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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장르 실재론과 장르 명목론, 그리고 발생 흐름 본문

SF & 판타지/장르 정의

장르 실재론과 장르 명목론, 그리고 발생 흐름

OneTiger 2019. 10. 8. 20:18

사회와 개인. 흔히 사람들은 두 가지가 대립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이 너무 커진다면, 이건 공동체 질서를 흐트러뜨릴 겁니다. 사회가 너무 강해진다면, 사회는 개인 권리와 자유를 침해할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개인과 사회를 논의할 때, 사람들은 사회 실재론과 사회 명목론을 나눕니다. 사회 실재론은 개인보다 사회를 중시합니다. 사회는 실재하고, 사회는 그저 개인들의 총합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동물학자가 꿀벌 무리를 유기체라고 간주하는 것처럼, 사회 역시 유기체가 될 수 있습니다. 열 사람들이 사회를 구성한다고 해도, 열 사람들보다 사회는 거대합니다. 열 사람들 외부에서 사회는 존재합니다.


사회가 거대하기 때문에, 사회는 개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개인은 사회적인 영향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윤리를 찾는다고 해도, 이건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 되지 못합니다. 이렇게 사회 실재론은 개인보다 사회를 강조합니다. 반면, 사회 명목론은 문자 그대로 사회가 그저 명목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중요한 것은 개인입니다. 사회는 공허합니다. 오직 국어 사전 속에서만 사회는 존재할 뿐이고, 현실 속에는 사회가 없습니다. 사회는 비가시적이고, 사람들은 사회가 무엇인지 실체를 찾지 못합니다. 사회적인 문제는 그저 개인 문제에 불과합니다.



사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보다 개인이 중요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윤리와 도덕은 사회를 바꿀 수 있습니다. 개인들이 윤리와 도덕을 고민한다면, 사회 문제들은 사라질 겁니다. 개인은 가시적입니다. 하지만 사회는 비가시적입니다. 우리는 개인을 가리킬 수 있으나, 어디부터 어디까지 사회인지, 우리는 확실하게 가리키지 못합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논의하는 동안, 기준은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회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회보다 개인은 기준이 되어야 할 겁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논의하는 동안, 우리는 사회보다 개인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우리가 개인적인 문제들을 해결한다면, 이건 세상을 훨씬 낫게 만들 겁니다.


사회 실재론과 달리, 이렇게 사회 명목론은 개인들을 강조합니다. 이런 대조는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대조보다 초보적이고 대중적인 대조입니다. 이런 대조는 사회 실재론과 사회 명목론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않습니다. 사회학자들이 사회 실재론을 주장할 때, 내용은 훨씬 복잡해질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대조가 '사회 실재론 vs. 사회 명목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회 실재론 vs. 사회 명목론' 논의에서 대부분 결론들은 "중요한 것은 조화이다."입니다. 사회 실재론과 사회 명목론에 모두 장점과 단점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회 실재론과 사회 명목론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와 개인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결론에는 아주 커다란 문제 하나가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사회 실재론과 사회 명목론을 논의하기 시작했나요? 왜 우리가 이것을 논의하나요? 인류 문명이 나타났을 때부터, 고대 문명 사람들부터 사회와 개인을 논의했나요? 3세기 사람들, 8세기 사람들, 13세기 사람들, 18세기 사람들 역시 이것을 논의했나요? 18세기 서구 문명에는 이런 논의들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18세기 인류 문명에게 사회와 개인이 아주 보편적인 논의 대상이었나요? 18세기 모든 인류 문명이 사회 실재론과 사회 명목론을 논의했나요? 우리는 개인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게 절대적인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어떻게 우리가 이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나요?


흔히 우리가 어떤 문제를 논의할 때, 우리는 어떻게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파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갑자기 문제가 뚝 떨어졌다고 인식합니다. 우리는 그 자체로서 문제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20세기의 가장 거대한 비극을 바라볼 때조차, 우리는 그 자체로서 비극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 인류 문명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가장 거대한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소비에트 연방이 사회주의 노선에서 크게 벗어났거나 소비에트 연방이 그저 국가 자본주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나, 만약 우리가 소비에트 연방을 사회주의 국가라고 간주한다면, 20세기 인류 문명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가장 거대한 사회주의 국가가 됩니다.



