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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어머니 자연과 언어의 가부장적인 물질성 본문

감상, 분류, 규정/생태 사회주의, 에코 페미니즘

어머니 자연과 언어의 가부장적인 물질성

OneTiger 2019. 3. 24. 16:09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를 일으킵니다. 어머니 자연은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할 겁니다.]



"생명(life)은 강해! 생명은 돈보다 강하고, 총과 감옥보다 강하고, 자본주의보다 강해! 어머니 자연은 대미를 장식해. 어머니 바다는 강해. 영원히 어머니 자연의 품 속에서 우리는 살아야 해! 생명은 끈질기고, 네놈은 절대 생명을 죽이거나 구매하지 못해! 생명! 생명! 생명! 생명은 네놈의 엉덩짝을 걷어찰 거야!"



이렇게 소설 <뉴욕 2140>은 격렬하고 분노에 가득한 문구들을 말합니다. 소설 <뉴욕 2140>은 기후 변화가 홍수를 부르고 홍수가 도시를 뒤덮었다고 묘사합니다. 기후 변화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비롯했습니다. 19세기 유럽 문명이 산업 자본주의를 발전시켰을 때, 이미 산업 자본주의는 엄청난 열기(와 매연들과 오물들)를 뿜었습니다. 산업 자본주의는 열대 밀림을 밀어내고, 훨씬 많은 화석 연료들을 태우고, 과다한 자동차들을 조립하고, 과다한 가축들을 늘립니다. 이미 화석 연료 사업들이 거대 권력이 되었기 때문에, 태양열 에너지 사업은 쉽게 두 날개를 펼치지 못합니다.


이반 일리치는 행복이 자전거를 타고 온다고 말했으나, 거대 화석 연료 권력은 자전거를 쫓아내고 행복을 짓밟습니다. 이건 인류 문명이 중세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환경 오염이 논란이 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환경 오염이 필연적이라고 말합니다. 인류 문명은 산업 발전을 돌이키지 못하고, 따라서 산업 폐기물들은 필연적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자본주의 경제가 문제라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진짜 문제는 산업 문명 그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에 기반하는 산업 문명입니다. 19세기 유럽 문명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산업 자본주의 문명이었습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이윤을 축적하기 원하고, 그래서 환경 오염은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자연 생태계가 무너지고 기후 변화가 기이해진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오직 이윤 축적만 추구합니다. 아무리 화석 연료가 산업 폐기물들을 양산한다고 해도, 화석 연료 사업이 당장 이윤을 축적할 수 있다면, 자본주의는 화석 연료 사업을 추구할 겁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합니다. 아니, 산업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를 초래했기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는 부유해질 수 있습니다. 기후 변화 때문에 자본주의는 부유해질 수 있었습니다.


자본주의는 대대적인 환경 오염들을 절대 막지 못합니다. 그래서 소설 <뉴욕 2140>에서 등장인물은 분노하고 "자본주의보다 생명은 강해!"라고 외쳤을 겁니다. 'life'라는 단어는 인생이 될 수 있으나, 저 대사에서 'life'는 인생보다 생명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등장인물이 어머니 자연(Mother Nature)과 어머니 바다(Mother Ocean)를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자연과 어머니 바다는 인생보다 '생명'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어머니 자연은 생명, 환경, 생태계로 이어질 수 있어요. 저 대사는 인생을 가리킬 수 있으나, 소설 <뉴욕 2140>에서 등장인물은 어머니 자연을 이용해 인생보다 대자연과 생태계를 말하기 원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자본주의 따위보다 어머니 자연은 강합니다.



