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밤하늘 아래>, 일상 만화와 교양 천문학 본문
[왼쪽은 '밤하늘'이고, 오른쪽은 '오리온'입니다. 밤하늘과 오리온은 신비로운 우주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마스다 미리가 그린 <밤하늘 아래>는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는 마스다 미리가 그린 일상 만화입니다. 다른 하나는 천문학 연구원 안도 카즈마가 쓴 교양 천문학 <알기 쉬운 우주 이야기>입니다. <밤하늘 아래>는 마스다 미리의 일상 만화와 안도 카즈마의 교양 천문학을 번갈아 늘어놓습니다. 가령, 6화 '지구는 하나뿐'에서 만화 주인공은 어떤 남자 부장과 함께 식사합니다. 남자 부장은 만화 주인공에게 술을 권유하나, 만화 주인공은 술을 잘 마시지 못합니다. 만화 주인공이 여자이기 때문에, 남자 부장은 "술을 잘 마시는 여자는 남자에게 인기를 끈다."고 운운합니다.
만화 주인공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나, 남자 부장은 성 희롱을 운운하고 아재 성향을 열렬하게 드러냅니다. 만화 주인공이 집으로 돌아온 이후, 만화 주인공은 한숨을 쉬고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고, 만화 주인공은 드넓은 우주 어딘가에 또 다른 지구와 또 다른 사람들이 사는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드넓은 우주 어딘가의 또 다른 사회에는 아재 부장이 없고 성 차별이 없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일상 만화는 끝나고, <밤하늘 아래>는 안도 카즈마의 교양 천문학을 보여줍니다. 안도 카즈마는 우주에서 또 다른 지구, 또 다른 생명의 요람이 있는지 설명합니다.
이렇게 독자가 <밤하늘 아래>를 읽는 동안, 독자는 일상 만화를 보고, 교양 천문학을 읽고, 다시 일상 만화를 보고, 다시 교양 천문학을 읽고, 또 다시 일상 만화를 보고, 또 다시 교양 천문학을 읽습니다. <밤하늘 아래>는 별똥별, 로켓, 우주선, 또 다른 지구, 은하수, 지구 멸망 같은 다양한 천문학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문제는 일상 만화와 교양 천문학 사이에 필수적인 관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일상 만화에서 만화 등장인물들은 전문적인 천문학 연구원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운석에게 소원을 빌고, 로켓을 꿈꾸고, 우주에 감탄한다고 해도, 이것들은 사소한 일상입니다.
"회사는 지긋지긋해요. 회사에서 저는 탈출하고 싶어요." 이렇게 만화 등장인물이 별똥별을 향해 기도한다고 해도, 만화 등장인물은 천체 연구원이 되지 않고, 일상 만화는 천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일상 만화에 전문적인 천문학 이야기가 없음에도, 이런 일상 만화와 교양 천문학이 어울릴 수 있나요? 만화 등장인물이 별똥별을 향해 소원을 빌기 때문에, 일상 만화와 교양 천문학이 어울리나요? 이게 억지 연결이 아닌가요? 물론 일상 만화에서 등장인물이 별똥별을 향해 소원을 빌고 천문학 연구원으로서 안도 카즈마가 별똥별을 설명할 때, 일상 만화와 교양 천문학 사이에는 유사성(별똥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 만화와 교양 천문학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해도, 이건 그저 사소한 접점에 불과합니다. 여자친구 멤버 은하는 은하수가 아닙니다. 노래 <여름여름해>가 "은하수를 건너서~♬"라고 노래한다고 해도, 은하는 은하수가 되지 않습니다. 여자친구 멤버 은하와 우주 은하수 사이에는 유사성(발음)이 있으나, 이건 언어 유희에 가깝습니다. 이런 언어 유희는 재미있고 참신하고 즐겁습니다. 여러 언어 문화들은 연결 고리 유희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만약 이런 유사성이 언어 유희를 넘고 본격적인 천문학으로 넘어간다면, 이건 과잉 해석이 될 겁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골디락스 행성으로 항해한다고 해도, 이건 <여름여름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자친구 은하와 바이오스피어 세대 우주선 사이에 접점이 없는 것처럼, 통속적으로 만화 독자들은 (마스다 미리가 그린) 일상 만화 수필에게 천문학을 기대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천문학이 시, 소설, 수필 같은 문학과 어울려야 한다면, 일상 만화보다 SF 소설은 훨씬 나을 겁니다. 일상 만화 수필과 달리, SF 소설에게 외계 행성 바이오스피어 건물과 세대 우주선과 골디락스 행성은 어색한 소재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SF 소설은 이것들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덧붙입니다. SF 소설 작가와 천문학 사이에는 깊은 관계, 필수적인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만화 <밤하늘 아래>에서 가끔 안도 카즈마 역시 사이언스 픽션을 언급합니다.)
