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독자가 SF 명작을 읽을 수 있는 권리 본문
"명작을 만드는 것은 당신의 몫이기도 하다." 이건 한윤정이 쓴 <명작을 읽을 권리>에 나오는 문구입니다. <명작을 읽을 권리>는 문학 비평 서적입니다. 아니, 이게 문학 비평 서적일까요? 이 서적의 부제는 '작품이 당신의 삶에 말을 걸다'입니다. 서적 뒤표지에는 "작품이 당신과 공명하는 순간, 명작이 탄생한다. 명작을 만드는 것은 당신의 몫이기도 하다. 당신에게는 명작을 읽을 권리가 있다."라는 문구들이 있습니다. 서론에서 한윤정 저자는 수동적인 독서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독서를 중시합니다.
어떤 소설을 읽은 이후, 독자는 눈물을 흘리거나 분노하거나 기뻐하거나 경탄할 겁니다. 독자가 감동을 받았다면, 독자는 그 소설을 이야기하고 싶어할 겁니다. 그 소설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독자는 소설을 좀 더 자세히 파고들어야 할 겁니다. 독자가 소설을 아주 좋아하거나 사랑한다면, 독자는 논리적이고 근본적으로 소설을 분석하고 싶어하겠죠. 아니면 하루 종일 독자는 소설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발상들을 내놓을지 모릅니다. 그러는 동안 독자는 소설을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을 겁니다.
연인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연인을 자세히 알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은 연인의 취미, 세계관, 인생 역정, 고민이나 걱정을 자세히 알고 싶어할 겁니다. 연인의 세계관이나 고민이나 취미에 무심한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연인이 생겼을 때, 하루 종일 사람들은 연인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연인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겠죠. 흔히 이건 '눈에 콩깍지가 씌웠다'고 불립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의 평범한 요소는 각별한 특징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측면은 연인에게 사랑스러운 아름다움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단점조차 장점으로 승화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너무 어설프고 황당해.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해." 이건 별로 드문 사례가 아닙니다. 단점이 있음에도, 연애는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하거나 단점을 덮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연인으로 우아하게 떠오릅니다. 독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독자가 있을 때, 독자가 소설을 특별하게 평가할 때, 소설은 특별해질 수 있습니다. 소설은 명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윤정은 '명작을 읽을 권리'를 이야기했을 겁니다.
흔히 소설들을 읽을 때, 사람들은 작가의 목소리를 따라갑니다. 독자는 작가의 목소리를 따라가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독자는 소설 줄거리를 대략적으로 요약하고, 자신의 생각을 끼워넣고, 그게 독후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작가 중심적인 독후감입니다. 이런 독후감 역시 일종의 감상과 비평이 될 수 있습니다. 작가 중심적인 독후감에는 여러 장점들이 있습니다. 소설을 쓰는 장본인이 작가이기 때문에 독자는 작가에 주목해야 할 겁니다. 한윤정은 작가 개인의 삶과 정신적인 편력, 작가가 속한 사회적인 조류를 독자가 파악할 때, 독자가 소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한윤정은 사례로서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언급합니다. 1차 세계 대전에 참가한 이후,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를 썼습니다. 에스파냐 내전이 터졌을 때,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전장으로 달려갔고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썼습니다. (조지 오웰 역시 <카탈로니아 찬가>를 썼죠. 조지 오웰 같은 작가를 이해할 때, 사회적인 조류는 필수적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헤밍웨이는 낚시를 즐겼고, 그래서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썼습니다. 이렇게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삶을 파악할 때, 독자는 <무기여, 잘 있거라>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와 <노인과 바다>를 이해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게 전부일까요? 이게 소설을 이해하기 위한 전부일까요? 한윤정 저자는 그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작가는 창조신입니다. 소설을 쓸 때, 작가는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합니다. 이 작업이 아주 매력적이기 때문에 수많은 작가 지망생들은 소설들을 쓰고 싶어합니다. 어떤 작가들은 허구를 쓰는 행위가 고역이고 재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은 커다란 기쁨입니다. 특히, 작가가 아주 이상적인 집단이나 등장인물을 묘사할 때, 이런 기쁨은 훨씬 커질 겁니다. 메리 수 소설들은 극단적으로 이런 기쁨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한윤정은 작가가 작품의 모든 측면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사무엘 베케트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썼으나, 베케트는 고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다소 특이한 사례이나, 다른 소설들에도 비슷한 측면들이 있습니다.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소설을 쓰지 못할지 모릅니다. 작가는 신이 아니고 현실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작가가 소설을 쓸 때, 작가는 그저 부분적으로 현실을 반영할 뿐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일부러 의도를 감출 수 있습니다. 심지어 소설을 쓴 이후, 시간이 한참 흘렀을 때, 작가는 자신이 무엇을 쓰기 원했는지 까먹을지 모릅니다.