이렇게 생태학 SF 소설에서 어머니 자연은 감동적이고 원대한 개념이 될 수 있습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경제보다 어머니 자연은 생태 유토피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 자연은 다소 관념적이고 종교적인 기운을 풍길지 모르나,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이 어머니 자연을 거부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만약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이 어머니 자연을 거부해야 한다면, 이유는 다른 것일 겁니다. 어머니 자연에게 '언어의 가부장적인 물질성'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사회적인 기호입니다. 언어는 사회적으로 존재합니다. 언어가 사회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앤서블'이 무엇인가요? 사람들이 열심히 영어 사전을 뒤적인다고 해도, 사람들은 앤서블(Ansible)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겁니다. 이게 SF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우주 무선 통신 장치를 가리키기 위해 어슐라 르 귄은 '앤서블'이라는 단어를 창작했습니다. 어슐라 르 귄은 '개인적으로' 앤서블을 창작했습니다. 그래서 앤서블은 사회적인 기호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앤서블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SF 독자들은 앤서블을 이해합니다. SF 독자들이 어슐라 르 귄을 이용해 특정한 관계들(팬덤)을 맺기 때문입니다. SF 팬덤 안에서 앤서블에게는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SF 팬덤 밖에서 앤서블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앤서블은 그저 의미 없는 기호에 불과해요.



SF 작가가 외계 언어를 만든다고 해도, 이 외계 언어는 개인적입니다. 이건 사회적인 기호가 아닙니다. 그래서 SF 팬덤 이외에 다른 사람들은 외계 언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스타 트렉> 팬들은 외계 언어로 소통할 수 있으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비단 언어만 아니라 다른 의사 소통 방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타 트렉> 팬들이 저 유명한 손동작(스팍의 손 인사)을 모방할 때, SF 팬덤은 그걸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니, 그게 뭡니까? 손가락 관절들이 유연하다고 자랑합니까? 식초를 많이 드셨나요? 어디에서 필라테스를 배웠습니까?"


이렇게 언어를 비롯해 의사 소통 방법은 사회적으로 파생합니다. 언어는 사회적입니다. 남한 사람들은 '부모'라고 말합니다. 부모(父母)는 아버지와 어머니입니다. 남한 사람들이 부모라고 말할 때, 남한 사람들은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우선합니다. 남한 사람들은 모부라고 말하지 않고 부모라고 말합니다. 누군가가 '모부(母父)'라고 말한다면, 남한 사람들은 모부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여자보다 남자는 우선합니다. 남한 사람들은 '부부'라고 말합니다. 부부(夫婦)는 남편과 아내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남자와 여자입니다. '레즈비언 부부'가 가능한가요? 부부가 남자와 여자를 가리킨다면, 남한 사람들이 결혼한 레즈비언 한쌍을 부부라고 부를 수 있나요?



[SF 팬덤은 이걸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손 동작 요가인가?"]



남한 사회는 가부장적인 사회입니다. 남한 사회는 아주 억압적인 가부장 문화입니다. 언어는 사회적이고, 그래서 남한 언어는 가부장적인 사회를 반영합니다. 부모와 부부는 여자보다 남자를 우선시하고 동성애보다 (남자를 떠받드는) 이성애를 우선시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부모라는 단어를 싫어합니다. 이 단어가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모부'라고 말하거나 아예 신조어를 말한다면,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우리는 가부장적인 언어를 이용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성 평등'이 아니라 '남녀 평등'을 이야기할 때, 그 사람에게는 꿍꿍이가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여남 평등'이 아니라 '남녀 평등'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남녀 평등'은 여자보다 남자를 우선시합니다. 게다가 '남녀 평등'은 다른 성별들을 배제합니다. '남녀 평등'보다 '성 평등'은 훨씬 폭넓은 용어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일부러 성 평등보다 남녀 평등을 주장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꿍꿍이가 있을지 모릅니다.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소비에트 연방'과 '러시아'라는 단어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소비에트 연방보다 러시아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은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을 부정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의도적으로 러시아를 말했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언어는 사회적인 측면을 반영합니다. 사회가 억압적일 때, 사람들은 억압적인 언어를 이용합니다. 이건 언어의 물질성입니다. 그래서 장 폴 사르트르는 진정한 작가가 언어의 물질성을 뛰어넘고 평등한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쉽지 않습니다. 어머니 자연에게도 언어의 가부장적인 물질성이 있을지 모릅니다. 왜 자연이 어머니인가요? '하나님 아버지'라는 용어처럼,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위대한 존재는 남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 위대한 자연이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되었나요? 여자(어머니)와 자연이 똑같이 생산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술가들, 철학자들, 비평가들은 자연이 번성한다고 말합니다. 


