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미드라시와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유동성 본문
[글자로서 사이언스 픽션은 시각적이고 고정적입니다. 반면, 사이언스 픽션 '개념'은 유동적입니다.]
미드라시(מדרש)는 기독교 <성경> 해석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미드라시는 기독교 <성경>을 오직 읽기만 하지 않습니다. 미드라시는 <성경>을 '해석'합니다. 신앙인들은 <성경>에서 훨씬 깊은 의미와 내용을 찾기 원합니다. 그들은 이미 존재하는 내용에 새로운 내용을 덧붙입니다. 그래서 이건 해석이 됩니다. '해석'이라는 단어에는 '여러 해석들이 공존한다'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이 똑같은 책을 읽는다고 해도, 네 사람들은 다양한 의견들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이웃집 영희는 등장인물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옆동네 철수는 등장인물보다 시대 배경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문체와 필력이 우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랫집 수진은 언제 작가가 책을 썼는지 알기 원할 수 있습니다. 영희와 철수와 말자 할머니와 수진은 다양한 것들을 파악하고, 이런 다양한 독서 방법들은 다양한 결과들을 내놓을 겁니다. 만약 이것들 중에서 오직 한 가지만 존재한다면, 이건 '해석'이 되지 못할 겁니다. 해석은 다양한 결과들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만약 영희와 말자 할머니와 수진이 틀리고 철수가 반드시 옳다면, 독서가 오직 시대 배경에만 주목해야 한다면, 여기에는 '해석'이 없을 겁니다.
미드라시 연구자들 역시 해석을 중시합니다. 이미 어떤 내용이 존재한다고 해도, 미드라시 연구자들은 훨씬 깊은 내용을 탐구하고 새로운 내용을 덧붙이기 원합니다. 만약 이게 가능하지 않다면, 미드라시는 '해석'이 되지 못할 겁니다. 심지어 일부 미드라시 연구자들은 구전 <성경>에 훨씬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들은 글자들이 내용을 고정시킨다고 생각합니다. 말은 시각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語)을 두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말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구전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구전이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미드라시 연구자들은 계속 새로운 내용들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약 텍스트가 고정적이라면, 어떻게 새로운 내용들이 계속 나타날 수 있나요? 그래서 글자들보다 구전은 훨씬 낫습니다. 게다가 기독교 <성경>은 신의 말씀을 담았습니다. 인간이 고안한 글자들이 신의 말씀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나요? 어떻게 인간적인 기호가 전능한 신의 말씀을 기록하고 '고정'할 수 있나요? 이건 모순인지 모릅니다. 인간은 글자들보다 구전으로 신의 말씀을 전파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글자들은 시각적입니다. 말은 시각적이지 않으나, 우리는 두 눈으로 글자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기록은 고정적입니다. 고정적인 것은 새로운 해석을 낳지 못합니다. 텍스트는 고정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일부 미드라시 연구자들은 고정적인 텍스트(글자들)가 새로운 해석을 방해할 거라고 여깁니다. 비단 미드라시만 아니라 다른 해석 행위들 역시 마찬가지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뭔가를 해석할 때, 만약 고정적인 뭔가가 있다면, 이건 새로운 해석을 방해할지 모릅니다. SF 팬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무엇인지 논의합니다. SF 팬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논의할 때,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정의와 사이언스 픽션에 해당하는 창작물들 중에서 SF 팬들이 무엇을 먼저 머릿속에 떠올리나요? 대답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어떤 SF 팬들은 창작물들을 머릿속에 떠올릴 테고, 어떤 SF 팬들은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개념을 머릿속에 떠올릴 겁니다.
19세기에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썼을 때, 메리 셸리는 자신이 바이오펑크 소설을 쓴다고 자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나타났을 때, 19세기 서구에서 사람들은 바이오펑크를 운운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서구 문명에서 바이오펑크라는 개념은 본격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메리 셸리는 자신이 바이오펑크 소설을 쓴다고 자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19세기 메리 셸리와 달리, 오늘날 21세기 초반 사람들은 메리 셸리가 바이오펑크 소설을 썼다고 쉽게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19세기 이후, 작가들, 독자들, 평론가들이 사이언스 픽션이 무엇인지 계속 정의했고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개념보다 <프랑켄슈타인>은 훨씬 선천적입니다. 20세기 SF 평론가들이 바이오펑크를 운운하기 전에, 이미 메리 셸리는 바이오펑크 소설을 썼습니다. 허버트 웰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허버트 웰즈는 자신이 바이오펑크 소설을 썼다고 자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20세기 SF 평론가들이 바이오펑크를 규정했기 때문에, '뒤늦게' 20세기 평론가들은 허버트 웰즈가 바이오펑크 소설을 썼다고 분류했습니다. 그래서 SF 팬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논의할 때, 어떤 SF 팬들은 창작물들을 머릿속에 떠올릴 테고, 어떤 SF 팬들은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개념을 머릿속에 떠올릴 겁니다.
