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빼앗긴 자들>과 생체 우주선, 고유한 SF 색깔 본문
[SF는 다른 것들과 비슷하거나 다릅니다. SF 평론가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을 썼습니다. '레 미제라블'은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왜 그들이 불행한가요? 여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습니다. 가난 역시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아니, 가난은 아주 커다란, 아주 핵심적인 이유일 겁니다. 가난 때문에, 팡틴은 불행해지고, 팡틴이 불행한 사람들을 대표하는 것처럼, 가난은 핵심적인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뮤지컬 판본은 노래 <I Dreamed a Dream>을 강조할 겁니다. 가난은 육체를 짓밟고, 영혼을 부수고, 인생을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뜨립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불행들이 있으나, 가난은 정말 지배적이고 대표적인 불행입니다.
하지만 왜 사람들이 가난해지나요? 왜 가난이 나타납니까?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설명하는 것처럼, 개인이 나태하기 때문에? 개인에게 아무 재능이 없기 때문에? 하지만 18~19세기 서구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은 죽도록 일했습니다. 하루 종일 그들은 일해야 했습니다. 어린 소녀부터 건장한 아재까지, 수많은 노동자들은 계속 일했습니다. 심지어 작업장은 무덤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노동자들이 죽도록 일했음에도, 그들은 가난했습니다. 노동자들이 죽도록 일했음에도, 그들은 밑바닥 사람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틀렸습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헛소리를 떠듭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똑똑한 척하나, 그들은 그저 꽥꽥거리고 헛소리를 씨불거릴 뿐입니다. 지배적이고 살인적인 가난에서 나태는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만약 나태가 이유가 아니라면,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요? 사람들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사람들은 식량을 생산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식량은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연 환경을 가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고구마를 심고, 꿀벌들을 치고, 버섯을 따고, 물고기를 낚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자연 환경에 기반합니다. 꿀벌들이 야생 꽃들에게 크게 의지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는 자연 환경이 필요합니다.
아마존 밀림 인디언 소녀부터 북극 이누이트 할머니까지, 모든 인간에게는 자연이 필요합니다. 예외 없이,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하고, 먹고 살기 위해 인간은 자연 환경을 가공해야 합니다. 아무리 포스트 모더니즘이 상대성을 열심히 떠든다고 해도,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하지만 자연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18~19세기 서구에서 지배 계급은 자연 환경을 차지합니다. 사람들은 자연 환경을 평등하게 차지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지배 계급은 농지에서 농민을 내쫓고 농지를 차지합니다. 농민은 억지로 노동자가 되어야 하나, 노동자들은 작업장을 평등하게 차지하지 못합니다. 지배 계급은 작업장을 차지합니다.
지배 계급이 작업장을 차지하기 때문에, 지배 계급은 잉여 생산물들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자연 환경, 작업장 같은 생산 수단이 개인 소유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잉여 생산물들을 압도적으로 차지하고, 누군가는 고작 푼돈 따위를 받습니다. 생산 수단이 개인 소유이기 때문에, 대대적인 가난은 나타납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본가 계급은 자연 환경을 독차지하나, 수많은 민중들은 감히 자연 환경에 손대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연 환경이 필요함에도, 오직 거대 자본가 계급만 압도적인 자연 환경을 차지합니다. 심지어 자본가 계급은 행성급 환경 오염을 일으킵니다.
자본가 계급이 행성급 환경 오염을 일으킴에도, 행성급 환경 오염이 농업, 어업 같은 1차 산업에 막대한 피해를 끼침에도, 사람들은 그저 굶주릴 뿐입니다. 자연 환경이 지배 계급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자연 환경은 지배 계급 소유, 개인 소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연 환경은 사회적인 공유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슐라 르 귄은 '빼앗긴 사람들'을 썼을 겁니다. '빼앗긴 사람들'은 '소유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소유는 개인 소유를 가리킵니다.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소유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공유합니다. 사회적인 공유는 착취와 수탈과 억압을 막습니다.
사회적인 공유가 가난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다고 해도, 분명히 개인 소유는 억압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연 환경이 필요하기 때문에, 개인 소유는 억압입니다. 그래서 '레 미제라블'과 '빼앗긴 사람들'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레 미제라블'과 '빼앗긴 사람들' 사이에는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만약 문학 평론가가 여기에 주목한다면, 문학 평론가는 어떻게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개인 소유를 강요하고 어떻게 자본주의 속에서 사람들이 굶주리는지 비판할 수 있을 겁니다. 문학 평론가는 아주 길다란 논문을 쓰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개인 소유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문학 평론가는 장문을 쓰고 평등한 공유 사회가 필요하다고 외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SF 독자는 한 가지를 물을지 모릅니다. 소설 <빼앗긴 자들>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빼앗긴 자들>이 SF 소설이기 때문에, 만약 문학 평론가가 <레 미제라블>과 <빼앗긴 자들>을 비교하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하고, 공유 사회를 주장한다면, 이런 논문이 SF 평론이 될 수 있나요? <빼앗긴 자들>이 SF 소설이기 때문에, 만약 문학 평론가가 아주 길다란 논문을 쓴다면, 아주 길다란 논문이 SF 평론이 될 수 있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레 미제라블>, 18~19세기 서구 사회, 내부 식민지 수탈, 개인 소유, 자본가 계급, 생산 수단과 자연 환경, 식량 노동, 공유 사회에는 SF 요소가 없습니다. 이런 논문은 SF 평론이 절대 되지 못할 겁니다.
