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왜 사람들이 인공 지능 비평가를 언급하지 않는가 본문
인공 지능들이 소설들을 쓸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은 인공 지능이 놀랍다고 느끼거나 두렵다고 느낍니다. 소설 쓰기는 창작입니다. 소설 쓰기는 창의적인 예술 활동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주제, 사상, 철학을 글자들로 표현하기 원합니다. 인간이 일상을 글자들로 묘사하고 거기에 자신의 주제와 사상과 철학을 담을 때, 그건 소설이 됩니다. 소설을 정의하는 방법들은 많으나, 이런 정의 역시 크게 틀리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소설은 창의적인 예술 활동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직 인간만이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공 지능이 그런 영역에 들어왔을 때, 누군가는 그게 신기하다고 느끼고 누군가는 그게 두렵다고 느낄 겁니다. 누군가는 기계가 인간과 엇비슷하다고 놀랄 테고, 누군가는 기계가 인간의 영역을 침범했다고 두려워할지 모릅니다. 놀라움은 당연한 반응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두려움 역시 당연한 반응일까요. 소설을 읽은 이후,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인공 지능이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놀라워합니다. 물론 그건 창의적인 행동이 아닐지 모릅니다. 그건 그저 모방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사실 소설 쓰기는 독창적인 활동이 아닐지 모릅니다. 숱한 소설 작가 지망생들은 고전 소설들을 모방합니다. 그건 습작 과정이죠. 그런 습작 과정을 거친 이후, 소설 작가 지망생들은 고유한 필력들과 사상들을 익힐 수 있고 정말 독창적인 소설들을 내놓을 수 있어요.
그 자체로서 소설은 특별하지 않을 겁니다. 작가가 고유한 필력과 사상을 익히고 활화산처럼 영감을 분출할 때, 소설은 독창적인 예술 활동이 되겠죠. 소설이 대단한가요? 그 자체로서 소설이 대단한가요? 소설은 종이 위의 글자들입니다. 그 자체로서 소설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작가가 엄청난 고민과 성찰을 거쳤기 때문에 소설은 대단해집니다. 소설은 관념적인 생산물입니다. 소설은 정신 노동이 만든 결과물입니다. 사람들은 얼마든지 소설들을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얼마든지 소설들을 쓸 수 있다고 해도, 정말 독창적인 소설들은 드물 겁니다.
백인들은 흑인들이 야만적이라고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육아를 전담해야 한다고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열등하다고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소설들에게는 불쏘시개를 넘는 가치가 없겠죠. 소설은 종이 위의 글자들입니다. 그 자체로서 종이 위의 글자들에게는 가치가 없습니다. 깊은 고민과 성찰이 있을 때, 마침내 종이 위의 글자들은 가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세계적인 고전 문학들 역시 그저 종이 위의 글자들에 불과할 겁니다. 고전 문학들이 장광설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그것들은 그저 잉크 낭비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소설 쓰기는 특권이 아닙니다. 소설 쓰기는 지식 노동이고 정신 노동이고 의자 노동입니다. 소설은 관념적인 생산물입니다. 관념적인 노동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관념적인 노동은 보조적입니다. 소설책 따위가 없다고 해도, 인간은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빵 한 조각이 없다면, 인간은 굶어죽을 겁니다. 아무리 고전 소설들이 100권 있다고 해도, 굶주리는 사람에게 그것들은 불쏘시개보다 못하겠죠. 하지만 소설이 그저 정신 노동에 불과함에도, 사람들은 소설 쓰기가 대단하다고 숭배합니다. 그게 지배 계급을 떠받들 수 있기 때문이죠. 지배 계급이 육체 노동들을 저급하다고 무시하기 때문이죠. 지식인이라는 권력의 앞잡이들이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징징거리기 때문이죠.
피에르 부르디외가 지적한 것처럼, 문화는 지배 계급을 숭배할 수 있습니다. 그런 문화를 접할 때, 사람들은 지배적인 관념들을 재생산하죠. 그래서 육체 노동들이 인류 문명을 지탱함에도, 사람들은 육체 노동들이 천박하다고 무시하고 정신 노동들을 숭배합니다. 자본주의 사회 역시 다르지 않죠. 따라서 소설 작가들은 자신들이 정신 노동자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겁니다. 소설 작가들이 그것을 잊는다면, 소설 작가들은 기생충보다 못한 것들이 되겠죠. 하지만 소설 쓰기가 보조적인 정신 노동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작가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들 인문학이 위기라고 씨부렁거리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직 인문학만 위기인가요? 그 놈의 인문학이 뭐 그렇게 잘났나요? 뭐가 잘났기 때문에 위기라고 게거품을 무나요?
소설 작가들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습니다. 소설 작가들은 인류 문명을 지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소설을 먹지 못하고, 소설을 입지 못하고, 소설 속에서 살지 못합니다. 소설은 그저 관념적인 생산물에 불과합니다. 소설들은 쓸모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소설들이 현실을 제대로 반추할 때, 마침내 소설들은 가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제대로 반추하고 싶다면, 소설들은 지배 계급을 공격해야 합니다. 작가들에게 이건 꽤나 커다란 부담일 겁니다. 온갖 관념론들과 말장난들이 소설들을 비롯해 인문학을 지배하는 이유 역시 그런 것이죠. 관념론들과 말장난들이 옥수수 하나라도 키울 수 있나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창작이라는 정신 노동은 생산이 아니죠. 이건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사라져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창작과 표현의 자유는 소중합니다. 하지만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소중하다고 해도, 그런 자유 역시 비판을 받을 수 있겠죠.