자연에는 여러 측면들이 있습니다. 알프레드 테니슨이 노래하는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이나 찰스 다윈이 고민하는 '징그러운 기생충' 역시 자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폭력적이고 징그러운 것들보다 번성하는 생명 현상을 자연이라고 부릅니다. <심라이프>처럼, 초기부터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번성하는 생물 다양성을 구현하기 원했습니다. 과일 나무가 열매들을 주렁주렁 매달 때,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산호초 숲을 누빌 때, 울창한 숲이 싱그러운 녹색 나뭇잎들을 뽐낼 때, 벌집에 반짝거리는 황금 꿀이 가득할 때, 사람들은 이것들이 자연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은 생산적입니다. (긍정적인) 자연은 풍요로워야 합니다.



<야성의 사랑학>에서 목수정 작가는 자연 생태계가 생산적인 것처럼 여자의 몸 속에 이미 생산적인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연처럼 여자(어머니)는 생산적입니다. 자연처럼 여자(어머니)는 풍요롭습니다. 여자는 아이를 낳을 수 있습니다. 여자는 모유를 뿜을 수 있습니다. 여자는 아이를 낳고, 아이를 먹이고, 아이를 키울 수 있습니다. 남자가 뭔가를 생산하고 싶다면, 남자는 도구를 이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자가 필요하다고 해도) 여자는 자신의 몸으로 스스로 생산하고 먹이고 키울 수 있습니다. 예전에 2018년 8월 12일 게시글(링크)이 이야기한 것처럼, 남자가 기계 공학으로 로봇을 만들 때, 남자는 뭔가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남자가 생산하고 싶을 때, 남자에게는 공학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CSI 과학수사대>에서 어떤 남자는 기계 공학을 찬양하고 임신을 비웃었을 겁니다. 하지만 여자는 아닙니다. 여자에게 기계 공학 따위가 없다고 해도, 여자는 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터미네이터 2>에서 사라 코너는 기계 공학을 비판하고 임신과 수유를 옹호했을 겁니다. 비록 폭력을 막기 위해 사라 코너는 폭력을 휘둘러야 했으나, 사라 코너는 여자가 폭력보다 생태에 가깝다고 여깁니다. 어쩌면 사라 코너는 목수정 작가에게 동의할지 모릅니다. 여자가 생태적이기 때문에 목수정은 여자가 본질적으로 평화롭다고 말합니다.



누군가는 폭력과 죽음(소멸) 역시 자연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알프레드 테니슨이 피에 물든 이빨을 노래하는 것처럼, 폭력과 죽음 역시 자연에 속합니다. 호랑이가 사슴을 물어죽일 때, 사람들은 이게 자연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왜 호랑이가 사슴을 물어죽여야 합니까? 생태계 게임 <쉘터>가 보여주는 것처럼, 아기 오소리들을 먹이기 위해 엄마 오소리는 개구리를 물어죽입니다. 어미 호랑이가 사슴을 물어죽일 때, 아기 호랑이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언니 호랑이는 동생 호랑이를 내쫓고 혼자 먹이를 독차지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언니 호랑이는 배를 채우고, 쑥쑥 자라고, 또 다시 어미가 될 겁니다. 어미 호랑이는 다시 아기를 낳고 젖을 먹일 겁니다. 이렇게 생물 다양성은 번성합니다. 누군가는 엔트로피가 소멸로 이어지고 자연 역시 예외가 아니라고 말할 겁니다. 이건 다소 잘못된 범주화입니다. 엔트로피는 자연의 법칙보다 우주의 법칙입니다. 우주 에너지는 끊임없이 평형 상태를 추구하고, 결국 소행성과 오소리는 모두 소멸합니다.


자연은 우주에 속하고, 자연 역시 끊임없이 평형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소행성과 오소리 모두 엔트로피 법칙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양쪽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소행성은 젖을 먹이지 못합니다. 소행성은 의도적으로 번성하지 못해요. 오소리는 그럴 수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자연을 예찬할 때, 자연은 폭력과 소멸보다 번성을 가리킵니다. 여자는 생산적이고 생태적입니다. 여자는 자연과 닮았고, 심지어 여자는 자연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목수정 작가는 여자가 본질적으로 평화롭다고 말합니다.