비단 20세기 인류 문명만 아니라 인류 문명 전체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가장 거대한 사회주의 국가일 겁니다.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은 아주 관료적이고 중앙 집중적입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엄청난 문제들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가 틀렸다고 힐난합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관료적이고 중앙 집중적이고 골칫덩이 국가가 되었고, 이건 마르크스주의가 틀렸다는 뜻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옳다고 믿습니다. 심지어 진보 지식인들, 페미니스트들, 환경 운동가들 역시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옳다고 믿습니다. 이런 페미니스트들은 "마르크스주의는 틀렸다! 페미니즘은 킹왕짱이야!"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페미니즘을 실천하기 위해 이런 페미니스트들은 '여자 대통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을 찍습니다. '여자 대통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이 대기업들을 편애하고, 대기업들이 온실 가스를 뿜고, 기후 변화를 부채질하고, 기후 변화 속에서 제3세계 여자들이 개고생한다고 해도, 자칭 페미니스트들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힐러리 클린턴은 치마를 입고, 자칭 페미니스트들에게 이건 가장 중요한 사실이 됩니다. 이런 대단한 페미니스트들 덕분에,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은 화끈한 기후 변화로 나가는 중입니다. 자칭 페미니스트들은 하늘에서 소비에트 연방과 다른 많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뚝 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게 사실인가요?



만약 마르크스주의가 틀리지 않았다면, 왜 소비에트 연방이 관료적이고 중앙 집중적이고 억압적인 골칫덩이 독재 국가가 되었나요? 대답은 자본주의 강대국들입니다. 20세기 인류 문명에서 가장 거대한 비극은 2차 세계 대전입니다. 아무리 20세기가 산만한 시대였다고 해도, 무수한 사람들은 20세기 인류 문명에서 가장 거대한 비극이 2차 세계 대전이라고 동의할 겁니다. 어느 지역에서 가장 거대한 비극, 2차 세계 대전이 터졌나요? 대답은 자본주의 지역입니다. 자본주의 지역 유럽은 비단 2차 세계 대전만 아니라 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습니다. 세계 대전은 어린 아이 장난이 아닙니다. 세계 대전은 그저 시끄러운 사건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아주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나, 자본주의 지역 유럽은 무려 두 번이나 세계 대전을 일으켰습니다. 반면, 사회주의 지역에서는 세계 대전이 단 한 번도 터지지 않았습니다. 자본주의 지역은 무려 두 차례나 세계 대전을 일으켰고, 2차 세계 대전은 가장 거대한 20세기 비극입니다. 비록 사회주의 지역이 단 한 번도 세계 대전을 일으키지 않았음에도, 오히려 우리는 자본주의 지역보다 사회주의 지역을 욕합니다. 우리는 사회주의 지역을 악마화합니다.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은 1917년 사건이고, 1차 세계 대전은 20세기 초반 사건이고, 2차 세계 대전은 20세기 중반 사건입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샌드위치와 비슷합니다.



샌드위치처럼,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 사이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끼었습니다. 양쪽에서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은 소비에트 연방을 압박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20년도 지나지 않은 혼란스러운 신생 국가였습니다. 양쪽에서 두 세계 대전이 이런 신생 국가를 압박한다면, 이런 국가가 멀쩡하게 굴러갈 수 있나요? 이건 지나친 기대와 낭만적인 환상입니다. 만약 소비에트 연방이 엉망진창이 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건 이상할 겁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이건 아주 당연한 현상입니다. 이런 엉망진창 상황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파쇼주의를 몰아냈고 유럽 문명을 "위 아 더 나치 월드~♬"에서 구원했습니다.


이런 엉망진창 상황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식민지 독립 운동들을 지원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이 제3세계들을 지원하지 않았다면, 제3세계들이 목소리들을 높일 수 있었을까요? 프란츠 파농과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인지도를 높일 수 있었을까요? 만약 제3세계들이 주목을 받지 못했다면, 오늘날에 반다나 시바 같은 남반구 운동권이 주목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아무리 상황이 엉망진창이었다고 해도, 소비에트 연방은 놀라운 복지 수준을 보여줬습니다. 여러 측면들에서 21세기 자본주의보다 소비에트 연방은 나았습니다. 게다가 만약 소비에트 연방이 자본주의 진영을 견제하지 않았다면, 정말 북유럽 국가들이 복지 정책들을 실현할 수 있었을까요?