이건 너무 이상합니다. <빼앗긴 자들>은 SF 소설입니다. 문학 평론가는 <빼앗긴 자들>을 분석하고 아주 길다란 논문을 씁니다. <빼앗긴 자들>이 SF 소설이기 때문에, 아주 길다란 논문은 SF 평론이 되어야 하나, 이건 SF 평론이 아닙니다. 왜 이게 SF 평론이 아닌가요? 평론가가 SF 요소들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변(speculative)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비일상적인 것을 상상합니다. 사변 소설, SF 소설로서 <빼앗긴 자들>에는 외계 식생, 외계 물고기, 우주선, 앤서블 같은 비일상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길다란 논문에서 문학 평론가는 이것들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주 길다란 논문이 <빼앗긴 자들>을 열심히 떠든다고 해도, 아주 길다란 논문은 SF 평론이 되지 못합니다. <빼앗긴 자들>은 사이언스 픽션이나, <빼앗긴 자들>에는 오직 SF 요소만 있지 않습니다. <빼앗긴 자들>은 소설입니다. <빼앗긴 자들>은 가난과 빈곤을 이야기합니다. <빼앗긴 자들>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빼앗긴 자들>은 여자 작가 문학입니다. <빼앗긴 자들>은 영어 매체입니다. <빼앗긴 자들>에는 이런 것들 이외에 다른 여러 측면들이 있습니다. 여러 측면들 중에서 문학 평론가는 다른 무엇보다 가난과 빈곤, 사회적인 공유에 초점을 맞추고 길다란 논문을 씁니다. 길다란 논문은 SF 평론이 아닙니다.
비단 <빼앗긴 자들>만 아니라 다른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에는 우주 함선이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가 함선을 신나게 떠든다고 해도, 이게 SF 이야기가 되나요? 게임 플레이어가 함선 비용이나 함선 운영 전술이나 함포 피해 계산을 떠든다고 해도, 이게 SF 이야기가 되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일반적인 전략 게임에도 함선 비용, 함선 운영 전술, 함포 피해 계산이 있을 겁니다. 심지어 중세 판타지 게임 역시 함선 비용, 함선 운영 전술, 함포 피해 계산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에 우주 함선이 나온다고 해도, 그 자체로서 우주 함선은 SF 요소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우주 함선은 생체 우주선입니다. 우주 함선은 생태주의 세력에 속합니다. 생태주의 세력이 자연 생태계를 연구하기 때문에, 그들은 생물 다양성을 결합하고, 합성 생명체들을 인공적으로 진화시키고, 생체 우주선을 건조할 수 있습니다. 생체 우주선에게는 끈질긴 생명력이 있고, 생체 우주선은 자체적으로 치유할 수 있습니다. 거대 괴수들이 끈질긴 생명력으로 자체적으로 치유하는 것처럼, 생체 우주선 역시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여기에 주목한다면, 이건 SF 이야기가 될 겁니다. 생체 우주선은 사변입니다. 생체 우주선은 비일상적인 요소입니다. 현실에서 생태주의 세력은 생체 우주선을 건조하지 않습니다.
문학 평론가가 <빼앗긴 자들>과 <레 미제라블>을 비교하고 오직 사회적인 공유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가 인공 진화 과정을 간과하고 오직 함선 운영 방법만 떠드는 것처럼,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이용해 비(非)SF를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어제 11월 18일 게시글에서 이웃집 영희는 세 강의 과제들을 작성했습니다. 하지만 세 강의 과제들은 구조적/형식적으로 비슷합니다. 세 강의 과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계몽주의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18세기 서구 진보적인 사상으로서 계몽주의가 신보다 인간에게 초점을 맞춘다고 말한다. 서구 근대화는 계몽주의 시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장 자크 루소와 아이작 뉴턴은 계몽주의 지식인을 대표한다. 하지만 어디부터 어디까지, 계몽주의 시대인가? 장 자크 루소와 찰스 다윈이 확실히 다른가? 아니면 루소와 다윈이 비슷한가? 사람들은 의미들을 임시적으로 부여한다. 계몽주의 지식인은 고정적이지 않다."
