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압주>가 어느 정도 생명애를 충족할 수 있는가 본문
[이런 기술적인 자연은 싱그럽고 원대합니다. 이게 여자의 몸을 왜곡할까요, 아니면 생명애를 충족할까요?]
비디오 게임 <압주>는 환경 아포칼립스입니다. 지적 문명은 멸망했고, 이상한 기계들은 바다를 장악했고, 몇몇 지역은 황무지와 비슷합니다. 분노한 백상아리는 기계들을 공격하고 자연 환경을 보호하기 원합니다. 동시에 <압주>는 생태 유토피아를 보여줍니다. 주인공 잠수부는 열대 바다, 망망대해, 산호초 지대, 심해, 고대 바다를 돌아다니고 수많은 해양 생명체들과 만납니다. 풍성한 해양 생물 다양성과 함께 잠수부가 헤엄칠 때, 게임 플레이어는 왜 예술가들이 자연의 생산력을 칭송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고대부터 지식인들은 여러 의미들로 자연을 규정했습니다. 예술가들과 철학자들과 비평가들은 자연이 번성이나 치유나 복원이나 명상이나 규모라고 말합니다. 이런 것들 중에서 <압주>는 번성에 초점을 맞춥니다. 전반적으로 <압주>는 번성하는 생명력에 초점을 맞춥니다. <압주>는 엄청난 생물 다양성을 늘어놓습니다. 해양 야생 동물들이 정말 압도적이기 때문에, 사양이 낮은 컴퓨터는 이것들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벅벅 끊길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압도적인 번성과 생물 다양성을 즐기고 싶다면, 좋은 컴퓨터는 필수적일 겁니다.
<압주>가 환경 아포칼립스이고 동시에 생태 유토피아이기 때문에, <압주>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압주>는 뚜렷한 줄거리와 배경 설정을 보여주지 않으나, 거대하고 억압적인 기계들과 해양 문명은 <압주>가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압주>는 사이언스 픽션과 비슷한 감성을 자아냅니다. <압주>가 기술적인 자연이기 때문입니다. 고대부터 수많은 예술가들과 철학자들과 비평가들은 자연을 칭송했으나, 그들은 기술적인 자연을 칭송하지 않았습니다. 기술적인 자연은 자연 다큐멘터리 영화나 생태계 시뮬레이션 비디오 게임을 가리킵니다.
고대에는 자연 다큐멘터리 영화와 생태계 시뮬레이션 비디오 게임이 없었습니다. 중세에도 이런 것들은 없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 역시 마찬가지였고, 17~19세기 근대적인 진보 시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20세기 중반까지, 기술적인 자연은 없었습니다. 20세기 후반에 자연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늘어나고, 본격적으로 기술적인 자연들은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해도 생태계 게임들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20세기 후반에 <압주> 같은 게임은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1994년 <울프>나 1996년 <심파크>는 좋은 생태계 게임들이나, <압주>와 달리, 이런 게임들은 3D 그래픽으로 압도적인 생물 다양성을 구현하지 못했습니다. 1996년에 게임 플레이어들이 <심파크>를 재미있게 즐겼다고 해도, 그들은 <압주> 같은 게임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20세기 후반의 환경 운동가들 역시 이런 기술적인 자연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21세기 초반 이후, 3D 그래픽 게임들은 널리 퍼지기 시작합니다. 비단 <압주>만 아니라 다른 많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놀라운 자연 생태계를 보여줍니다. 3D 그래픽 덕분에 게임 플레이어는 거대하고 감동적이고 경이로운 자연 생태계를 누빌 수 있습니다. 이런 기술적인 자연에는 '시대적인 격차'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자연 생태계는 존재했고, 지식인들은 자연 환경을 다양하게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술적인 자연을 알지 못했습니다. 근대적인 진보에서 기술적인 자연은 비롯했고, <압주> 같은 기술적인 자연은 21세기 초반 결과물입니다.
정보 기술이 기술적인 자연을 만들기 때문에, 미래에 정보 기술이 훨씬 발달한다면, 미래에는 훨씬 놀라운 기술적인 자연들이 나타날 겁니다. 미래 사람들은 진짜 동물원이 아니라 가상 동물원을 방문할지 모릅니다. 아니, 정보 기술이 기술적인 자연 생태계를 만들 수 있다면, 왜 사람들이 '동물원'에 방문해야 하나요? 정보 기술은 아예 야생을 구현하고, 사람들은 기술적인 야생을 즐길 수 있을 겁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철창 안에서 흐느적거리는 호랑이를 구경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압주>는 첫걸음인지 모릅니다. 미래에는 <압주>보다 훨씬 경이로운 기술적인 자연들이 있을 겁니다. 이런 '시대적인 격차'는 사이언스 픽션과 비슷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처럼, 기술적인 자연은 시대적인 격차를 이용해 짜릿한 감성을 자아냅니다.
물론 기술적인 자연 이외에 숱한 진보적인 기술들은 시대적인 격차와 짜릿한 감성을 자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적인 자연은 훨씬 독특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풍성한 녹색 자연과 첨단 기술이 이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부상 열차와 제트 여객기와 아이패드는 근대적인 진보, 첨단 기술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호테알린의 하얀 숲 속을 뛰어다니는 아무르 호랑이와 거대한 레드 우드와 꽃들을 방문하는 무침벌들은 근대적인 진보를 상징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원초적이고, 진보적인 기술은 근대적입니다. 원초적인 감성과 근대적인 계몽은 서로 대립합니다. 하지만 기술적인 자연에는 원초적인 감성과 근대적인 계몽이 함께 있습니다.