사변 장르(Speculative Fiction)로서 사이언스 픽션은 자연 과학을 비롯해 서구 근대화를 이용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신화에 서구 근대화를 대입하거나 어떻게 우주, 자연, 문명이 바뀌는지 거시적으로 고찰합니다. 그래서 판타지, 공포, 신화, 동화와 사이언스 픽션은 다릅니다. 만약 19세기 서구 문명에서 과학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여러 자연 과학들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사이언스 픽션 역시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에게 천문학을 비롯해 자연 과학 분야는 필수적인 소재입니다. 자연 과학 없이, 사이언스 픽션은 신화적인 영역에 진출하지 못할 테고 거시적인 변화를 고찰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SF 소설과 교양 천문학이 어울린다고 해도, 이런 만남은 무리가 아닙니다.
심지어 과학자를 비판하기 위해 독자들은 SF 작가를 언급할 수 있습니다. 다국적 기업 임원이 자유 시장 경제가 우주 개척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SF 독자들은 어슐라 르 귄을 인용하고 다국적 기업 임원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우주 물리학자가 기후 변화를 피하기 위해 인류 문명이 우주로 도망쳐야 한다고 주장할 때, SF 독자들은 킴 스탠리 로빈슨을 인용하고 우주 물리학자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게 자연 과학을 비롯해 서구 근대화가 필수적인 소재이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자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과 자연 과학 사이에는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런 연결 고리(사이언스 픽션-자연 과학)가 억지라고 간주할지 모릅니다.
과학 논문과 달리, 사이언스 픽션은 창작물입니다. 자연 과학 논문과 달리, 소설, 만화, 영화, 게임은 창작물입니다. 창작물은 허구입니다. 창작물이 허구이기 때문에, 창작물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건 범죄가 아닙니다. 심판의 날이 다가온다고 해도, 천상의 판관은 SF 작가들이 뻥쟁이라고 판결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SF 소설들이 과학 용어들을 읊조리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만약 하드 SF 소설이 뻥을 친다면, 아무리 이게 커다란 뻥이라고 해도, 어떤 독자들은 커다란 뻥을 믿을 겁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사이언스 픽션들을 비판합니다.
천문학 논문과 하드 SF 소설은 똑같은 목적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천문학 논문과 하드 SF 소설이 우주 개척을 똑같이 이야기한다고 해도, 양쪽은 다른 목적을 추구합니다. 우주 개척 사업은 그저 천문학 영역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우주 개척 사업은 경제학, 사회학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인생들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과학 논문은 인생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소설은 인생을 반영하고 현실을 모방합니다. SF 소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SF 소설이 세대 우주선 내부 생태학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SF 소설은 오직 과학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SF 소설은 어떻게 우주선 사람들이 살아가는지 반영합니다.
