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F 생태주의

가루다 종족과 선택 권리 침해 본문

SF & 판타지/외계인과 이방인

가루다 종족과 선택 권리 침해

OneTiger 2018. 11. 9. 22:15

※ 이 게시글에는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의 치명적인 결말 누설이 있습니다.



스팀펑크 판타지로서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다양한 종족들을 보여줍니다. 가끔 이 소설은 스팀펑크보다 사이언스 판타지나 스페이스 오페라에 가깝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수많은 외계인들을 중시하는 것처럼,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다양한 유사 인간 종족들을 중시하죠. 양서류 종족, 벌레 종족, 식물 종족, 조류 종족…. 사실 스팀펑크 장르는 19세기 유럽이 보여주는 과도기적인 측면을 부풀리거나 비틀거나 과장하는 장르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같은 다양한 종족들은 스팀펑크 장르가 드러내는 특징이 아니었죠.


19세기 작가들이 쓴 고전적인 스팀펑크 소설들에는 다양한 종족들이 없습니다. <타임 머신>에는 엘로이와 몰록이 나오나, 엘로이와 몰록은 다양한 유사 인간 종족들과 거리가 멀죠. 훨씬 현대적인 스팀펑크 <아누비스의 문>에는 이상한 종족들이 있으나, 그것들 역시 전형적인 종족 설정과 거리가 멀어요. 어쩌면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스페이스 오페라 설정과 방법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을지 모릅니다. 차이나 미에빌이 직접 스페이스 오페라들을 참고했는지, 아니면 차이나 미에빌이 다른 판타지들과 <던전스 앤 드래곤스>를 참고했는지, 아니면 차이나 미에빌이 스스로 이런 설정을 고안했는지, 그건 미지수겠죠.



이런 다양한 종족들은 그저 신기한 이방인들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이언스 판타지 종족들과 달리,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서 인간 형태 종족들은 사회 부조리들을 고발할 수 있는 비유들입니다. 부두에서 보디야노이 양서류 종족이 파업했을 때, 이런 사회 부조리는 정점에 다다르죠.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파업은 아주 일상적이고, 동시에 파업은 노동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대대적인 파업은 자본가 계급을 몰아붙일 수 있고, 심지어 전국적인 총파업은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어요. 그래서 아나코 생디칼리스트들이나 좌파 공산주의는 총파업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파업이 노동자들의 신성한 권리임에도, 보수 우파들은 파업을 극단적으로 비난하죠. 아무리 시민 운동가들이 크게 떠든다고 해도, 보수 우파들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시민 운동가들은 그저 들러리에 불과해요. 하지만 거대 노동 조합이 파업하는 순간, 보수 우파들은 나라 경제가 무너진다고 게거품을 뭅니다. 역설적으로 이건 거대 노동 조합이 나라 경제를 먹여살린다는 뜻이죠. 보디야노이 부두 파업은 어떻게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이 사회 부조리를 다루는지 보여줍니다. 수많은 SF/판타지 소설들은 신기한 종족들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페르디도 기차역>처럼 신기한 설정과 사회 부조리를 동시에 건드릴 수 있는 소설들이 많을까요?



여러 종족들 중에서 가루다 조류 종족은 가장 신비스러울지 모릅니다. 특히, 사막 가루다들은 사회적인 평등을 중시합니다. 소설 속에서 이 사회적인 평등은 자세히 나오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은 그저 사막 가루다들이 사회적인 평등을 중시한다고 말할 뿐입니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이 더러운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주기 때문에 사막 가루다 종족과 사회적인 평등은 자본주의 디스토피아에 저항하는 대안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막 가루다 사회가 직접 나오지 않기 때문에 독자들은 가루다 사회를 직접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야가렉은 주연 등장인물이나, 추방자입니다. 사막 가루다 사회에서 야가렉은 쫓겨났죠. 야가렉은 사회적인 평등을 보여주지 못해요.


