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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이사야들과 피지배 계급 저항 본문

감상, 분류, 규정/생태 사회주의, 에코 페미니즘

늑대 이사야들과 피지배 계급 저항

OneTiger 2019. 7. 20. 20:12

마가렛 앳우드가 쓴 <홍수>에는 신의 정원사들이 있습니다. 신의 정원사들은 생태주의 종교 단체입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모방합니다. 여자 회원들은 이브가 되고, 남자 회원들은 아담이 됩니다. 전통적인 기독교와 달리, 신의 정원사들은 생물 다양성을 숭배합니다. 신의 '정원사들'이라는 이름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정원사들이 되고 생물 다양성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정원사들은 동물 권리를 중시하고, 채식을 선호하고, 무분별하게 생산하지 않고, 검소하게 자원들을 재활용합니다. 신의 정원사들은 재활용의 귀재들입니다. 비디오 게임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의 테라 살붐은 신의 정원사들을 좋아할지 모릅니다.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에서 테라 살붐은 녹색 정치 단체입니다. 그들은 숲에서 높은 생산력을 얻을 수 있고 재활용으로 이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의 정원사들이 재활용의 귀재인 것처럼, 테라 살붐 역시 재활용의 귀재입니다. 이건 신의 정원사들과 테라 살붐이 완전히 똑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는 우주 4X 게임입니다. 인류 개척 세력들은 외계 행성을 개척하기 원하고, 테라 살붐은 다른 세력들과 경쟁해야 합니다. 다른 세력들과 경쟁하기 위해, 테라 살붐은 전투 병기들을 생산하고, 외계 야수들을 죽이고, 억압적인 정책들을 폅니다. 신의 정원사들은 이런 모습들을 절대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테라 살붐과 달리, 신의 정원사들은 외계 행성을 개척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디스토피아 시대, 심각한 환경 오염 시대를 살아갑니다. 하지만 테라 살붐이 다른 개척 세력들과 경쟁하는 것처럼, 신의 정원사들은 다른 세력들과 경쟁해야 합니다. 신의 정원사들이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은 경쟁해야 합니다. 폭력 조직들은 신의 정원사들을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영리 기업들 역시 그들을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만약 신의 정원사들이 계속 세력을 불린다면, 이건 폭력 사업들과 자본주의 경제에 부정적인 피해를 미칠 겁니다. 당연히 폭력 조직들과 영리 기업들은 신의 정원사들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신의 정원사들은 폭력을 싫어하고 거의 폭력을 휘두르지 않으나, 디스토피아 시대에서 폭력 없이 살아남기는 어렵습니다. 소설 <홍수>에는 신의 정원사들 이외에 다른 생태주의 단체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른바 이사야의 늑대들입니다. 이사야의 늑대들은 꽤나 폭력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들 역시 생태주의를 추구하나, 그들은 온건한 생태주의가 망상이라고 간주하는 것 같습니다. 소설 <홍수>가 신의 정원사들을 주목하기 때문에, 이사야의 늑대들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홍수>는 그들이 누구인지 자세히 조명하지 않습니다. 신의 정원사들은 이사야의 늑대들이 어쩌구 이야기하나, 소설은 늑대들을 대충 넘어갑니다. 독자들 역시 그들이 누구인지 자세히 알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운동권들이 여러 노선들을 추구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운동권 노선들과 <홍수>를 비교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그린피스와 시 셰퍼드가 서로 다른 것처럼, 신의 정원사들과 이사야의 늑대들은 다를지 모릅니다. 그린피스와 시 셰퍼드는 모두 환경 보호 단체이나, 그린피스는 온건한 측면이고, 시 셰퍼드는 과격한 측면입니다. 적어도 대중적인 인식은 그렇습니다. 어쩌면 신의 정원사들은 그린피스와 비슷하고, 이사야의 늑대들은 시 셰퍼드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홍수>가 신의 정원사들에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신의 정원사들은 주연 등장인물들입니다.


소설 시점은 그들을 주목하고, 독자는 그들을 읽습니다. 소설은 신의 정원사들과 온건한 생태주의를 지지하는지 모릅니다. 흔히 사람들은 비폭력 운동이 옳다고 생각하고, 소설 <홍수> 역시 비폭력 운동을 지지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폭력이 뭔가요? 무엇이 폭력입니까? 이사야의 늑대들은 꽤나 폭력적일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이사야의 늑대들이 폭력적이라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이사야의 늑대들이 폭력적인가요? 왜 그들이 폭력을 휘두릅니까? 이사야의 늑대들이 사이코패스인가요? 그들이 삥을 뜯기 원하나요? 그들이 테러리스트인가요? 아니, 그건 아닙니다. 그들은 자연 환경을 보호하기 원하고 영리 기업들을 막기 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과격합니다.