SF 소설은 세대 우주선 속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생태계를 관리하고, 사회 관계들을 이루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섹스하는지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것들은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섹스는 아주 중요한 일상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인생에서 섹스가 가장 커다란 즐거움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세대 우주선이 제한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세대 우주선 사람들에게 섹스는 인생의 활력소가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연 과학 논문은 어떻게 사람들이 연애하고 사랑하고 섹스하는지 말하지 못합니다. 자연 과학 논문이 섹스를 논리적으로 탐구한다고 해도, 이건 반영보다 설명입니다. 반면, 소설은 반영입니다.
만약 자유 시장 경제가 우주 개척을 뒷받침한다면, 우주 개척은 또 다른 기후 변화가 될 겁니다. 이미 현실에서 자본주의는 숱한 환경 오염들을 저질렀습니다. 인류 문명은 자연 생태계를 평등하게 관리해야 하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건 불가능합니다. 만화 <밤하늘 아래>에서 회사 직원들은 영리 기업이 너무 지긋지긋하다고 느낍니다. 아무리 회사 직원들이 야근한다고 해도,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영리 기업은 수당을 착취합니다. 자본주의는 '착취'입니다. 천문학 논문과 SF 소설은 자본주의가 우주 개척을 착취할 거라고 똑같이 이야기할 수 있으나, 천문학 논문과 달리, SF 소설은 설명하기보다 반영합니다.
이렇게 천문학 논문과 하드 SF 소설은 비슷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에게 서구 근대화가 결정적인 요소이고, 19세기 이후, 천문학이 서구 근대화에 속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과 자연 과학을 (상대적으로) 쉽게 연결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일상 만화에서 만화 등장인물이 밤하늘을 바라본다고 해도, 밤하늘은 필수적인 소재가 아닙니다. 만화 <밤하늘 아래> 제6화 '또 다른 지구'에서 만화 주인공은 또 다른 지구를 상상합니다. 하지만 만약 만화 주인공이 또 다른 지구를 상상하지 않는다고 해도, 만화 주제는 크게 바뀌지 않을 겁니다. 제6화 '또 다른 지구'에서 중요한 것은 외계 골디락스 행성보다 아재 부장과 성 차별입니다.
가부장적인 편견은 골디락스 행성으로 반드시 이어지지 않습니다. 수구 꼴통 부장이 여자 직원들을 성 차별한다고 해도, 만화 주인공과 달리, 다른 많은 여자 직원들은 밤하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테고 외계 행성을 상상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가부장적인 편견은 자본주의 비판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돌봄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자본주의가 여자들을 왜곡하고 차별하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는 가부장 제도입니다. 만약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오늘 혜화역에서 성 차별 반대 집회가 열린 것처럼, 성 해방 운동들은 비판적인 외침을 멈추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제6화 '또 다른 지구'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제6화 '또 다른 지구'에서 일상 속의 가부장적인 편견은 자본주의 비판보다 외계 행성으로 이어집니다. 이게 논리적인 연결인가요? 이런 흐름, 연결 고리가 타당한가요? 수구 꼴통 아재 부장이 여자들을 차별함에도, 왜 만화 주제가 가부장 제도 비판, 자본주의 비판보다 외계 골디락스 행성인가요? 가부장적인 편견-외계 골디락스 행성 사이에는 일관성이 없습니다. 사이언스 픽션과 달리, 일상 만화는 신화적인 영역으로 진출하지 않고 거시적인 변화를 고찰하지 않습니다. '일상'은 신화 및 거시적인 변화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일상 만화는 훨씬 개인적이고 단기적인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개인적이고 단기적인 사건에게 천체 연구는 필수적인 소재가 아닙니다. 이렇게 일상 만화와 교양 천문학 사이에 필수적인 관계가 없음에도, <밤하늘 아래>는 두 가지를 연결합니다.
