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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에밀이 <신비의 섬>과 <붉은 화성>을 읽는다면… 본문

감상, 분류, 규정/생태 사회주의, 에코 페미니즘

에밀이 <신비의 섬>과 <붉은 화성>을 읽는다면…

OneTiger 2019. 3. 22. 19:57

[계몽주의 시대 에밀은 <로빈슨 크루소>를 이용해 자연과 문명을 읽습니다. 21세기 에밀은 어떨까요?]



계몽주의 지식인 장 자크 루소는 아이 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루소 본인이 아이들을 버렸음에도, 장 자크 루소는 다른 어떤 것들보다 교육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장 자크 루소는 심혈을 기울이고 아이 교육 서적을 씁니다. 그리고 <에밀>은 루소의 가장 뛰어나고 위대한 서적들 중에서 하나입니다. <에밀> 때문에 장 자크 루소는 명성을 누리고 동시에 힐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은 <에밀>이 21세기 인류 사회의 교육 문제에 많은 것들을 가르친다고 생각합니다.


<에밀>에서 장 자크 루소는 에밀이 어떤 책을 읽기 원합니다. 루소는 수많은 지식들을 쉽고 풍성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에밀이 어떤 책을 읽기 원합니다. 그건 다니엘 디포가 쓴 <로빈슨 크루소>입니다. 장 자크 루소는 <로빈슨 크루소>에게 수많은 지식들이 있고 에밀이 이걸 특별하게 읽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아주 고립된 상황을 가정합니다. 무인도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혼자 살아남아야 하고, 혼자 노동해야 하고, 혼자 자연 환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사회적인 관계들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문명의 혜택과 편의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은 사변 실험이 될 테고, 사변하는 동안 에밀은 수많은 지식들을 쉽게 받아들일 겁니다.



<에밀>에서 장 자크 루소는 <로빈슨 크루소>가 제시하는 상황이 '자연적인 인간'을 만든다고 상정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먹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에밀은 훌륭한 농민이 되고 훌륭한 목수가 됩니다. 사회는 잉여 생산물들을 착취합니다. 부자들이 잉여 생산물들을 착취할 때, 사회는 이런 착취에 기반합니다. 그래서 장 자크 루소는 사회적인 관계들이 에밀을 물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 자크 루소는 계속 '자연적인 본성'을 이야기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장 자크 루소가 (계몽주의에 반대하는) 자연주의 교육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장 자크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하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문구가 루소의 사상을 압축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에밀>에서 장 자크 루소가 권유하는 <로빈슨 크루소>에 커다란 단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루소가 추구하는 자연주의 본성 교육에도 커다란 단점이 있습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인간이 맨땅에 헤딩하는' 상황을 제시하고, 그래서 장 자크 루소는 에밀이 이 소설을 읽기 바랍니다. 하지만 '인간이 맨땅에 헤딩하는' 상상력은 오직 <로빈슨 크루소>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SF 소설들 역시 이런 상황을 상상하곤 합니다. 특히, 이건 외계 개척 이야기의 주된 소재입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이 쓴 <붉은 화성>은 대표적인 외계 개척 이야기입니다. <붉은 화성>과 <로빈슨 크루소>는 비슷합니다. 양쪽 모두 사람(들)이 새로운 자연 환경을 개척하고 새로운 문명을 이룩한다고 묘사합니다. 하나는 작은 무인도 문명이고, 다른 하나는 화성 개척 도시이나, 양쪽 모두 맨땅에서 사람들이 새롭게 시작한다고 묘사합니다. 에밀이 사변 실험을 시도할 수 있는 것처럼, SF 독자들 역시 그럴 수 있습니다. 사실 외계 개척 이야기는 어떻게 자연 환경 속에서 문명이 나타나는지 고찰합니다.


