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외계 거미가 바라보는 '거칠게 맞서는 정직함' 본문
※ 이 게시글은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의 내용 누설을 담았습니다.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괴물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은 사람들이 괴물을 때려잡는 이야기입니다. 흔히 괴물이나 괴수를 이야기할 때, 작가들은 괴물과 괴수에게 너무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군가가 괴물과 싸운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작가가 너무 괴물을 부각한다면, 괴물과 싸우는 사람들은 사라지겠죠. 이건 균형을 깨뜨리고, 소설은 구심점을 잃을 겁니다. 독자가 인간이기 때문에, 소설이 괴물보다 인간을 더 많이 보여주기 때문에, 괴물과 싸우는 사람들은 괴물보다 훨씬 중요할지 모릅니다. 작가가 이런 함정을 피하지 못한다면, <프래그먼트>나 <내추럴 셀렉션>처럼 작가는 얄팍한 종이짝 이야기를 쓰겠죠.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온갖 등장인물들에게 관심을 기울입니다. 아니, 이 소설이 너무 등장인물들에게 많은 관심들을 기울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게 괴물을 때려잡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처음 이 소설을 읽는다면, 독자들은 뭐라고 작가가 이야기하는지 헛갈릴지 모릅니다. 그렇게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괴물을 때려잡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죠. 소설 속에서 괴물을 때려잡는 사람들로서 아이작 그림너블린, 더칸, 야가렉, 레뮤얼은 가장 많이 활약할 겁니다.
하지만 괴물을 때려잡기는 어렵습니다. 게다가 군사 정부 역시 괴물을 노리기 때문에 아이작과 더칸과 야가렉과 레뮤얼은 정부와 충돌합니다. 정부는 네 사람들이 범죄자라고 간주하고 그들을 체포하기 원하죠. 그래서 괴물을 추적하는 동안 네 사람들은 정부 군대와 부딪히고 위기에 빠집니다. 그들은 쉽게 탈출하지 못하죠. 그때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누군가는 그들을 구출합니다. 그 누군가는 직조자입니다. 직조자는 외계 거미입니다. 직조자는 지성적인 거미이고, 다른 차원들을 넘을 수 있고, 굉장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에게 직조자는 외계 거미 괴물이나, 그렇기 때문에 직조자는 정부 군대를 무력화시키고 다른 괴물들과 싸울 수 있어요. 아이작이 부탁했을 때, 직조자는 아이작을 돕고 다른 괴물들과 싸우죠.
직조자는 비교적 긍정적인 괴물입니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는 비단 부정적인 괴물들만 아니라 긍정적인 괴물이 있죠. 그래서 이 소설은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직조자가 긍정적이라고 해도, 분명히 인간들에게 외계 거미 괴물은 괴물입니다. 직조자는 인간들을 동정하지 않아요. 직조자가 아이작 일행을 도와준다고 해도, 직조자는 아이작과 친하지 않습니다. 거미 괴물로서 직조자는 세계적인 거미줄을 짭니다. 직조자는 세계가 아름다운 거미줄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미 괴물로서 직조자는 아름다운 거미줄을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어떻게 세계가 거미줄이 될 수 있을까요? 직조자가 외계 거미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직조자를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는 비유할 수 있겠죠. 생태학자들과 환경 사회학자들이 자연 환경을 바라볼 때, 그들은 자연 환경이 그물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 환경은 먹이 그물망입니다. 생태학자들과 환경 사회학자들은 그물망을 봅니다. 그들에게 자연 환경은 그물입니다. 자연 환경에는 거대한 그물이 없으나, 생태학자들과 환경 사회학자들에게 자연 환경은 거대한 그물망입니다. 생물 다양성은 서로 상호 작용하고, 그물처럼 이 부분은 저 부분과 이어지고 저 부분은 다시 다른 부분과 이어지죠.
수많은 것들은 서로 연결하고, 생물 다양성은 하나의 거대한 그물망을 이룹니다. 체계는 그물이 될 수 있죠. 생태학자들과 환경 사회학자들은 이런 그물, 먹이 그물망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양한 것들이 다양하게 상호 작용하기 때문에, 먹이 그물망은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이런 시각을 익힐 수 있다면, 뒷산에서 꿀벌들과 까치들과 나무들과 꽃들과 버섯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추상적인 그물망을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자본주의가 이런 살아있는 아름다운 그물망을 파괴할 때, 우리는 자본주의에게 분노할 수 있겠죠.
