 스테고사우루스처럼, 그림 속의 수각류 공룡에게는 커다란 골판들이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수각류 공룡들은 이런 골판들을 달지 않습니다. 어쩌면 미래에 고생물학자들은 이런 수각류 공룡을 발굴할지 모르나, 적어도 이제까지 고생물학자들은 이런 수각류 공룡을 발굴한 적이 없습니다.



현실에 이런 수각류 공룡이 없음에도, 왜 구글 대문이 이걸 수각류 공룡이라고 표현하나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공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수각류 공룡에게 이렇게 저렇게 특징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특징들은 공식이 되고, 수각류 공룡을 표현하기 위해 사람들은 공식을 활용합니다. 실러캔스 그림 속의 수각류 공룡은 고지라와 많이 닮았습니다. 영화 속의 고지라와 달리, 비록 그림 속의 수각류 공룡은 골판들을 파랗게 (우우우우웅~) 빛내지 못하고 방사 열선을 뿜지 못하나, 그렇다고 해도 영화 속의 고지라와 그림 속의 수각류 공룡은 닮았습니다. 이것 역시 공식일 겁니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 <사우리안>에 나오는 티라노사우루스와 실러캔스 그림 속의 수각류 공룡은 별로 닮지 않았습니다. <사우리안>과 실러캔스 그림은 다른 공식을 이용해 수각류 공룡을 그립니다. 이렇게 예술에게는 공식과 기준이 있습니다. 이런 공식 때문에 사람들은 세콰이어 나무 그림이 세콰이어 나무를 표현한다고 인지합니다. 옆동네 철수가 세콰이어 나무 그림을 싫어한다고 해도, 분명히 세콰이어 나무 그림은 어떤 공식들을 충실하게 따랐고, 이웃집 영희는 세콰이어 나무 그림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소설 <프래그먼트>와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술 평론가들은 이런 공식들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공식들을 알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이 예술 사조를 숙지한다면, 평론가는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불가능해요.


제임스 카메론이 감독한 영화 <아바타>가 개봉했을 때, 관객들은 이게 기발하다고 느꼈습니다. 영화 속에서 인류 문명은 외계 생태계를 수탈합니다. 소설 <우주 전쟁>부터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까지, 많은 관객들은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략하는 공식에 익숙했습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아바타>가 기발하다고 느꼈습니다. 심지어 JoySF 같은 동호인들조차 그랬습니다. 하지만 어슐라 르 귄이 쓴 <세상 숲>과 벤 보바가 쓴 <알타이르의 바람>과 존 스칼지가 쓴 <작은 친구들의 행성>처럼, 인류 문명이 외계 생태계를 수탈하는 공식은 드물지 않습니다. 관객들이 생태학 SF 사조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관객들은 그저 <아바타>가 기발하다고 착각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평론가는 중요하고 예술 사조는 중요합니다.



예술 사조는 세상을 바라보고 표현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여기에서 주체는 인간입니다. 인간은 세상을 바라보고, 인간은 뭔가를 생각하고, 인간은 그걸 표현합니다. 다양한 대상들과 사고 방식들과 표현 방법들은 다양한 예술 사조들로 이어집니다. 소설 <세상 숲>과 비디오 게임 <코이>는 똑같이 생태학 SF, 환경 아포칼립스에 속합니다. 하지만 표현 대상(외계 밀림 원주민들과 형형색색 잉어들), 사고 방식(암울한 진지함과 발랄한 싱그러움), 표현 방법(언어와 그림)은 다릅니다. 이렇게 예술 사조들이 다르기 때문에, 예술 평론가들은 이것들을 종합하고 구분하고 정리합니다. 예술 평론가들은 무엇이 어디에 속하고 왜 이것들이 다른지 분류합니다.


무엇보다 평론가들은 어디에서 예술 사조가 파생했는지 따집니다. (예술 사조는 사회적으로 파생합니다.) 이건 예술가들이 무조건 예술 사조를 숙지하고 따라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SF 작가가 SF 사조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SF 작가는 얼마든지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SF 작가가 SF 사조를 파악할 수 있다면, SF 작가는 무엇이 좋은지 선별하거나 이미 존재하는 공식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위대한 예술은 이미 존재하는 공식을 뛰어넘거나 새로운 공식을 만듭니다. 이렇게 예술 사조와 장르는 확장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결국 예술을 표현하는 주체는 인간입니다. 예술 사조들이 다양하다고 해도, 결국 주체는 인간입니다.



