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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 판타지/머나먼 생태계

외계 생태계를 묘사하는 한계

OneTiger 2017. 4. 14. 20:00

[게임 <엔들리스 스페이스>의 한 장면. 이런 외계 생태계는 지구 생태계의 뻥튀기입니다.]



데비앙아트 같은 사이트에서 외계 생명체를 검색하면, 아주 다양한 그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상상력을 발휘하는지 재미있습니다. 물론 그런 외계 생명체 그림들은 지구 생명체의 과장이나 짬뽕입니다.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아무리 우리가 외계 생명체를 상상하고 싶어도 한계가 있겠죠. 아무도 외계 생명체를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지구 생명체만을 볼 수 있을 뿐이고, 그걸 바탕으로 외계 생명체를 연상합니다. 우주 생물학자들은 좀 더 과학적으로 상상할 수 있겠으나, 그림 동아리의 회원들은 우주 생물학자가 아니죠.


따라서 화가들은 최대한 상상력을 짜내지만, 기괴한 절지류를 그리거나 파충류와 절지류를 뒤섞거나 두족류를 뻥튀기할 뿐입니다. 동물군만 아니라 식물군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대하고 울창한 푸른 버섯, 해면처럼 생긴 덤불, 고름이나 종양을 매단 나무들, 현란한 빛깔을 자랑하는 나뭇잎들, 발광하거나 맥동하는 꽃들…. 이런 것들이 외계 생태계의 식생을 구성합니다. 아름답고 신비하고 기이하지만, 역시 지구 식생에서 그리 멀리 나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외계인들도 딱히 다르지 않습니다. 비늘이나 깃털이 달린 인간, 피부색이 다른 인간, 촉수나 더듬이가 달린 인간, 두 발로 걷는 절지류가 외계인의 주류를 이루죠.



저는 이런 상상력을 폄하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상상력을 즐기는 편입니다. 비록 화가들의 발상이 지구의 한계에 갇혔다고 해도 저런 그림들은 감수성을 자극하기 충분합니다. 생명의 신비를 물씬 풍기죠. 다양한 식생이 어우러진 삼림은 고증에 상관없이 신비롭습니다. 그냥 희한하게 생긴 버섯이나 촉수 같은 덩굴이나 번쩍거리는 꽃이라면 뭐 어떻겠어요. 파충류와 절지류가 뒤섞이거나 두족류가 뻥튀기가 되어도 나쁘지 않아요. 과학적 상상력이 꼭 완벽한 고증을 해야 하는 건 아니겠죠.


사실 유명한 SF 작가들도 그저 지구 생명체와 비슷한 생명체들을 상상하잖아요. 그런 설정은 결코 하드 SF가 될 수 없고, 그저 스페이스 오페라나 스페이스 판타지에 머물 뿐이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게다가 피터 와츠 같은 하드 SF 작가도 외계 생명체를 상상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피터 와츠는 해양 생물학 출신이기 때문에 비교적 고증을 엄격하게 살리지만, 그래도 외계 생명체를 상상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생물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어련하겠어요. 생명의 신비로운 근본이나 역사를 건드릴 수 있다면, 상투적인 상상력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끔 이런 상투적인 상상력보다…. 그냥 외계 생명체를 아예 인식하기 불가능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외계 생명체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면, 아예 그 정확한 모습을 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라마와의 랑데부>를 보면, 아예 외계인이 나오지 않습니다. 라마 우주선 안에는 분명히 생명체(?)가 있으나, 그게 진짜 라마인들과 어떤 관계인지 모릅니다. 만약 진짜 라마인이 나왔다면, 라마 우주선이 좀 덜 신비롭게 보였을지 모릅니다.


<솔라리스>에서 스타니스와프 렘은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결코 자세히 알려주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어떻게든 솔라리스와 소통하려고 애쓰지만, 그런 소통은 번번이 실패로 끝납니다. 솔라리스는 그저 커다란 덩어리에 불과하고, 우리는 그게 어떤 존재인지 정확히 모릅니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10억 년> 같은 소설은 한층 더 합니다. 뭔가 이상한 현상들이 연달아 벌어지지만, 그 배후는 절대 눈 앞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암시만 할 뿐입니다. 어쩌면 차라리 이런 방법들이 나을지 모릅니다. 상투적인 외계 식생을 묘사하는 것보다 그냥 아예 묘사하지 않는 게 나을 수 있어요.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 그건 창작자의 자유겠죠. 각종 외계 생명체가 싫다는 뜻은 아니지만, 가끔 저는 외계 생명체를 묘사하지 않는 쪽이 마음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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