오히려 추방자로서 야가렉은 자신을 감추느라 바쁩니다. 어쩌면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미래 청사진보다 현실적인 저항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지 모릅니다. 아직 아무도 평등한 사회를 직접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파리 코뮌이나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나 인도 케랄라 지역, 21세기 남아메리카 사회주의 같은 것들은 실험적인 시도에 가깝죠. 그래서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평등한 사회가 무엇인지 직접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그저 머나먼 목적을 설정하고 우리가 저항해야 한다고 말할 뿐입니다. 하지만 <페르디도 기차역>을 읽을 때, 독자들은 저항보다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를 훨씬 강렬하게 기억할지 모르죠.



사회적인 평등을 중시하기 때문에 가루다 종족은 '선택 권리 침해'를 굉장히 경멸합니다. 야가렉은 추방자입니다. 야가렉이 다른 가루다의 선택 권리를 침해했기 때문입니다. 이 '선택 권리'가 뭘까요? 왜 가루다들이 선택 권리를 중시할까요? 선택 권리는 미래적인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선택은 선택을 낳습니다. 그 선택은 다른 선택을 낳고, 다른 선택은 또 다른 선택을 낳을 수 있겠죠. 그렇게 선택은 무수한 다른 선택들을 낳고, 선택은 미래적인 분기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사막 가루다 종족은 개인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들이 있다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최초 선택 권리를 빼앗는다면, 그 선택 권리는 사라질 테고, 다른 선택들 역시 사라지겠죠. 그때 무수한 분기점들은 사라질 겁니다.


선택 권리가 사라진다면, 그건 그저 한 순간의 폭력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 순간이 아닙니다. 선택 권리가 사라질 때, 무수한 미래 분기점들은 함께 사라집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선택 권리를 침해한다면, 그건 미래로 이어지는 엄청난 가능성들을 함께 침해할 겁니다. 여기에 어린 가루다 소녀가 있습니다. 만약 어른 남자 가루다가 소녀를 폭행한다면, 소녀는 트라우마에 걸릴 테고, 소녀는 정상적인 어른 여자가 될지 못할 겁니다. 소녀는 정신병자가 되거나, 범죄자가 되거나, 매춘부가 될지 모릅니다.



어른 남자 가루다가 소녀 가루다를 폭행할 때, 어른 남자는 소녀가 품은 미래를 함께 짓밟습니다. 소녀는 트라우마에 빠질지 모릅니다. 이런 소녀는 정상적으로 사회 활동에 참가하지 못하겠죠. 이런 소녀는 정상적인 어른으로 자라지 못할지 모르죠. 그래서 어른 남자가 소녀를 폭행할 때, 수많은 가능성들은 함께 사라집니다. 이건 아주 무서운 범죄이고, 그래서 가루다들은 선택 권리 침해를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보디야노이 부두 파업처럼, 이건 사회 부조리일지 모릅니다. 현실 속의 학생들 역시 무수한 분기점들을 잃습니다. 가혹한 입시 경쟁은 학생들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입니다.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대학에 가고, 대기업에 취직하고, 많은 돈을 벌어야 합니다.


학교 교육들은 그게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가르칩니다. 학생들이 풋풋하고 설레는 청춘이 된다고 해도, 학생들은 그런 청춘을 펼치지 못합니다. 가혹한 입시 경쟁 속에서 학생들은 청춘과 낭만과 사랑과 꿈을 버려야 합니다. 아니, 학생들은 아예 청춘과 낭만과 사랑과 꿈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저 임금 노예들이 될 뿐입니다. 비단 학생들만 아니라 평등한 공동체들 역시 미래를 잃어버렸을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파리 코뮌을 짓밟고 로자 룩셈부르크와 스파르타쿠스 단체를 짓밟고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를 짓밟고 수많은 부족 사회들을 짓밟았을 때, 평등한 공동체들은 무수한 분기점들을 잃었을 겁니다. 선택 권리 침해는 비단 순간만을 짓밟지 않습니다. 그건 미래와 가능성들과 분기점들을 짓밟아요. 그래서 가루다들은 선택 권리 침해를 경멸하겠죠.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