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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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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을 주목하지 않는 19세기 SF 소설들

OneTiger 2018. 1. 31. 19:00

[유감스럽게도 19세기 비경 탐험 소설들에는 이런 여자 탐사 대원들이 없었습니다.]



SF 평론가들은 메리 셸리가 사이언티픽 로망스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평가합니다. <프랑켄슈타인>은 그런 결과물이고요. 메리 셸리가 사이언스 픽션을 쓴다는 자각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테크노 스릴러 작가처럼 메리 셸리는 인조인간 이야기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장르를 쓴다는 자각이 없었을 겁니다. 나중에 쥘 베른이나 허버트 웰즈나 에드워드 벨라미 등은 자신들이 장르 작가임을 자각했으나, 메리 셸리는 그저 으스스한 소설을 썼을 뿐이죠.


그렇다고 해도 메리 셸리가 사이언티픽 로망스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장본인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메리 셸리는 여자죠. 흔히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남자들의 차지라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은 일부분 맞습니다. 하지만 사이언티픽 로망스를 열어젖힌 작가는 여자였습니다.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성 평등을 위해 싸우는 운동권이었어요. 이런 사실은 꽤나 유명하나, 수많은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남자들의 차지라고 생각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남자 작가가 쓰는 것이고, 남자 독자가 읽는 것이고, 남자들이 활약하는 것입니다.



사실 초기 사이언스 픽션에서 여자 작가나 여자 등장인물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여자 등장인물조차 주연이 아니라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 뿐입니다. <프랑켄슈타인>조차 그런 면모에서 멀리 나가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서 중심적인 등장인물은 빅토르 프랑켄슈타인과 인조인간입니다. 솔직히 두 인물 이외에 다른 인물들은 그저 병풍입니다. <프랑켄슈타인>에 여자 등장인물들이 아예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여자 등장인물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여자들이 지적이거나 현명하거나 인간적이라고 해도 그들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도 문제가 없을 겁니다.


<프랑켄슈타인>에서 중요한 것은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느끼는 야망이나 죄책감, 인조인간이 느끼는 외로움과 분노, 증오입니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그걸 떠받치는 배경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여자들이 한 트럭으로 등장한다고 해도 프랑켄슈타인과 인조인간의 관계만큼 중요하지 않습니다. 프랑켄슈타인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거나 정다운 여동생이 있다고 해도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조인간이 소녀를 죽인다면, 인조인간은 좀 더 죄책감을 느낄지 모르나, 그저 그것뿐이죠.



우리는 쥘 베른을 SF 소설의 선구자라고 기억합니다. 다들 쥘 베른이 19세기의 대표적인 SF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쥘 베른이 얼마나 많은 여자 인물들을 중요하게 묘사했을까요. 결과는 꽤나 부정적입니다. 쥘 베른은 여자 인물들을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고,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해저 2만리>는 쥘 베른을 대표하는 소설이고, 독자들 역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설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 여자들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대학 교수 일행, 순양함 승무원들, 잠수함 승무원들 모두 남자들입니다.


물론 이 소설은 19세기 소설입니다. 게다가 순양함이나 잠수함이 등장하는 해양 소설입니다. 19세기 해양 소설에서 여자가 활약할 여지는 매우 적습니다. 그래서 쥘 베른은 여자 등장인물에게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을지 모르죠. 하지만 만약 노틸러스 잠수함 승무원들 중 여자가 있었다면…. 네모 선장이 여자였다면…. 그러면 안 될 이유는 없습니다. 대학 교수 일행이나 순양함 승무원들과 달리 노틸러스 승무원들은 작가가 상상한 결과입니다. 승무원들이 여자들이거나 잠수함 선장이 여자이면 안 될 이유는 없죠. 네모 선장이 여자였다고 해도 권위를 잃지 않았을 겁니다.



<신비의 섬>은 어떨까요. <신비의 섬>은 인류의 미래와 과학적인 진보와 이성과 논리와 단결된 노동을 찬양하는 유토피아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무인도에서 생존자들이 살아남는 표류 이야기이나, <로빈슨 크루소> 같은 소설과 달라요. <신비의 섬>에서 생존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생존자들이 작은 문명을 건설하는 과정이고, 인류 문명의 미래를 논의하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신비의 섬>은 SF 분위기를 풍깁니다. 쥘 베른은 SF 작가다운 전망을 빠뜨리지 않았어요.


