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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SF 소설 속에서 이미 미래 문명은 과거이다 본문

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SF 소설 속에서 이미 미래 문명은 과거이다

OneTiger 2019. 2. 23. 09:55

소설을 읽을 때, 어떤 독자들은 '순수하게' 문학적인 기법을 평가하기 원할 겁니다. '순수하게' 문학적인 기법을 연구할 때, 독자들은 현실을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더럽고 추잡하고 복잡한 현실과 순수하고 고결한 문학 기법은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순수하고 고결하게 문학 기법을 평가하기 원할 때, 독자는 언어에 집중해야 합니다. 문학은 글자 나열입니다. 소설'책'을 펼치는 순간, 독자는 숱한 단어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최고의 문장을 구성하기 위해 작가들은 이런저런 단어들을 고르고 버리고 다시 고르고 다시 버리고 또 다시 고릅니다.


심지어 SF 작가들은 가상의 언어를 만들거나 신조어를 만듭니다. 영화나 비디오 게임 역시 언어를 이용합니다. 영화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대사들을 날릴 때, 그들은 언어를 이용해야 합니다. "엄마는 이 세상에 괴물들이 없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이 세상에는 괴물들이 있어요." 영화 <에일리언 2>에서 이렇게 뉴트가 말했을 때, 뉴트는 언어를 이용해야 했습니다. 영화 <맨 프롬 어스>는 언어의 나열입니다. 이 영화는 시각적인 측면보다 언어적인 측면에 주목하고 수많은 논의들을 늘어놓습니다. 영화가 종합적인 영상 매체라고 해도, 영화는 언어를 이용해야 합니다. 수많은 영화들은 언어를 이용합니다.



하지만 언어 없이 영화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기호 없이 영화는 존재하지 못할지 모르나, 적어도 언어 없이 영화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언어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열차가 극장 화면으로 돌진할 때, 관객들은 기절할 수 있습니다. 언어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우주선이 달 표면을 들이받고 달이 표정을 찡그릴 때, 관객들은 그 장면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찰리 채플린이 구태여 대사들을 날리지 않는다고 해도, 관객들은 자본주의 공장이 노동자를 끔찍하게 부품화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화들처럼 이렇게 언어 없이 소설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과테말라 사람이 일본어를 알지 못한다면, 과테말라 사람은 아리카와 히로가 쓴 <바다 밑>이나 다카노 가즈아키가 쓴 <제노사이드>나  다나카 요시키가 쓴 <은하 영웅 전설>을 읽지 못할 겁니다. 사실 중국 사람이나 대만 사람이나 한국 사람 역시 아리카와 히로가 쓴 소설 <바다 밑>을 읽지 못할 겁니다. 똑같이 중국, 대만, 한국, 일본이 한자 문화권이라고 해도, 일본어를 모른다면, 중국 사람과 대만 사람과 한국 사람은 <바다 밑>을 읽지 못할 겁니다. 소설에서 언어는 필수적입니다. 문학적인 기법을 살필 때, 독자는 언어를 살펴야 합니다. 문제는 하늘에서 언어가 뚝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언어는 사회적인 파생물입니다.



남한 사람들은 여자들의 월경을 생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월경 이외에 다른 것들 역시 생리가 될 수 있습니다. 쉬아와 응가 역시 생리 현상입니다. 하지만 구태여 남한 사람들은 월경을 생리라고 말합니다. 남한 사람들은 월경이라는 단어를 직접 말하기 원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사회 분위기는 월경을 감추고 싶어합니다. 월경은 당당한 월경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그 날'이 되어야 합니다. "저기, 선생님, 오늘 저는 '그 날'이에요." 수업 시간에 이렇게 어떤 여학생이 남자 선생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을 때, 왜 여학생이 구태여 월경을 '그 날'이라고 말했을까요? 월경이 죄입니까?