[자연 생태계는 번성입니다. 여자의 몸은 생태적이고, 여자는 자연이 되고, 여자는 본질적으로 평화로워요.]



이게 사실인가요? 어쩌면 이건 생물적인 결정론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생명체에게 본질이라는 단어를 대입할 때, 우리는 생물적인 결정론을 주의해야 합니다.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에서 마리 루티는 얼마나 자주 (남성적인) 생물적인 결정론이 오류에 빠지는지 보여줬습니다. 목수정 역시 (여성적인) 생물학 결정론 오류에 빠졌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여자는 자신의 몸으로 자연 생태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남자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아버지에게는 젖가슴이 없으나, 어머니에게는 있습니다. 어머니의 풍만한 젖가슴은 풍요롭습니다.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 여자의 젖가슴은 정말 풍만해집니다.


풍만한 젖가슴은 번성하는 생명력이 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수유가 번성하는 생명력을 가리킨다고 여깁니다. 여자(어머니)의 젖가슴은 생체 식량 공장입니다. 여자의 젖가슴은 생산적이고, 이건 생산적인 자연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생명체들이 후손을 낳고 먹이고 키우기 때문에, 자연 생태계는 번성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자가 자연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머니 자연은 존재합니다. 생산적인 여자와 생산적인 자연은 결합하고 어머니 자연이 될 수 있습니다. 생태학 SF 소설이 생산적인 자연을 예찬하고 싶을 때, 작가는 어머니 자연을 외칠 수 있어요.



하지만 어떤 고립된 차원에서 생태학 SF 소설은 어머니 자연을 외치지 못합니다. 어떤 초월적이고 초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은 어머니 자연을 외치지 못합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태학 SF 소설이 어머니 자연을 외칠 때,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생태학 SF 소설은 어머니 자연을 외쳐야 합니다. 가부장적인 사회는 여자들을 차별합니다. 가부장적인 사회는 여자가 수동적이고 부차적이고 보조적인 존재라고 차별합니다. 가부장 문화는 공격적이고 적극적이고 중요한 남성과 수동적이고 부차적이고 보조적인 여성을 구분합니다.


남성적인 노동은 인류 문명을 뒷받침하나, 여성적인 노동은 그렇지 않습니다. 학교 교과서들은 남성적인 노동(대규모 산업, 침략, 탐험, 전쟁)이 인류 역사라고 말합니다. 여성적인 노동(육아, 간호, 전쟁 반대 시위, 자급자족)은 인류 역사에 끼어들지 못합니다. 하지만 남성적인 노동은 숱한 학살들과 파괴들로 이어졌습니다. 학교 교과서들은 숱한 학살들과 파괴들이 인류 역사라고 주장합니다. 학생들이 이걸 믿을 때, 지배 계급은 계속 학살들과 파괴들을 저지르고 거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 교과서들은 세뇌 도구입니다. 학교 교과서들은 가부장적인 세뇌 도구입니다.



비디오 게임 <문명 4>는 감동적인 <바바 예투>를 들려줍니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 <바바 예투>가 흐르는 동안, <문명 4> 동영상은 오직 남자들과 남성적인 노동만을 보여줍니다. '문명'은 '남성적인 노동'입니다. 문명은 대규모 건축물, 침략, 전쟁, 탐험입니다. 이렇게 가부장 문화는 남성적인 노동을 중시하고 여성적인 노동을 무시합니다. 육아는 대표적인 여성 노동입니다. 가부장 문화는 남성 노동과 여성 노동을 분리하고 여성 노동을 억지로 여자들에게 떠넘깁니다.


여자는 아이를 낳고 아이를 먹이고 아이를 키울 수 있습니다. 여자에게는 이런 생물적인 특성, 생태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가부장 문화는 여자가 생산적이고 생태적이기 때문에 여자가 육아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자들이 육아를 비롯해 돌봄 노동을 맡는 동안, 가부장 문화는 남자들을 대규모 산업과 전쟁과 탐험에 밀어넣을 수 있습니다. 만약 여자들과 남자들이 함께 돌봄 노동들을 맡는다면, 가부장 문화는 남자들을 대규모 산업과 전쟁과 탐험에 밀어넣지 못할 겁니다.


