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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이야기와 논리, 소설과 사상

OneTiger 2018. 11. 12. 17:34

한때 <논리야 놀자> 시리즈는 크나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논리야 놀자> 시리즈는 철학적인 논리들을 간단하게 알려주는 책들입니다. <논리야 놀자> 시리즈를 읽은 이후, 어린 독자들은 어떤 현상을 좀 더 논리적이고 근본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가령, 여기에 어떤 장군이 있습니다. 장군은 병사들에게 벌을 주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장군은 병사들이 돼지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명령했습니다. 병사들은 고개들을 갸웃거렸죠. 돼지고기? 돼지고기가 처벌이 될까요? 게다가 이건 상하거나 맛없는 돼지고가 아닙니다. 장군은 아주 맛있고 기름진 돼지고기를 내밀었고 병사들이 이걸 먹어야 한다고 명령했습니다.


병사들은 아주 잘 먹었죠. 병사들은 무시무시한 처벌을 예상했으나, 예상과 달리, 그들은 배부르게 맛있는 고기를 즐겼습니다. 왜 장군이 돼지고기가 처벌이라고 말했을까요. 장군이 돼지고기를 싫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장군에게는 돼지고기 알레르기가 있었고 그래서 돼지고기가 가장 혐오스러운 음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군은 다른 사람들 역시 돼지고기를 싫어할 거라고 착각했고 병사들이 돼지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명령했죠. 이런 사고 방식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관점에서만 장군은 세상만물을 파악했을 뿐입니다.



<논리야 놀자> 시리즈에는 이런 사례들이 많습니다. <논리야 놀자> 시리즈는 재미있고 간단한 이야기를 제시합니다. 돼지고기를 싫어하는 장군처럼, 이런 이야기들은 꽤나 우스꽝스럽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제시한 이후, <논리야 놀자> 시리즈는 왜 이야기가 우스꽝스러운지 논리적으로 분석합니다. 이렇게 <논리야 놀자> 시리즈에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들과 논리적인 분석들이 있어요. 그래서 어린 독자들은 이 시리즈를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논리적인 분석'은 꽤나 딱딱한 느낌을 풍깁니다. 사람들은 논리적인 분석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겠죠. 어떤 사람들은 이런 분석을 좋아하겠으나, 그렇다고 해도 논리적인 분석은 딱딱한 느낌을 풍깁니다. 논리적인 분석을 배우기 위한 진입 장벽은 높겠죠.


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는 진입 장벽을 낮춥니다. <논리야 놀자> 시리즈를 읽는 동안, 본격적으로 논리 분석을 배우기 전에 어린 독자들은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우스꽝스러운 이야기 덕분에 독자는 쉽게 논리에 접근할 수 있죠. 어떻게 딱딱한 분석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해체하는지 구경하는 동안,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논리적인 사고 방식을 키울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들이 없었다면, 독자들은 논리 분석이 어렵고 지루하다고 느꼈을지 모릅니다. <논리야 놀자> 시리즈는 논리가 절대 학구적이지 않고 일상과 동떨어진 요소가 아니라고 말해요.



물론 이런 방법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논리적인 분석보다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에 몰입할지 모릅니다.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독자들은 이야기들을 읽을지 모르죠. 돼지고기를 싫어하는 독자들은 장군에게 감정을 이입할지 모릅니다. 장군에게 감정을 이입했다면, 독자들은 왜 장군이 잘못했는지 느끼지 못할지 모릅니다. "와, 이 장군이 돼지고기를 싫어해? 나와 장군은 비슷하구나. 불쌍한 장군. 쯧쯧쯧." 이렇게 어떤 독자들은 느낄지 모릅니다. 이런 독자들은 논리적인 분석을 받아들이기보다 그저 장군이 불쌍하다고 동정할 뿐이겠죠.


사실 누군가가 이야기를 통해 분석과 논리와 해체를 말할 때, 이런 방법에는 언제나 문제가 있습니다. 이야기를 통해 논리를 전달하고 싶다면, 그 사람은 문제를 각오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논리보다 이야기에 훨씬 주목할지 모릅니다. 논리 그 자체가 명확한다고 해도,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는 명확한 논리를 흐릴지 모릅니다. 장군과 돼지고기 이야기는 간단한 사례이나, 훨씬 복잡한 사건을 다루어야 한다면, 우리는 쉽게 오류에 빠지거나 논점을 놓칠지 몰라요. 하지만 이런 방법(이야기를 통해 논리를 다루는 방법)은 진압 장벽을 낮출 수 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런 방법을 사용하죠.



논리가 순수 과학이라면, 이야기는 응용 과학일지 모릅니다. 수학이 순수 과학이고 각종 기계 공학들이 응용 과학인 것처럼, 논리적인 분석과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는 그런 관계를 맺었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논리를 이용해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겠죠. 이야기 속에는 논리가 있고, 이야기는 논리에 기반하겠죠. 이런 것들을 이용해 사람들은 논리를 좀 더 쉽게 전달할 수 있을 겁니다. 한때 슬라보예 지젝의 비평 방법은 꽤나 유행했습니다. 슬라보예 지젝은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이 예술을 비평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철학 그 자체가 너무 딱딱하다면, 우리는 비평을 통해 철학을 유연하게 풀어낼 수 있겠죠.


