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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기생체>와 소외된 지식인들의 각성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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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기생체>와 소외된 지식인들의 각성

OneTiger 2018. 2. 28. 22:45

소설 <정신기생체>는 꽤나 기이한 책입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를 내세우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으나, 이 소설에서 러브크래프트 같은 요소는 별로 비중이 크지 않습니다. 사악한 외계인들은 그저 서두를 장식할 뿐이죠. <정신기생체>가 정말 기괴한 이유는 콜린 윌슨이 독특한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콜린 윌슨은 오컬트 책들을 많이 썼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인 각성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윌슨은 왜 인간이 소외나 절망, 분노를 느끼는지 주목했고, 정신적인 각성으로 그걸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윌슨은 인간이 자신을 진정으로 세상에 표현하기 원했고,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기 원했고, 그게 정신적인 승천이나 진화를 이룰 수 있다고 여겼죠. 인간의 의식에는 상당한 잠재력이 있고, 윌슨은 사람들이 그걸 끄집어내기 원했습니다. 정신적인 자각을 이끌어내고 싶다면, 인간은 평범한 일상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세속에서 한 걸음 물러나고, 진정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해요. 콜린 윌슨의 대작이자 데뷔작 <아웃사이더>는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제목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사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당연히 타성에 젖은 일반인은 쉽게 각성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회에서 좀 더 동떨어진 사람들은 훨씬 쉽게 각성할 수 있겠죠. 그래서 <아웃사이더>는 사회에서 동떨어진 등장인물들을 탐구합니다. <구토>나 <젊은 예술가의 초상> 같은 소설들을 통해 왜 등장인물들이 타성에서 멀어지는지 살펴요. 콜린 윌슨은 하워드 러브크래프트 역시 그런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러브크래프는 정말 아웃사이더처럼 살았고,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 역시 사회에서 동떨어졌죠. 이런 특징이 콜린 윌슨을 자극한 듯합니다. 하지만 콜린 윌슨은 러브크래프트를 완전히 긍정하지 않았고, 몇몇 단점을 지적합니다.


그래서 크툴루 신화를 정립하고 러브크래프트를 추종하는 어거스트 덜레스와 논쟁이 붙었고, 콜린 윌슨은 우주적인 공포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정신기생체>는 러브크래프트에게 기대는 소설이 아니고, 우주적 공포 소설이 아닙니다. <정신기생체>는 뭔가 러브크래프트처럼 시작하나, 중반부 이후 태도를 바꿉니다. 소설은 러브크래프트 같은 요소를 우주 너머로 날려버리고, 콜린 윌슨이 주목하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습니다. 당연히 그건 사회에서 동떨어진 사람들과 정신적인 각성과 인간 정신의 잠재력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정신기생체>는 그런 소설입니다. 소설의 서문에서 콜린 윌슨은 러브크래프트를 언급했으나, 그건 그저 떡밥이나 농담에 가깝습니다. <아웃사이더>나 <소설의 진화>를 비롯한 여러 책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콜린 윌슨은 사회에서 동떨어지고 절망하는 인간들을 주목합니다. <정신기생체>에서 그들이 절망하는 이유는 흡혈귀 같은 우주 괴물이 인간의 정신을 빨아먹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알아채고 싸우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어떻게 사람들이 인간의 정신을 빨아먹는 괴물과 싸울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인간이 정신적인 영역에 진입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인간의 정신을 빨아먹는 괴물은 콜린 윌슨이 처음 떠올린 발상이 아닙니다. 다른 작가들 역시 이미 비슷한 소재를 이용했어요. 하지만 콜린 윌슨은 그런 설정을 이용해 아주 과감히 전진합니다. 인간이 정신적으로 각성하면, 정신적인 괴물과 맞서싸울 수 있다고 주장해요. 그래서 등장인물들은 의식적인 수련을 거듭하고, 정신적인 영역에 진입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소설의 주된 내용이고, 소설에서 의식 묘사는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이 부분이 소설의 절정입니다. 깊고 깊은 해저로 잠수하는 것처럼 소설은 인간 의식을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정신기생체>에서 차토구아나 카다스 같은 용어는 농담이나 작은 유희에 불과합니다. 별로 비중이 없어요. 하워드 러브크래프트 역시 그저 기이한 작가로 나올 뿐이고요. 콜린 윌슨은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고, 본인이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늘어놓습니다. 인간의 의식을 빨아먹는 흡혈 괴물 역시 정신적인 자각을 강조하는 소품입니다. 왜 인간들이 좌절하거나 분노하는가. 어떻게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가. 해답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방법입니다. 이 세상에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라는 이야기들은 많습니다. 그걸 다루는 소설들 역시 많고요.


