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압주>, 풍요롭고 살아있고 소중한 해방 본문
[이런 장면은 광대하고 신비롭고 풍요롭습니다. 하루 종일 구경한다고 해도, 이건 지겹지 않을지 모르죠.]
YouTube 같은 동영상 사이트들에는 이른바 분위기(ambience) 동영상들이 있습니다. YouTube 검색창에서 사람들이 ambience를 검색한다면, 사람들은 다양한 분위기 동영상들을 구경할 수 있을 거에요. 분위기 동영상들은 거대하고 웅장하고 신비로운 장면들과 음악들을 들려줍니다. 우주, 자연, 야경, 까페, 도서관, 고요한 건물 같은 것들은 중요한 소재들입니다. 종종 이런 분위기 동영상들은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동영상이 될 수 있어요. ASMR 동영상들은 부스럭거리는 소리, 사각거리는 소리, 물결 소리 같은 백색 소음들을 이용해 청각을 자극합니다.
이런 자극적인 백색 소음들은 심리적인 안정에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이런 동영상들이 의학적으로 정말 심리적인 안정을 형성하는지 그건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동영상들은 커다란 인기들을 끕니다. 어떤 동영상은 분위기 동영상이고, 어떤 동영상은 ASMR 동영상이나, 양쪽은 얼마든지 섞일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동영상이 장대한 우주 풍경을 보여주고 신비로운 음악과 우주선 통신을 백색 소음으로 이용한다면, 이게 무슨 동영상에 속할까요? 분위기 동영상? 아니면 ASMR? 아니면 양쪽 모두?
이런 분위기 동영상들에는 비디오 게임 동영상들이 있습니다. 특히, 샌드 박스 게임들과 오픈 월드 게임들은 분위기 동영상에 어울립니다. 분위기 동영상은 거대하고 웅장하고 신비로운 장면들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리고 오픈 월드 게임들은 문자 그대로 광대한 세계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오픈 월드 게임들은 아주 쉽게 분위기 동영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서브노티카>를 플레이한다면, 구태여 게임 플레이어가 노력하지 않는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거대하고 웅장하고 신비로운 해양 풍경들을 구경할 수 있을 거에요.
게임 플레이어가 이런 외계 해양 풍경들을 녹화하고 여기에 물결 소리와 서정적인 음악을 추가한다면, 이건 멋진 분위기 동영상이 될 수 있을 거에요. 만약 이런 이런 동영상이 백색 소음 같은 청각적인 측면을 강조한다면, 이건 ASMR 동영상에 가까울 겁니다. 반면, 만약 이런 동영상이 시각적인 측면을 강조한다면, 이건 분위기 동영상에 가까울 겁니다. 무엇보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평화롭고 조용한 게임 공략 동영상을 올린다면, 그 자체로서 이건 게임 공략 동영상이고 동시에 분위기 동영상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느긋하게 <쉘터 2>를 플레이하는 동안, 엄마 스라소니는 광대한 북아메리카 자연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이유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들은 오픈 월드 게임들을 좋아할 겁니다. 이건 오픈 월드 게임들이 선사하는 미덕들 중에서 하나일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장대한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어합니다. 오픈 월드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거대한 산맥을 넘고, 웅장한 강물을 건너고, 깊고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 도시를 누빕니다. 오픈 월드 게임 속에서 숱한 미지들은 우리를 기다립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산맥을 넘고, 강물을 건너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 도시를 누비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계속 새로운 것들을 마주칩니다. 이건 끝없고 기나긴 여정입니다.
이런 끝없고 기나긴 여정은 비선형적입니다. 수많은 오픈 월드 게임들은 비선형을 강조합니다. 비록 게임 플레이어가 무한한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고 해도, 오픈 월드 게임들은 꽤나 커다란 자유를 선사합니다. 이런 커다란 자유는 해방 감각과 비슷합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해방을 느낍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우주선을 타고 머나먼 얼음 행성을 찾아간다고 해도, 오픈 월드 게임은 탓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픈 월드 게임은 그걸 권유합니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이런 비선형을 추구하지 못합니다. 갑자기 우리가 노르웨이 피요르드로 떠나고 싶다고 해도, 일상은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겁니다.
우리는 함부로 떠나지 못합니다. 일상은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우리는 선형적인 일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에 종속됩니다. 모든 것은 이미 존재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넓다고 해도, 우리는 넓은 세상을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합니다. 넓은 세상 속에서 우리는 그저 부품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고, 이런 사람들은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일상에 종속됩니다. 우리는 일상의 노예입니다. 폭력적인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를 임금 노예로 만듭니다. 억압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직 소수 사람들만 금수저를 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무너지고 훨씬 이상적인 사회가 나타난다고 해도, 우리가 선형적인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윌리엄 모리스와 반다나 시바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윌리엄 모리스와 반다나 시바는 민중 혁명을 바랍니다. 두 사상가 모두 민중들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무너뜨리고 이상적인 사회를 이룩하기 바랍니다. 하지만 윌리엄 모리스와 반다나 시바 모두 노동과 선형적인 일상을 외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윌리엄 모리스와 반다나 시바는 우리가 노동과 일상을 즐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무너진다고 해도, 먹고 살기 위해 우리는 선형적인 일상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기계 문명이 엄청난 생산량을 보장할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만약 기계 문명이 엄청난 생산량을 보장한다면, 노동 시간은 크게 줄어들 테고, 우리는 선형적인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앙드레 고르는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나, 앙드레 고르 역시 이런 기계 문명을 바랍니다. 심지어 이안 뱅크스가 쓴 <플레바스를 생각하라>처럼, 기계 문명 덕분에 인류는 노동에서 완전히 해방될지 모릅니다. 노동 조합들이 휘두르는 <노동 해방> 깃발은 더 이상 꿈이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마리아 미스는 이게 환상이라고 꾸짖습니다. 근대성, 모더니티는 식민지 수탈에서 비롯합니다. 식민지 수탈 없이, 근대성은 없고, 근대성 없이 기계 문명은 없습니다. 마리아 미스는 과학 기술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소설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는 그릇된 환상입니다. 사실 소설 <플레바스를 생각하라> 역시 완전한 기계 문명이 옳은지 의심합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반다나 시바 중에서 누가 옳은가요? 우리가 누구를 지지하든, 당장 우리는 선형적인 일상을 벗어나지 못해요. 심지어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반다나 시바가 모두 옳다고 해도, 당장 우리는 선형적인 일상에 매달려야 해요.