"마르크스주의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과학적인 사회주의로서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서구 근대화는 마르크스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한다. 하지만 어디부터 어디까지, 마르크스주의인가? 로자 룩셈부르크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확실히 다른가? 아니면 로자와 체가 비슷한가? 사람들은 의미들을 임시적으로 부여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고정적이지 않다."
"사이언스 픽션이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사변 장르로서 사이언스 픽션이 서구 근대화를 이용해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펼친다고 말한다. 서구 근대화는 사이언티픽 로망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메리 셸리, 허버트 웰즈, 쥘 베른은 사이언스 픽션을 대표한다. 하지만 어디부터 어디까지, 사이언스 픽션인가? 메리 셸리 소설과 영화 <고지라: 괴수왕>이 확실히 다른가? 아니면 두 소설과 영화가 비슷한가? 사람들은 의미들을 임시적으로 부여한다. 사이언스 픽션은 고정적이지 않다."
이렇게 세 과제들은 구조적/형식적으로 비슷합니다. 파란색 문단은 계몽주의 시대를 말하고, 적갈색 문단은 마르크스주의 계보를 그리고, 녹색 문단은 SF 장르를 분류합니다. 하지만 계몽주의 시대, 마르크스주의 계보, SF 장르 과제들은 구조적/형식적으로 비슷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까? 아이작 뉴턴과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와 메리 셸리가 다름에도, 왜 계몽주의 시대, 마르크스주의 계보, SF 장르 과제들이 구조적/형식적으로 비슷해지나요? 이웃집 영희가 SF 요소들보다 분류 체계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SF 장르 과제에서 이웃집 영희는 SF 그 자체보다 분류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만약 이웃집 영희가 장 자크 루소, 아이작 뉴턴, 로자 룩셈부르크,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메리 셸리, 허버트 웰즈, <고지라: 괴수왕> 같은 단어들을 바꾼다면, 세 강의 과제들은 차이를 드러내지 못할 겁니다. 심지어 이웃집 영희는 이런 형식을 다른 분류들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온갖 분류 체계들이 있고, SF 장르 분류와 이것들은 구조적/형식적으로 별로 다르지 않을지 모릅니다. 문학 평론가가 <빼앗긴 자들>을 자세히 분석한다고 해도, 이게 비(非)SF 평론인 것처럼, 이웃집 영희는 메리 셸리와 허버트 웰즈와 영화 <고지라: 괴수왕>을 이용해 얼마든지 비(非)SF를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문학 평론가가 길다란 논문을 쓰고 <빼앗긴 자들>을 평가한다고 해도, 이건 SF 평론이 아닐지 모릅니다. 아무리 게임 플레이어가 신나게 우주 함선을 떠든다고 해도, 이건 SF 이야기가 아닐지 모릅니다. 아무리 이웃집 영희가 SF 장르를 고민한다고 해도, 이건 SF 장르 규정이 아닐지 모릅니다. 그래서 강사는 이웃집 영희 과제에 A+를 주지 않을지 모릅니다. 만약 이웃집 영희가 좋은 점수를 받기 원한다면, SF 장르와 계몽주의 시대와 마르크스주의 계보 과제들은 달라져야 합니다. 만약 SF 장르와 계몽주의 시대와 마르크스주의 계보 과제들이 달라져야 한다면, 이웃집 영희는 SF 장르에 고유한 색깔을 집어넣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웃집 영희가 고유한 색깔을 집어넣을 수 있나요? 사이언스 픽션에서 사변, 비일상적인 요소는 가장 중요합니다. 계몽주의는 비일상적인 요소를 말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비일상적인 요소를 경계합니다. 비일상적인 요소가 낭만적인 유토피아로 흘러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계몽주의 및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사이언스 픽션은 비일상적인 요소를 재미있게 떠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집 영희는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언급합니다. 현실 속에는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하기 위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없고, 그래서 이웃집 영희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강조한다면, 이건 SF 장르 규정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앗,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고대 방주 설화와 비슷합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는 내부 생태계가 있습니다. 고대 방주에도 내부 생물 다양성이 있습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합니다. 새로운 땅에서 고대 방주 역시 생물 다양성을 퍼뜨립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소설과 고대 방주 설화는 구조적/형식적으로 비슷해질 수 있습니다. 아이고, 이웃집 영희는 다시 위기에 빠졌습니다. 만약 이웃집 영희가 어떻게 외계 행성 테라포밍 소설과 고대 방주 설화가 다른지 분석하지 않는다면, 강사는 좋은 점수를 주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고대 방주가 다른가요?