비록 <로빈슨 크루소>와 <붉은 화성> 사이에는 굉장히 커다란 차이점들이 있으나, 근본적인 공통점 역시 있습니다. 새로운 자연 환경에서 인간은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물론 SF 독자들은 외계 개척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신비의 섬>처럼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이 무인도 문명을 묘사했다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비의 섬>은 <로빈슨 크루소>와 많이 닮았습니다. <신비의 섬>은 <로빈슨 크루소>를 적극적으로 의식합니다. 사실 <그랜트 선장의 아이들>이나 <15소년 표류기>에서도 쥘 베른은 로빈슨 크루소를 크게 의식합니다. 소설 <그랜트 선장의 아이들>에서 아예 등장인물들은 공개적으로 로빈슨 크루소를 논의합니다.



비록 하나가 무인도 문명을 이야기하고, 다른 하나가 화성 개척 도시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신비의 섬>과 <붉은 화성>은 꽤나 비슷합니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양쪽 소설은 새로운 자연 환경에서 새로운 문명이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문명은 꽤나 진보적입니다. 여기에는 폭력과 착취와 수탈이 없고, 사회 구조는 평등합니다. <에밀>에서 장 자크 루소는 사회가 잉여 생산물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사회를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붉은 화성>을 포함하는) <화성> 3부작과 <신비의 섬>에서 새로운 사회는 착취에 기반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사회는 철보다 금이 낫다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이런 사회에서 에밀은 착취에 물들지 않을 겁니다. <붉은 화성>과 <신비의 섬>은 모두 진보와 과학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진보와 과학 없이, 링컨 섬 생존자들은 무인도를 개척하지 못합니다. 진보와 과학 없이, 화성 과학자들은 붉은 행성을 개척하지 못합니다. <신비의 섬>에서 어떤 등장인물은 진보한 스팀펑크를 상상합니다. 만약 미국 대륙에서 링컨 섬까지 철도가 이어진다면…. 이건 너무 공상적인 스팀펑크 같으나, 링컨 섬 생존자들은 진보와 과학을 믿습니다. 그들은 진보와 과학이 놀라운 스팀펑크를 이룩할 거라고 믿습니다.



<신비의 섬>에서 링컨 섬 생존자들은 진보적인 스팀펑크 세상을 상상합니다. 여기에는 생명체 번성이 없습니다. 링컨 섬 생존자들은 철도를 비롯해 온갖 기계들을 꿈꿉니다. 링컨 섬 생존자들은 19세기 사람들이고 산업 혁명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기계 세상이 진보하고 풍요로운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 기계들을 중시합니다. 이건 드문 현상이 아닙니다. 수많은 19세기 유럽 지식인들은 '기계가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는' 세상에 감탄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처럼 공산주의 지식인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공산당 혁명>은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정말 놀라운 업적들을 이룩했다고 칭찬합니다. 인류 문명에서 산업 혁명은 가장 혁신적이고 놀라운 업적들을 이룩했습니다. 게다가 산업 혁명은 오랜 세월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100년이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산업 혁명은 유럽을 뒤집었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너무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 경제를 찬양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기계 문명 자유주의자 같습니다. 여전히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물질적인 부가 사회주의 경제를 뒷받침한다고 생각합니다. 생산력 발전 없는 사회주의 세상은 없습니다.



21세기 사람들보다 19세기 사람들은 기계 문명에 훨씬 감탄했을 겁니다. 17세기 이전까지, 유럽 문명(을 비롯해 인류 문명)은 기계 문명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세기에 최초로 유럽 사람들은 기계 문명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이런 충격은 벼락과 비슷할 겁니다. 쥘 베른은 기계 문명을 믿었습니다. 적어도 <신비의 섬>은 진보한 스팀펑크를 꿈꿉니다. 비단 <신비의 섬>만 아니라 여러 쥘 베른 소설들은 진보한 기계 문명을 꿈꿉니다. 19세기 유럽 백인 남자 지식인으로서 쥘 베른은 그게 훨씬 좋은 미래라고 믿었습니다. 진보한 기계 문명은 훨씬 좋은 미래입니다.


