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작가가 <쥬라기 공원>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가 본문
"원시 생명이 부르는 그릇된 현대 문명의 장송곡. 막대한 자본을 소유한 야심에 찬 자본가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2억 년 전 쥬라기 시대의 공룡들을 재현해 낸다. <쥬라기 공원>은 상업주의와 결탁한 과학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독자의 피를 원시의 빛깔로 물들이는 과학 스릴러!"
위 문구들은 소설 <쥬라기 공원>을 홍보합니다. 김영사 출판사 판본에는 저런 홍부 문구들이 있죠. <쥬라기 공원>이 정말 독자의 피를 원시의 빛깔로 물들일까요? 어쩌면 누군가는 이게 너무 과장된 표현이라고 여길지 모르죠. 하지만 <쥬라기 공원>은 공룡들을 꽤난 능숙하게 활용하고 정말 독자가 고대 생태계를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을 풍깁니다. 아쉽게도 마이클 크라이튼은 공룡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레이 브래드버리나 로버트 소여 같은 작가들과 달리, 마이클 크라이튼은 공룡 팬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리 앨런 그랜트 박사가 공룡을 좋아한다고 떠든다고 해도, <쥬라기 공원>에는 공룡들을 동경하는 마음이 없어요. 마이클 크라이튼은 노련하게 공룡들을 이야기하나, 로망이 뭔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공룡 소설로서 <쥬라기 공원>은 꽤나 재미있습니다. 이 소설은 정말 독자의 피를 원시 빛깔로 물들일 수 있을지 모르죠. 하지만 이 소설이 드러내는 특징은 비단 그것만이 아닙니다. <델로스>나 <타임 라인>이나 <먹이> 같은 다른 여러 소설들처럼, 마이클 크라이튼은 상업화된 과학을 비판하죠. 자본가들은 과학을 이용해 돈벌이에 치중하고, 상업화된 과학은 재앙을 부릅니다.
19세기 유럽에서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이 처음 나왔을 때, 이런 이야기들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유럽에서 자본가는 막대한 자금을 이용해 과학을 상업화하지 못했어요. 빅토르 프랑켄슈타인, 모로 박사, 지킬 박사는 유명한 19세기 미치광이 과학자들입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연구했고 영리 기업에게 종속되지 않았죠. 하지만 20세기 이후, 과학자들은 더 이상 개인적으로 연구하지 못합니다. 적어도 생명 과학 분야에서 첨단 장비들은 필수적이고, 과학자들은 영리 기업들에 속해야 합니다. 어쩌면 20세기 과학자들은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을 부러워할지 모르죠. 20세기 과학자들과 달리,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자본가들의 비위를 살피지 않았습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그저 자신의 양심에만 솔직할 수 있었죠.
하지만 이제 양심은 날아갔습니다. 양심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학자가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 싶다고 해도, 과학자는 자본가를 떠받들어야 합니다. 20세기에서 자본가는 과학자보다 훨씬 우월합니다. 과학자에게 막대한 자금이 없다면, 아무리 머리가 명석하다고 해도, 과학자는 연구를 진행하지 못합니다. <쥬라기 공원>은 어떻게 자본가가 과학자를 끌어들이는지 이야기합니다. 과학자는 저항하지 못합니다. 상업화된 과학이 재앙을 부른다고 해도, 과학자는 쉽게 발을 빼지 못합니다. 자본가는 과학자를 놔주지 않죠.
소설 <쥬라기 공원>은 이런 주제를 다룹니다. 속편 <잃어버린 세계> 역시 상업화된 과학을 이야기하죠. 하지만 마이클 크라이튼이 상업화된 과학을 정말 예리하게 파악했을까요? 여기에서 '상업화'가 무엇을 가리킬까요? 조선 시대에도 상업은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장영실 같은 과학자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이클 크라이튼은 이런 것들을 상업화된 과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사실 상업화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가리킵니다. 홍보 문구가 말한 '자본가'는 자본주의 요소입니다. 오직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자본가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아무리 숱한 시장들이 있었다고 해도, 그 자체로서 시장들은 자본주의가 되지 않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유한 계급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자본가 계급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시장 경제를 이용해 이윤을 축적하지 않았고 자본을 부풀리지 않았죠. 자본가를 말하고 싶다면, 마이클 크라이튼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파악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소설 <쥬라기 공원>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제대로 파악하나요? 마이클 크라이튼이 자본주의를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아니, 소설과 작가 모두 자본주의를 아주 피상적으로 바라봅니다. 양쪽 모두 자본주의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못해요.