현실 속에서 환경 오염들은 행성적인 재앙입니다. 환경 오염들은 그저 가벼운 소동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환경 오염들은 '행성적인 재앙'입니다. 행성적인 재앙. 하루 종일 사람들이 행성적인 재앙이라고 떠든다고 해도, 이건 넘치지 않을 겁니다. 인류 사회는 행성적인 재앙에 부딪혀야 합니다. 온갖 생태학 서적들과 환경 사회학 서적들은 얼마나 행성적인 재앙이 심각한지 줄줄이 늘어놓습니다. 근대적인 환경 오염들은 행성적인 재앙입니다. 언제나 인류 문명에는 환경 오염들이 있었으나, 그런 환경 오염들과 '행성적인 재앙'은 다릅니다. 아무리 인류 문명에서 환경 오염들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들은 국지적이었습니다.


그것들은 행성적인 재앙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남아메리카 거대 제국이 뻘짓들을 저지르고 삽질들을 펐다고 해도, 이건 그저 남아메리카 열대 밀림을 국지적으로 파괴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남아메리카 밀림은 자신을 쉽게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오랜 동안 여러 지역들에서 인류 사회들은 숱한 환경 오염들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행성적인 재앙'으로 퍼지지 않았습니다. 이것들과 달리, 기후 변화, 백화 현상, 핵 폐기물, 6번째 멸종, 쓰레기 섬은 행성적인 재앙입니다. 몇 백 년 동안 기후 변화는 사라지지 않을지 모르고, 백화 현상은 해양 생태계를 대대적으로 파괴할지 모르고, 핵 폐기물은 거의 반영구적입니다. 6번째 멸종은 지구 생태계를 바꿀지 모릅니다.



이런 전망은 다소 과장일지 모릅니다. 환경 운동가들이 설레발을 치고 침을 튀길 때, 여기에는 극단적인 과장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행성적인 재앙이 '행성급'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남아메리카 거대 제국이 뻘짓들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건 행성급이 아니었습니다. 21세기 초반 인류 문명은 '행성급' 환경 오염들에 부딪혀야 합니다. 언제 이런 행성적인 재앙이 나타났나요? 언제 환경 오염들이 '행성급'이 되었나요? 많은 학자들은 산업 혁명이 이른바 인류세를 불질렀다고 말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산업 혁명을 이용해 산업력을 엄청나게 일으켰고, 그래서 인류세는 자본세입니다.


플랜테이션 농업이 자본주의 경제를 뒷받침했기 때문에, 플랜테이션 농업이 본격적인 서구 근대화 환경 오염이었기 때문에, 인류세와 자본세는 다시 플랜테이션세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산업 혁명을 이용해 행성급 환경 오염들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행성급 환경 오염들은 식민지 수탈, 노예 무역, 공유지 수탈, 노동자 착취, 마녀 사냥, 각종 성 폭행들을 이용해 발달했습니다. 결국 행성급 환경 오염들은 식민지 수탈, 노예 무역, 공유지 수탈, 노동자 착취, 마녀 사냥, 각종 성 폭행들, 열대 밀림 파괴, 환금 작물 농업과 밀접한 관계들을 맺습니다. 폭력은 이런 것입니다. 진짜 폭력과 행성급 환경 오염은 식민지 수탈, 노예 무역, 공유지 수탈, 노동자 착취, 마녀 사냥, 각종 성 폭행들, 열대 밀림 파괴, 환금 작물 농업입니다.