하지만 링컨 섬 생존자들은 자연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인류가 자연 환경을 관리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생물 다양성은 번성해야 합니다. 인류 문명은 자연 생태계를 떠나지 못합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인공 기계 농장을 보여주나, 정말 인공 기계 농장이 가능한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인공 기계 농장은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로봇 꿀벌들이 꽃가루 운송을 맡거나 수경 재배가 전통적인 텃밭을 밀어내거나 대규모 온실 농장이 가능할 거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아직 아무도 그것들이 가능할 거라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은 추측입니다.



로봇 꿀벌들과 수경 농장들과 대규모 온실 농장들은 그저 추측들에 불과합니다. 이런 것들이 가능하다고 해도, 훨씬 거대한 자연 생태계가 이것들을 뒷받침하지 않는다면, 이것들은 실패할 겁니다. 결국 인류 문명은 자연 생태계를 떠나지 못합니다. 인류 문명은 아기이고, 자연 생태계는 어머니입니다. 어머니 자연 없이, 인류 문명은 없습니다. 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빠는 것처럼, 인류 문명은 어머니 자연의 젖가슴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링컨 섬 생존자들은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실 링컨 섬은 아주 풍족합니다. 링컨 섬은 아주 생산적이고, 생존자들은 그저 그것들을 (이성과 과학으로) 이용할 뿐입니다.


<신비의 섬>과 달리, 하드 SF 소설로서 <붉은 화성> 역시 진보와 과학이 죽은 행성을 살아있는 행성으로 바꿀 거라고 말합니다. 화성은 붉고 황량합니다. 여기에는 생명체가 없습니다. 하지만 개척 과학자들은 계속 화성 기후를 바꾸고, 물을 흘리고, 생명체들을 퍼뜨립니다. 테라포밍은 황량한 붉은 화성을 풍성한 녹색 화성으로 바꿉니다. 진보와 과학은 우주에 생명체들을 퍼뜨립니다. 우주에서 생명 현상이 흔하지 않다면, 이런 테라포밍은 가장 놀라운 진보일지 모르죠. 그래서 <화성> 3부작에서 개척 과학자들은 자연과 문명과 생명 현상을 고민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링컨 섬 생존자들처럼, 로빈슨 크루소 역시 자연 환경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어떻게 생물 다양성이 번성하는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무인도에는 다양한 식물들과 동물들이 있고, 로빈슨 크루소는 그저 그것들을 이용할 뿐입니다. 빅토르 위고가 쓴 <바다의 노동자> 역시 비슷합니다. 소설 <바다의 노동자>에서 소설 주인공은 위험한 해안 절벽을 찾아갑니다. 거기에서 선박이 좌초했기 때문입니다. 해안 절벽에서 소설 주인공은 선박 엔진을 무사히 꺼내고 싶어합니다. 거기에서 소설 주인공은 먹고 삽니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소설 주인공은 해안 자연 환경을 이용해야 했습니다. 로빈슨 크루소와 달리, <바다의 노동자>에서 소설 주인공은 새로운 문명을 개척하지 않습니다. 소설 주인공의 목표는 오직 선박 엔진일 뿐입니다. 소설 제목처럼, <바다의 노동자>에서 주인공은 생존자보다 노동자입니다. 하지만 로빈슨 크루소처럼, <바다의 노동자>에서 주인공은 이미 존재하는 자연 생태계를 그저 이용할 뿐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어떻게 해안 자연 생태계가 번성했는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어떤 현상이 이미 존재할 때, 사람들은 왜 그게 존재하는지 묻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그저 당연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심지어 아주 끔찍하고 폭력적인 사태가 벌어진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베네수엘라 인디언들을 짓밟는다고 해도, 자본주의 경제가 기후 변화를 일으킨다고 해도, 가부장 문화가 여자들을 폭행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그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건 너무 편협하고 단기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하지만 어떤 현상이 이미 존재할 때, 사람들은 그게 당연하다고 믿습니다.


