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비평가들의 임무 본문
에릭 올린 라이트는 세계적인 사회학자이고 계급 분석의 권위자입니다. 동시에 에릭 올린 라이트는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입니다. 세계적인 석학들 중에서 마르크스주의자를 꼽는다면, 사람들은 열 손가락들 안에 에릭 올린 라이트를 집어넣어야 할지 모릅니다. 에릭 라이트 역시 자신이 유명한 사회학자이고 동시에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 같습니다. <리얼 유토피아>는 해방적인 사회 과학을 자세히 열거하고 파악하는 사회학 서적입니다. 이 서적의 서문에서, 특히, 남한 독자들을 위한 서문에서 에릭 올린 라이트는 왜 자신이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인지 밝힙니다.
에릭 올린 라이트는 지식인이 안락하고 타성적인 특권에 빠질 수 있다고 걱정합니다. 그리고 에릭 라이트는 자신이 그런 지식인이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여기에는 찬반 양론이 있겠죠. 어쩌면 누군가는 에릭 라이트가 좌파 운동가들에게 여러 이론적인 근거들을 제공한다고 호평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에릭 라이트 역시 숱한 부르주아 지식인들과 다르지 않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누가 옳든, 에릭 라이트는 그런 호평들과 비판들을 의식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건 (비단 좌파 지식인만 아니라) 모든 지식인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일지 모르죠.
20세기에서 이런 문제를 가장 깊이 고민한 지식인들 중에서 하나는 장 폴 사르트르일 겁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지식인이 무엇이고 지식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 역시 자신이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인식했고 어떻게 자신이 사회 문제들에 참가할 수 있는지 논증했죠. <작가는 지식인인가>는 이런 사유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작가는 지식인인가>는 그저 작가와 문학을 정의하는 내용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지식인인가>는 문학이 무엇인지 밝히고 왜 작가와 문학이 사회 문제들에 참가해야 하는지 이야기합니다.
설사 이런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렇게 우리는 정리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지식인이거나 지식인이 아닐지 모릅니다. 학자와 달리, 작가는 무조건 지식인이 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학자들처럼, 작가는 종이 노동자, 의자 노동자, 정신 노동자입니다. 학자들처럼, 작가들은 글을 씁니다. 작가가 글을 쓰기 때문에, 이런 범주 안에서 작가와 지식인은 비슷한 위상이 됩니다. 지식인에게 사회 문제들에 참가할 의무가 있다면, 작가 역시 사회 문제들에 참가해야 할 겁니다. 작가는 사회 문제들에 참가하고, 약자들을 변호하고, 강자들을 규탄해야 하겠죠.
사실 종이 노동, 의자 노동, 정신 노동은 생산적인 노동이 아닙니다. 종이 노동이 뭔가를 생산한다고 해도, 그건 물리적이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작가가 소설책 100권을 쓴다고 해도, 그건 생산이 아닙니다. 우리는 글을 먹거나 글을 입거나 글 속에서 살지 못합니다. 글은 관념적인 생산물이고 물리적인 생산물이 아닙니다. 아무리 작가가 능수능란한 필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글은 그저 글에 불과합니다. 만약 전세계 사람들이 오직 글들만 쓴다면, 아무도 농사를 짓지 않고 직물을 짜지 않고 집을 짓지 않는다면, 인류 문명은 무너질 겁니다. 우리가 인류 문명을 유지하고 싶다면, 우리는 생산적인 노동들에 종사해야 합니다. 생산적인 노동들이 있기 때문에 작가들 역시 글을 쓸 수 있죠.
따라서 생산적인 노동들은 종이 노동들보다 선행합니다. 아무리 작가가 굉장한 필력으로 소설책들을 몇 천 권 쓴다고 해도, 그것들은 빵 한 조각보다 못할지 모릅니다. 그런 작가가, 그렇게 생산적인 노동들에 종사하지 않는 작가가 사회 문제들을 외면하고 약자들을 외면하고 수탈들과 오염들을 외면한다면? 작가는 기생적인 존재가 되겠죠. 작가는 생산적인 노동들에 기생하는 존재가 될 겁니다. 작가는 기생충이 되겠죠. 아니, 작가는 기생충보다 훨씬 못할지 모릅니다. 적어도 기생충은 생물 다양성에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기생적인 작가는 그렇지 못하겠죠.