디즈니 애니메이션들만 봐도, 진정한 자신을 찾으라는 대사들을 끝없이 접할 수 있을 겁니다. 콜린 윌슨은 인간이 그저 그런 평면적이고 막연한 자아를 찾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타성적인 사회와 일상을 깨닫고 멀리 떨어질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 저 의식의 밑바닥까지 살펴야 합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나오는 스티븐처럼 인간은 모든 것에 회의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칠 때, 마침내 인간은 정신적인 자각에서 승리할 수 있고,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콜린 윌슨은 소설을 통해 어떻게 사람들이 그럴 수 있는지 보여줘요. 소설 초반부에서 등장인물들은 동료가 자살했다는 부고를 듣습니다. 그들은 수상한 지하 유적을 발굴합니다. 소설 초반부는 분명히 우주적 공포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우주적 공포는 정말 우주로 날아가고, 소설의 진짜배기는 콜린 윌슨의 새로운 실존주의입니다. 보이지 않는 우주 흡혈귀는 깊은 의식 속에서 꿈틀거리고, 인간의 정신을 신나게 빨아먹습니다. 괴물과 싸우고 싶다면, 인간 역시 어두운 심연 같은 의식 속으로 잠수해야 합니다.


잠수부가 몇 km 심해로 잠수하는 것처럼 등장인물들은 정신적인 심연으로 계속, 계속 잠수합니다. 하지만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달리 콜린 윌슨은 오묘한 의식의 흐름을 서술하지 않습니다. 콜린 윌슨은 상황을 단순하고 직선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읽기 쉽다는 뜻은 아닙니다. 콜린 윌슨은 이 부분(인간이 어둡고 깊은 의식 속으로 잠수하는 부분)에 가장 많은 공을 들였을 테고, 독자 역시 이 부분을 제일 어렵게 읽을 것 같습니다. 작가는 가시적이지 않은 의식의 세계를 최대한 가시적이고 직선적으로 설명하느라 애씁니다. 아마 독자마다 다르게 평가하겠으나, 저는 윌슨이 나름대로 이해하기 쉽게 썼다고 생각합니다.



소설 서문에서 콜린 윌슨은 자신이 이런 의식적인 영역을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형언하지 못할 공포 운운하곤 했고, 아예 이걸 이용해 단편 소설을 썼습니다. 아마 러브크래프트 역시 왜 자신의 필력이나 문학적 기법이 까이는지 알았던 것 같아요. 콜린 윌슨은 그런 기법을 피하느라 애씁니다. 아예 <정신기생체>에서 형언하지 못할 공포를 조롱하고, 독자가 두 눈으로 의식적인 세계를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비록 그건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일 수 있으나, 콜린 윌슨은 그걸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저는 그런 시도가 성공적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쉽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마 많은 독자들이 이게 무슨 헛소리인지 의심할 테고, 콜린 윌슨이 또 다시 괴이한 작품을 내놨다고 생각하겠죠. 게다가 독자가 의식적인 잠수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콜린 윌슨은 너무 정신적인 자각에만 몰두합니다. 정신적인 자각? 네, 좋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타성에서 벗어나고 현대 문명을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물리적인 사회 구조를 바꾸지 않고 정신적인 자각에 매달린다고 해도, 뭔가가 바뀔까요.



