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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발리의 <잔상>과 사유 재산의 시각화 본문

SF & 판타지/유토피아

존 발리의 <잔상>과 사유 재산의 시각화

OneTiger 2017. 8. 20. 20:00

"사유 재산은 시각적이다." 철학자 강신주 박사는 어느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강신주는 사유 재산이 등장하기 위해 상품이 시각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시각적이지 않은 사물은 시장에서 팔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시장에서 뭔가를 팔고 싶다면, 그걸 시각적이고 구체적인 상품으로 변환해야 합니다. 강신주 박사는 공기나 향기를 사례로 들더군요. 아무도 공기를 팔지 못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공기를 팔고 싶다면, 그 사람은 공기를 통에 포장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공기를 통에 포장하는 순간, 공기는 깡통이라는 시각적이고 구체적인 상품이 됩니다. 들꽃의 향기 역시 상품이 되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그 꽃의 향기를 추출하고 그걸 향수병에 담아야 합니다. 향기가 향수병에 담긴다면, 이 향수병은 시각적이고 구체적인 상품이 됩니다. 사실 탄소 배출권이나 관광 같은 무형적인 상품에도 시각적이고 구체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탄소 배출량을 시각적이고 수치적으로 측정할 수 있고, 우리는 여행지에서 각종 건물들이나 야생 동물들을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강신주는 인류가 사유 재산을 없애고 싶다면 시각적인 상품들을 없애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물이 탈시각적이고 추상적인 유형이 될 때, 그 사물은 사유 재산이 되지 못합니다. 누구나 들꽃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면, 아무도 그 들꽃의 향기를 추출하지 않는다면, 사유 재산은 사라질 겁니다. 누군가는 그 향기를 측정할지 모르지만, 그 측정값을 시장에 넘기지 않는다면, 들꽃의 향기는 사유 재산이 되지 않을 겁니다. 물론 그 들꽃이 자라는 초원에는 울타리가 없어야 할 겁니다.


누군가가 거기에 울타리를 친다면, 그 울타리는 시각적이고 구체적이죠. 그 울타리는 시각적으로 여기가 누군가의 사유 재산임을 증명하겠죠. 울타리가 없다고 해도 토지 문서처럼 시각적인 기록이 존재한다면, 그것 역시 사유 재산을 증명할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유 재산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저는 인간이 아주 시각적인 동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허버트 웰즈는 장님들의 세계를 상상했겠죠. 저는 웰즈가 (하필 다른 장애인이 아니라) 장님을 상정한 이유는 그만큼 인간이 시각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신주 박사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저는 존 발리의 <잔상>이 떠올렸습니다. 이 소설에는 사유 재산이 없는 공동체가 등장합니다. 그야말로 코뮨이죠. 이 공동체에서 구성원들은 누구 하나 사유 재산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공동체가 샤를 푸리에나 조세프 프루동이나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사회주의 공동체와 비슷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들은 저런 사상가들보다 훨씬 급진적(?)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저 생산 수단만 공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자기 자신까지 공유합니다.


여기에는 아무 비밀이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을 남들과 공유합니다. 이들은 사랑과 애정 역시 공유합니다. 사유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개인적인 연인이 없습니다. 더 나가서 개인이라는 관념이 희미한 것 같습니다. 모두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지만, 동시에 그걸 남들과 공유합니다. 그래서 개인의 기쁨은 공동체의 기쁨이 됩니다. 흠, 이게 카를 마르크스가 말한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사회 전체의 발전이 되는 공동체'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 공동체에는 계급이나 격차가 없습니다. (종종 SF 소설들은 계급이 없는 사회를 묘사하곤 합니다. 그게 전부 혁명적인 사회주의 세상은 아닙니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모두 장애인입니다. 그들은 앞을 볼 수 없습니다. 어쩌면 강신주 박사의 주장대로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장애인이기 때문에 계급이 없고 사유 재산이 없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켈러라고 불리는 이 공동체에서 앞을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들은 기꺼이 켈러 공동체의 관습을 존중합니다. 사실 앞을 보는 누군가가 사유 재산을 만든다고 해도 대부분 구성원들이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시각적인 사유 재산은 별로 소용이 없을지 모릅니다.


만약 앞을 보는 누군가가 사유 재산을 이용해 이득을 얻고 싶다면, 켈러 공동체를 파괴해야 합니다. 사실 폭력 조직들이 몇 번 켈러를 습격했고, 그들은 켈러를 파괴함으로써 이득을 얻었습니다. 누군가가 켈러를 파괴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사유 재산을 이용해 이득을 얻지 못해요. 저는 존 발리가 이런 요소들을 고려했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존 발리는 사유 재산과 시각화의 관계를 잘 몰랐을지 모릅니다. 존 발리는 그저 히피 문화에 상상력을 덧댔을 뿐인지 모르죠. 하지만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켈러는 흥미로운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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