많은 남자들이 적극적으로 돌봄 노동들에 참가한다면, 남성적인 노동(대규모 산업과 전쟁과 탐험)은 더 이상 많은 남자 노동력들을 착취하지 못할 겁니다. 남성적인 노동은 무너질지 모릅니다. 가부장 문화에게 이건 끔찍한 악몽입니다.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지배 계급은 남성적인 노동을 유지해야 하고 거대 권력을 유지해야 합니다. 대규모 산업과 전쟁과 탐험은 사라져서는 안 됩니다. 부르즈 할리파에서 건설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든, 미국 산업 단지가 엄청난 온실 가스를 뿜든, 다국적 식량 회사의 가축들이 엄청난 메탄 가스를 뿜든, 서구 제국주의가 베네수엘라 사회를 짓밟든, 대규모 산업과 전쟁과 탐험은 사라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가부장 문화에게 돌봄 노동 사회화는 악몽입니다. 가부장 문화에게 공공 육아는 끔찍한 악몽입니다. 한때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는 돌봄 노동 사회화를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이 소비에트 연방을 압박했을 때, 소비에트 연방은 돌봄 노동 사회화를 버렸고 가부장적인 중산층 가정을 선호했습니다. 돌봄 노동 사회화와 침략 전쟁(남성적인 노동)은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가부장 문화는 남자들을 남성적인 노동에 동원해야 하고, 따라서 돌봄 노동은 여자들의 몫이 되어야 합니다. 아, 물론 가부장 문화는 돌봄 노동을 별로 지원하지 않습니다.


가부장 문화는 사회적인 부를 남성적인 노동에 투입하고 여성적인 노동을 무시합니다. 남성적인 노동이 존재하는 동안,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지배 계급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부가 여성적인 노동을 뒷받침한다면, 많은 남자들은 여성적인 노동에 참여할 겁니다. 만약 육아 노동자가 금전적인 보상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면, 남자들은 개떡 같은 회사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집에서 아이들과 놀아주기 원할지 모릅니다. 남자들이 회사 업무보다 육아 노동을 중시한다면, 영리 기업들은 이윤을 축적하지 못할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지배 계급에게 이건 악몽입니다.



[이야~, 씐난다! 전쟁입니다! 인류 문명은 이런 것입니다. 감히 68 혁명 따위가 문명이 될 수 있나요?]



게다가 아무 이유 없이, 돌봄 노동 사회화는 나타나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은 유기체 동물이고, 유기체 동물은 뭔가를 먹고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여자의 젖가슴이 생체 식량 공장이라고 해도, 생체 식량 공장에게는 연료가 필요합니다. 어머니 역시 먹어야 합니다. 어머니가 풍부한 영양분을 섭취할 때, 어머니의 젖가슴은 그걸 건강한 모유로 바꾸고 아기에게 젖을 먹일 겁니다. 소설 <운수 좋은 날>에서 아기가 공허한 젖가슴을 빨 때, 아무도 이게 풍요롭다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 수구 꼴통들조차 이게 풍요롭다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건강하고 풍요로운 젖을 위해 어머니 역시 풍부한 영양분을 섭취해야 합니다.


인간이 영양분을 섭취하고 싶다면, 인간은 자연을 가공하고 식량을 생산해야 합니다. 인간은 생산 수단을 이용해 식량을 생산해야 합니다. 결국 돌봄 노동은 이런 식량 생산 노동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돌봄 노동을 사회화해야 한다면, 우리는 식량 생산 노동을 함께 사회화해야 합니다. 우리가 식량 생산 노동을 사회화해야 한다면, 우리는 생산 수단(자연과 토지)을 사회화해야 합니다.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와 중국 인민 공사와 다른 사회주의 공동체들이 그랬던 것처럼, 생산 수단 사회화 속에서 돌봄 노동 사회화는 나타날 겁니다. 하지만 지배 계급에게 이건 악몽입니다.