그래서 작가는 사회 문제들에 참가하고, 약자들을 옹호하고, 수탈들과 오염들을 규탄해야 할 겁니다. 작가에게는 그런 임무가 있을지 모릅니다. 적어도 생산적인 노동들에 종사하지 않는다면, 작가는 그런 것들을 말할 수 있어야 하겠죠. 비평가는 어떨까요? 작가가 나타난다면, 비평가 역시 나타날 겁니다. 작가가 소설을 쓴다면, 누군가는 그걸 비평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그런 비평 노동에 종사한다면, 그 사람은 비평가가 되겠죠. 작가처럼, 비평가 역시 종이 노동자, 의자 노동자, 정신 노동자입니다. 비평가 역시 글쟁이입니다. 비평가 역시 생산적인 노동자가 아닙니다.
아무리 비평가가 예리하고 날카로운 시각으로 소설들을 비평한다고 해도, 우리는 비평을 먹거나 비평을 입거나 비평 속에서 살지 못합니다. 비평 역시 글입니다. 비평은 음식이 아니고, 옷이 아니고, 집이 아닙니다. 전세계 인류가 모두 비평가가 된다면, 전세계 인류가 생산적인 노동들에 종사하지 않는다면, 인류 문명은 무너질 겁니다. 작가처럼, 비평가는 그런 사실을 의식해야 할 겁니다. 사람들이 생산적인 노동들에 종사하지 않는다면, 비평가는 글자 하나 쓰지 못하겠죠. 따라서 생산적인 노동자들이 억압을 받거나 오염되었을 때, 비평가는 그걸 의식하고 그걸 강렬하게 규탄해야 할 겁니다.
그건 '비평가의 임무'일지 모릅니다. 비평가에는 그런 임무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회 문제들을 떠들지 않는다면, 약자들을 외면한다면, 수탈들과 오염들을 간과한다면, 비평가는 비평가의 임무를 지키지 못하겠죠. 여기에서 우리는 좀 더 깊이 들어가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문학 비평을 언급할 때, 사람들은 주류 문학 비평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문학에는 장르 소설들이 있죠. SF 소설, 판타지 소설, 로맨스 소설, 공포 소설, 탐정 소설, 기타 등등. 비평가에게 임무가 있다면, SF 비평가에게도 임무가 있을까요? SF 비평가가 '비평가의 임무'를 지켜야 할까요?
네, SF 비평가 역시 '비평가의 임무'를 지켜야 할지 모릅니다. SF 소설 역시 소설이고, SF 비평가 역시 종이 노동자입니다. SF 비평문들은 정신 노동, 관념적인 생산물입니다. SF 비평문들 속에서 비평가가 우주 탐사선을 날리고, 행성 공학을 시도하고, 외계 문명과 만난다고 해도, 그것은 모두 관념적인 생산물입니다. 비평가가 우주 탐사선을 날리고, 행성 공학을 시도하고, 외계 문명과 만난다고 해도, 그것들은 빵 한 조각보다 못할 겁니다. 농민들과 제빵사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빵 한 덩이를 만들기 때문에 비평가는 우주 탐사선과 행성 공학과 외계 문명을 떠들 수 있겠죠.
에릭 올린 라이트가 자신이 무슨 지식인인지 자문한 것처럼, SF 비평가 역시 그럴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아니, SF 소설이 미래를 전망하기 때문에 SF 비평가는 훨씬 근본적으로 인류 문명을 들여다봐야 할 겁니다. 주류 문학 비평가들처럼, SF 비평가가 미래 전망을 떠들지 않는다면, 그게 정말 SF 비평이 되겠습니까. 물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SF 비평가가 지식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온갖 철학자들과 예술가들과 주류 문학 비평가들과 달리, SF 비평가는 일반적인 지식인이 아니죠. 하지만 SF 비평가는 지식인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SF 비평가들은 '비평가의 임무'를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