하지만 오픈 월드 게임들은 다릅니다. 오픈 월드 게임 속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엄청난 해방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선형적인 일상 따위는 없습니다. 광대한 세상은 우리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일상을 박차고 끝없이 기나긴 여정을 떠날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엘더 스크롤 V: 스카이림>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마법 대학교를 누비고, 드워프 기계 공학 동굴에 들어가고, 하얀 산꼭대기에서 드래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Fur so dah~!!!) <서브노티카>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잠수정을 타고 신비롭게 빛나는 해저 속으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감상적인 음악과 함께 스산하고 아름다운 잿빛 골짜기를 구경할 수 있습니다. <노 맨스 스카이>는 최악의 게임이라고 불렸습니다. 하지만 심지어 <노 맨스 스카이>에서조차 게임 플레이어는 기이한 외계 식생을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이런 중세 유럽 판타지와 스페이스 오페라 이외에, <그랜드 테프트 오토 V>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훨씬 현실적인 세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쉘터 2>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현실적인 도시보다 현실적인 자연 환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우리는 해방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오픈 월드 게임은 해방입니다.
그레서 오픈 월드 게임은 멋진 분위기 동영상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분위기 동영상은 관조적이고 전지적입니다. 분위기 동영상은 일상을 벗어나고 장대한 세상을 전지적 시점으로 바라봅니다. 우리는 일상을 벗어나고 훨씬 숭고하고 전능한 차원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까페나 도서관이나 건물 분위기 동영상들은 이런 숭고한 차원으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도서관 분위기 동영상은 일상에서 작은 여유를 찾습니다. 하지만 <서브노티카> 분위기 동영상에서 우리는 전지적 시점으로 웅장한 외계 바다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건 무조건 도서관 분위기 동영상보다 <서브노티카> 분위기 동영상이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그저 개인적인 취향에 불과합니다. 분명히 도서관 분위기 동영상보다 <서브노티카> 분위기 동영상은 압도적입니다. 광대한 외계 바다와 각종 해양 생명체들은 정말 신비롭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는 <서브노티카> 분위기 동영상보다 도서관 분위기 동영상을 좋아할 겁니다. 종종 우리는 일상에서 여유를 찾고 싶어합니다. 종종 우리는 훨씬 장대하고 전지적인 시점을 보고 싶어합니다. 우리에게 도서관 분위기 동영상과 <서브노티카> 분위기 동영상은 모두 필요할 겁니다.
하지만 이런 온갖 분위기 소재들 중에서 생물 다양성에는 특별한 가치가 있습니다. 생물 다양성은 번성을 말할 수 있습니다. 생물 다양성은 풍요롭습니다. 아무리 항성이 거대하고 강한 열기를 내뿜는다고 해도, 우리는 이걸 풍요롭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엄청난 물고기들이 무리를 지을 때, 이건 풍요롭습니다. 생명 현상에는 의지가 있습니다. 생명체들은 스스로 꿈틀거리고 살아갑니다. 생물학자들은 신진 대사를 위해 생명 현상이 물질들을 섭취하고 새로운 화학 질서를 조성하고 엔트로피를 늦춘다고 과학적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과학 용어들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생명 현상이 살아있다고 인식할 수 있어요. 그래서 거대하고 강한 항성보다 작은 꿀벌은 훨씬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생명 현상이 살아있고 생물 다양성이 풍성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 역시 잘 먹고 잘 살 수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산다'는 표현은 별로 멋대가리가 없으나, 사실 이건 꽤나 중요합니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먹고 잘 살지 못한다면, 아무리 세상이 넓다고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어제 천문학계는 아주 놀라운 소식을 발표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과학자들은 블랙홀을 관찰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블랙홀을 볼 수 있습니다.
이건 정말 굉장한 소식입니다. 어쩌면 SF 팬들은 이런 소식에 감탄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블랙홀은 멀고 멉니다. 반면, 지구 자연 생태계는 훨씬 가깝습니다. 지구 자연 생태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가 블랙홀을 관찰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먹고 살 수 있어요. 하지만 지구 자연 생태계가 망가진다면, 우리는 제대로 먹고 살지 못할 겁니다. 산업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를 부르고 자연 생태계를 파괴합니다. 우리는 머나먼 블랙홀보다 우리를 품은 지구 자연 생태계를 바라봐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주 탐사 소설보다 Cli-Fi 소설을 열심히 읽어야 할지 모릅니다.
이건 블랙홀 관찰과 우주 탐사 소설들에 아무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지구 자연 생태계와 Cli-Fi 소설들이 아주 소중하다는 뜻입니다. 생물 다양성에는 특별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압주>처럼, 자연 생태계 동영상은 훨씬 특별합니다. <압주>는 풍요롭고 살아있고 소중한 해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