따라서 독자는 무조건 오직 작가만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독자는 작가를 이해하고 동시에 작가 이외에 다른 것들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 자체로서 소설은 소설이 아닙니다. 독자가 해석할 때, 소설은 소설이 될 수 있습니다. 독자가 해석하지 않는다면, 소설은 그저 글자들 나열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수용 미학을 중시하는 평론가 볼프강 이저는 독자가 판관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독자는 소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판관이 되어야 합니다. <이야기 속의 독자>에서 움베르토 에코는 "텍스트는 게으른 기계와 같아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독자에게 나누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독자는 (게으른 기계와 비슷한) 텍스트에서 해석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한윤정은 움베르토 에코가 일방적인 우위를 주장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작가가 소설을 창작할 수 있다면, 독자는 소설을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작가에게는 해답이 없습니다. 어떤 소설 작가들은 해답들을 제시하고 싶어하겠으나, 작가에게는 만능 해답이 없습니다. 독자는 스스로 소설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건 독자가 아무렇게나 소설을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독자는 논리적인 근거를 이용해 소설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독서에는 정답이나 오답이 없습니다. 여러 독특한 위치들에서 독자들은 서로 다르게 소설들을 읽을 수 있을 겁니다. <명작을 읽을 권리>는 그렇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권리(독자가 명작을 만드는 몫)가 오직 주류 문학에게만 적용할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명작을 읽을 권리>는 데스카 오사무가 제작한 <아톰>을 언급합니다. <아톰>은 애니메이션이고, <아톰>에게는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시나리오는 문학이죠. <아톰>을 문학이라고 간주한다면, 독자는 <아톰>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아톰>은 주류 문학보다 SF 시나리오입니다. 사이언스 픽션 역시 문학에 속하고, 따라서 SF 소설과 만화와 영화와 연극과 게임을 만날 때,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들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겠죠. 특히, 사이언스 픽션들은 드넓은 시야를 드러냅니다. 우주 탄생부터 평행 차원까지, 인류 문명부터 자연 생태계까지, 사이언스 픽션들은 드넓은 시야를 자랑합니다. 그래서 어떤 SF 독자들은 다른 주류 문학보다 SF 소설들이 위대하다고 말하죠. 그건 심각한 착각입니다. 하지만 SF 소설을 읽을 때, 독자가 문명과 자연과 우주를 파악할 수 있다면, 독자는 SF 소설을 멋지게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학교 교육을 비롯해 숱한 교육 매체들은 문명과 자연과 우주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건 교육 과정보다 세뇌 과정에 가깝습니다. 이런 세뇌 속에서 작가들은 SF 소설들을 쓰고 독자들은 SF 소설들을 읽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몇몇 근본적인 오류를 피하지 못합니다. 주류 문학을 해석할 때도 이런 세뇌는 치명적인 오류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SF 소설이 문명과 자연과 우주를 파악하기 때문에, 독자가 SF 소설을 해석할 때, 이런 세뇌는 훨씬 치명적인 오류를 일으킵니다. 오히려 독자는 소설을 명작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멀쩡한 소설을 졸작으로 왜곡할지 모릅니다.
생체 우주선에서 내부 생태계를 관리하는 생태학자가 인류의 탐욕이 환경 오염을 일으켰다고 운운한다면, 그건 자본주의가 저지르는 세뇌에 동조하는 행위일 겁니다. 독자가 이런 세뇌를 주의하고 비판한다면, 독자는 SF 소설을 정말 새롭게 읽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소설 역시 사회적인 파생물입니다. 하늘에서 문학은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사회적인 관계들을 맺을 때, 사회 구조 속에서 소설은 파생합니다. 그 자체로서 소설은 존재하지 않고, 사회 구조는 소설을 지정하고 만들 수 있습니다. 만약 독자가 SF 소설이 파생한 사회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면, 그건 가장 근본적인 비평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