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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로드> - 적막과 여백과 불안을 그리는 종말 소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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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 적막과 여백과 불안을 그리는 종말 소설

OneTiger 2018. 2. 8. 19:43

코맥 매카시가 쓴 <로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왜 인류 문명이 멸망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죠. 비단 인류 문명만 아니라 자연 생태계 역시 무너졌습니다. 도시들은 폐허가 되었고, 사람들은 여기저기에서 불탔고, 하얀 눈송이들과 검은 잿가루들은 모든 것을 뒤덮습니다. 하늘은 언제나 흐리고, 해를 찾아보기 어렵고, 차가운 바람만 휘몰아칩니다.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지고, 눈은 무릎까지 찹니다. 사방은 어둠이나 희미한 날빛입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눈이 내리는 밤에 깊은 숲 속을 헤맨다는 느낌을 받을 겁니다. 사방은 적막하고, 가끔 비명이나 희한한 소리가 들리나, 대부분 침묵을 지킵니다. 귀를 기울여도 천둥이나 바람 소리만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질서를 유지하는 누군가는 없습니다. 질서는 그저 혼란스러운 상황들이 이어지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혼란은 질서이고, 질서는 혼란입니다. 사방이 워낙 적막하기 때문에 직접 마주치기 전까지 아무도 그런 혼란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제자리에서 세상을 둘러본다고 해도, 광대한 폐허와 잿빛 하늘과 두꺼운 눈과 죽은 듯한 침묵만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소설 주인공을 제외하고, 세상이 죽은 것 같습니다.



사실 이런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별로 색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은 코맥 매카시가 굉장한 책을 썼다고 호들갑을 떨떠군요. 하지만 19세기부터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했습니다. 코맥 매카시는 그저 그런 전통을 빌렸을 뿐이고요. <로드>보다 더 암울하고, 더 극적이고, 더 사변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많습니다.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이 <로드>에 열광하는 이유는…. 글쎄요, 저는 코맥 매카시가 주류적인 작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코맥 매카시는 서부 장르를 자주 썼으나, 주류 문학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두 예쁜 말들>, <국경을 넘어>, <평원의 도시들>, <핏빛 자오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같은 소설들은 굉장한 주목을 받았고, 이런 주목이 <로드>로 이어졌을지 모르죠. <타임 머신>이나 <트리피드의 날> 같은 소설은 대놓고 장르 소설이라고 주장하나, 코맥 매카시는 그런 작가가 아니고, <로드> 역시 주류 문학처럼 보일 수 있겠죠. 만약 본격적인 SF 작가가 <로드> 같은 소설을 썼다면? 코맥 매카시처럼 주목을 받았을까요. 어쩌면 제가 너무 <로드>라는 소설을 무시하는지 모르죠. 하지만 저는 <로드>에게 쏟아지는 평가들에게 과장이 아예 없지 않다고 생각해요.



<로드>가 그저 선배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을 졸래졸래 쫓아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로드>는 자신만의 색깔을 뚜렷하게 갖췄고, 그래서 온갖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이 열광했을 겁니다. <로드>의 가장 큰 특징들 중 하나는 짤막하고 여백이 많은 형식이겠죠. 다른 소설들에 비해 이 소설은 꽤나 여백이 많습니다. 작가는 절대 문단을 길게 늘이지 않고, 틈이 날 때마다 여백을 집어넣습니다. 작가는 서사를 장황하게 펼치지 않고, 소설 주인공이 무엇을 하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줍니다.


세상이 무너졌기 때문에 소설 주인공이 별로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소설 주인공은 길을 따라 계속 이동할 뿐입니다. <로드>라는 제목처럼 소설 주인공은 꾸준히 길을 따라갑니다. 그러는 동안 각종 먹거리들을 찾습니다. 소설에서 먹거리를 찾는 과정은 많은 분량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그건 전문적이거나 복잡한 과정이 아닙니다. <로드>는 소설 주인공이 어디로 가고, 어디에서 자고, 어떻게 먹거리를 찾는지 짤막하게 보여줍니다. <로드>는 그런 짤막한 행위들을 연이어 늘어놓습니다. 문장 역시 길지 않습니다. 장대한 문장은 짤막한 문단들에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겁니다.



묘사 역시 치밀하지 않습니다. 코맥 매카시는 시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나, 묘사는 길거나 방대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물들을 짧게 묘사하거나 한 순간을 포착할 뿐입니다. 마치 스냅 사진기가 촬영하는 것처럼. 아니면 우리가 어떤 순간을 빠르고 강렬하게 인상에 남기는 것처럼. <로드>는 그런 짧은 인상들과 파편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국경을 넘어>나 <핏빛 자오선>이 장대한 서부 풍경을 길게 묘사했다면, <로드>는 정반대입니다. 대사 역시 치고 빠지곤 합니다. 등장인물들은 대사를 툭툭 치는 것 같습니다. 대사가 진지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용이 무겁다고 해도 형식이 간결하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대사에는 큰따옴표("")가 없습니다. <모두 예쁜 말들>이나 <평원의 도시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같은 소설들 역시 큰따옴표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그런 기법은 더욱 두드러지는 듯합니다. 여백들이 많고, 문단들과 문장들이 간결하기 때문에 큰따옴표가 없다는 사실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게다가 시종일관 작가가 묘사하는 것처럼 멸망한 세상은 고요합니다. 이런 고요한 세상에서 큰따옴표를 사용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런 적막 속에서 서술적인 문장과 등장인물의 대사를 큰따옴표로 구분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SF 소설에서 외계인들이 독특한 글씨체를 사용하는 것만큼.



