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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비평 기준과 <에코토피아 비긴스> 본문

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문학 비평 기준과 <에코토피아 비긴스>

OneTiger 2019. 3. 3. 23:30

소설을 읽을 때, 독자들은 그게 좋은 소설이기 기대할 겁니다. 좋은 소설이 무엇일까요? 좋은 소설이 되기 위해, 소설이 무엇을 갖추어야 할까요? 치밀한 줄거리? 뛰어난 개연성? 일관적인 시점? 논리적인 문체? 이런 것들은 좋은 소설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소설이 이런 것들을 갖출 때, 독자는 소설이 좋다고 평가할 겁니다. 만약 줄거리가 엉성하고, 개연성이 머나먼 안드로메다 성운으로 날아가고, 자꾸 산만하게 시점들이 바뀌고, 문체가 논리적이지 않다면, 독자들은 이런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아, 당연히 소설 주제는 일상적인 사고 방식에 부합해야 합니다.


소설 주제가 일상적인 사고 방식과 멀어진다면, 그 소설은 좋은 소설이 되지 못할 겁니다. 독자는 이런 소설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다시 읽지 말아야 할 겁니다. 문학 평론가들은 이런 소설을 멀리 쫓아내고 문학 수업 시간에 내밀지 말아야 할 겁니다. 작가는 모름지기 치밀한 줄거리를 구상하고, 뛰어난 개연성을 고민하고, 일관적인 시점을 유지하고, 문체를 논리적으로 가다듬어야 합니다. 작가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무엇을 느끼는지 관찰하고 그걸 소설 속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작가가 이런 것들을 외면한다면, 작가는 절대 좋은 소설을 쓰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허먼 멜빌이 쓴 <백경>은 절대 좋은 소설이 되지 못합니다. <백경>에 치밀한 줄거리가 있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소설에서 줄거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이스마엘이 낸터킷 부두를 헤맬 때, <백경>은 어느 정도 줄거리를 갖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포경선 피쿼드가 대양으로 나간 이후, 치밀한 줄거리는 사라집니다. 비선형적으로 이스마엘은 이것저것 묘사합니다. 갑자기 이스마엘은 돛대 망루를 언급하고, 갑자기 이스마엘은 에이허브 선장을 관찰하고, 갑자기 이스마엘은 어떻게 작살잡이들이 식사하는지 떠들고, 갑자기 이스마엘은 고래를 분류하는 박물학자가 됩니다.


일개 선원부터 뛰어난 철학자까지, 이스마엘은 마음대로 변신합니다. 이스마엘은 어디에나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선장실에서 선장과 1등 항해사가 몰래 이야기했다고 해도, (놀랍게도) 이스마엘은 그걸 자세하게 엿들을 수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소설 화자이나, 종종 '나'는 사라집니다. '나'는 사람들을 관찰하지 않고, 사람들은 직접 나타나고 이야기합니다. 종종 아예 <백경>은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벗어나고 다른 사람들의 심리를 직접 묘사합니다. 시점은 꽤나 중구난방이나, 이스마엘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스마엘은 상관하지 않고 (소설 줄거리와 별로 관계를 맺지 않은) 고래 생태들을 열심히 설명합니다. 이런 고래 생태들(이른바 고래 학장들)은 꽤나 많은 분량을 차지합니다.



이렇게 <백경>은 산만하고 요란하고 비선형적입니다. <필경사 바틀비> 같은 소설과 달리, <백경>은 너무 뒤죽박죽입니다. 당연히 <백경>은 좋은 소설 조건들을 만족하지 못합니다. 독자는 <백경>을 쓰레기통에 내던져야 할 겁니다. 문학 평론가들은 <백경>을 멀리 내쫓고 절대 문학 강의 시간에 이걸 들이대지 말아야 할 겁니다. 그래서 정말 <백경>이 고전 소설 울타리에서 멀리 떠났을까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계 고전 소설 울타리에서 <백경>은 자랑스럽게 빛납니다. 문학 평론가들은 <백경>을 재해석하느라 애쓰고, 문학 강의 시간에 영문학과 학생들은 <백경>을 분석하느라 골머리를 썩입니다.


침대에서 퀴퀘그와 이스마엘이 '남편과 아내처럼 가슴을 만지고 자는' 장면은 어느 정도 므흣할지 모르나, 독자들은 왜 이 따위 산만하고 지루하고 늘어지는 소설이 세계 고전인지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이건 꽤나 해괴망측한 짓입니다. <백경>은 가식적인 기독교 백인보다 위풍당당한 주술사 원주민이 낫다고 찬양합니다. 아무리 목사가 열심히 설교한다고 해도, 그것보다 원주민 주술사의 우상 숭배는 훨씬 진실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나요? <백경>은 19세기 서구 소설입니다. 당연히 지금처럼 19세기 서구는 식민지 지역들을 열심히 수탈해야 했습니다. 열대 원주민 주술사는 열등해야 합니다. 어떻게 감히 세련된 서구 백인보다 열대 야만인 따위가 나을 수 있나요?