이건 이른바 개인과 사회 논의와 비슷합니다. 만약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개인은 개인을 인식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개인이 다른 개인들과 뭉치지 않는다면, 개인이 사회를 겪지 못한다면, 개인은 사회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겁니다. 만약 개인이 사회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개인은 개인과 사회를 비교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개인이 개인과 사회를 비교하기 원한다면, 개인은 사회가 무엇인지 인식해야 할 겁니다. 만약 개인이 사회를 인식하고 싶다면, 개인은 다른 개인들이 뭉치는 상황을 겪거나 다른 개인들과 뭉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개인은 개인과 사회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사회(범주)보다 개인(개별 요소)은 선천적입니다. 하지만 만약 사회라는 개념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개인은 개인과 사회를 비교하지 못할 겁니다. 사회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개인은 개인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개인(이라는 개념)보다 사회(라는 개념)는 선천적입니다. 분명히 바이오펑크라는 장르 정의보다 허버트 웰즈와 <모로 박사의 섬>은 선천적입니다. 하지만 20세기 평론가들이 바이오펑크를 규정했기 때문에, 허버트 웰즈는 바이오펑크 작가가 됩니다. 그래서 SF 팬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정의하기 원할 때, 범주와 개별 요소들 중에서 SF 팬들은 무엇이 훨씬 선천적인지 쉽게 규정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범주와 개별 요소 관계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장르 정의보다 허버트 웰즈와 <모로 박사의 섬>은 선천적이나,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정의가 있기 때문에, 허버트 웰즈는 바이오펑크 소설 작가가 됩니다. 선천적인 것은 후천적인 것이 되고, 후천적인 것은 선천적인 것을 포함합니다. 이렇게 사이언스 픽션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단어 때문에, SF 팬들은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개념이 고정적이라고 오해할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단어가 시각적(고정적)이기 때문에, SF 팬들은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개념 역시 시각적(고정적)이라고 오해할지 모릅니다.
SF 팬들이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단어를 말하거나 생각한다고 해도, SF 팬들이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글자를 종이에 적고 두 눈으로 읽는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단어는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개념을 고정하지 못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개념)이 고정적이지 않다면, SF 팬들은 계속 어떤 창작물들을 SF 울타리 안에 넣거나 뺄 수 있습니다. 이런 흐름과 과정 속에서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개념)은 존재합니다. 따라서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개념)은 순간적이지 않습니다. 이건 흐름과 과정입니다. SF 팬들이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SF 팬들은 이런 흐름과 과정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단어 그 자체는 이런 유동적이고 변증법적인 흐름과 과정을 반드시 담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단어는 순간적입니다. SF 팬들은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순간적으로 말하거나 쓸 수 있습니다. 흐름과 과정은 시각적이지 않습니다. 반면, 단어는 시각적입니다. 순간적인 단어 사이언스 픽션은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흐름과 과정을 고정할지 모릅니다. 적어도 SF 팬들은 단어가 흐름과 과정을 고정한다고 오해할지 모릅니다. 인간은 시각적인 동물이고, 그래서 인간은 시각적인 요소에 쉽게 끌립니다.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단어(시각적인 요소)는 SF 팬들을 쉽게 이끌지 모릅니다.
반다나 싱이 쓴 단편 소설 <아내>에서 남편은 개념을 단어 속에 가두기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에서 야생 동물이 탈출하는 것처럼, 단어 밖으로 개념은 탈출합니다. 남편은 단어 속에 개념을 가두지 못합니다. 단어는 우리가 되지 못하고, 단어는 개념을 고정하지 못합니다. 단어보다 말은 훨씬 비가시적이고, 그래서 일부 미드라시 연구자들은 글자들을 경계했고 구전을 선호했을 겁니다. 이건 SF 팬들이 오직 구전만을 선호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불가능합니다. 이미 글자들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는 오직 구전 문학만을 만들고 소비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SF 팬들은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순간적이고 시각적이고 고정적인 단어가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개념이 아니라고 인식해야 할 겁니다. SF라는 단어와 달리, SF라는 '개념'은 아주 유동적입니다. SF 팬들은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유동적인 개념을 고정시키지 못합니다. SF 팬들은 무엇이 장르를 만드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SF 팬들은 왜 장르가 유동적이고 무엇이 유동성을 낳는지 주목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