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F 생태주의

베케트와 렘은 고도와 솔라리스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본문

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베케트와 렘은 고도와 솔라리스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OneTiger 2018. 11. 3. 18:37

"나는 고도가 누구인지 모른다. 내가 고도를 알았다면, 나는 그걸 썼을 것이다." 사무엘 베케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때문이었죠.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두 주인공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고도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고도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계속 고도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동안 여러 대화들을 주고받습니다. 1막과 2막에 걸쳐 두 주인공은 계속 고도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결국 고도는 나타나지 않아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고도를 기다리나, 2막에서 희곡은 끝날 때까지 고도는 나타나지 않죠.


만약 희곡이 3막이나 4막이나 5막으로 계속 이어지고,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계속 고도를 기다린다고 해도, 결국 고도는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가장 커다란 사건은 고도가 나타나지 않은 사건이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일은 가장 커다란 일입니다. 그래서 이 연극을 관람한 이후, 수많은 평론가들과 관객들은 물었을 겁니다. 도대체 고도가 누구인가? 고도가 누구이고, 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고도를 기다리는가? 고도는 모비 딕과 비슷합니다. <백경>을 읽은 이후, 평론가들과 독자들이 백경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묻죠. 백경처럼, 고도가 무엇일까요?



유명한 해석들 중에서 하나는 고도가 '혁명'이라는 해석입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1952년 희곡입니다. 1950년대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블라디미르가 누구일까요? 그건 블라디미르 레닌일 겁니다. 1950년대는 냉전이 시작한 시기이고, 냉전 구도에서 유럽 및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은 서로 적대했죠. 소비에트 연방을 창시한 인물은 블라디미르 레닌입니다. 레닌은 직접 소비에트 연방을 창시하지 않았으나, 레닌이 러시아 10월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에, 소비에트 연방은 나타날 수 있었죠. 따라서 희곡 속의 블라디미르는 블라디미르 레닌을 가리키는지 모릅니다.


만약 블라디미르가 레닌이라면, 블라디미르는 사회주의 혁명을 간절히 기다리겠죠. 에스트라공은 블라디미르가 마지막 순간을 꿈꾼다고 말합니다. 꿈꾸는 것처럼 블라디미르는 마지막 순간을 중얼거리고 계속 고도를 기다립니다. 사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사회주의 혁명을 간절히 꿈꿨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은 억압을 뒤집는 해방이죠. 사회주의 혁명은 억압의 마지막 순간입니다. 하지만 레닌은 언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예 레닌은 자신이 혁명을 목격하지 못할 거라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건 혁명 의도를 감추기 위한 위장 전술일지 모르나, 정말 레닌은 자신이 혁명을 목격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이런 관점에서 고도를 줄기차게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혁명을 줄기차게 기다리는 레닌은 서로 비슷합니다. 만약 블라디미르를 연기하는 배우가 레닌과 비슷하게 생겼다면, 그 연극은 논란들에 휩싸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건 수많은 해석들 중에서 그저 하나에 불과합니다. 고도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해석은 그저 해석에 불과하죠. 이건 정답이 아닙니다. 게다가 숱한 평론가들과 관객들은 온갖 해석들을 내놓았습니다. 고도는 신이거나 운명이거나 사랑이거나 유토피아거나 심판의 날이거나 불금이거나 여름 방학이거나 월급날일지 모릅니다. 만약 고도가 월급날이라면, 월급쟁이들은 정말 공감하는 심정으로 <고도를 기다리며>를 관람할 수 있겠죠. 배경 무대가 사무실이라면, 그건 훨씬 실감이 날지 모릅니다.


만약 고도가 여름 방학이라면, 학생들은 1학기가 정말 지루하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여름 방학에 CC와 함께 해변으로 놀러가고 재미있게 물놀이를 즐기고 화끈한 밤에 끈적거리는 섹ㅅ… 같은 것들은 오지 않을지 모릅니다. 만약 고도가 사랑이라면, 이건 모태 솔로들의 심금을 울릴지 모릅니다. 결국 고도는 오지 않습니다. 결국 사랑은 오지 않습니다. 결국 모태 솔로들은 짝을 찾지 못합니다. 모태 솔로들은 그저 사랑을 기다릴 뿐입니다. 아, 이건 정말 모태 솔로들에게 치명타가 되겠어요. 모태 솔로들은 이런 해석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싶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도 해석들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사무엘 베케트조차 부정하지 못하겠죠. 사무엘 베케트 역시 고도가 누구인지 모를 겁니다.