혼란스러운 혁명을 거치고 고작 20년조차 지나지 않은 신생 국가가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이라는 가장 거대한 비극에 부딪혔음에도, 이런 신생 국가가 파쇼주의를 몰아냈고, 유럽 문명을 구원했고, 식민지 독립 운동들을 지원했고, 상당한 복지 수준을 보여줬다면, 오히려 우리는 소비에트 연방을 칭찬해야 마땅할 겁니다. 이게 정말 굉장하지 않습니까? 만약 우리가 인류 문명에서 가장 혁신적인 국가를 꼽는다면, 우리는 소비에트 연방을 꼽아야 할지 모릅니다. 이건 소비에트 연방이 100% 잘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소비에트 연방에는 너무 심각하고 엄청난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소비에트 연방을 강력하게 비판해야 합니다. 아무리 소비에트 연방에게 장점들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이것들을 미화해서는 안 됩니다. 쿨타임이 돌아올 때마다, 우리는 이오시프 스탈린과 코민테른 고위층이 엄청난 학살들을 저질렀고 엄청난 실책들을 저질렀다고 제깍제깍 까야 합니다. 하지만 쿨타임 때마다 우리가 비판한다고 해도, 우리는 '자본주의가 엉망진창 상황을 만들었다'고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소비에트 연방을 제대로 비판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숱한 보수 우파 지식인들과 얄팍한 진보 지식인들은 소비에트 연방을 제대로 비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의 유일하게 마르크스주의는 왜 소비에트 연방이 엉망진창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마르크스주의가 하늘에서 갑자기 소비에트 연방이 뚝 떨어지지 않았다고 파악하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인류 문명에서 갑자기 뭔가가 번쩍 나타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건 망상입니다. 인류 문명에는 흐름, 발생 원인, 과도기, 생산 조건이 있습니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조차 절대적인 논리 법칙이 아닙니다. 인류 문명에서 다른 수많은 현상들과 이론들과 사건들처럼, 마르크스주의는 그저 시대적인 산물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어떤 커다란 현상을 파악할 때, 우리는 흐름, 발생 원인, 과도기, 생산 조건을 파악해야 합니다.


사회 실재론과 사회 명목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사회 실재론과 사회 명목론을 논의할 때, 대부분 결론들은 "조화가 중요하다."입니다. 이런 결론들은 흐름, 발생 원인, 과도기, 생산 조건을 파악하지 않습니다. 14세기 서구 사람들이 사회 명목론을 이야기했나요? 그들이 개인과 사회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나요? 만약 그들이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그들과 달리, 왜 우리가 사회 실재론과 사회 명목론을 이야기하나요? 하늘에서 갑자기 사회 실재론과 사회 명목론이 뚝 떨어졌나요? 허공에서 갑자기 사회 실재론과 사회 명목론이 번쩍 나타났나요? 우리는 개인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정말 그 자체로서 개인의 자유가 중요한가요? 허공에서 이런 생각이 번쩍 나타났나요?



SF 팬들은 이런 시각을 사이언스 픽션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실재인가요, 아니면 명목인가요? 많은 작가들, 독자들, 평론가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을 정확하게 규정하기는 힘듭니다. 어쩌면 이건 거의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사이언스 픽션은 그저 명목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오직 백과 사전 속에서만 사이언스 픽션은 존재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SF 실재론은 이런 명목론에 반대하고 사이언스 픽션이 실재라고 주장할 겁니다. SF 실재론은 사이언스 픽션을 정확하게 규정하지 못하나, 분명히 SF 팬들은 무엇이 사이언스 픽션인지 '느낄' 수 있습니다. SF 실재론은 많은 독자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느낀다'고 주장합니다.