생태학자들이 자연 환경을 먹이 그물망이라고 간주하는 것처럼, 직조자는 세계가 거미줄이라고 간주합니다. 인류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 영향들을 미칩니다. 인간은 순수하게 개인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이고, 그물처럼 사회적인 관계들은 서로 영향을 미치죠. 그물망과 거미줄은 비슷합니다. 사실 거미줄은 그물의 일종이죠. 직조자가 외계 거미이기 때문에 우리는 직조자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먹이 그물망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직조자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 모르죠. 직조자에게 모든 것은 거미줄을 이루는 요소들입니다. 인간들 역시 거미줄을 이루는 요소들입니다.
이름처럼 직조자는 거미줄을 짜기 원합니다. 누군가가 거미줄을 망칠 때, 직조자는 그걸 수선하기 원하죠. 직조자에게 아이작 일행 역시 거미줄을 이루는 요소들일 겁니다. 아이작 일행을 도울 때, 언뜻 직조자는 그런 생각을 내비칩니다. 직조자는 야가렉을 '사납고 고집센 것'이라고 부릅니다. 야가렉은 사막 가루다 종족이고, 사막 가루다는 사냥꾼 종족입니다. 가루다는 야성적이고 강렬하고 날렵합니다. 가루다는 인간 맹금입니다. 그래서 직조자는 야가렉이 사납고 고집세다고 생각했겠죠. 레뮤얼은 '검붉은 재료'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레뮤얼은 야비하고 냉혹한 뒷골목 범죄자입니다. 검붉은 색깔은 별로 긍정적이지 않죠.
아나코 생디칼리스트들에게 검고 붉은 깃발은 아름답겠으나, 일반적으로 검고 붉은 색깔은 위험하고 치명적이죠. 그래서 지배 계급을 위협하기 위해 아나코 생디칼리스트들은 검고 붉은 깃발을 휘두를지 모릅니다. 비록 서로 의미는 다르나, 검고 붉은 깃발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직조자는 레뮤얼이 검고 붉은 재료라고 말했을지 몰라요. 아이작은 '터무니없이 세속적인 무리'입니다. 왜 아이작이 세속적인 무리일까요? 이건 아이작을 가리키는 적당한 비유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이작은 발명가이고 과학자입니다. 게다가 아이작은 무리가 아니죠. 어쩌면 세속적인 무리는 아이작이 아니라 정부 군대 병사들을 가리키는지 모릅니다. 정부 병사들은 아이작 일행을 포위했고, 거기에서 직조자는 아이작 일행을 구출했죠.
마지막으로 더칸은 '거칠게 맞서는 정직함'입니다. 더칸은 거칠고, 투쟁적이고, 정직합니다. 사실 더칸은 반체제 인사입니다. 더칸은 노동 계급 친화적이고, 군사 정부에 반대하고, 지하 언론을 돕습니다. 이런 투쟁은 별로 고상하거나 세련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민중들은 거칠게 지배 계급에게 저항하죠. SF 세상에서 숱한 저항군들은 멋지게 비장미를 풍기나, 사실 민중들이 봉기했을 때, 그런 봉기들에는 멋진 비장미가 없었습니다. 무산자 민중들에게 뭐가 있겠습니까.
지배 계급은 세련된 거드름을 피울 수 있으나, 무산자 민중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깡다구만 있습니다. 파리 코뮌부터 사파티스타 해방군까지, 다들 오직 깡다구만 드러내죠. 하지만 그런 거친 투쟁은 정직합니다. 세계적인 그물망을 바라보는 외계 거미는 그게 정직하다고 말합니다. 거친 투쟁은 별로 고상하거나 세련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거친 투쟁은 악독하고 위험한 것 같습니다. 너무 거칠기 때문에 깡다구 투쟁은 극단적인 학살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정직함이 있습니다. 언젠가 그런 정직함은 승리의 붉은 깃발을 휘날릴지 모르죠. 외계 거미는 그걸 말하고 싶어했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