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컬러 퍼플>과 <Among Ripples 2> 사이에서 본문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대만 로맨스 영화입니다. 사람들은 이 창작물이 대만 로맨스 영화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류에는 여러 측면들이 있습니다. '대만'과 '로맨스'와 '영화'는 서로 다른 울타리들에 속합니다. 어떤 대만 창작물들은 로맨스 영화보다 모더니즘 소설이나 중세 유럽 판타지 게임일지 모릅니다. 어떤 로맨스들은 대만 영화보다 남한 소설이나 일본 만화일지 모릅니다. 어떤 영화들은 대만 로맨스보다 북한 괴수물이나 중국 스페이스 오페라일지 모릅니다.
이렇게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에는 여러 측면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서 오직 <그 시절 소녀>만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이웃집 영희가 이 '영화'를 아주 감동적으로 관람했다면, 이웃집 영희는 다른 비슷한 창작물들을 계속 보기 원할지 모릅니다. 이웃집 영희가 무슨 창작물들을 봐야 하나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실사 영화'입니다. <부산행>은 '실사 영화'입니다. 이웃집 영희가 <부산행>을 관람해야 하나요? 두 가지가 똑같이 '실사 영화'이기 때문에?
[이런 소설들은 문학입니다. 소설 <오로라>는 문학입니다. 그래서 <제르미날>과 <오로라>가 똑같나요?]
앨리스 워커가 쓴 <컬러 퍼플>은 소설입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이 쓴 <오로라>는 소설입니다. <컬러 퍼플>과 <오로라>는 모두 소설입니다. <컬러 퍼플>과 <오로라>는 소설이고, 이건 아주 근본적인 공통점입니다. 아무도 이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앨리스 워커는 <오로라>가 소설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합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은 <컬러 퍼플>이 소설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합니다. 두 작가는 두 소설에게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평론가들 역시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평론가들은 <컬러 퍼플>과 <오로라>에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독자들은 <컬러 퍼플>과 <오로라>가 소설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합니다.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 역시 앨리스 워커와 킴 스탠리 로빈슨이 '소설' <컬러 퍼플>과 <오로라>를 썼다고 인정합니다. <컬러 퍼플>은 가난한 흑인 여자들과 끔찍한 성 폭행들을 이야기하고, <오로라>는 장거리 세대 우주선을 이야기합니다. 두 소설에서 내용은 다릅니다. <오로라>는 (북부 동토부터 아마존 열대 밀림까지) 장거리 세대 우주선이 여러 자연 생태계들을 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장거리 세대 우주선, 바이오쉽은 폐쇄 인공 생태계입니다.
반면, '소설' <컬러 퍼플>은 장거리 세대 우주선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소설' <컬러 퍼플>은 폐쇄 인공 생태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로라>는 생물 다양성과 먹이 그물망을 논의하나, <컬러 퍼플>에는 이런 내용들이 없습니다. <오로라>에서 세대 우주선 사람들은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하기 원합니다. <컬러 퍼플>에서 흑인들은 테라포밍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흑인 등장인물들은 테라포밍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장거리 우주선 속에서 과학자들이 바이오스피어 원통을 만들든, 우주선 사람들이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하든, 지구가 기후 변화에 부딪히든, <컬러 퍼플>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만약 지구가 기후 변화에 부딪힌다면, 수많은 흑인들은 고통을 겪을 겁니다. 기후 변화는 극심한 가뭄을 부를 테고, 수많은 흑인들은 농사들을 망칠 겁니다. 그들은 물을 구하지 못할 겁니다. 수많은 흑인들에게 식량 위기보다 식수 위기는 훨씬 심각할 겁니다. 기후 변화와 극심한 가뭄은 남반구 흑인들(을 비롯해 온갖 가난한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을 겁니다. 독자들이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해도, 현실 속에서 이미 기후 난민들은 고통을 겪는 중입니다. 북반구 산업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를 일으켰고, 기후 변화는 남반구 가난한 흑인들을 괴롭힙니다. 기후 변화는 범죄입니다. 북반구 자본가 계급은 기후 변화를 책임져야 합니다.