월경하는 여학생이 죄를 지었나요? 이게 부끄러운 현상인가요? 월경은 비밀스러운 단어가 되어야 하고, 그래서 생리대는 월경대가 아닙니다. 생리대는 생리대가 되어야 합니다. 남한 사회에서 여자들은 당당하게 월경한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그 날'은 모욕이 될 수 있습니다. 남한 사회에서 남자들은 소리칩니다. "아니, 왜 이렇게 아줌마가 성질이 더러워? 아줌마, 오늘이 '그 날'이야?" 이렇게 월경에게는 여러 기호들과 의미들이 있습니다. 월경을 감추는 사회 분위기와 '그 날'이라는 언어는 밀접한 관계를 맺습니다. 비단 월경과 생리와 그 날만이 아니라 다른 단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어는 사회 구조와 문화와 분위기에서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순수하고 고결하게 문학적인 기법을 살펴볼 때, 독자는 사회 구조와 문화와 분위기를 살펴야 할 겁니다. 작가가 단어를 고를 때, 아무 이유 없이 작가는 단어를 고르지 않습니다. 작가가 소설을 쓰기 전에 이미 단어들은 존재합니다. 작가는 이미 존재하는 단어들을 골라야 합니다. 작가가 임의적으로 단어들을 새로 만든다면, 작가 이외에 아무도 그걸 읽지 못할 겁니다. '멜론'은 과일이 아닙니다. '멜론'은 친구를 뜻합니다. 적어도 회색의 간달프는 멜론이 친구라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회색의 간달프는 허구적인 캐릭터이고, 한국어를 구사하는 독자는 왜 멜론이 친구인지 반문할지 모릅니다.


소설을 쓸 때, 작가는 사회에서 독립적인 언어를 동원하지 못합니다. SF 소설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SF 소설에게 가장 커다란 모순이 있다면, 그건 내용(미래)과 형식(과거)이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일 겁니다. SF 소설은 미래를 이야기하나,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 SF 소설은 이미 존재하는 언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아무리 미래 은하계 사람들이 새로운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SF 작가가 (이미 존재하는 언어가 아니라) 오직 새로운 언어만으로 소설을 쓴다면, 독자는 그걸 읽지 못할 겁니다. 심지어 그걸 쓴 SF 작가조차 그걸 읽지 못할지 모르죠. SF 작가는 이미 존재하는 언어를 동원해야 하고, 그러는 동안 SF 작가는 이미 존재하는 사회와 문화를 동원합니다.



심지어 많은 SF 작가들은 과거 시제를 사용합니다. SF 소설은 미래 은하계 문명이 나타날 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SF 소설은 '이미 미래 은하계 문명이 나타났다'고 간주합니다. SF 작가가 과거 시제를 사용한다면, SF 소설 속에서 미래 은하계 문명은 과거가 됩니다. SF 소설을 펼칠 때, 독자는 소설 속의 내용이 이미 나타난 과거라고 받아들입니다. 아무리 SF 소설이 2312년 미래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을 말한다고 해도, 2012년 독자에게 2312년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은 과거입니다.


미래와 과거는 서로 반대이나, SF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이런 모순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SF 만화나 SF 영화나 SF 게임에도 이런 모순이 있으나, SF 소설이 과거 시제를 표현하는 문장들을 동원하기 때문에, SF 소설에서 이런 모순은 가장 커집니다. SF 소설은 미래 은하계 문명을 묘사하는 역사 기록이 아닙니다. SF 소설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파생합니다. 그래서 SF 작가는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미래를 과거라고 간주합니다. 만약 SF 작가가 현재 시제를 동원한다고 해도, 미래 은하계 문명은 미래가 되지 못합니다. SF 소설 속에서 미래 은하계 문명은 그저 과거에서 간신히 벗어날 뿐입니다.