성경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성경은 당연합니다. 태양은 지구 주변을 돌아야 합니다. 현모양처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가부장 문화는 당연합니다. 여자는 남자를 떠받들어야 하고, 여자는 보조적이고 부차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남자는 중요하고 주된 존재가 됩니다. 남자는 중요한 산업 노동에 참가하고, 여자는 쓸데없는 육아와 살림을 맡습니다. 여자가 사회적으로 진출하고 싶다고 해도, 이미 사회는 가부장적이고, 여자는 가부장적인 사회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여자와 남자는 똑같이 사회로 진출하지 못합니다. 여자가 원래 현모양처이기 때문에, 사회로 진출하기 위해, 여자는 희생과 변화를 감당해야 합니다.


남자가 원래 중요하고 주된 존재이기 때문에, 커다란 희생과 변화 없이 남자는 사회에 진출할 수 있습니다. 학교 교과서들은 남자들의 대규모 산업 노동들과 침략들과 전쟁들이 역사라고 가르칩니다. 여자들이 열심히 육아와 살림을 맡는다고 해도, 그건 역사가 되지 못합니다. 학교 교육은 오직 가부장적인 것들만 역사가 된다고 거짓말하고 세뇌합니다. 이렇게 거짓말들과 세뇌들이 판치는 상황에서 '중요하고 주된' 남자는 '보조적이고 부차적인' 여자를 폭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 폭행들은 끊이지 않아요.



학교 교육들이 거짓말들을 퍼뜨린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걸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미 가부장 문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미 그게 존재하기 때문에, 오직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로빈슨 크루소>와 <바다의 노동자>에게 번성하는 생물 다양성은 당연합니다. 이미 그게 존재하기 때문에. 심지어 <바다의 노동자>에서 소설 주인공은 거대 문어에게 끌려갑니다. 거대 문어는 소설 주인공을 휘감고 압박합니다. 이 부분에서 잠시 <바다의 노동자>는 촉수 괴수물이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소설 주인공이 거대 문어와 싸웠음에도, 소설 주인공은 생물 다양성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빅토르 위고는 놀라운 필력으로 해안 자연 생태계를 웅장하게, 섬세하게 표현했습니다. 21세기 초반 게임 플레이어들이 비디오 게임 <압주>에게 감탄하는 것처럼, 19세기 유럽 독자들은 <바다의 노동자>에게 감탄했을 겁니다. 소설 <소멸의 땅>이 X 구역의 자연 생태계를 이질적이고 환상적으로 묘사하는 것처럼, <바다의 노동자>는 해안 자연 생태계를 이질적이고 환상적으로 묘사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빅토르 위고가 열심히 자연 생태계를 묘사한다고 해도, 위고는 어떻게 생물 다양성이 번성하는지 파고들지 않습니다. 19세기 유럽 작가에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겁니다. 소설 <신비의 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에밀이 <신비의 섬>을 읽는다고 해도, 에밀은 생물 다양성을 고민하지 않겠죠.



반면, <붉은 화성>은 생물 다양성을 고민해야 합니다. <로빈슨 크루소>와 <바다의 노동자>와 <신비의 섬>에서 사람들은 이미 존재하는 자연 생태계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붉은 화성>에서 상황은 아주 다릅니다. 불모지 행성에서 화성 개척자들은 새로운 자연을 퍼뜨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구 생명체에게 화성은 너무 가혹한 환경입니다. 화성 개척자들은 가혹한 환경을 온건한 환경으로 바꾸고 새로운 자연을 퍼뜨리기 원합니다. 화성 개척자들은 어떻게 생물 다양성이 퍼지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화성 개척자들이 이걸 고민하는 동안, 그들은 생명 현상을 바라보기 위한 다양한 시각들을 드러냅니다.