하지만 유토피아 소설임에도 <신비의 섬>은 남자들만의 유토피아입니다. 여자 등장인물은 없습니다. 만물 박사와 신문 기자와 선원과 흑인 하인과 박물학 소년은 모두 남자입니다. 아마 사냥개와 오랑우탄 역시 수컷인 것 같습니다. 생존자들은 이성적이고 단결된 작은 문명을 세웠으나, 여기에 여자는 끼어들지 못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인류의 절반이 여자라고 말합니다. 만약 작가가 유토피아 소설을 쓰고 싶다면, 당연히 인류의 절반에게 자리를 할애해야 하지 않을까요. 왜 <천년 홀과 주변국 묘사>나 <에코토피아 뉴스>, <뒤 돌아보며> 같은 유토피아 소설들이 그렇게 여자들의 위상을 설명하느라 애썼을까요.



<지구 속 여행>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모험을 제공하는 동기입니다. 그저 그럴 뿐입니다. 여자를 생각하며 남자는 모험을 떠나고, 여자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신나고 아슬아슬한 모험은 남자들의 몫이고, 여자는 그저 고향에서 남자를 기다리는 역할입니다. 이는 아서 코난 도일이 쓴 <잃어버린 세계> 역시 다르지 않아요. <잃어버린 세계>에서 주인공 신문 기자는 명성을 떨치기 원합니다. 신문 기자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그걸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문 기자는 공룡들을 찾아 모험을 떠나고, 아가씨는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공룡 탐사대를 이루는 두 교수와 귀족 사냥꾼과 신문 기자 네 사람은 모두 남자입니다. <잃어버린 세계>는 19세기 소설이고, 이런 공룡 탐사대에서 여자들이 활약하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실존했던 열대 밀림 탐험가들을 살펴본다면, 여자들이 극소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원양 항해나 열대 밀림 탐험은 남자들의 몫이었습니다. 알렉산더 훔볼트나 알프레드 월레스나 찰스 다윈은 남자죠. 여자 탐험가들이 없지 않았으나, 비중은 별로 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숱한 탐험가들이나 항해자들 역시 남자들입니다.



허버트 웰즈는 사회주의자이고 (19세기에서) 꽤나 좌파적인 인물입니다. 허버트 웰즈는 여자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그렸을까요. <타임 머신>, <우주 전쟁>, <모로 박사의 섬>, <투명 인간> 같은 소설들에서 작가는 적극적으로 여자들을 그렸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남자이고, 중요한 등장인물들은 남자들이고, 여자는 그저 조연에 불과합니다. 미래로 날아가는 시간 여행자와 화성 삼발이를 목격하는 시민과 기괴한 동물 왕국을 만드는 박사와 투명 물약을 마시는 과학자는 모두 남자입니다. 그들이 마주치는 다른 등장인물들 역시 남자들입니다.


<타임 머신>에서 위나는 주목을 받을 인물입니다. 위나는 시간 여행자를 유일하게 도와주는 엘로이고, 시간 여행자와 함께 또 다른 축을 맡습니다. 그래서 <타임십>을 썼을 때, 스티븐 백스터는 위나를 찾기 위해 시간 여행자를 다시 미래로 보냈겠죠. 하지만 위나는 꽤나 가련한 인물입니다. 독자가 유일하게 주목할 수 있는 여자 인물이 가련한 상황….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자가, 특히 그 여자가 남자 주인공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면, 그 여자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건 남자 주인공이 각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위나는 그런 역할인 것 같습니다.



아마 이렇게 계속 19세기 SF 소설들을 줄줄이 읊을 수 있을 겁니다. 비단 SF 소설만 아니라 공포나 추리 소설들을 읊을 수 있겠죠. 하지만 유명한 19세기 등장인물들은 남자들입니다. 셜록 홈즈와 존 왓슨, 드라큐라와 아브라함 반 헬싱처럼. 아이린 애들러는 꽤나 인상적인 역할을 맡았으나, 단막극의 주인공일 뿐이었습니다. 허드슨 부인은 감초 역할이나, 작가는 허드슨 부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사실 셜록 홈즈를 좋아하는 골수 독자라고 해도, 허드슨 부인이 누구인지 자세히 알지 못하죠.