다행히 이웃집 영희는 단서를 찾습니다. 세 강의 과제들은 공통적으로 '서구 근대화는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합니다. 서구 근대화는 사이언티픽 로망스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계몽주의와 사이언스 픽션과 마르크스주의는 다릅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서구 근대화는 계몽주의와 사이언스 픽션과 마르크스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것 역시 사실입니다. 비록 이웃집 영희가 분류 방법에 초점을 맞췄다고 해도, 이웃집 영희는 SF 배후에 무슨 생산 조건이 있는지 제대로 짚었습니다. 어쩌면 강사는 너무 짜게 점수를 주지 않을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에게 서구 근대화는 아주 중요한 사항입니다.
[심지어 고대 신화 판타지조차 SF 느낌을 풍길 수 있습니다. 만약 서구 근대화가 생산 조건이 된다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고대 방주가 비슷하다고 해도, 고대 방주는 서구 근대화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개조 꿀벌들이 내부 생태계 수분을 돕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고대 방주 설화는 이것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그래픽 노블 <노아> 같은 고대 신화 판타지 역시 개조 꿀벌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고대 설화, 고대 신화 판타지는 유전 공학과 근대 생태학보다 신의 권능에 기반해야 합니다. 거대 괴수와 생체 우주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대 괴수와 생체 우주선은 똑같이 거대한 생명 현상입니다. 만약 고대 신화 판타지에서 주술사가 거대 바다 괴수를 소환한다면, 거대 바다 괴수와 생체 우주선이 비슷한가요?
그건 아닐 겁니다. 거대 바다 괴수는 마법과 주술에 기반합니다. 반면, 거대 바다 괴수와 생체 우주선이 똑같이 거대한 생명 현상이라고 해도, 생체 우주선은 유전 공학과 근대 생태학에 기반합니다. 거대 바다 괴수와 생체 우주선이 놀라운 치유 능력을 똑같이 자랑한다고 해도, 거대 바다 괴수는 마법과 주술에 기반하고, 생체 우주선은 유전 공학과 근대 생태학에 기반합니다. 이렇게 사이언스 픽션은 다른 것과 비슷하거나 다릅니다. <빼앗긴 자들>과 <레 미제라블>은 비슷하거나 다릅니다. 고대 방주 설화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비슷하거나 다릅니다. 거대 바다 괴수와 생체 우주선은 비슷하거나 다릅니다. 양쪽에는 공통점, 차이점이 있습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고대 방주는 생태계 복원을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근대 생태학을 이용하기 때문에, 고대 방주보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근대적인 환경 오염을 훨씬 구체적으로 비판할 수 있습니다. 거대 바다 괴수와 생체 우주선은 자연 환경이 웅장하고 신비롭다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체 우주선이 근대 생태학을 이용하기 때문에, 생체 우주선은 생물 다양성을 훨씬 구체적으로 들려줄 수 있습니다. <빼앗긴 자들>과 <레 미제라블>은 모두 불행한 사람들을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빼앗긴 자들>은 두 행성과 위성을 지리적으로 단절합니다.
두 행성과 위성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지기 때문에, 소설 <빼앗긴 자들>은 변수들을 차단하고 유토피아를 사고 실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이언스 픽션은 다른 분야들과 비슷하거나 다릅니다. 그래서 SF 평론가는 공통점, 차이점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만약 SF 평론가가 너무 공통점만 강조한다면, SF 평론가는 SF 장르에 고유한 색깔을 집어넣지 못할 겁니다. 만약 SF 평론가가 너무 차이점만 강조한다면, SF 평론가는 하늘에서 SF 장르가 뚝 떨어졌다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웃집 영희는 공통점, 차이점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강사는 이 과제에 좋은 점수를 줄지 모릅니다.
오래 전부터 인류 문화는 사변 문학을 이야기했습니다. 신화, 전설, 민담은 대표적인 사변 문학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못된 악마들을 물리치기 위해 주술사가 거대 바다 괴수를 소환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대 사람들은 기계 좀비 함선을 물리치기 위해 생태주의 세력이 생체 우주선을 건조한다고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고대 인류 문명에게 '생산 조건'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생산 조건은 서구 근대화'입니다. 고대 인류 문화와 달리, 21세기 SF 작가는 생태주의 세력이 생체 우주선을 건조하고 못된 기계 좀비들을 물리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SF 작가에게 서구 근대화는 중요한 사항입니다.
<레 미제라블>과 달리, <빼앗긴 자들>은 우주 화물선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주 화물선은 단순한 사변이 아닙니다. 이건 서구 근대화에서 비롯한 사변입니다. 우주 화물선이 서구 근대화에서 비롯한 것처럼, SF 장르 규정은 서구 근대화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어제 11월 18일 게시글에서 이웃집 영희는 공통점을 너무 강조했고, 그래서 SF 장르 과제는 고유한 색깔을 드러내지 못했으나, 이런 강조에는 가치가 있을지 모릅니다. 생체 우주선에게 서구 근대화가 중요한 생산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여러 SF 평론가느님들께서는 하늘에서 SF 장르가 뚝 떨어졌다고 너무 착각하시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