그래서 말년에 마이클 크라이튼은 <공포의 제국>을 썼을 겁니다. 자본주의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마이클 크라이튼은 절대 <공포의 제국>을 쓰지 않았을 겁니다.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공포의 제국>은 그저 웃기지 않은 농담거리에 불과하죠. 따라서 마이클 크라이튼은 상업화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이클 크라이튼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소설 <쥬라기 공원>은 많은 비판들을 받아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이게 <쥬라기 공원>이 잘못했다는 뜻일까요? 분명히 마이클 크라이튼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했고, <쥬라기 공원>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직 마이클 크라이튼만 이런 잘못을 저지를까요? 다른 작가들은 이런 잘못에서 자유로울까요? 아니, 이게 정말 잘못일까요? 소설 <백경>에서 허먼 멜빌은 향유 고래를 이야기합니다. 향유 고래는 수심 1,000m까지 잠수할 수 있습니다. 향유 고래는 꽤나 장대하고 신비한 야생 동물이죠. 하지만 허먼 멜빌은 19세기 작가입니다. 허먼 멜빌은 수심 1,000m로 내려간 적이 없었을 겁니다. 허먼 멜빌은 깊고 깊은 해저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허먼 멜빌은 <백경>을 썼고 향유 고래를 이야기했죠.
21세기 독자들은 자연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습니다. 21세기 독자들은 향유 고래가 깊고 깊은 해저로 잠수하는 과정을 볼 수 있죠. 심해 무인 잠수정은 향유 고래를 촬영할 수 있습니다. 허먼 멜빌은 이런 것들을 몰랐습니다. 허먼 멜빌에게 이런 것들은 미래입니다. 심지어 하드 SF 작가들조차 미래를 제대로 상정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허먼 멜빌은 SF 작가가 아니죠. 이런 것들을 알지 못했음에도, 허먼 멜빌은 <백경>을 썼죠. 사실 모든 소설에는 이런 한계가 있을 겁니다. 현실은 거대합니다. 현실은 아주 거대하죠. 우리는 21세기 첨단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중이나, 아직 우리는 우주와 생명의 비밀을 완전히 밝히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생명의 비밀을 밝히지 못했다면, SF 작가들이 바이오펑크 소설들을 쓰지 말아야 할까요? SF 작가들이 인공 생태계나 생체 우주선 이야기를 쓰지 말아야 할까요?
만약 이런 논리를 전개한다면, SF 작가들은 아무것도 쓰지 못할 겁니다. 아니, 모든 작가는 소설을 쓰지 못하겠죠. 심지어 아주 작은 일상조차 장대한 우주 역사에서 자유롭지 못할지 모릅니다. 암흑 물질은 젊은 두 연인이 알콩달콩 데이트하는 일상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칠지 모르죠.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작가가 일상을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작가는 소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합니다. 작가는 소설을 쓰고 소설 속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으나, 작가는 그 세계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해요.
여기에서 우리는 왜 비평이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작가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작가가 소설을 쓴다고 해도, 작가는 소설 속의 세계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비평은 중요합니다. 좋은 비평은 작가가 놓친 한계를 파악하고 그런 한계를 넘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소설은 온전히 작가의 소유가 아닙니다. 누군가가 소설을 읽을 때, 소설은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혼자 읽기 위해 마이클 크라이튼이 <쥬라기 공원>을 썼을까요? 그건 아니겠죠. 마이클 크라이튼은 독자가 소설을 읽을 거라고 기대했을 겁니다. 따라서 독자가 읽을 때, 소설은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독자는 비평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작가가 무엇을 놓쳤는지. 좋은 비평은 그런 것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