문제는 <압주>가 비디오 게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비디오 게임은 부정적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비디오 게임이 부정적이라고 말합니다. 에코 페미니즘 지식인들 역시 컴퓨터 기술과 비디오 게임을 좋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에코 페미니즘 고전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서 마리아 미스는 비디오 게임이 부정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른바 현대 사회는 기계 사회입니다. 기계들은 사람들을 둘러쌌고, 어디에서든 사람들은 기계들을 마주칩니다. 산업 노동자들 역시 기계들과 함께 노동합니다. 산업 노동은 기계 노동입니다. 이미 19세기 유럽에서 카를 마르크스 같은 유럽 남자 지식인들은 기계 시대에 감탄했습니다.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 같은 책들은 거대한 산업 공장들과 철컥거리는 기계들을 예찬합니다.
하지만 마리아 미스는 이런 기계 산업 노동이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오염시킨다고 비판합니다. 기계 산업 노동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 환경을 만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유기체들보다 죽은 기계들과 상호 작용입니다. 이런 상호 작용은 병적인 현상입니다. 사람들은 유기체들과 상호 작용해야 합니다. 비디오 게임 역시 이런 병적인 현상에 속합니다. 비디오 게임은 첨단 기계 오락입니다. 사람들이 병폐적인 기계 문명에 매달릴 때, 사람들이 자연과 접촉하고 싶다고 해도, 사람들은 자연과 접촉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특히, 남자들은 여자의 몸을 왜곡할지 모릅니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비롯해 여러 에코 페미니즘 서적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여자의 몸은 어머니 자연이 될 수 있습니다. 가렛 하딘과 공유지의 비극 이론을 비판했을 때, 베로니카 벤홀트-톰젠은 풍요로운 자연과 어머니 원리를 강조했습니다. 이건 돌봄 노동을 비롯해 여성적인 노동이 자연을 풍성하게 가꾸고 협조한다는 뜻이나, 한편으로 이건 자연과 여자가 똑같이 생산적이라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왜 여자(어머니)의 몸이 풍요로운 자연이 되나요?
<압주>가 보여주는 것처럼, 고대부터 예술가들과 철학자들과 비평가들이 찬탄하는 것처럼, 자연은 풍성한 생산력을 보여줍니다. 자연은 생산적입니다. 삭막한 바위 지대는 풍성한 생명력을 생산하지 못하고, 이런 것들은 자연이 되지 못합니다. 여자의 몸 역시 생산적입니다. 여자의 젖가슴은 풍성하고 건강한 모유를 생산합니다. 자연에서 인간이 식량들을 찾는 것처럼, 여자의 젖가슴에서 아기는 식량을 찾습니다. 여자의 젖가슴은 가장 기초적인 식량을 생산합니다. 여자의 젖가슴은 생체 식량 공장이고 생명력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연과 여자의 몸은 비슷하고, 여자의 몸은 어머니 자연이 됩니다. 사람들은 여자의 몸이 자연이라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자연을 만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진짜 자연을 그리워할 테고, 사람들은, 특히, 남자들은 여자의 몸을 편파적으로 소비할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진짜 자연과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남자)들은 여자의 몸(어머니 자연)을 왜곡할지 모릅니다. 이런 현상은 각종 저질 포르노들과 성 폭행들을 양산할 겁니다. 사람들이 진짜 자연과 만날 수 있을 때, 저질 포르노들과 성 폭행들은 줄어들지 모릅니다. 마리아 미스는 기계 문명이 줄어들고 사람들이 진짜 자연과 상호 작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쩌면 마리아 미스를 비롯해 에코 페미니스트들은 <압주> 역시 문제라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21세기 첨단 기술 없이, <압주>는 없습니다. 에코 페미니스트들은 <압주>가 불완전하고 기이한 기술적인 자연이라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제노블룸> 같은 2D 픽셀 게임부터 <Equilinox> 같은 3D 샌드 박스 게임까지, 에코 페미니스트들은 수많은 기술적인 자연들을 비판할지 모릅니다. 이런 주장이 옳을까요? 분명히 사람들은 자연과 접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에드워드 윌슨은 인간에게 생명애(바이오필리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에게 생명애가 있다면, 인간은 생명애를 충족해야 할 겁니다. 인간이 생명애를 충족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애정 결핍에 걸릴 테고, 이건 불행한 폭력이나 우울증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마리아 미스는 이런 사태를 우려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압주> 같은 기술적인 자연이 폐해가 될까요, 아니면 이득이 될까요? 마리아 미스는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들을 비판했으나, <압주>는 폐해보다 이득이 될지 모릅니다. <압주> 같은 기술적인 자연들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이로운 대자연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구태여 비싼 심해 잠수정을 타지 않는다고 해도, <압주>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쉽게 장수 거북을 만날 수 있어요.
이건 기술적인 자연이 진짜 자연을 완전히 대신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는 진짜 자연과 접촉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고작 뒷산에만 올라갈 수 있다고 해도, 뒷산에서 우리는 자연과 접촉하고 진짜 자연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에드워드 윌슨은 우리가 생명애를 충족한다고 말할 겁니다. 기술적인 자연은 진짜 자연을 완전히 대신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압주>가 무조건 폐해가 되나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쉽게 장수 거북들과 함께 헤엄치지 못합니다.
<압주> 같은 기술적인 자연 덕분에, 사람들은 자연에 훨씬 몰입할 수 있을 겁니다. <압주>는 <배틀필드> 같은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들과 다르고, <몬스터 헌터>나 <호라이즌 제로 던>이나 <파 크라이 3> 같은 사냥을 빙자하는 학살 게임들과 다릅니다.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들이 병폐가 된다고 해도, <압주> 같은 기술적인 자연은 이득이 될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