아마 <로드>는 우리나라에서 읽을 수 있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들 중 가장 간결한 소설일 겁니다. 다른 유명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들과 비교한다고 해도 <로드>는 짧습니다. 새벽에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읽어도 별로 부담이 없습니다. 그런 정신으로 <최후의 인간>이나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이나 <메트로 2033> 같은 소설을 읽을 수 있겠어요. 무슨 내용인지 별로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로드>는 부담이 없습니다. 그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고 가장 매력적인 특징입니다.


그리고 간결한 구성과 형식은 멸망한 세상과 잘 어울립니다. 세상은 멸망했고, 사람들은 사라졌고, 도시는 무덤이 되었습니다. 사방은 적막하고, 눈송이들과 잿가루들은 모든 것을 뒤덮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소설 주인공이나 작가가 장황하게 떠든다면, 그런 장황한 묘사나 연설은 분위기를 해칠 겁니다. 간결한 구성과 형식은 적막하고 고요하고 멸망한 세상을 부각하고, 코맥 매카시는 그런 문학적인 형식으로 멸망한 세상을 그리는 것 같습니다. 간결한 구성은 그 자체가 그림입니다. 적막하고 고요한 그림이죠. 적막을 강조하는 소설은 침묵해야 합니다. 절대 길게 떠들면 안 되겠죠.



어쩌면 작가 지망생들은 이런 특징을 따라하고 싶을지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여백들, 짧으나 시적인 비유, 단순한 구조, 반복적이고 주기적인 상황들. <로드>가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아니라고 해도, 이런 특징은 정말 매력적일 겁니다. <로드>의 짧은 문단들은 짤막한 산문시를 보는 듯하거나 어떤 운율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시나 음악은 반복적인 운율을 조합하고, 사람들은 그런 부분에서 매력을 느낍니다. <로드> 역시 마찬가지겠죠. 다른 소설들과 달리 <로드>는 그런 형식적인 미학을 꾸준히 이어가고, 그래서 장단을 맞추는 것처럼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소설들에 그런 장단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계속 강조한 것처럼) <로드>는 여백들이 많고 간결해요. 그래서 <로드>는 그런 장단을 맞추기가 훨씬 쉽습니다. 어쩌면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이 <로드>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런 형식 때문일지 모릅니다. 사실 내용은 뻔합니다. 수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로드>보다 훨씬 어둡거나 파격적인 전망이나 사변을 내놨습니다. 하지만 <로드>는 그런 소설들보다 훨씬 인상적입니다. <로드>에서 시각적인 부분은 사변적인 부분보다 더 큽니다. 사변보다 시각이 훨씬 인간에게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고요.



그렇다고 해도 형식적인 특징이 이 소설의 유일한 장점은 아니겠죠. <로드>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리나, 그건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아들을 걱정하는 마음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기보다 걱정하는 것 같습니다. 인류 문명은 무너졌고, 아버지가 사라진다면, 아무도 어린 아들을 따스하게 맞이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폭력배들은 어린 아들을 험하게 이용할지 모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런 장면들을 충분히 목격했고,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애정을 드러낼 여유가 없습니다. 이 소설에서 걱정은 사랑보다 큽니다.


마지막에 이 소설이 사랑을 강조한다고 해도, 독자는 계속 사랑보다 걱정을 읽어야 할 겁니다. 아버지의 애정은 진부한 소재이나, 이 소설은 아버지의 걱정을 묘사하고, 진부한 소재와 멀리 떨어집니다. 그리고 다른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처럼 독자는 "나는 어떻게 할까?"라고 감정을 이입할 수 있겠죠.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극단적인 상황에 몰렸고, 아들을 지키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생존보다 죽음이 훨씬 자비로운 상황 속에서 극단적인 방법을 쓰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요. 멸망한 세상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그런 상황에 직면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들은 언제나 그렇게 묻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할 수 있는가?" 문명이 사라진 세상에서 생존자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가? 윤리나 도덕이나 질서를 거스르고, 극단적인 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는가? 약자를 폭행하거나 착취할 수 있는가? 성 폭행을 무시하거나 지지할 수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 죽일 수 있는가? 모두 어려운 물음들입니다. 하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언제나 이런 선택들을 강요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생존자는 선택해야 합니다. 생존자를 바라보는 독자 역시 갈림길에 서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할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문명이 대신 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질서가 무너졌기 때문에, 생존자는 가장 밑바닥에 떨어질지 모릅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 해쳐야 한다는 상황은 너무 끔찍하죠. 사랑하는 사람의 최후를 목격하는 행위는 비참합니다. 게다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그 짓을 해야 한다면, 그건 그야말로 살아있는 지옥일 겁니다. <로드>에서 아버지는 그런 지옥을 견뎌야 합니다. 모든 상황은 아버지를 그런 선택으로 몰고 가고, 그래서 이 소설은 끊임없이 불안합니다.



이 소설을 지탱하는 두 가지 축이 있다면, 그 축은 적막과 불안일 겁니다. 외부적인 상황은 적막하고, 내부적인 심리는 불안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는 심리적인 불안은 비단 <로드>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이미 <해변에서>나 <핵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 같은 소설은 그런 상황을 충분히 이야기했어요.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그런 심리적인 불안은 드문 소재가 아니죠. 하지만 <로드>는 오직 그런 부분에만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췄고, 그래서 극단적인 방법과 심리적인 불안이 더욱 두드러지는 듯합니다. 그렇게 불안하기 때문에 이 소설이 더욱 희망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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