열대 원주민보다 서구 백인은 우월합니다. 심지어 21세기 초반에서조차 이런 사고 방식은 꽤나 지배적입니다. 베네수엘라 같은 나라가 혼란에 부딪힐 때, 사람들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열등하다고 주장합니다. 열등한 야만인들은 나라를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 서구 백인들이 수탈할 때, 야만인들은 백인들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이런 유럽 중심주의를 떠듭니다. 하지만 19세기 서구 소설이었음에도, <백경>은 기독교 백인들보다 열대 밀림 주술사에게 손을 들어줍니다. 이건 <백경>이 인종 차별을 타파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백경>에는 엄청난 인종 차별들이 있고, 비단 인종 차별만 아니라 성 차별들 역시 있습니다. <백경>은 19세기 서구 소설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떤 관점에서 21세기 보수 우파보다 <백경>은 훨씬 낫습니다. <백경>은 어느 정도 유럽 중심주의를 지탄합니다. 유럽 중심주의는 지배적이고 일상적입니다. 왜 문학 평론가들이 지배적이고 일상적인 사상을 따르지 않는 불온한 소설을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을까요? <백경>은 좌익 사범이 아니나, 어느 정도 불온합니다. 문학 강의 시간에 문학 평론가들은 이런 불온한 소설을 들이대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백경>은 세계 고전 소설 울타리에서 쉽게 나갈 것 같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엉성한 줄거리와 비선형적인 개연성과 산만한 시점들과 비주류적인 사고 방식 때문에, <백경>은 좋은 소설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허먼 멜빌이 개연성이 있는 평범한 포경 이야기를 썼다면, <백경>은 그저 숱한 포경 소설들 중에서 하나에 불과했을 겁니다. 이런 사례처럼, 좋은 소설을 평가할 때, 기준들은 꽤나 달라질 수 있습니다. 소설은 특정하고 고정적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시대와 상황과 장소와 사회에 따라 문학 평론가들은 소설을 다시 해석하고, 소설의 명성은 추락하거나 상승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시대에서 어떤 소설은 찬사를 받으나, 또 다른 시대에서 그 소설은 추락할지 모릅니다. 어떤 시대에서 어떤 소설은 외면을 받으나, 또 다른 시대에서 그 소설은 상승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다양한 측면들에서 어떤 소설들은 세계 고전 명작들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권정생이 쓴 <몽실 언니>는 세계 고전 문학에 들어가지 못하나, 어떤 관점에서 <백경>보다 <몽실 언니>는 훨씬 좋은 소설입니다. <백경>은 여자들에게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나, <몽실 언니>는 자본주의가 일으킨 전쟁 속에서 얼마나 여자들이 힘겹게 살아가는지 이야기합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고정적인 기준들로 소설을 평가해야 한다면, 우리는 꽤나 많은 명작들을 버려야 할 겁니다. 좋은 소설이 되기 위한 기준들은 다양하고, 그것들은 하나로 귀결하지 않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에코토피아 비긴스> 역시 좋은 소설이 되거나 어설픈 소설이 될 수 있습니다. <에코토피아 비긴스>에는 나쁜 소설이 갖추어야 할 덕목들이 많습니다. <백경>처럼, <에코토피아 비긴스>에서 줄거리는 치밀하지 않고, 개연성은 하늘로 날아가고, 등장인물들은 뒤죽박죽이고, 시간의 흐름은 일정하지 않습니다. 독자가 치밀한 줄거리와 일정한 시점과 뛰어난 개연성을 중시한다면, <에코토피아 비긴스>는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 할 겁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거부하고 생태 사회주의를 수용합니다.


<에코토피아 비긴스>는 직원들이 회사를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숱한 사람들은 <에코토피아 비긴스>가 녹색을 가장한 좌익 빨갱이라고 매도할 겁니다. 좌익 사범 빨갱이로서 이 소설에는 급진적인 환경 사회학과 성 평등이 있습니다. 성 평등이 정말 자유분방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게 미친 정신병이라고 욕할지 모릅니다. 종종 소설 속에서 환경 사회학 강의는 줄거리를 압도하고 밀어냅니다. 치밀한 줄거리보다 환경 사회학 강의는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솔직히 <에코토피아 비긴스>는 소설을 이용해 환경 사회학과 성 평등을 이야기합니다. 이건 소설보다 환경 사회학 서적에 가깝습니다.



급진적인 환경 사회학을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 <에코토피아 비긴스>는 좋은 선택이 될 겁니다. 일반적인 환경 사회학 서적들과 달리, <에코토피아 비긴스>는 소설을 가장했고, 독자는 훨씬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환경 사회학 서적은 소녀가 자유롭게 자위하는 장면을 묘사하지 않겠죠. <에코토피아 비긴스>에는 여러 단점들이 있고 동시에 여러 장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독자가 어니스트 칼렌바크의 다른 책들을 고려한다면, 독자는 작가가 일반적인 소설보다 소설을 이용하는 환경 사회학 서적을 쓰고 싶었을 거라고 추론할 수 있겠죠. 그래서 독자가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요? 어설픈 개연성? 급진적인 성 평등?


글쎄요, 아무도 정답을 장담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줄거리가 치밀하지 않고, 개연성이 하늘로 날아가고, 등장인물들이 뒤죽박죽이고, 시간의 흐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해도, 산업 자본주의가 숱한 환경 오염들을 일으키고 차별들을 저지르는 상황에서 <에코토피아 비긴스>는 고유한 가치를 빛낼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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