내용이 미래적이라고 해도, SF 소설은 미래적인 형식을 추구하지 못합니다. SF 소설은 이미 존재하는 언어를 동원해야 하고, 그러는 동안 SF 소설은 이미 존재하는 사회와 문화를 집어넣어야 하고, SF 소설은 미래 은하계 문명이 과거라고 간주해야 합니다. 이런 형식에서 SF 소설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쩌면 어떤 SF 작가는 이걸 시도했을지 모릅니다. 나중에 SF 소설은 이런 형식을 벗어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직 수많은 SF 소설은 과거 형식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떤 독자들은 자신들이 오직 문장 형식과 구조만을 살핀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수학자들이 방정식을 푸는 것처럼, 기호학자들은 문장 구조와 형식을 짜맞추고 해석합니다. 어떤 독자들은 더럽고 추잡하고 복잡한 현실이 이런 문학 분석에 끼어들지 못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런 독자들은 소설 내용이 무엇이든 형식과 구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레고리 머과이어가 쓴 소설 <위키드>가 다소 좌파적이고, 제리 퍼넬이 쓴 소설 <용병>이 다소 우파적이라고 해도, 내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과 구조입니다. 형식과 구조를 살필 때, 문학 평론은 더럽고 추잡하고 복잡한 현실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독자들은 적지 않을 겁니다. 문제는 그 자체로서 문장 형식들과 구조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독자가 수학적(기호학적)으로 문장 형식을 분석한다고 해도, 독자는 과거 시제들을 분석할 겁니다. 그 문장을 쓰기 위해 SF 작가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동원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 자체로서 구조는 구조가 아닙니다. 구조가 있다고 해도, 그 구조가 어디에서 파생했습니까? 태초에 신이 "빛이 있으라!"라고 말했을 때, 갑자기 허공에서 문장 구조가 나타났을까요? 오직 구조와 형식만이 중요하다면, 왜 어떤 독자들은 <위키드>를 선호하고, 왜 어떤 독자들은 <용병>을 선호할까요?



움베르토 에코가 말한 것처럼, 의미를 완전히 배제하는 기표 해석은 그저 환상에 불과하고, 완전한 형식주의는 형식주의를 빙자한 내용주의일 겁니다. 무엇보다 어떻게 '구조와 형식에 치중하는 문학 평론'이 나타났을까요? 왜 이런 문학 평론이 존재할까요? 무슨 평론가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평론 방법을 이야기했을까요? 왜 그 평론가가 평론가라고 불릴까요? 누가 그 평론가를 평론가라고 인정했을까요? 누군가가 그 평론가를 평론가라고 인정했을 때, 그 사람에게 무슨 권한이 있었을까요? 무슨 권한으로 그 사람이 평론가를 평론가라고 인정했을까요? 왜 우리가 문학을 평가할 때 고전주의나 낭만주의나 사실주의를 따질까요?


중세 승려들이 <불경>을 읽었을 때, 승려들이 낭만주의나 구조주의를 따졌을까요? 만약 그들이 낭만주의를 따지지 않았다면, 왜 중세 승려들이 낭만주의를 따지지 않았을까요? 이 모든 것이 그냥 당연하게 나타났을까요? 이건 독후감을 쓸 때 모든 독자가 무조건 이 모든 것을 따지고 살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저 가볍게 소설을 읽고 시간을 때우고 싶다면, 독자는 이런 것들을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습니다. 소설 <용병>을 읽은 이후 독자가 독후감을 쓸 때, 독자가 무조건 어떻게 구조주의가 나타났는지 살필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독자가 좀 더 근본적으로 문학을 평가하고 싶다면, 이런저런 관점에서 문학을 평가할 때, 독자는 어떻게 문학이 파생했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전문적인 문학 비평가는 훨씬 그럴 겁니다. 어떻게 문학 비평가가 문학을 평가해야 할까요? 문학 비평가는 줄거리를 요약하거나, 어려운 철학 용어들을 늘어놓거나, 작가와 인터뷰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문학 비평이 딱딱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다고 시범을 보이기 위해) 문학 비평가는 썰렁하고 오글거리는 농담들을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문학 비평가는 어디에서 문학이 파생했는지 말해야 할 겁니다. 근본적인 문학 비평은 그걸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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