정신적인 자각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가 정말 무엇을 하고 싶은지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아주 커다란 기쁨으로 이어지겠죠. 하지만 물질적인 여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해도, 그건 아무 소용이 없을 겁니다. 우리는 정신적인 영혼만으로 살지 못합니다.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하고, 물을 마셔야 하고, 숨을 쉬어야 하고, 응가를 싸야 합니다. 그런 기본적인 요건들을 충족했을 때, 마침내 우리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살필 수 있겠죠. 콜린 윌슨은 이런 측면을 무시합니다.


<아웃사이더>나 <소설의 진화>, <정신기생체>에서 콜린 윌슨은 주로 지식인들이나 예술가들을 이야기합니다. 이른바 제3세계에서 고통을 받는 빈민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각성하지 못할까요. 거대 자본가들이 빈민들을 착취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빈민들이 각성할 수 있을까요. 빈민들이 계급 의식을 각성하지 못한다면, 정신적으로 각성하지 못할 겁니다. 콜린 윌슨은 그런 측면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사회 구조를 무시하고, 오직 정신적인 영역에만 매달리죠. 그래서 <정신기생체>는 빈민이나 사회적 약자인 여자나 환경 오염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깊고 어두운 의식을 치밀하게 묘사하는 필력은 정말 집요하고 대단합니다. 개인적으로 의식의 흐름 같은 기법을 좋아하지 않으나, <정신기생체>는 읽기 좋았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콜린 윌슨은 정말 희대의 천재 같아요. 그런 천재성을 사회적인 범주로 확대했다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콜린 윌슨은 의식적인 범주에서 머물렀고, 여기에서 최대한 대가의 솜씨를 발휘합니다. 만약 독자가 인간이 깊고 복잡한 동굴 속을 천천히 탐험하는 모습을 그릴 수 있다면, 잠수정이 어두운 심연으로 천천히 잠수하는 모습을 그릴 수 있다면, 우주선이 깊고 깊은 우주를 천천히 항해하는 모습을 그릴 수 있다면, 독자는 <정신기생체>를 보다 수월하게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정신기생체>가 만만하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저런 장면들을 떠올린다면, 독자가 이 소설을 좀 더 친숙하게 접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런 방법이 유용했습니다. 이런 방법을 정말 현실에서 사용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콜린 윌슨이 그걸 바랐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일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고 현대 문명을 훨씬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실에는 정신기생체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건 자본주의 헤게모니라는 정신기생체입니다.)



소설 중반부에서 <정신기생체>는 열심히 (콜린 윌슨 특유의) 실존주의를 열심히 떠듭니다. 마침내 등장인물들은 각성하고, 초인이 됩니다. <인간을 넘어서>처럼. 이제 소설 주연들은 더 이상 사회적인 타자가 아니고, 소외된 아웃사이더가 아닙니다. 그보다 진정한 자아를 찾고 우주를 조작할 수 있는 초인입니다. 초인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당연히 그들은 세상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초인들은 정말 세상을 구합니다. 솔직히 이 부분은 꽤나 당황스럽군요. 오히려 의식적인 싸움으로 결말을 지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초인들이 활약하는 부분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작가가 너무 갑자기 소설 분위기를 반전하는 것 같아요. <정신기생체>는 계속 공포와 의식을 강조했으나, 후반부에서 모든 것을 날려버리고 갑자기 초인 소설로 변합니다. 사람들이 <정신기생체>를 조롱하거나 놀리는 이유는 후반부 초인 소설 때문일 겁니다. 아무리 <정신기생체>를 감동적으로 읽었다고 해도, 후반부 초인 소설은 정말…. 희대의 천재답게 정말 기괴한 초인 소설을 썼군요. 그렇다고 해도, 저는 소설 중반부가 묘사하는 의식의 깊고 어두운 세계를 폄하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마 누군가는 이 소설을 읽고 낄낄거리며 웃을 겁니다. <정신기생체>는 독자도 후설 철학을 읽으면 초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아마 누군가는 역시 콜린 윌슨이 괴악한 오컬트 작가라고 욕할지 모릅니다. 의식을 빨아먹는 우주 흡혈귀? 뚱딴지 같은 소리죠. 그렇다고 해도 독자들은 콜린 윌슨이 제기하는 정신적인 자각을 한 번쯤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분명히 우리는 자유롭게 살아가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복종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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