자연, 생명, 환경. 이것들이 무엇을 뜻하나요? 이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나요? 자연과 생명과 환경이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가요? 만약 화성에 생명체가 있다면, 화성 생명체가 소중할까요? 화성 환경이 바뀐다면, 화성 생명체는 사라질지 모릅니다. 지구 생명체들이 늘어난다면, 화성 생명체들은 사라질지 모릅니다. 흔히 우리는 외래종 교란이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화성에서 지구 생명체들이 늘어난다면, 이게 외래종, 아니, 외계종 교란이 아닐까요? 테라포밍이 정말 긍정적입니까? 번성하는 생물 다양성은 아름답고 경이로우나, 테라포밍이 아름답고 경이로울까요?



<로빈슨 크루소>와 <신비의 섬>과 <붉은 화성>은 모두 새로운 환경에서 인간이 새로운 문명을 이룩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로빈슨 크루소>와 <신비의 섬>보다 <붉은 화성>은 훨씬 폭넓습니다. <붉은 화성>에는 사회적인 관계들이 있고, 진보와 과학이 있고, 무엇보다 생물 다양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 표류 소설과 19세기 사이언티픽 로망스와 20세기 하드 SF 소설은 비슷한 소재를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로빈슨 크루소>와 <신비의 섬>과 <붉은 화성>은 비슷한 소재를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만약 23세기나 24세기 사람들이 계속 SF 소설들을 쓴다면, 그것들은 표류 이야기나 개척 이야기를 또 다시 새롭게 만들 겁니다. 24세기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로빈슨 크루소>와 <신비의 섬>과 <붉은 화성>과 비교하고 대조할 겁니다. 이렇게 시대는 흐르고, 새로운 문학은 나타나고, 새로운 문학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변주합니다. 다니엘 디포는 <신비의 섬>을 낯설게 바라볼 겁니다. 쥘 베른은 <붉은 화성>을 낯설게 바라볼 겁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은 24세기 SF 소설을 낯설게 바라볼지 모릅니다. 이렇게 세상은 계속 바뀔 겁니다.



계몽주의 시대 에밀에게 <로빈슨 크루소>가 있는 것처럼, 19세기 에밀에게는 <신비의 섬>이 있을 겁니다. 20세기 에밀에게는 <붉은 화성>이 있을 겁니다. 24세기 에밀에게는 또 다른 표류/개척 이야기가 있을 겁니다. 이렇게 여러 시대들에서 여러 에밀들은 여러 표류/개척 이야기들을 읽을 겁니다. 표류/개척 이야기는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문명을 그립니다. 사람들이 '맨땅에 헤딩'하고 새롭게 문명을 만들기 때문에, 독자들은 어떻게 문명이 시작하는지 근본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문명의 혜택과 이기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시작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표류/개척 이야기에는 이런 장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장 자크 루소는 에밀이 표류/개척 이야기를 읽기 원했을 겁니다.


이른바 '자연주의 교육자' 장 자크 루소는 새로운 자연 환경에서 에밀이 새로운 문명을 고민하기 원했을 겁니다. 하지만 새로운 자연 환경에서 에밀이 새로운 문명을 고민한다고 해도, <로빈슨 크루소>와 <신비의 섬>과 <붉은 화성>은 많은 차이들을 드러냅니다. 특히, <붉은 화성>은 여자와 자연을 이야기합니다. <에밀>과 <로빈슨 크루소>와 <신비의 섬>에는 여자와 자연이 없습니다. 장 자크 루소는 소년 에밀을 이야기하나, 소녀 소피아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루소가 소녀 소피아를 이야기할 때, 소녀 소피아는 그저 소년 에밀의 부속품에 불과합니다. 소녀 소피아는 순종적이고 온순하게 자라야 합니다. 청년 에밀과 (순종적이고 온순한) 처녀 소피아가 만날 때, 청년 에밀은 처녀 소피아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처녀 소피아에게 행복은 청년 에밀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소피아가 에밀을 만날 때, 마침내 소피아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피아는 에밀의 부속품이 됩니다. 아내는 남편의 부속품이 됩니다. 여자는 남자의 부속품이 됩니다. 소녀 소피아의 미래는 에밀의 아내입니다. 장 자크 루소는 오직 현모양처 같은 소피아만을 말합니다. 이건 아주 심각한 성 차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장 자크 루소가 어느 정도 성 평등에 주목했다고 옹호할지 모릅니다.


