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F 생태주의

<에코토피아 뉴스>와 가정적인 여성의 이상 본문

SF & 판타지/유토피아

<에코토피아 뉴스>와 가정적인 여성의 이상

OneTiger 2017. 8. 10. 20:00

윌리엄 모리스의 <에코토피아 뉴스>는 생태 사회주의의 고전으로 불립니다. 원래 이 책의 제목은 <뉴스 프롬 노웨어>이지만, 번역자 박홍규 교수는 '자연 환경을 강조하는 유토피아 로망스'라는 관점을 고려했고 그래서 <에코토피아 뉴스>라고 번역했다고 밝혔습니다. 비슷한 시기의 다른 사회주의 유토피아 소설들, <붉은 별>이나 <뒤 돌아보며>와 달리 <에코토피아 뉴스>는 정말 자연 환경을 강조합니다. <붉은 별>은 공산주의 생산력과 자연 환경의 한계를 이야기합니다. <뒤 돌아보며>는 산업 군대를 강조하기 때문에 자연 환경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반면, <에코토피아 뉴스>는 매연과 산업 폐기물을 부정하고 싱그럽고 울창한 숲을 찬양합니다. 우스갯소리를 하자면, 우드 엘프의 원조는 존 로널드 톨킨이 아니라 윌리엄 모리스일 겁니다. 소설 속의 사회주의자들은 마음 속 깊이 맑은 강물과 목가적인 초원과 울창한 숲을 사랑하기 때문이죠. 아쉽게도 모리스의 사상은 다소 낭만적이고 카를 마르크스에게 밀렸습니다.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고, 19세기 이후 명맥이 끊겼죠. 하지만 <에코토피아 뉴스>는 오늘날 사회주의가 생태적 가치로 귀결해야 함을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장점만큼 단점도 뚜렷합니다. 비평가들은 소설의 사상이 너무 낭만적이라고 비판하지만, 저는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 하나는 성 차별입니다. 아무리 모리스가 생태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주의자라고 해도 이 소설에서 사회주의 사상은 성을 차별합니다. 소설은 여자들이 가정적인 일을 맡아야 하고 남자들이 외부 노동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게 미덕이고 그게 이상적입니다. 소설 속의 사회주의자들은 집안에서 가정을 돌보는 여자가 고귀하고 우아하다고 평가합니다.


반면, 남자들은 집안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남자들은 집안을 망칠 뿐이고, 그러므로 밖에서 일해야 합니다. 소설 속에서 여자들은 모두 집안 일에만 종사합니다. 이상하게도 육체적인 외부 노동에 종사하는 여자는 나오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런 것을 좋아하는 여자가 있을 테고, 소설은 노동의 가치에 상당한 부분을 할애함에도 외부 노동에 종사하는 여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지속적으로 가정적인 여자의 미덕을 찬양합니다. 곡괭이를 휘두르는 것 같은 노동은 전부 남자들의 몫입니다. 여자는 그걸 지켜보거나 잠시 거들 뿐이죠.



저는 이게 분명히 성 차별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이상적인 모습에 제약을 걸죠. 진화 심리학을 가장한 사기꾼들과 달리 이 소설은 "남자는 공격적이고 활동적이며, 여자는 방어적이고 수동적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여자를 무조건적인 성녀로 만들지 않고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라고 바라보지 않습니다. 사실 소설 속에서 여자들은 굉장히 자유롭게 연애합니다. 여자들은 자신이 원할 때 결혼하거나 이혼할 수 있습니다. 그걸 가로막는 제도나 법률, 관습은 없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고, 사실 '가정'이라는 것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설 속의 '가정'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정(노동자 남편, 가정적인 주부, 아이들로 이루어진 가족)과 많이 다릅니다. 사회 구조가 평등하기 때문에 강간이나 성 폭행 같은 범죄 역시 벌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느 관점에서 본다면, 이 소설이 여자들의 해방과 독립을 주장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그런 부분을 인정하지만, 이 소설이 가정적인 여자만 찬미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군요. 아울러 가정적인 남자를 조롱하는 것도 불만입니다. 왜 남자는 가정적인 인간이 되면 안 되는 겁니까. 남자도 집안 일을 잘 할 수 있어요.



게다가 연애 문제를 다룰 때, 소설의 관점은 남자에게 쏠렸습니다. 소설의 화자가 남자이기 때문에 그럴까요. 그렇다고 해도 화자가 연애 문제를 남자 입장에서만 서술했다는 점을 부인하지 못하겠죠. 어쨌든 저는 가정적인 여자와 외부적인 남자라는 관점이 꽤나 아쉽습니다. 윌리엄 모리스 역시 19세기의 성 평등 운동을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모리스는 19세기 유럽 상류층 백인 남자이고, 그런 관행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선구적인 사람도 시대의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기가 어렵죠.


비단 모리스만 아니라 종종 위대한 사상가들도 성 차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어제 이야기한 것처럼 장 자크 루소는 기념비적인 철학자이나, 여자를 깔보는 어투나 아이를 함부로 고아원에 맡긴 행위 등은 반드시 비판을 받아야 하죠.) 오늘날의 정치인이나 사상가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에코토피아 뉴스>는 오늘날의 환경 오염과 자본주의 착취에 일침을 가하는 소설이지만, 독자는 저런 부분을 주의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옥타비아 버틀러나 제임스 팁트리, 조안나 러스 같은 작가들이 필요하죠.)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