<드라큐라>는 똑똑한 신여성을 이야기하나, 신여성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파고들지 않습니다. 미나 하커조차 남자처럼 똑똑한 여자일 뿐입니다. 그냥 똑똑한 여자가 아니라 남자처럼 똑똑한 여자입니다. 이건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가장 현명하고 이성적인 반 헬싱의 입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소설 속에서 반 헬싱은 흡혈귀와 대적할 수 있는 현명하고 이성적인 인물이나, 동시에 남자처럼 똑똑한 여자를 지껄이는 인물이죠. 반 헬싱이 다소 괴팍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고 해도, 저는 저런 발언을 그냥 지나가지 못하겠습니다. 뭐, 계집애처럼 겁이 많다는 표현 역시 21세기 현재까지 사라지지 않았어요.



SF 소설은 과학자나 철학자, 탐험가를 내세우는 소설입니다. 적어도 <프랑켄슈타인>, <해저 2만리>, <타임 머신>, <잃어버린 세계>,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은 소설들은 그렇습니다. <바스커빌 가문의 사냥개>나 <드라큐라> 같은 장르 소설 역시 탐정이나 의사 같은 인물을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과학자, 철학자, 탐험가, 탐정, 의사 등은 남자들의 몫이었습니다. 철학 사전을 찾아본다면, 사람들이 존경하는 숱한 철학자들이 남자들임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같은 사례가 존재하나, 사회주의 철학자들 역시 다르지 않아요.)


과학 역사에서 자연 과학자들 역시 남자들이었습니다. 21세기 지금까지 여자 과학자는 차별 대상입니다. 하버드 같은 세계 최고의 대학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형사나 의사를 더 말할 필요는 없겠죠. 왜 과학자들, 철학자들, 탐험가들은 남자들일까요. 왜 여자들은 별로 비중이 없었을까요. 왜? 여자들이 멍청하기 때문에? 반 헬싱이 말한 것처럼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멍청하기 때문에? 그건 아닙니다. 여자들은 투표권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했습니다. 사실 시민 취급을 받지 못했어요. 여자들은 노예나 유색 인종과 다르지 않았죠. 흑인들이 멍청하기 때문에 노예가 되었나요? 멍청하기 때문에 원주민들이 학살을 당했나요?



저는 이 문제를 그저 성별 문제로 취급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별 역시 중요한 문제이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여자는 흑인 노예나 식민지 원주민과 별로 다르지 않았어요. 물론 유럽 여자들은 그들보다 사정이 나았으나, 유럽 여자들조차 정식적인 시민이 아니었죠. 따라서 이건 계급 문제에 가깝습니다. 사회 구조가 매우 불평등하기 때문에 여자들 역시 제대로 자립하지 못했습니다. 사회 구조가 불평등하기 때문에 여자들은 자립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만약 여자들에게 혼자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이 있었다면, 여자들은 자립할 수 있고, 유명한 과학자나 철학자나 탐험가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는 그렇게 한탄했겠죠.)


과학자나 탐험가는 절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과학자나 탐험가는 사회 구조에서 나옵니다. 노동자들이 원양 범선을 만들지 않는다면, 탐험가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합니다. 노동자들이 원양 범선이나 증기선을 만들지 않았다면, 월레스고 다윈이고 나발이고 아무 데도 가지 못했을 겁니다. 19세기 SF 작가들은, 미래를 바라보고 우주를 바라보는 작가들은 그런 사회 구조에 주목했을까요.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물론 작가들이 무조건 그런 사회 구조를 소설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작가들에게 그런 의무는 없습니다. 어떤 소설이 반드시 그 시대의 가장 커다란 억압과 계급 수탈을 묘사할 의무는 없어요. 게다가 저는 몇몇 소설만 언급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소설들이 대표적이라고 해도, 그건 결과론적이죠. 고작 몇몇 소설만 결과론적으로 이용해 19세기 소설들을 전반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그건 오류일 겁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신비의 섬> 같은 소설이 너무 단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은 현실이 이루지 못하는 뭔가를 상상할 수 있어요. 소설은 현실보다 더욱 급진적으로 나갈 수 있죠. 저는 작가들이, SF 작가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우주나 외계 문명을 논의해도, 그건 현실에 밀착하지 않는 신선 놀음에 불과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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