만약 북반구 자본가 계급이 책임지지 않는다면, 남반구 가난한 흑인들은 고통을 피하지 못할 겁니다. <컬러 퍼플>은 이런 상황을 반기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컬러 퍼플>은 행성 생태계 변화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행성 생태계 변화는 주류 문학보다 사이언스 픽션에 속합니다. <컬러 퍼플>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반면, <오로라>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으로서 <오로라>는 생태적인 상상력을 이야기합니다. 바이오스피어 원통과 외계 행성 테라포밍, 행성 생태계 변화는 아주 거대한 생태적인 상상력입니다. <컬러 퍼플>은 거대한 생태적인 상상력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래서 <컬러 퍼플>과 <오로라>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앨리스 워커와 킴 스탠리 로빈슨은 이런 결정적인 차이를 인정할 겁니다. 아무리 <컬러 퍼플>이 가난한 흑인들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컬러 퍼플>과 행성 생태계 변화는 쉽게 이어지지 않습니다. 평론가들과 독자들 역시 결정적인 차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 역시 <컬러 퍼플>과 <오로라>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이웃집 영희는 <컬러 퍼플>과 <오로라>가 모두 '소설'이라고 주장합니다. 아무리 <컬러 퍼플>과 <오로라>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해도, 이웃집 영희는 <컬러 퍼플>과 <오로라> 사이에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이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비록 <컬러 퍼플>이 폐쇄 인공 생태계 원통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철수와 말자 할머니와 수진은 <컬러 퍼플>과 <오로라>가 똑같이 '소설'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컬러 퍼플>과 <오로라>가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기 때문에, 특히, <컬러 퍼플>이 아주 유명하고 많은 인기들을 끌기 때문에, <컬러 퍼플>과 <오로라>는 소설을 뛰어넘고 문학으로 승천할 수 있습니다. <컬러 퍼플>과 <오로라>는 문학입니다. 이웃집 영희는 두 소설이 문학이라고 주장합니다. 평론가들, 독자들,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두 소설이 문학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이건 근본적인 공통점일 겁니다. 이웃집 영희는 <컬러 퍼플>과 <오로라>가 문학이라고 묶을 수 있습니다. <컬러 퍼플>과 <오로라>가 문학이기 때문에, 이웃집 영희는 <컬러 퍼플>과 <오로라>를 비롯해 다른 많은 문학들을 여기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문학은 방대한 울타리입니다. 문학이라는 울타리 속에는 수많은 소설들이 있습니다. <컬러 퍼플>과 <오로라>가 문학이 되는 것처럼, <100년 동안의 고독>과 <부활>과 <제르미날>과 <적과 흑>은 문학에 속합니다. 이웃집 영희는 <컬러 퍼플>과 <오로라>와 <100년 동안의 고독>과 <부활>과 <제르미날>과 <적과 흑>이 문학이라고 묶을 수 있습니다. 영희는 다른 문학들을 계속 추가할 수 있습니다.
<샬롯의 거미줄>이 문학이 될 수 있나요? 이건 동화입니다. 동화가 문학이 될 수 있나요? 하지만 <샬롯의 거미줄>이 산문을 이용해 이야기를 전달하기 때문에, <샬롯의 거미줄>이 아주 유명하기 때문에, 이건 문학이 될 수 있습니다. 이웃집 영희는 <컬러 퍼플>과 <제르미날>과 <100년 동안의 고독>과 <샬롯의 거미줄>이 문학이라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옆동네 철수는 반박할지 모릅니다. 옆동네 철수는 <컬러 퍼플>과 <제르미날>과 <100년 동안의 고독>이 성인 소설이고 <샬롯의 거미줄>이 동화라고 지적할 겁니다. 하지만 성인 소설과 동화 모두 문학이 될 수 있습니다. 평론가들은 문학이 반드시 성인 소설이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평론가들이 문학을 분류하는 동안, 언제나 평론가들은 똑같은 기준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성인 소설들보다 동화들은 훨씬 나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두룩한 3류 포르노 소설들이 있습니다. 이것들보다 <샬롯의 거미줄>은 훠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얼씨이이이이이이이인 낫습니다. 아니, 이웃집 영희는 감히 3류 포르노 소설들이 <샬롯의 거미줄>에게 까불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동화는 반드시 유치하지 않습니다. <샬롯의 거미줄>은 문학으로 승천할 수 있습니다. 이웃집 영희는 <컬러 퍼플>과 <오로라>와 <100년 동안의 고독>과 <부활>과 <제르미날>과 <적과 흑>과 <샬롯의 거미줄>이 문학이라고 묶습니다. 이것들은 한 덩어리입니다.