분명히 장 자크 루소는 도시화, 문명화, 이성과 과학을 회의했고 지배적인 관념에 반박했습니다. 루소는 오직 소피아를 현모양처일 뿐이라고 말했으나, 21세기 가부장적인 수구 세력과 장 자크 루소는 다릅니다. 시대적인 한계 속에서 루소는 성 평등을 추구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성 차별은 성 차별입니다. 이건 아주 심각하고 고정적인 성 차별입니다. 루소는 자연적인 삶을 강조했으나, 에밀은 자연과 여자를 알지 못할 겁니다. <붉은 화성>이 자연과 여자를 말할 때, 에밀은 크게 당황할 겁니다.


장 자크 루소 역시 크게 당황할 겁니다. 장 자크 루소는 여자가 살림에 매달리고 남편을 기쁘게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자 개척 과학자 히로코가 생태학 연구 집단을 이끌고 대규모 녹색 농장들을 가꿀 때, 여자 개척 과학자 나디아가 남자 과학자들을 윽박지르고 중장비들을 운전할 때, 루소는 놀라 자빠질 겁니다. 아니, 비단 에밀과 루소만 아니라 다니엘 디포와 쥘 베른 역시 당황할지 모릅니다. 소설 <신비의 섬>은 새로운 자연 속에서 새로운 문명이 나타난다고 말하나, 여기에는 여자가 없습니다. 게다가 여기에는 비단 여자만 아니라 진짜 자연이 없습니다.



1895년 2월 잡지 <스트랑>에서 쥘 베른은 말합니다. "사랑은 엄청난 열정이다. 인간의 마음 속에 사랑이 있을 때, 다른 감성은 자리를 잡지 못한다. 소설 주인공들은 거대한 업적들을 이루어야 한다. 따라서 소설 주인공들이 매혹적인 젊은 여자와 동행한다면, 매혹적인 젊은 여자는 거대한 업적들을 방해할지 모른다." 그래서 소설 <신비의 섬>에는 (매혹적인 젊은) 여자가 없습니다. 쥘 베른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거대한 업적을 이루어야 합니다. 무엇이 거대한 업적인가요? 그건 개척입니다. 인간은 자연 환경을 개척하고 새로운 문명을 이룩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왜 여자가 무조건 매혹적인 젊은 여자이어야 합니까? 평범하거나 중년이거나 건장한 여자는 여자가 아닙니까? 왜 개척자들이 무조건 남자들이어야 합니까? 왜 여자들이 개척자가 되지 못합니까? 사랑이 너무 엄청난 열정이고 문제가 되나요? 네, 좋습니다. 사랑이 정말 문제라면, 쥘 베른은 남자 없이 여자 개척자들이 자연 환경을 개척한다고 쓸 수 있습니다. 어슐라 르 귄이 여자 탐사대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쥘 베른 역시 여자 개척자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쥘 베른은 쓰지 않았습니다. 개척자는 오직 남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고 열정이고 나발이고 따지기 전에, 쥘 베른은 오직 남자만 개척자라고 가정합니다. 진짜 문제는 사랑과 열정이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개척자가 오직 남자라는 사실입니다.



이건 비단 쥘 베른만의 잘못이 아닐 겁니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탐험과 개척이 남자의 영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코난 도일이 쓴 <잃어버린 세계>에서 공룡 탐사대는 남자들입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가 쓴 <광기의 산맥>에서 극지 탐사대는 남자들을 강조합니다. 존 로널드 톨킨이 쓴 <반지 원정대>에서 반지 원정대에는 오직 남정네들만 득실거립니다. 아, 근력과 전투가 문제입니까? 하지만 반지 원정대 아홉 중에서 넷은 호빗입니다. 호빗은 전사가 아니고, 호빗에게는 근력이 없습니다. 회색의 간달프는 호빗을 칭찬했으나, 이유는 근력과 전투가 아니었습니다.