소설 쓰기는 대단하지 않습니다. 소설 쓰기가 대단하지 않기 때문에, 인공 지능이 소설을 쓴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놀라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자체로서 소설들이 대단하다면, 이미 인류 사회는 진보적인 유토피아가 되었겠죠. 이 세상에서 발에 채이는 것들은 소설들입니다. 우리는 소설이 아니라 소설 속의 사상과 철학과 세계관과 주제에 주목해야 합니다. 소설이 그런 것을 제대로 구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글자들 나부랭이에 불과하겠죠.
사실 모든 것은 문학이 될 수 있습니다. 허리케인이 건물들을 무너뜨리고, 잔재들이 사방에 퍼졌을 때, 그것들은 기호들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런 잔재들이 신비로운 마법진이라고 간주할지 모릅니다. 사실 그것들은 정말 신비로운 마법진일지 모릅니다. 우리 인간들이 아직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건물 잔재들은 신비로운 마법진일지 모르죠. 그건 300년 이후 세상이 망한다는 계시일지 모릅니다. 물론 그게 정말 마법진이거나 계시라고 믿는 사람들은 별로 없겠죠. 허리케인에게 특별한 의도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허리케인이 건물 잔재들을 멋지게 늘어놓는다고 해도, 거기에는 철학과 사상과 세계관과 주제가 없습니다. 소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글자들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기호입니다. 그래서? 인공 지능이 기호들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그게 대단한가요?
인공 지능이 자연어들을 늘어놓는다면, 그건 대단하겠죠. 하지만 왜 우리가 기술적인 진보를 두려워해야 할까요? 자연어들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인공 지능이 창의적인 예술 활동을 펼치기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은 인문학이 대단하다고 숭배하고 소설 쓰기가 대단하다고 숭배합니다. 그래서 인공 지능들이 소설들을 쓸 때,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소설 쓰기는 대단하지 않아요. 인공 지능이 수 천 권의 소설책들을 쓴다고 해도, 그걸 두려워할 필요는 없죠. 자본주의 사회가 멀쩡하게 굴러간다고 생각하는 지식인들이 인공 지능을 두려워하는 모습은 그저 요란한 꼴불견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소설이 있다면 비평 역시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인공 지능이 비평한다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이건 다소 이상한 현상입니다. 왜 사람들이 오직 소설 쓰기만 중시하고 비평을 중시하지 않을까요? 비평이 창작 활동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창작은 뭔가 대단한 활동이나, 비평은 창작 활동에 들어가지 않죠. 그래서 사람들은 소설 쓰기가 대단하다고 숭배하고 비평을 숭배하지 않죠. 하지만 소설 쓰기는 대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소설을 중시하고 싶다면, 우리는 비평을 함께 중시해야 할 겁니다. 종종 좋은 비평 하나는 숱한 소설들보다 훨씬 낫습니다.
창작 활동을 숭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설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소설 쓰기가 별로 대단하지 않음에도, 작가들은 슬럼프에 빠지곤 하죠. 물론 소설 쓰기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허구적인 세계를 창조합니다. 소설을 쓸 때, 작가는 창조신이 됩니다. 작가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소설 쓰기가 굉장하다고 여깁니다. 종종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은 고되고 힘듭니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은 정말 고됩니다. 종종 작가들은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하지만 오직 소설 쓰기만 고된가요? 이 세상에는 소설 쓰기보다 훨씬 고된 노동들이 넘쳐납니다.
왜 그런 노동들이 넘쳐남에도, 우리가 오직 소설 작가들의 슬럼프만 주목해야 하나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고 해도, 작가가 정말 특별한 가치를 생산하나요? 우리가 그런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나요? 허구적인 세계 속에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나요? 아니, 그건 아닙니다. 아무리 작가가 허구적인 세계를 새롭게 창조한다고 해도, 그것은 종이 위의 글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세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세계 속에서 살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허구적인 세계가 반영하는 현실이고, 그런 현실이 드러내는 사상과 철학과 세계관과 주제일 겁니다. 그리고 비평은 소설을 읽기 위한 사상과 철학과 세계관과 주제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 쓰는 인공 지능이 화제가 된다고 해도, 비평하는 인공 지능은 화제가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비평은 소설 쓰기보다 훨씬 힘들지 모릅니다. 비평은 작가가 포착하지 못한 부분을 포착해야 합니다. 소설을 쓸 때, 작가는 현실을 모두 반영하지 못합니다. 작가는 많은 부분들을 빠뜨립니다. 좋은 비평가는 그걸 포착하고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인공 지능이 그걸 할 수 있을까요? 인공 지능이 정말 문명과 자연을 고민하고 작가가 무엇을 빠뜨렸는지 지적할 수 있을까요? 진부하고 상투적인 비평은 종이 위의 글자들이죠. 인공 지능이 그걸 넘어 정말 제대로 비평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건 많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만약 인공 지능이 그걸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걸 반겨야 할 겁니다. 좋은 비평들이 늘어난다면, 그런 비평들은 지배적인 관념을 공격할 수 있을 테고, 세상은 훨씬 평화롭고 평등해질 수 있겠죠. 그런 인공 지능 비평가들이 나타날 때, 우리는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