이웃집 영희와 달리, 아랫집 수진은 <오로라>가 다른 문학들과 다르다고 지적합니다. <컬러 퍼플>과 <100년 동안의 고독>과 <부활>과 <제르미날>과 <적과 흑>과 <샬롯의 거미줄>은 바이오스피어 원통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런 문학들은 세대 우주선 사회, 외계 자연 생태계, 행성 환경 변화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로라>는 유일하게 근대적인 진보를 이용해 미래가 바뀐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로라>는 예언서가 아닙니다. <오로라>가 미래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오로라>는 예언서가 아닙니다. <오로라>는 시대적인 격차를 이용해 21세기 환경 오염들을 경고하기 원합니다. <컬러 퍼플>과 <100년 고독>과 <부활>은 예언서가 아닙니다.
<제르미날>과 <적과 흑>과 <샬롯의 거미줄>은 예언서가 아닙니다. 이런 문학들처럼, <오로라> 역시 예언서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오로라>는 근대적인 진보를 이용해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펼치고 자연과 문명이 바뀐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로라>는 사이언스 픽션이고, 사이언스 픽션으로서 <오로라>는 다른 문학들과 다릅니다. 아무리 <컬러 퍼플>이 끔찍한 성 폭행들을 고발한다고 해도, 아무리 <100년 동안의 고독>이 마술 기법을 이용해 유구한 역사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아무리 <샬롯의 거미줄>이 감동적인 우화라고 해도, 이런 문학들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아랫집 수진은 <오로라>가 아주 독특하다고 말합니다.
이웃집 영희는 <컬러 퍼플>과 <오로라>와 <제르미날>을 함께 묶었으나, 아랫집 수진은 여기에 반대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오로라>를 좋아하나, 아랫집 수진은 <컬러 퍼플>과 <제르미날>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랫집 수진은 <컬러 퍼플>과 <제르미날>이 훌륭한 문학이라고 인정하나, 이웃집 영희와 달리, 아랫집 수진은 <컬러 퍼플>과 <오로라>와 <제르미날>을 함께 묶지 않습니다. 아랫집 수진은 <오로라>와 BBC 자연 다큐멘터리 <살아있는 지구>를 함께 묶습니다. <살아있는 지구>가 행성 생태계를 둘러보기 때문입니다. <오로라>는 바이오스피어 원통과 여러 자연 생태계들과 외계 행성 테라포밍과 기후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생태 문학 <오로라>처럼, <살아있는 지구>는 행성 자연 생태계를 장엄하게 보여줍니다. 혹독한 극지부터 깊고 깊은 동굴까지, 건조한 사막부터 광활한 망망대해까지, <살아있는 지구>는 지구 행성에 여러 자연 생태계들이 있다고 보여줍니다. <살아있는 지구>는 기후 변화를 비롯해 각종 환경 오염들이 자연 생태계들을 파괴한다고 걱정합니다. <살아있는 지구>는 북반구 자본가 계급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많은 환경 운동가들이 그러는 것처럼, <살아있는 지구>는 서구 제국주의에 충성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살아있는 지구>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기후 변화를 바라봅니다. 그래서 <오로라>와 <살아있는 지구>에는 아주 커다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로라>와 <살아있는 지구>는 똑같이 여러 자연 생태계들을 보여주고 행성 생태계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오로라>가 생태학 SF 소설이기 때문에, <오로라>를 이해하고 생태학 지식들을 쌓기 위해 아랫집 수진은 <살아있는 지구>를 참고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오로라>와 <살아있는 지구>가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수진은 생태학 지식들을 좀 더 쌓기 원합니다. 수진은 여러 생태학 서적들을 참고하고, 결국 수진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을 플레이합니다. 수진은 <Among Ripples 2> 같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을 플레이합니다. 수진이 자연 생태계를 직접 조성하는 동안, 수진은 정말 자신이 '바이오스피어'를 관리한다고 느낍니다.
세대 우주선 사람들이 '바이오스피어'를 관리하는 것처럼, 아랫집 수진은 '바이오스피어'를 직접 관리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생물 다양성을 직접 배치합니다. 생물 다양성이 상호 작용하고 스스로 번성하는 동안, 수진은 감탄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또 다른 생태계 게임 <쉘터 2>를 플레이합니다. <쉘터 2>가 '바이오스피어'를 서정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수진은 다시 감탄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오로라>와 <살아있는 지구>와 <Among Ripples 2>와 <쉘터 2>를 함께 묶습니다. 이웃집 영희는 깜짝 놀랍니다. 이웃집 영희는 어떻게 <오로라>와 <살아있는 지구>와 <Among Ripples 2>와 <쉘터 2>가 똑같은 울타리에 속하는지 묻습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처럼,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은 생물 다양성을 직접 배치하고, 조성하고, 관리합니다.]