회색의 간달프가 호빗을 칭찬한 이유는 호빗이 작고, 교활하고, 끈질기기 때문입니다. 여자 호빗이 반지 원정대에 참가했다고 해도,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프로도 배긴스는 특별히 힘이 세거나 싸움박질을 잘 하지 않아요. 하지만 존 로널드 톨킨은 여자 호빗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죠. 탐험과 개척이 오직 남자만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17~19세기 탐험, 과학, 계몽, 개척은 오직 가부장적인 탐험, 과학, 계몽, 개척이었을 뿐입니다. 이런 시각은 여전히 우리를 장악합니다. 그래서 소설 <소멸의 땅>에서 여자 탐사대는 특이합니다. 여자는 탐사와 개척에 끼어들지 못합니다. 쥘 베른은 이런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가부장적인 탐사와 개척은 온갖 학살들로 이어졌습니다. 가부장적인 탐사와 개척은 자연이 수동적이라고 간주했고 원주민들이 수동적이라고 간주했습니다. 가부장적인 개척을 위해 자연과 원주민들은 쓰러져야 합니다. 심지어 유럽 백인 지식인들은 "원주민의 권리가 신장할 때 백인은 희생을 당한다."고 말했습니다. 원주민에게는 권리고 나발이고 없습니다. 백인들이 열대 밀림을 개척하지 않는다면, 그건 '백인의 희생'이 됩니다. 따라서 유럽 백인들은 무조건 열대 밀림을 개척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리끼지 않고 플랜테이션 농장들을 세웠습니다. 가부장적인 탐사와 개척은 여자, 자연, 원주민이 수동적이라고 간주합니다.


여자, 자연, 원주민은 가부장적인 탐사와 개척에 끼어들지 못합니다. 심지어 여자 없이 진짜 문명이 나타나지 못함에도, 쥘 베른은 이걸 지적하지 않습니다.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에서 남자 우주 개척자는 여자를 거부합니다. 여자와 남자가 함께 우주를 개척할 때, 그들은 에덴 동산의 사악한 뱀을 만날 겁니다. 테라포밍 행성에서 온갖 녹색 식물들이 번성한다고 해도, 거기에는 사악한 뱀이 있을 겁니다. 여자는 선악과를 남자에게 줄 겁니다. 그래서 여자는 없어야 합니다. 소설 <신비의 섬>은 새롭고 이상적인 문명을 말하나, 이 문명은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없기 때문에, 독자들은 한 세대 안에서 이 문명이 망할 거라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이 임신하고 출산하고 수유하고 육아를 맡을 때, 인류 문명은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비의 섬>은 여자를 배제하고 오직 남자들만의 개척 문명을 말합니다. 사랑과 열정은 문제가 아닙니다. 열정적인 사랑이 정말 문제입니까. 섹스는 인생의 커다란 쾌락입니다. 왜 이게 나쁠까요. 진짜 문제는 가부장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잡지 <유럽>에서 시릴 안드리프는 링컨 섬이 비정상적으로 풍성하다고 지적했습니다. 태평양 무인도에 오랑우탄과 야생 당나귀와 캥거루가 서식하지 않음에도, <신비의 섬>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태평양 무인도에서 생존자들은 너무 쉽게 풍부한 광물들과 자원들을 찾습니다. 이미 자연은 풍성하게 존재합니다.


