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스페이스 마린과 영어를 발음하는 로마 군인 본문
미니어처 게임 <워해머 40K>는 장대한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워해머 40K>는 스페이스 오페라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품기 원하는 것 같습니다. 거대한 우주 함대, 다양하고 수많은 행성들, 기이한 외계인들, 든든한 강화복 해병 부대, 지능적인 기계들, 징그러운 절지류 외계인들, 사이언스 픽션과 중세 판타지를 넘나드는 악마들, 뛰어난 초능력자들, 기타 등등. <워해머 40K>는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든 것을 품었고 그런 야망을 절대 감추지 않습니다. 그게 미니어처 게임에 도움을 주는지 그건 좀 의문입니다. 분명히 설정은 아주 방대합니다. 이런 방대한 설정은 엄청난 이야깃거리들을 뿜어내겠죠. 하지만 그것들이 실질적인 미니어처 게임 플레이로 이어질 수 있는지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설정에 아예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방대한 설정을 줄줄이 외운다고 해도, 게임 규칙을 제대로 모른다면, 그 게임 플레이어는 게임에 지겠죠. 게임은 게임입니다.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들은 규칙을 알아야 합니다. 설정이 아니라. 하지만 동시에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역할 놀이를 즐깁니다. 그들은 그저 강화복 해병 모형을 움직이기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비장미가 넘치는 우주 해병대를 지휘하기 원합니다.
<워해머 40K>의 제작사인 게임즈 워크샵은 그런 기대에 부응해야 했습니다. 게임즈 워크샵은 방대한 설정을 만들었고, 가장 핵심적인 설정은 인류 제국입니다. <워해머 40K>에는 엘다(우주 엘프), 오크(우락부락한 초록 유사 인간들), 타우(최첨단 기계 문명), 카오스(지옥에서 나온 악마들), 타이라니드(징그러운 절지류 외계인들) 등이 있으나, 가장 핵심적인 설정은 인류 제국입니다. 왜?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인류 제국은 다시 임페리얼 가드와 스페이스 마린과 몇몇 부대로 나뉩니다. 임페리얼 가드는 각종 기갑 부대를 동원할 수 있고, 스페이스 마린은 소수 정예 강화복 부대입니다. 임페리얼 가드와 스페이스 마린이 지키는 인류 제국은 고대 로마 제국을 닮았고요. <워해머 40K>에서 미래 인류 제국은 고대 로마 제국의 우주 판본이죠. 유럽과 북미와 호주 백인들은 로마 제국에게 어떤 경외를 품은 것 같습니다. 뭐, 당연히 고대의 화려하고 번창하고 과학적인 제국은 사람들의 마음에 로망의 불씨를 지피겠죠. 게다가 유럽이나 북미 이외에 다른 나라들 역시 이런 고대의 거대 제국을 좋아할 겁니다. 게임즈 워크샵은 그걸 간파했고, 로마 제국을 우주에 투영했고, 인류 제국과 임페리얼 가드와 스페이스 마린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방대한 스페이스 오페라로서 인류 제국에는 로마 제국 이외에 다양한 문명들이 있습니다. 전투적인 바이킹? 있습니다. 기동력이 뛰어난 몽골? 있습니다. 어머니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붉은 군대? 있습니다. 멋진 제복을 뽐내는 독일?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핵심적인 설정은 로마 제국입니다. 누군가는 이게 이상하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워해머 40K>는 영국 미니어처 게임입니다. 게임즈 워크샵은 영국 게임 회사죠. 한때 로마 제국은 영국을 침략했어요. 영국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영국 사람들은 이런 사실에 별로 상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게임즈 워크샵은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아요. 과거에 고대 로마 제국이 영국을 침략했고 식민지로 삼았다고 해도, 게임즈 워크샵은 그걸 불편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인류 제국이 우주 로마 제국이라고 주장하죠. 만약 남한 미니어처 게임 회사가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을 만들고, 핵심적인 주인공 세력이 우주 일본 제국이라고 주장한다면, 남한 게임 플레이어들은 엄청나게 분노할 겁니다. 남한 사람들은 아직 일본 제국이라는 폭력을 완전히 잊지 못했어요.
하지만 게임즈 워크샵이나 영국 미니어처 게임 플레이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식민지 역사가 너무 과거이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일본 제국은 근대이나, 로마 제국은 고대죠. 그건 꽤나 커다란 차이입니다. 이미 너무 많은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영국 게임 플레이어들에게는 분노할 감정이나 앙금이 남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아니, 오히려 유럽 중심적인 시각에서 그들은 고대 로마 제국을 바라보는 중일지 모릅니다. 로마 제국이 브리타니아를 침략했다고 해도, 로마와 영국 모두 유럽이고, 로마 제국은 유럽 중심적인 시각을 강화할 수 있죠. 무엇보다 19세기 이후 영국은 세계적인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시티 런던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상징하는 구역입니다. 신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정치인을 꼽을 때, 흔히 우리는 마가렛 대처를 언급합니다. 대영 제국은 세계 지도를 새로 그렸고, 그건 여전히 엄청난 분쟁들을 일으킵니다. 비록 미국 패권주의에 밀렸으나, 영국은 문화적으로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영국 문화는 프랑스 문화나 독일 문화보다 훨씬 유명합니다. 셜록 홈즈, 007 제임스 본드, 프로도와 절대 반지, 모던 스페이스 오페라, 해리 포터, 기타 등등. SF 소설이나 판타지 소설이나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절대 영국 문화를 간과하지 못해요.
그래서 게임즈 워크샵이나 영국 게임 플레이어들은 우주 로마 제국에 상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는 개인적인 추측입니다. 딱 부러지는 근거는 없어요. 어쩌면 로마 덕후들이나 영국 덕후들은 훨씬 명료한 대답을 내놓을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은 저보다 훨씬 많이 알 테고, 그런 사람들은 저보다 옳겠죠. 어쨌든 영국 문화는 엄청나게 잘 나가고, 그런 영국 문화는 고대 로마 제국에게 앙갚음하지 않는 것 같아요. 오히려 고대 로마 문화가 영국 문화에게 빨려들어갈지 모르죠. <스페이스 헐크> 같은 게임에서 우주 로마 군대인 스페이스 마린이 영국 발음을 딱딱거리는 장면은…. 뭐, 나름대로 재미있습니다. 고대 로마 백부장이 이런 게임을 본다면, 그 백부장은 기절초풍할지 모르겠습니다. 로마 군인 스페이스 마린이 촌스러운 변방 영어를 딱딱거리다니…. 스페이스 오페라는 여러 문화들을 수용하고, 그래서 이렇게 게임 플레이어들은 로마 문화와 영국 문화를 살필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