그래서 가부장 문화는 돌봄 노동 사회화를 짓밟습니다. 가부장 문화와 돌봄 노동 사회화는 대립합니다. 가부장 문화는 공공 육아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가부장 문화 속에서 지배 계급은 남자들을 남성적인 노동에 동원하고 여자들을 돌봄 노동에 밀어넣어야 합니다. 가부장 문화에게는 아주 좋은 핑계가 있습니다. 여자가 생산적이고 생태적이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고 먹이고 키울 수 있기 때문에, 가부장 문화는 여자가 돌봄 노동에 헌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가부장 문화가 여자를 생산적이라고 말할 때, 가부장 문화는 그게 좋은 핑계라고 생각할 겁니다. 생태학 SF 소설이 어머니 자연을 생산적이라고 간주할 때, 생태학 SF 소설은 이런 언어의 가부장적인 물질성을 의식해야 합니다.


소설 <뉴욕 2140>에게는 성 차별 의도가 없었을 겁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은 여자가 무조건 돌봄 노동에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가부장 문화는 지배적인 관념이고, 지배적인 관념은 언어를 왜곡합니다. 생태학 SF 소설이 어머니 자연을 강조한다면, 독자는 생산적인 여자가 돌봄 노동에 헌신해야 한다고 오해할지 모릅니다. 이게 그저 문화적인 현상에 불과한가요? 이런 언어의 물질성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요? 어쩌면 이건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이런 논의를 욕할지 모릅니다. "어머니 자연? 아놔, 씨발, 한가한 소리하고 처자빠졌다. 지금도 곳곳에서 여자들은 성 폭행들에 시달리고 죽어라 투쟁하는 중이야. 고작 용어 따위가 중요해?"



고작 용어 따위는 중요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상부 구조보다 토대가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건 문화적인 현상보다 경제적인 현상이 근본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문화 마르크스주의는 진짜 마르크스주의가 아닐지 모릅니다. 이른바 구좌파(old left wing)는 진짜 마르크스주의일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언어의 물질성이 아무것도 아닌가요? 구좌파 역시 문화적인 현상을 아예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문화적인 현상보다 경제적인 현상이 근본적이라고 해도, 이건 문화적인 현상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경제적인 현상이 중요하다고 해도, 문화적인 관념이 우리를 장악한다면, 우리는 경제적인 계급 투쟁을 외면하거나 오해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지배적인 관념은 자연 과학을 뒤집어쓰고 여자들을 차별합니다. <가슴 이야기>에서 플로렌스 윌리엄스는 진화 생물학이 성 차별들을 저지르는지 모른다고 의심합니다. 어머니 자연 역시 이런 성 차별에 해당할지 모릅니다. 생태학 SF 소설이 '자연처럼 여자가 생태적'이라고 말할 때, 이건 가부장 문화에 일조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생태학 SF 소설이 어머니 자연을 버려야 하나요? 어머니 자연에게 언어의 가부장적인 물질성이 있기 때문에,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이 이걸 폐기해야 하나요?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에게 '여자의 생산적인 몸'은 중요한 주제입니다. 에코 페미니즘 고전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여자가 생산적이고 대지에 가깝다고 이야기합니다. 번역가 최재인은 이런 개념이 커다란 위로가 된다고 말합니다. 여자의 젖가슴은 생체 식량 공장이고, 여자는 기초적인 식량 생산자입니다. 최재인은 이런 개념들이 출산 후유증을 위로하고 치유한다고 개인적인 경험을 말합니다. 여자는 자신의 생산적인 몸이 자랑스럽다고 느끼고 자부심을 키울 수 있습니다. 여자의 젖가슴은 비단 아기만 아니라 여자의 자부심을 함께 키울 수 있습니다.


여자의 생산적인 몸이 중요한 주제라면,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은 이걸 버리거나 감추지 말고 공개적으로 논의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은 그저 여자의 생태적인 측면만을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언어의 가부장적인 물질성은 어머니 자연을 왜곡할 겁니다.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은 여자의 생태적인 측면과 함께 돌봄 노동 사회화, 생산 수단 사회화, 다른 성 해방 운동들을 지지해야 할 겁니다. 그때 생태학 SF 속에서 어머니 자연은 언어의 물질성을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어머니 자연은 상징입니다. 상징에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수많은 개념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은 토대(경제적인 현상)와 상징을 함께 논의해야 합니다.