링컨 섬 남자 생존자들은 풍성한 자연을 그저 이용할 뿐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인간과 자연이 관계를 맺는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가부장적인 개척 사회는 여자와 원주민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가부장적인 개척 사회는 여자와 자연과 원주민이 수동적이라고 간주합니다. 만약 이런 시각이 비단 열대 밀림만 아니라 외계 생태계로 확장한다면? <신비의 섬>이 여자와 자연이 수동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처럼, 가부장적인 시각은 외계 행성과 외계 생태계와 외계 바이오스피어 건물 역시 수동적이라고 간주할 겁니다. 이런 시각 속에서 외계 바이오스피어 건물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가부장적인 경제는 바이오스피어 건물을 탕진할지 모릅니다.



가부장적인 시각이 여자와 자연과 원주민을 무시하기 때문에, 에코 페미니스트들은 여자와 자연을 함께 옹호합니다. 종종 이건 피상적인 함정에 빠집니다. 에코 페미니즘은 생물적인 현상을 사회 구조적인 현상으로 연결합니다. 이건 피상적인 시각입니다. 여자의 몸과 자연 생태계가 똑같이 생산적이고 똑같이 생명체들을 먹인다고 해도, 여자의 몸은 자연 생태계가 아닙니다. 하지만 가부장적인 시각이 너무 억압적이기 때문에, 에코 페미니즘이 다소 무리한다고 해도, 그건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이런 가부장적인 개척에서 비롯했고, 따라서 그 자체로서 자본주의는 모순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자체로서 자본주의는 모순입니다.


자본주의는 1분 1초라도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에코 페미니즘은 이걸 계속 강조해야 할 겁니다. 무엇보다 여자들은 임신하고 출산하고 수유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이 젖을 먹일 때, 여자들은 자연의 생산력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겠죠. 여자의 몸이 무조건 자연 생태계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여자의 몸에는 아주 커다란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환경 사회학 서적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에서 나오미 클라인은 임신과 출산을 구태여 밝혔을 겁니다. 개척 이야기는 여자와 자연을 다시 바라보고 다시 말해야 합니다. '자연주의' 교육자 장 자크 루소는 어떨까요? 루소는 계몽주의에 반대했으나, 가부장적인 시각이 여자와 자연을 무시하는 것처럼, 루소 역시 피상적인 시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장 자크 루소는 에밀이 자연을 점거하고 노동하기 바랍니다. 자연의 소유자 에밀이 노동하는 동안, 소피아는 에밀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소피아는 스스로 먹고 살지 못하고 자연에 의존하지 못합니다. 에밀은 자연의 주인이 되고 소피아의 주인이 됩니다. 소피아는 에밀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게 그저 비유에 불과하다고 해도, 왜 아내가 남편을 자신의 주인이라고 표현해야 하나요? <에밀>에서 자연과 여자는 남자의 소유입니다. <로빈슨 크루소>와 <신비의 섬>이 오직 남자만이 자연을 개척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에밀>은 남자가 여자와 자연을 소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게 정말 자연주의적인가요? 그건 아닐 겁니다. 분명히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장 자크 루소는 소유 문제에 치중했어요. 인류 문명에서 공유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쩌면 공유는 가장 중요한 문제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에밀>에서 루소는 여자들과 남자들(과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자연 환경을 공유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21세기 사람들은 <에밀>이 훌륭한 교육학이라고 말하나, 이런 가부장적인 시각이 평등한 사회에 도움이 될까요. '자연주의' 교육자 장 자크 루소는 여자와 자연을 다시 말해야 합니다. 에밀은 여자와 자연을 다시 읽어야 합니다.



아무리 에밀이 자연주의 교육을 받는다고 해도, 이런 자연주의 교육은 가부장적일 겁니다. 소설 <화성> 3부작은 여자와 자연을 이야기하고, 그래서 미래의 에밀에게 <화성> 3부작은 좋은 선택일 겁니다. 게다가 미래의 에밀이 비단 <화성> 3부작만 아니라 여러 생태 사회주의 서적들과 에코 페미니즘 서적들을 함께 읽는다면, 소피아와 에밀은 함께 외계 바이오스피어 건물을 바라볼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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