세콰이어 나무부터 실러캔스 물고기까지, 포털 사이트 대문 그림이 다양한 생명체들을 보여준다고 해도, 실러캔스를 위해 실러캔스 그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실러캔스를 그리고, 인간은 실러캔스 그림을 감상합니다. 실러캔스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 실러캔스 그림은 존재합니다. 우리가 자연을 표현할 때, 인간으로서 우리는 자연을 표현합니다. 작가이자 비평가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언어 중에서 자연이 가장 복잡하다고 말했습니다. 자연은 수많은 것들을 가리키고 상징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자연을 표현할 때, 인간으로서 우리는 자연을 표현합니다.


심층 생태주의는 인간 중심주의를 비판하나, 아무리 우리가 인간에게서 벗어나고 싶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자연을 표현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전제해야 합니다. 아무 조건 없이 우리는 자연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연을 말할 때, 언제나 우리는 '인간 중심주의'에 빠집니다. 우리가 비인간 생명을 바라볼 때, 이건 커다란 장애물이 될지 모릅니다. 어쩌면 외계 행성에 외계 생명체들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들이 외계 생명체라고 생각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생명체가 인간적인 범주를 벗어난다면, 우리는 그 생명체를 파악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사실 구글 대문 그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구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구글 대문은 여러 생명체들 그림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지구는 생명체가 아닙니다. 가이아 이론은 감동적인 설명이나, 그렇다고 해도 지구는 행성이고 생명체가 아닙니다. 스토리텔링 게임 <웨어울프 디 아포칼립스>에서 늑대인간들은 어머니 지구를 외치나, 이건 사이언스 판타지입니다. 비디오 게임 <시드 마이어의 알파 센타우리>에서 가이아의 양녀들은 행성 지성과 소통하나, 현실 속에서 지구 행성은 살아있지 않습니다. 노라 제미신이 쓴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이 각종 지질학들을 행성과 연결하는 것처럼, 행성은 복잡한 돌덩어리입니다. 하지만 지구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포털 사이트 대문 그림은 여러 생명체들을 보여줍니다.


대문 그림은 바위나 사막이나 산맥이나 맨틀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구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자연 생태계와 생물 다양성을 중시합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으나, 우리 인간이 생명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생물 다양성을 중시할 겁니다. 기후 변화가 엄청난 홍수를 부른다고 해도, 지구 행성은 부서지지 않습니다. 핵 발전소가 핵 폐기물들을 버린다고 해도, 지구 행성은 부서지지 않습니다. 고지라 어스 같은 거대 괴수가 사방을 휘젓고 다닌다고 해도, <고지라: 괴수 행성>이 보여주는 것처럼, 지구 행성은 부서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연 생태계입니다. 고지라 어스가 사방을 휘젓고 다닌다면, 자연 생태계는 크게 바뀔 테고, 인간은 쉽게 생존하지 못할 거에요.



최악의 경우처럼, 만약 기후 변화가 생물 다양성의 절반 이상을 파괴한다면, 이건 인류 문명에 엄청나게 부정적인 파장을 미칠 겁니다. 이런 파장은 꽤나 거시적이고 미래적이고 묵시적입니다. 지구의 날 그림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나, 이 게시글이 소설 <세상 숲>과 소설 <오로라>와 비디오 게임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와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을 언급하는 것처럼, 지구의 날은 환경 아포칼립스로 쉽게 이어질 수 있습니다. 자연 과학자들과 환경 운동가들은 환경 아포칼립스를 걱정하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선행을 떠들 겁니다.


하지만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선행은 절대 환경 아포칼립스를 막지 못합니다. 수직적이고 억압적인 계급 구조,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를 초래합니다. 오히려 자연 과학자들이 도덕적인 선행과 개인적인 근검절약을 강조할 때, 이런 주장은 억압적인 자본주의를 은폐하고 자본주의에게 충성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인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고작 인성 따위는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합니다. 인성은 사회적인 결과물이고 사회적으로 파생합니다. 로맹 가리가 쓴 소설 <흰 개>가 보여주는 것처럼, 예의가 바르고 온화한 인간은 얼마든지 인종 차별론자 수구 꼴통이 될 수 있습니다.


1년 365일이 모두 지구의 날이 된다고 해도, 고작 인성 따위는 환경 아포칼립스를 막지 못합니다. 미래 녹색당이 외계 행성을 개척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도덕적이고 개인적인 선행과 인성보다 평등한 사회 구조입니다. 우리가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타파할 때, 우리는 환경 아포칼립스에서 좀 더 벗어날 거에요.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