마가렛 앳우드가 쓴 <홍수>와 차이나 미에빌이 쓴 <상흔>과 킴 스탠리 로빈슨이 쓴 <오로라>는 생태학 SF 장르에 속합니다. 이런 소설들이 생물 다양성, 생체 개조, 먹이 그물망, 기이한 동물상과 식물상에 커다란 비중을 할애하기 때문입니다. 세 소설들보다 생태학 SF 장르는 거대하고, 세 소설들 외부에서 생태학 SF 장르는 존재합니다. 비디오 게임 <서브노티카>와 <니치>와 <블록후드> 역시 여기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반면, SF 명목론은 많은 독자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느낀다'고 해도 이게 그저 느낌에 불과하다고 반박할 겁니다. 독자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개념으로서만 사이언스 픽션은 존재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개념을 벗어나고 실재가 되지 못합니다. 생태학 SF 장르는 그저 허울에 불과합니다. 소설 <홍수>와 <상흔>과 <오로라>와 비디오 게임 <서브노티카>와 <니치>와 <블록후드>가 모인다고 해도, 이것들은 장르를 형성하지 않습니다. SF 명목론은 생태학 SF 장르보다 개별적인 소설들과 게임들에 주목합니다. SF 실재론은 여기에 반박할 겁니다. SF 명목론은 다시 반박할 테고, SF 실재론과 SF 명목론은 끝없이 싸울 겁니다. 비단 사이언스 픽션만 아니라 판타지를 비롯해 다른 장르들 역시 실재론과 명목론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SF 팬들이 실재론과 명목론을 논의한다고 해도, SF 팬들은 흐름, 발생 원인, 과도기, 생산 조건을 파악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골칫덩이 소비에트 연방이 뚝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불쑥 솟거나, 허공에서 번쩍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실재론과 명목론보다 흐름, 발생 원인, 과도기, 생산 조건은 우선합니다. SF 팬들이 실재론과 명목론을 논의하고 싶다면, SF 팬들은 "어떻게 사이언스 픽션이 나타나기 시작했는가?"라고 함께 물어야 할 겁니다. 아무리 <상흔>이 판타지 같다고 해도, 19세기 이전 사변 문학들은 구식 잠수함과 산업 도시와 둔클레오스테우스를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19세기 이전에도 사변 문학들은 존재했으나, 이런 사변 문학들은 사이보그 여자가 성 노예를 비판하고 성 해방 운동권에 뛰어든다고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소설 <홍수>와 <상흔>과 <오로라>와 비디오 게임 <서브노티카>와 <니치>와 <블록후드>가 장르를 형성할 수 있나요? 이런 소설들과 게임들이 생태학 SF 장르를 형성할 수 있나요? 이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개들을 끄덕일 테고, 어떤 사람들은 이의를 제기할 겁니다. 하지만 분명히 세 소설들과 세 게임들에서 생태적인 상상력은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이런 생태적인 상상력은 19세기 서구 근대화에서 비롯했습니다. 서구 근대화 이전에도 신화와 전설을 비롯해 사변 문학들은 생태적인 상상력을 보여줬으나, 이런 문학들은 생태학과 진화 이론과 유전 공학을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홍수>와 <블록후드> 같은 소설들 및 게임들에서 생태적인 상상력은 오직 생태학, 진화 이론, 유전 공학만 떠들지 않습니다. 생태적인 상상력은 자본주의 비판, 평등한 공동체, 성 해방 운동, 동물 권리로 이어집니다. 이런 소설들 및 게임들에서 생태학은 '평등'을 포괄합니다. 이미 19세기 서구 근대화에서 해방과 저항 철학들과 함께 생태학과 진화 이론이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19세기~20세기 초반 여러 저작들은 이런 선구적이고 생태적인 상상력들을 보여줍니다. 이런 상상력들은 <홍수>와 <블록후드>로 이어집니다. 이런 연장선 위에서 <홍수>와 <블록후드>는 나타납니다. <블록후드>는 고정적인 개체가 아닙니다.



[20세기 초반과 21세기 초반에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은 이런 모습들이었습니다. 그 다음이 무엇일까요?]



SF 팬들이 <블록후드>를 바라볼 때, SF 팬들은 비단 <블록후드>만 아니라 이런 발생 흐름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서 <블록후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블록후드>는 고정적인 개체가 아닙니다. 유동적인 흐름 속에서, 지속적인 변화 속에서,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서 <블록후드>는 존재합니다. 어쩌면 <블록후드>는 후배 사이언스 픽션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100년, 200년, 300년 이후, 이런 연장선 위에서 새로운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은 나타날지 모릅니다. 심지어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은 완전히 새로운 뭔가가 될지 모릅니다.


비록 SF 명목론이 옳고, 생태학 SF 장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분명히 이런 발생 흐름은 존재합니다. 어쩌면 생태학 SF 장르는 이런 발생 흐름을 가리킬지 모릅니다. (어쩌면 비단 이런 논의만 아니라 많은 학문 분야들에서 실재론과 명목론은 "어떻게 이것이 나타나기 시작했는가?"라고 함께 물어야 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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