[포이즌 아이비는 열심히 어머니 자연을 떠드나, 이건 그저 지배적인 관념의 앞잡이에 불과해요.]



비단 생태학 SF만 아니라 성 해방 운동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나, 마르크스주의처럼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문화적인 현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성 해방 운동들이 오직 문화적인 현상(여자의 당당한 정체성)에만 매달린다면, 성 해방 운동들은 근본적인 문제를 놓칠 겁니다. 가난한 미혼모는 아이들과 함께 비참하게 자살합니다. 왜 가난한 미혼모가 자살하나요? 미혼모에게 여자의 당당한 정체성이 없기 때문에? 당당한 정체성이 밥을 먹여줍니까? 가난한 미혼모가 당당한 정체성을 찾는다면, 하늘에서 전기세, 수도세, 식비가 뚝 떨어집니까?


이건 헛소리이고 망상입니다. 성 해방 운동들은 공공 육아와 시민 배당과 생산 수단 공유를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성 해방 운동들이 공공 육아와 시민 배당과 생산 수단 공유를 외칠 때, 미혼모가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미혼모와 아이 모두 밝게 웃을 수 있을 겁니다. 성 해방 운동들은 안락하고 1차원적인 관념에서 벗어나고 '토대'에 주목해야 할 겁니다. 성 해방 운동들이 토대에 주목할 때, 미혼모와 아이가 밝게 웃을 때, 어머니 자연 역시 가부장적인 왜곡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때 생태학 SF 역시 생산적인 자연을 예찬하고 어머니 자연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조엘 슈마허가 감독한 영화 <배트맨과 로빈>에서 포이즌 아이비는 어머니 자연을 운운합니다. 그래서 포이즌 아이비가 정말 어머니 자연을 제대로 말할 수 있나요? 아니, 오히려 <배트맨과 로빈>에서 포이즌 아이비는 성 차별을 조장합니다. 배트걸이 열심히 발차기를 날리고 포이즌 아이비가 쌍코피를 흘린다고 해도, 미스터 '프리즈'의 '썰렁한' 농담들처럼, 이건 썰렁한 코미디입니다. 비단 영화 <배트맨과 로빈>만 아니라 다른 <배트맨> 만화들과 애니메이션들과 게임들에서도 포이즌 아이비는 어머니 자연을 제대로 말하지 못합니다. 소설 <뉴욕 2140>이 그러는 것처럼, 생태적인 상상력이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 어머니 자연은 번성하는 생물 다양성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떤 사람들은 어머니 자연이라는 용어를 완전히 버리기 바랄지 모릅니다.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이 토대에 주목하고 생산 수단 공유와 공공 육아를 논의한다고 해도, 이건 불완전한 방법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이상화가 어머니의 젖가슴을 자연과 생산력에 비유하는 것처럼, 이미 어머니 자연은 너무 유명한 상징입니다. 이걸 버리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서 번역가 최재인이 말하는 것처럼, 오히려 여자의 생태적인 측면은 위로와 치유를 위한 개념일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은 최대한 어머니 자연에게 돌봄 노동 사회화라는 특성을 부여해야 할 겁니다. 이게 불완전한 방법이라고 해도, 이런 방법은 언어의 억압적인 물질성을 희석할 수 있을 겁니다.



※ 저 역시 어머니 자연, 여자의 생산적인 몸, 수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기 <SF 생태주의>에서 저는 이런 것들을 계속 언급하고 이야기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불안합니다. 어머니 자연, 여자의 생산적인 몸, 수유가 가부장적인 편견에 일조한다면…. 누군가는 고작 용어 때문에 제가 한가하게 고민한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서 언어는 언어가 아닙니다. 언어에게 죄가 없다고 해도, 언어는 (억압적인) 사회를 반영하고, 그래서 언어는 문제가 됩니다. 아, 가부장 문화 속에서 덕질하기는 참으로 고달프고 힘듭니다. 언제 걱정 없이 덕질하는 세상이 나타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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