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안드로메다 성운>과 유사 인간 종족들 본문
소설 <안드로메다 성운>의 특징 중 하나는 다채로운 인종들입니다. 소설 속에서 인류는 전세계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했고, 만인이 평등한 세상을 추구합니다. 당연히 작가는 평등한 구조를 보여줘야 했고, 그래서 므벤 마스나 차라 같은 등장인물을 집어넣었을 겁니다. (당연히 인종적인 평등과 함께 성적 평등도 추구합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많아요.) 하지만 이반 예프레모프는 다른 나라들을 무시하는 시각을 소설 속에서 완전히 지우지 못합니다. 여전히 러시아 남자들이 많아 보이고, 그런 남자들은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인물입니다.
반면, 므벤 마스나 차라 같은 등장인물들은 그런 전형성에서 벗어났어요. 아프리카인이나 인도인이라는 특성을 굉장히 강조하죠. 아무리 작가가 좌파적이고 평등한 시선을 유지하려고 애써도 결국 시대적인 한계나 태생적인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소설이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비록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이렇게 계속 노력할 때, 작가들은 전반적인 사상을 바꿀 수 있겠죠. 게다가 비록 한계가 있다고 해도 <안드로메다 성운>은 백인 남자들만 천편일률적으로 등장하는 여타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 소설들보다 훨씬 낫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나 판타지 소설들은 특성상 다양한 인종들이나 종족들을 이야기합니다. 하드 SF 소설들은 미래 인류 연합을 자주 이야기하고, 그래서 다양한 인종들을 보여줍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수많은 행성들을 이야기하고, 아주 당연히 수많은 종족들을 등장시킵니다. 서사 판타지나 검마 판타지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 엘프, 드워프, 오크, 고블린, 트롤 등은 검마 판타지에서 전형으로 자리를 잡았죠. 스팀펑크나 도시 판타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팀펑크가 하이 판타지와 만난다면, 다양한 종족들을 선보일 수 있습니다.
도시 판타지 역시 흡혈귀와 늑대인간, 유령, 요정 등을 다채롭게 변주하죠. 하지만 이런 인종들이나 종족들 중에서 유독 백인 남자들만 중요하게 나오는 듯합니다. 뭐, 북미나 유럽, 호주 창작가들이 장르 창작물을 만든다면, 당연히 백인들을 중요하게 내보내겠죠. 그건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그걸 비판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고려한다고 해도 백인 남자들에 비해 다른 인종이나 다른 성을 폄하하는 것 같은 사례가 보입니다. 아무리 다양한 인종들이나 종족들을 보여준다고 해도 결국 백인 남자 대 비전형적인 인종의 구도입니다.
가령,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같은 게임은 어떨까요. 이 온라인 판타지 롤플레잉 게임은 전세계적인 사랑을 받습니다. 이 게임은 서사 하이 판타지답게 다양한 종족들을 내보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인간 종족은 유럽 백인 남자를 대변합니다. 건축 양식은 서구적이고, 중요한 인물들은 백인 남자들입니다. 흑인 여자나 황인 여자가 중요한 인물들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플레이어는 흑인 여자나 황인 여자를 만들 수 있으나, 그건 플레이어가 선택하는 결과에 불과합니다. 공식적인 설정 속에서 인간 종족의 중요한 인물들은 모두 백인 남자들이죠. 왕도 그렇고, 기사도 그렇고, 마법사도 그렇고….
게다가 아프리카 사람이나 아시아 유목민이나 남아메리카 사람은 모두 비인간 종족으로 밀려납니다. 북미 원주민은 인간 종족이 되지 못합니다. 북미 원주민은 게임에서 타우렌이라는 반인반우로 등장합니다. 이족 보행하는 소입니다. 아프리카 사람이나 남아메리카 사람은 오크나 트롤로 등장합니다. 트롤들은 대놓고 부두교 운운하고 다녀요. 종종 오크는 아시아 유목민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요. 중국은 판다렌이라는 이족 보행하는 판다이고, 동아시아는 나이트 엘프로 나옵니다. 그나마 판다렌이나 나이트 엘프는 귀엽거나 우아하기 때문에 오크나 트롤, 타우렌보다 나을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어쨌든 판다렌과 나이트 엘프는 인간이 아니죠. 정상적인 인간 종족은 유럽 문명이고, 다른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문명은 비인간 종족으로 밀려나야 합니다. 중동이나 북아프리카는 언데드입니다. 희한하게 똑같은 엘프지만 하이 엘프나 블러드 엘프는 아시아보다 유럽 문명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하이 엘프나 블러드 엘프는 금발과 하얀 피부를 자랑하는 백인처럼 생겼습니다. 이처럼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백인 남자와 유럽 문명만 표준이라고 규정하죠.
물론 이 게임이 인종 차별을 주장하는 수구 꼴통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게임은 그저 서사 판타지가 걸어온 길을 아무 생각도 없이 걸을 뿐입니다. 예전부터 서사 판타지들은 (소설이든 게임이든) 유럽 문명을 표준적인 인간 종족으로 생각했고, 그런 생각을 무조건 인종 차별이라고 단정하지 못하겠죠. 하지만 온갖 상상력들을 발휘하는 장르임에도 서사 판타지는 저런 전형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쓰랄이 멋지게 등장하면 뭐 하겠습니까. 결국 오크에 불과하죠. 인간이 아니에요. 표준이 아니라 비표준이죠.
비단 이 게임만 아니라 수많은 하드 SF들, 스팀펑크들, 스페이스 오페라들, 서사 판타지들, 도시 판타지들을 비슷하게 비판할 수 있겠죠. 저런 장르 창작물들을 볼 때마다, 저는 <안드로메다 성운> 같은 소설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은 죄다 유럽 문명만 표준으로 내세운다고 해도 누군가는 평등을 추구해야 하지 않겠어요. 물론 이 소설 역시 한계가 있으나, 적어도 이런 소설은 좀 더 앞으로 나가려고 노력하죠. 그런 노력이 중요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