소설 역시 이런 역할을 맡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소설은 이야기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 독자들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특별한 논리에 기반할지 모릅니다. 이야기 속에는 특별한 논리가 있을지 모릅니다. 물론 작가는 그런 논리를 독자에게 직접 전달하지 못합니다. <논리야 놀자> 시리즈와 달리, 소설들에는 논리적인 분석이 없습니다. 작가는 직접 이야기를 해체하고 분석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그저 이야기를 들려줄 뿐입니다. 이야기에서 특별한 논리를 찾는 몫은 독자들의 몫입니다.



가끔 어떤 작가들은 자신들의 소설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직접 설명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작가들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게 소설의 감흥을 해칠지 모르기 때문이죠. 설사 작가가 직접 설명한다고 해도, 독자들은 그런 설명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작가가 신이 아니기 때문이죠. 작가는 소설을 창작합니다. 그래서 작가는 소설 속의 창조주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 역시 소설 속의 세계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합니다. 소설은 현실을 반영합니다. 작가는 고작 개인에 불과합니다. 고작 개인은 현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작가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을 완전히 소설에 반영할 수 있겠어요.


작가가 특정한 주제를 말하기 원한다고 해도, 소설이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에, 현실이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작가는 소설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작가가 소설을 직접 분석하고 해체하고 설명한다고 해도, 독자는 그걸 무시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이 장군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처럼, 소설은 아주 엉뚱한 해석들을 낳을 수 있어요. 심지어 작가들은 그런 해석들을 싫어하거나 부정하고 싶어할지 몰라요.



그렇다고 해도 작가들은 그것들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소설을 쓸 때, 작가는 그런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작가는 독자와 커다란 싸움을 벌이거나 커다란 갈등을 빚을지 모르죠. 그래서 작가들과 비평가들은 서로 싫어할지 모르죠. 비평가들은 작가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꼬집을 수 있습니다. 반면, <논리야 놀자> 시리즈는 이런 소설들과 다릅니다. 소설들과 달리, 평론가들이나 독자들은 <논리야 놀자>를 이용해 다양한 해석들을 늘어놓지 못할 겁니다. 이 책들이 특정한 논리를 의도적으로 펼치기 때문입니다.


<논리야 놀자> 시리즈는 오해를 불러일으킬지 모릅니다. 독자들이 장군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처럼, 이야기에는 언제나 다양한 해석들이 있죠. 그렇다고 해도 <논리야 놀자> 시리즈는 '이야기와 분석을 함께 제시'합니다. 반면, 소설은 그렇지 않습니다. 소설에는 아예 해체와 분석이 없습니다. 사실 소설의 목적은 해체와 분석이 아니죠. 그래서 <논리야 놀자> 시리즈가 수많은 이야기들을 담았음에도, 이건 소설 모음집이 아니죠. <논리야 놀자> 시리즈는 분석들과 해체들을 통해 특정한 논리를 펼칠 수 있으나, 소설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논리야 놀자>는 소설 형식을 빌릴 수 있으나, 이건 소설이 아닙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는 소설 같으나 소설이 아닌 매체들이 많을 겁니다. 어떤 매체는 소설과 비슷하나, 그 알맹이는 소설이 아닐지 모르죠. 만약 SF 독자들이 이반 예프레모프가 쓴 <안드로메다 성운> 같은 SF 유토피아 소설에 이런 시각을 적용할 수 있다면? <안드로메다 성운>이 무엇에 가까울까요? <논리야 놀자> 시리즈? 일반적인 소설? <안드로메다 성운>이 추구하는 주제는 뚜렷합니다. 아무리 독자들이 다양하게 해석하고 싶다고 해도, 독자들은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자본주의가 좋다는 주제를 이끌어내지 못하겠죠.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정말 <안드로메다 성운>이 다양한 해석들을 거부할 수 있을까요?


소설이라는 형식을 바라볼 때, <안드로메다 성운>은 이런 갈림길에 서야 할지 모릅니다. 물론 수많은 평론가들과 독자들은 <안드로메다 성운>이 소설에 가깝고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하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히 <안드로메다 성운>에는 <논리야 놀자>와 비슷한 구석들이 없지 않죠. 소설이라는 형식을 이야기할 때, <안드로메다 성운>을 이야기할 때, 독자들은 이런 점을 고민할 수 있을 겁니다. 독자들은 비단 <안드로메다 성운>만 아니라 다른 유토피아 소설들에 이런 점을 적용할 수 있겠죠.



<안드로메다 성운>이 일반적인 공산주의 사상 서적들보다 감동적이고 재미있다면,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특별한 주제와 논리가 존재함에도, 여기에 비유가 있고 감정 이입이 있고 다른 해석이 있기 때문일지 모르죠. 어떤 독자들은 일반적인 소설보다 이런 소설이 훨씬 매력적이라고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서로 대조되는 두 가지가 섞일 때, 그건 아주 독특한 느낌을 풍길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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