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이야기를 위한 SF 소설 시제들 본문
첫머리에서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몇몇 문구를 보여줍니다. 지구 자연 생태계는 사라졌고, 타이렐 회사는 도산했고, 월레스 회사는 인공 생태계를 만들었고, 블레이드 러너들은 넥서스 8 레플리칸트들을 추격하고 퇴역시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관객들은 이런 설명들을 읽어야 합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영화이고, 영화는 영상 중심적인 매체이나, 영화를 보기 전에 먼저 관객들은 설명들을 읽어야 합니다. 이런 설명들은 '과거 시제들'을 사용합니다. 이런 설명들이 미래를 가리킨다고 해도, 이런 설명들은 '과거 시제'들을 사용합니다. 2020년대 중반에서 지구 자연 생태계는 사라졌습니다.
영화 시대 배경 2049년에 지구 자연 생태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지구에는 오직 인공 농장들만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2020년이나 2049년은 오지 않았습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2017년 영화이고, 제목과 달리, <블레이드 러너 2049>에게 2020년이나 2049년은 미래입니다. 미래 2020년이나 2049년을 이야기함에도, <블레이드 러너 2049>는 2020년이 '과거'라고 간주합니다. 적어도 <블레이드 러너 2049>를 관람할 때, 관객들은 2020년이 과거라고 간주해야 합니다. 이 영화가 과거 시제를 사용해 2020년대 중반에 자연 생태계가 사라졌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2020년대 중반에 자연 생태계가 사라질 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2020년대 중반에 자연 생태계가 사라진다고 해도, 이 영화는 미래 시제를 도입하지 않습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2020년대는 이미 과거입니다.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관객들은 '과거 기록'을 봅니다. 2017년 관객들에게 2020년은 과거입니다. 이런 설명들 때문에,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들은 2020년이 과거라고 의식해야 합니다. 관객들이 그걸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고 해도,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들에게 2020년은 과거입니다. 만약 이런 설명들이 빠진다면, 상황이 바뀔까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2049년 메트로폴리스를 묘사합니다. 2049년 메트로폴리스에게 2020년은 과거입니다. 2049년 메트로폴리스를 보는 동안, 관객들은 2020년이 과거라고 의식해야 합니다.
첫머리에서 <블레이드 러너 2049>가 설명 문구들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2017년 관객들에게 2020년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입니다. 2049년은 어떨까요? 관객들이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관객들에게 2049년이 과거일까요, 현재일까요, 미래일까요?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들은 영화 주인공 케이를 계속 따라갑니다. 관객들은 케이가 무엇을 할지 알지 못합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들에게 케이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게다가 케이가 행동할 때, 관객은 그걸 과거라고 인식합니다. 케이가 권총으로 어떤 남자를 쏘거나 기준선 시험을 통과한다면, 관객은 '방금 전에 케이가 남자를 쐈어'라고 생각하거나 '방금 전에 케이가 기준선 시험을 통과했어.'라고 생각할 겁니다. 2049년 미래에서 케이가 기준선 시험을 통과한다고 해도, 2017년 관객은 그 사건을 과거로 인식합니다. 관객은 '케이가 기준선 시험을 통과할 거야.'라고 미래 시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케이 이외에 많은 것들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리고 많은 것들은 과거입니다. 영화 시대 배경이 2049년이기 때문에, 관객들이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들에게 (영화 속의) 2048년은 과거입니다. 2017년에 관객들이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보는 동안, 2017년 관객들에게 2048년은 과거가 됩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볼 때, 관객들은 미래가 과거라고 의식해야 합니다. 게다가 (미래가 되는) 이 과거는 꽤나 이상한 과거입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케이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케이 이외에 다른 사람들 역시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홀로그램 조이는 꽤나 신기한 장치이나, <블레이드 러너 2049>에는 태블릿 PC가 없는 것 같습니다. 왜 케이가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을까요? 전작 <블레이드 러너>가 스마트폰이 없는 미래를 그렸기 때문입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그걸 계승했고 스마트폰이 없다고 설정했습니다. 따라서 2017년 관객들은 '스마트폰이 없는 미래가 되는 과거 2048년'을 의식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이건 꽤나 골 때리는 상황입니다. 영화가 심오한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이미 골 때리는 상황입니다.
비단 <블레이드 러너 2049>만 아니라 다른 숱한 SF 영화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에일리언>은 미래입니다. 1979년에 이 영화를 봤을 때, 관객들은 <에일리언>이 미래를 묘사한다고 느꼈을 겁니다. 하지만 <에일리언>에서 많은 미래들은 과거들입니다. 1979년에 인류 문명이 거대한 우주 화물선을 띄우지 못했음에도, <에일리언>을 관람하는 동안, 관객들은 우주 항해 시대가 과거라고 간주해야 했습니다. <에일리언>에서 노스트로모 승무원들이 LV-426 행성에 들리고, 스페이스 쟈키와 만나고, 페이스 허거에게 당하고, 에일리언에게 쫓기는 동안, 관객들은 그것들이 현재 진행형이라고 느낍니다.