어떤 독자들은 <밤하늘 아래>가 천문학을 너무 무리하게 끼워넣는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래서 독자들이 <밤하늘 아래>를 비판해야 하나요? 일상 만화와 교양 천문학 연결이 그저 만화책을 팔아먹기 위한 상술에 불과한가요? 어떤 만화 독자들이 <밤하늘 아래>가 이상하고 어색하다고 비판한다고 해도, 이런 비판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한정식 메뉴와 고르곤졸라 포카치아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일상 만화와 교양 천문학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밤하늘 아래>는 사소한 접점(밤하늘)을 이용하고 일상 만화와 교양 천문학을 연결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또 다른 만화 독자들은 이런 구성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일상 만화와 교양 천문학 사이에 사소한 접점이 있다고 해도, 어떤 독자들은 이런 접점을 인정할 겁니다. 인생이 고정적인 경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달리기 경주가 아닙니다. 달리기 선수는 고정된 경로를 따라야 하나, 우리 인생에는 정도(正道)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무한하고, 인생은 온갖 것들과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설이 인생을 반영하는 것처럼, 일상 만화 역시 인생을 반영합니다. 일상 만화가 인생을 반영하기 때문에, 인생이 온갖 것들과 이어질 수 있는 것처럼, 일상 만화는 온갖 것들과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상상할지 모릅니다. 비록 이게 가볍고 사소한 상상이라고 해도, 이런 상상 '배후'에는 서구 근대화와 자연 과학이 있습니다. 현실이 서구 근대화를 거쳤기 때문에, 사람들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아주 사소하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많은 SF 소설들과 달리, 일상 만화는 신화적인 영역으로 진출하지 않고 거시적인 변화를 고찰하지 않으나, 서구 근대화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일상 만화가 우리 인생을 반영하기 때문에, 일상 만화 역시 서구 근대화를 이용하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고 해도, 그들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는 우주선을 아주 가볍고 사소하게 상상하기 위한 기반조차 없었습니다. 반면, 20세기 이후, 일상 만화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상이 본격적인 사이언스 픽션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과 자연 과학과 일상 만화 사이에는 접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상 만화는 교양 천문학을 담을 수 있습니다.
일상 만화가 교양 천문학과 어울린다고 해도, 이건 창작의 자유입니다. 이건 절대적인 법칙을 위반하지 않습니다. 일상 만화가 교양 천문학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하늘은 두 쪽이 나지 않습니다. 인생이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창작 소재, 주제, 장르, 매체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수필이 문학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마스다 미리가 쓰고 그린 <차의 시간>은 삽화를 곁들인 '수필'입니다. 다른 많은 수필들과 달리, <차의 시간>에 그림들이 있다고 해도, 이건 수필입니다. 이게 수필이기 때문에, <차의 시간>은 문학에 속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흔히 사람들은 문학이 그림보다 언어에 치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화 <차의 시간>은 언어보다 그림에 치중합니다. 적어도 <차의 시간>에서 언어처럼 그림은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차의 시간>이 문학에 속하지 않나요? <차의 시간>이 수필임에도, 이게 만화이기 때문에, 수구 꼴통 어른들이 만화를 불량 식품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차의 시간>이 고귀하신 문학느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나요? 하지만 만약 문학이 언어를 중시해야 한다면, 왜 시와 소설이 언어를 다르게 이용하나요? 시에서 언어가 춤꾼에 가까움에도, 소설에서 언어가 안내자에 가까움에도, 시와 소설이 똑같이 문학이 되나요? 소설은 시가 내용을 중시하지 않는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시는 소설이 언어 운율을 무시한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시와 소설이 똑같이 문학에 속하고, 문학이 언어를 중시해야 함에도, 시와 소설에서 언어는 아주 대조적입니다. 시나리오 역시 언어를 다르게 이용합니다. 시와 소설은 시나리오가 언어를 다르게 사용한다고 비판할지 모르고, 시나리오는 시와 소설을 비판할지 모릅니다. 흔히 사람들은 시나리오가 문학에 속한다고 분류하나, 만약 시나리오가 문학이라면, 게임 시나리오 역시 문학이 되나요? 인엑자일 게임 제작자들은 소설 <전쟁과 평화>처럼 비디오 게임 <웨이스트랜드 2>가 방대한 텍스트를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게임 텍스트가 문학인가요?