<쉘터 2>는 문학이 아닙니다. <쉘터 2>는 소설이 아닙니다. <쉘터 2>는 산문으로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습니다. 이건 비디오 게임입니다. <쉘터 2>에는 산문이 거의 없습니다. <살아있는 지구> 역시 문학이 아니고, 소설이 아니고, 산문으로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지구>는 자연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살아있는 지구>가 해설들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살아있는 지구>에서 사회적인 기호보다 시각적인 정보는 훨씬 중요합니다. <오로라>는 소설입니다. 이웃집 영희는 <오로라>와 다른 소설들을 함께 묶기 원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반박합니다. 아무리 <오로라>가 소설이라고 해도, <오로라>에는 행성 생태계 변화와 생태계 관리가 있습니다. <컬러 퍼플>과 <100년 동안의 고독>과 <제르미날>에는 이런 것들이 없습니다.
<Among Ripples 2>에는 생태계 관리가 있습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승무원들처럼, <Among Ripples 2>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생물 다양성을 직접 배치합니다. <쉘터 2>가 '바이오스피어'를 강조하기 때문에, 아랫집 수진은 <오로라>가 <컬러 퍼플>보다 <쉘터 2>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웃집 영희는 <오로라>가 평등한 사회를 강조하나 <쉘터 2>가 오직 야생 생태학에만 관심을 쏟는다고 반박합니다. <컬러 퍼플>과 <100년 동안의 고독>과 <제르미날>이 평등한 사회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웃집 영희는 <오로라>가 <컬러 퍼플> 같은 문학들에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제르미날>이 자연 생태계 관리를 강조하지 않고 <100년 동안의 고독>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엄중하게 고증하지 않는다고 다시 반박합니다.
이웃집 영희와 아랫집 수진은 계속 논쟁을 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가 누구를 지지할 수 있나요? 누가 옳은가요? 이웃집 영희가 옳은가요? <오로라>가 문학이기 때문에, <오로라>가 평등한 사회를 말하기 때문에, <오로라>가 <컬러 퍼플>과 <100년 동안의 고독>과 <제르미날>에 가깝나요? 아랫집 수진이 옳은가요? <오로라>가 행성 생태계 변화와 생태계 관리를 말하기 때문에, <오로라>가 <살아있는 지구>와 <Among Ripples 2>와 <쉘터 2>에 가깝나요? 만약 아랫집 수진이 <오로라>와 <쉘터 2>를 함께 좋아한다면, 이게 올바른 분류인가요? 옆동네 철수는 이런 논쟁이 헛갈린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관점에서 이웃집 영희는 옳고, 어떤 관점에서 아랫집 수진은 옳습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오로라>가 복합적이라고 대답합니다. 현명한 노인으로서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오로라>가 평등한 사회와 행성 생태계 변화와 생태계 관리를 함께 말한다고 설명합니다. <오로라>는 문학이고, 동시에 <오로라>는 생태적인 상상력입니다. 근본적으로 <오로라>는 문학이나, 생태계 관리와 환경 변화는 핵심 사항입니다. 만약 이웃집 영희와 아랫집 수진이 오직 한 가지 측면만 강조한다면, 영희와 수진은 <오로라>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겁니다. <오로라>에는 여러 측면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오로라>는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소설을 쓰고, 만화를 그리고, 영화를 촬영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개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관계들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아랫집 수진은 딸이고, 누군가에게 아랫집 수진은 제자이고, 누군가에게 아랫집 수진은 친구이고, 누군가에게 아랫집 수진은 조원이고, 누군가에게 아랫집 수진은 동네 사람이고, 누군가에게 아랫집 수진은 연인입니다. 만약 아랫집 수진이 아기를 낳는다면, 아기에게 아랫집 수진은 엄마가 될 겁니다. 이렇게 인간은 개인이 아닙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개인의 자유를 무식하게 지껄이나, 인간은 개인이 아닙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여러 관계들 속에서 창작물들, 소설, 만화, 영화 역시 존재합니다. 이웃집 영희는 이 세상에서 오직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웃집 영희는 (좀비 아포칼립스 <부산행>보다) 영화 <그 시절 소녀>와 만화 <파르페틱>과 소설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함께 바라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