그것들은 미래이나, 관객들은 그것들이 미래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고 느낍니다. 그리고 어떤 미래는 과거가 됩니다. 노스트로모가 화물들을 실었을 때, 그건 과거가 됩니다. 영화 <에일리언>에서 화물들을 수송하기 위해 노스트로모는 이미 항해하는 중입니다. 따라서 화물 적재는 과거 사건입니다. 현실 속에서 1979년 인류 문명이 거대한 우주 화물선을 띄우지 못했음에도, 노스트로모가 화물들을 실었을 때, 1979년 관객들은 그게 과거라고 느껴야 했습니다. 이렇게 SF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들은 어떤 미래들이 현재 진행형이라고 느끼고 어떤 미래들이 과거라고 느낍니다.
비단 SF 영화만 아니라 SF 만화, SF 연극, SF 애니메이션, SF 게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고, 관람하고, 플레이할 때, 사람들은 미래들이 과거이거나 현재 진행형이라고 느낍니다. 미래는 절대 미래가 되지 못합니다. 특히, SF 소설에서 이런 모순은 훨씬 심합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처럼, 소설 <2001 우주 대장정>은 연도를 제목에 달았습니다. <2001 우주 대장정>은 1968년 소설입니다. 1968년에서 아서 클라크가 이 소설을 출판했을 때, 아서 클라크에게 2001년은 미래였습니다.
소설 속에서 1999년 우주 항해하는 동안 플로이드 박사가 디미트리 박사를 만났을 때, 1968년 아서 클라크에게 그건 미래였습니다. 미래를 묘사함에도, 아서 클라크는 계속 과거 시제들을 동원합니다. 과거 시제들 때문에 1968년 아서 클라크에게 1999년 우주 항해는 과거가 됩니다. <2001 우주 대장정>은 1999년 우주 항해가 과거라고 간주합니다. 1968년에서 <2001 우주 대장정>을 읽었을 때, 독자들은 이런 모순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2017년 독자는 2001년이 더 이상 미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2017년 독자는 2001년 인류 문명이 유인 우주선을 태양계 외부 행성에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압니다. 2017년 독자에게 소설 속의 미래는 이상한 과거입니다.
이렇게 사이언스 픽션들은 이상한 모순들을 보여줍니다. SF 만화를 보고, SF 연극을 관람하고, SF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사람들은 이런 모순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특히, SF 소설에서 이런 모순은 가장 커집니다. SF 소설들이 글자들을 사용하고, 서술 문장들이 계속 과거 시제들을 늘어놓기 때문입니다. SF 소설들이 오직 현재 시제들만 사용한다고 해도,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를 관람하는 관객들이 그런 것처럼, 독자들은 미래가 현재 진행형이라고 의식해야 합니다. 소설 <와인드업 걸>이 현재 시제를 동원한다고 해도, <와인드업 걸>은 미래를 말하지 못합니다. <와인드업 걸>은 그저 현재 진행형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와인드업 걸> 같은 SF 소설은 미래학 서적이 되지 못합니다. 온갖 미래학 서적들은 미래를 예상합니다. 미래학 서적들을 읽을 때, 독자들은 '미래는 이럴 것이다'라는 미래 시제를 읽을 수 있습니다. 미래학 서적들은 미래 시제들을 동원합니다. 반면, SF 소설들은 미래 시제들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SF 소설들은 과거 시제들을 동원하고, 어떤 SF 소설들은 현재 시제들을 사용합니다. 미래학 서적들과 SF 소설들은 똑같이 글자들을 이용해 미래를 이야기하나, 미래학 서적들은 미래 시제들을 동원하고, SF 소설들은 과거 시제들을 동원합니다. SF 소설 속에서 미래는 과거이거나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래서 SF 소설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잠자리에서 할머니가 손녀에게 "옛날 옛적에 어떤 마을에 영희와 철수가 살았단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야기는 과거 사건을 묘사합니다. 어떤 마을에서 영희와 철수가 서로 좋아했고, 뽀뽀했고, 연애했고, 결혼했을 때, 그것들은 과거 사건입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옛날 옛적에."라고 말합니다. 사실 고대부터 인류가 이야기를 만들었을 때, 이야기는 과거를 묘사해야 했습니다. 숱한 신화들을 과거(어떻게 세상이 나타났는가)를 말합니다. 어떤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는 거미 여인이 실을 짰고 세상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거미는 그물망, 체계를 만듭니다. 그래서 거미는 세계를 형성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과거에 이렇게 세상은 나타났습니다. 이건 과거입니다. 이야기는 어떻게 우리가 나타났는지 증명해야 하고, 그래서 이야기는 과거 사건을 묘사합니다. 현대(근대) 소설은 더 이상 이런 역할을 떠맡지 않으나, 여전히 현대 소설은 과거 사건을 묘사합니다. SF 소설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래학 서적과 SF 소설은 다릅니다. SF 소설은 현재 진행형 너머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SF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이야기 속에 빠질 수 있습니다. SF 독자는 외계 바이오 돔에서 공학 기술자와 생태학자가 서로 좋아하고 뽀뽀하고 연애하고 결혼하는 이야기에 빠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