<웨이스트랜드 2>처럼, 여러 롤플레잉 게임들은 아주 방대한 텍스트를 자랑합니다. 비디오 게임 <아이스윈드 데일>에는 비단 등장인물 대사들만 아니라 각종 전승들과 판타지 설정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문학에 속할 수 있나요? 게임 제작자들이 고풍스러운 문체를 구사하고 판타지 전승들을 집어넣음에도, 이것들이 문학에 속하지 않나요? 하지만 만약 이것들이 문학에 속한다고 해도, 흔히 문학 평론가들은 비디오 롤플레잉 게임 속의 판타지 전승들이 문학이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문학은 고정적인 실체가 아닙니다. 문학이 고정적인 실체가 아닌 것처럼, 일상 만화와 교양 천문학은 만날 수 있습니다.
[일상 만화와 교양 천문학이 어울리는 것처럼, 우주 개척 이야기와 소설 <미친 아담>은 어울릴 수 있습니다.]
일상 만화와 교양 천문학이 고정적인 범주가 아니기 때문에, 독자들은 <밤하늘 아래>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만화 주인공이 또 다른 지구를 상상할 때, 이런 상상이 교양 천문학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어쩌면 어떤 만화 독자들은 여자친구 노래 <밤>이 <밤하늘 아래>와 잘 어울린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밤하늘을 날아~♬" 같은 가사는 '밤하늘 아래'와 잘 어울릴지 모릅니다. 아니면 <밤하늘 아래>는 안녕바다 노래 <별빛이 내린다>와 잘 어울릴지 모릅니다. "따뜻한 별빛이 내린다. 샤라랄라라랄라~♬" 같은 가사는 '밤하늘 아래'와 잘 어울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많은 독자들은 이게 억지 연결이라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노래 <별빛이 내린다>와 만화 <밤하늘 아래>는 억지 연결입니다.
양쪽이 억지 연결인 것처럼, 일상 만화와 교양 천문학은 억지 연결입니다. 아무리 만화 주인공이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또 다른 지구를 상상한다고 해도, 일상 만화에서 중심 소재는 또 다른 지구보다 수구 꼴통 아재 부장과 가부장적인 편견입니다. 또 다른 지구는 <문명: 비욘드 어스>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에 훨씬 잘 어울립니다. 제목처럼, <문명: 비욘드 어스>는 또 다른 지구, '지구를 넘어서'를 말합니다. 아니, 엄중한 자연 과학과 스페이스 오페라는 억지 연결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 논문이 아니고, '사이언스 픽션'은 엉터리 명칭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어떤 것과 어떤 것을 연결하거나 멀리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일상 만화와 교양 천문학처럼, 어쩌면 시-소설-문학 역시 억지 연결인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가 이야기를 만들고 분류하고 정리할 때, 우리는 유사성들을 이용합니다. 절대적인 법칙이 없기 때문에, 이런 유사성들은 유동적이고 임의적입니다. SF 팬들은 소설 <미친 아담>과 비디오 게임 <문명: 비욘드 어스>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양쪽 모두 급진적인 환경 운동, 환경 아포칼립스, 새로운 자연, 새로운 사회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SF 팬들은 <문명: 비욘드 어스>와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양쪽 모두 스페이스 오페라, 4X 비디오 게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SF 팬들은 소설 <위기의 바이오 돔을 구하라>와 비디오 게임 <Among Ripples: Shallow Waters>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소설 <위기의 바이오 돔을 구하라>는 생태학 SF 소설이고, 비디오 게임 <Among Ripples: Shallow Waters>는 생태계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나, 양쪽 모두 어떻게 사람들이 자연 생태계를 직접 배치하고 조성하는지 보여줍니다. 일상 만화 <밤하늘 아래>가 교양 천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소설 <위기의 바이오 돔을 구하라>와 비디오 게임 <Among Ripples: Shallow Waters> 사이에는 커다란 공통점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