흔히 사람들은 작가가 창작물을 완전히 장악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창작물을 만듭니다. 작가는 새로운 허구적인 세계를 만듭니다. 작가는 창조신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작가가 허구적인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작가가 허구적인 세계를 만든다고 해도, 작가는 그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사무엘 베케트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고도를 기다린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사무엘 베케트는 고도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문학에서 이런 사례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고도를 기다리며>가 주류 문학에 속하고 다른 장르 문학들은 예외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정말 그럴까요? 장르 문학들이 예외일까요? 소설 <노변의 피크닉>에서 외계인들은 지구를 방문합니다. 지구를 방문한 이후, 지구에는 기이한 구역들이 생기고 기이한 현상들이 벌어집니다. 지구인들은 왜 그런 현상들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합니다. 지구인들은 왜 외계인들이 지구를 방문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떤 과학자는 인간이 뒷산에 소풍가는 것처럼 외계인들이 지구에 소풍을 다녀갔다고 추측합니다. 만약 인간들이 과일 쥬스 병을 버린다면, 꿀벌들은 과일 쥬스 병을 들락거리고 달달한 쥬스를 마시겠죠.



하지만 꿀벌들은 과일 쥬스 병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과일 쥬스 병은 꿀벌의 이해 수준을 넘어서죠. 이것처럼 외계인들은 그저 쓰레기들을 버렸을 뿐일지 모릅니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쓰레기들을 버렸겠죠. 하지만 그걸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기이한 구역이 대단하다고 착각하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이런 추측이 옳은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외계인들이 소풍을 다녀갔을까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다른 이유들이 있을지 모르나, 아무도 그걸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스트루가츠키 형제조차 그걸 알지 못할 겁니다.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SF 소설을 썼으나, SF 소설 속의 세상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누군가는 <노변의 피크닉>이 초현실주의 소설에 가깝고 본격적인 SF 소설이 아니라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좋습니다. 스타니스와프 렘이 쓴 <솔라리스>와 아서 클라크가 쓴 <라마와의 랑데부>는 본격적인 하드 SF 소설들입니다. 하지만 왜 솔라리스가 방문자들을 보냈는지 스타니스와프 렘이 알까요? 왜 라마 우주선이 태양계로 날아왔는지 아서 클라크가 알까요? 아니, 스타니스와프 렘과 아서 클라크는 알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주류 문학처럼, 하드 SF 소설들 역시 숱한 해석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물론 주류 문학보다 하드 SF 소설들은 훨씬 적은 해석들을 낳을 겁니다. 스타니스와프 렘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솔라리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하드 SF 소설들은 SF 장르입니다. SF 장르에는 나름대로 여러 공식들이 있습니다. SF 장르를 해석할 때, 독자들과 평론가들은 그런 공식들을 따릅니다. 독자들과 평론가들이 공식들에서 벗어난다면, 그건 장르를 제대로 해석하는 방법이 아닐 겁니다. 그것 역시 창작과 표현의 자유겠으나, 독자들과 평론가들이 장르 공식들에서 너무 멀리 벗어난다면, 해석이라는 행위는 의미를 잃을 겁니다.


모든 것이 해석들이 될 수 있다면, 평론 방법들은 존재할 명분을 잃겠죠. 왜 장르가 장르인지 독자들과 평론가들은 논리적으로 고민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그런 고민 위에서 독자들과 평론가들은 해석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주류 문학보다 하드 SF 소설들은 훨씬 적은 해석들을 낳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해석들 역시 분분하겠죠. 이미 <솔라리스>에서 솔라리스 학파 과학자들 역시 분분한 해석들을 늘어놓았습니다. 솔라리스 학파 과학자들이 그랬다면, 독자들 역시 그럴 수 있겠죠.



※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라는 단편 소설에서 아서 클라크는 사랑이 우주를 바꿀 수 있다고 썼습니다. 그렇게 사랑은 강력한 감성이고 강력한 힘입니다. 이 소설에서 사랑은 비단 연애 감정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연애 감정 역시 얼마든지 사랑에 들어갈 수 있겠죠. 어쩌면 연애 감정은 사랑을 대표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사랑이 우주적이고 강력한 힘이라면, 모태 솔로들 역시 사랑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고도가 사랑을 상징한다고 해도,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겠죠. 사랑은 우주적이고 강력합니다. 분명히 사람들은 사랑을 찾을 수 있겠죠.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