이런 행성급 환경 오염 앞에서 다른 폭력이 심각한 폭력이 될 수 있나요? 이런 행성급 폭력 앞에서 시 셰퍼드가 폭력입니까? 시 셰퍼드가 행성급 폭력을 저질렀습니까? 시 셰퍼드가 대규모 노예 무역을 조장했습니까? 시 셰퍼드가 엄청난 핵 폐기물을 남겼습니까? 시 셰퍼드가 몇 백 만 명을 학살했습니까?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그랬습니다. 이런 폭력들 없이, 자본주의는 절대 발달하지 못합니다. 이제까지 자본주의는 이런 폭력들을 휘둘렀고, 여전히 자본주의는 폭력들을 휘두르는 중입니다. 이런 폭력은 행성급 환경 오염에 도달했습니다. 행성급 환경 오염 앞에서 시 셰퍼드는 폭력에 손가락 끝조차 닿지 못합니다. 시 셰퍼드는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이건 시 셰퍼드가 반드시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과격한 행위들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 셰퍼드가 너무 과격하다고 비판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행성급 환경 오염들을 비판하지 않고, 우리가 오직 '작은 과격함'만을 비난한다면, 이건 너무 피상적인 비난일 겁니다. 우리가 작은 과격함을 비판하고 싶다면, 먼저 우리는 행성급 환경 오염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시 셰퍼드가 너무 과격하다고 비판할 수 있을 겁니다. 비단 시 셰퍼드만 아니라 다른 폭력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프리카 여자 노예들부터 소비에트 연방까지, 이런 폭력들은 작은 과격함입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피해자에게 책임을 넘기기 위해 강자들은 온갖 논리들을 동원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논리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현실 속에서 여자에게 책임을 넘기기 위해, 흑인에게 책임을 넘기기 위해, 인디언에게 책임을 넘기기 위해, 노동자에게 책임을 넘기기 위해, 권력자들은 온갖 논리들을 동원합니다. "여자가 꼬리를 쳤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를 폭행했어. 남자에게는 죄가 없어. 여자는 훨씬 조신했어야 해. 애초에 여자가 짧은 치마를 입은 게 잘못이야.", "흑인 노예들은 무장 봉기했고 백인들을 잔인하게 처형했어. 깜둥이들은 야만적이고 잔인해. 백인 주인들과 깜둥이 노예들은 똑같이 폭력적이야." 이런 논리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이것들 중에서 사회주의 운동권을 공격하기 위한 논리는 가장 흔할 겁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농민들을 수탈했어. 뭐, 자본주의 국가들은 먼저 공산주의 세력을 괴롭혔고 침략했으나, 이건 중요하지 않아. 자본주의 국가들이 먼저 침략했기 때문에,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 공산주의 세력이 폭력을 휘둘렀다고 해도, 이건 중요하지 않아. 빨갱이 새끼들은 너무 악랄해."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논리들이 옳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권력자들보다 여자들, 흑인들, 인디언들, 노동자들을 비롯해 약자들을 욕합니다. 약자들이 항변하고 싶다고 해도, 약자들에게는 권력이 없습니다. 약자들에게 권력이 없기 때문에, 뭐라고 약자들이 항변하든, 사람들은 듣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는 옳은 것을 추구한다."보다 "우리는 지배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외칩니다.



기후 변화는 행성급 환경 오염입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이 사람들이 이런 행성급 환경 오염에 근본적인 관심을 기울이나요? 주류 언론 매체들이 특집 기사, 1면 기사, 전면 기사로서 기후 변화를 이야기하나요? 일본 불매 주장은 전면 기사가 될 수 있으나, 기후 변화는 전면 기사가 되지 못합니다. 행성급 환경 오염이 대대적으로 생물 다양성을 파괴할지 모름에도, 기후 변화는 절대 전면 기사가 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행성적인 재앙을 외면합니다. 동시에 사람들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불순분자라고 모욕하고 블라디미르 레닌이 독재자라고 모욕합니다.


극단적인 침략 전쟁 속에서 레닌이 급박한 결정을 내렸어야 했음에도, 1차 세계 대전을 막기 위해 로자가 목숨을 걸었어야 했음에도, 행성급 환경 오염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로자와 레닌을 모욕합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에서 오직 로자와 레닌 같은 급진적인 사람들만 식민지 수탈에 적극적으로 반대했습니다. 로자와 레닌이 식민지 수탈에 반대했음에도, 오히려 로자와 레닌은 욕을 먹어야 합니다. 사회주의자들이 대규모 경제 공황을 경고했음에도, 사회주의자들은 욕을 먹어야 합니다. 사회주의자들이 기후 변화를 외침에도, 사회주의자들은 욕을 먹어야 합니다.



사회주의자들이 가장 거대한 폭력과 착취와 수탈을 막기 원함에도, 그래서 사회주의자들이 극단적으로 행동함에도, 사람들은 가장 거대한 수탈을 용서하고 사회주의 운동권이 극단적이라고 욕합니다. 사회주의자들이 식민지 수탈에 반대했을 때, 사회주의는 많은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이 경제 공황을 경고했을 때, 사회주의는 많은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이 기후 변화를 지적한다고 해도, 여전히 사회주의는 많은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식민지 수탈과 경제 공황과 기후 변화를 관대하게 받아들입니다.


심지어 행성급 환경 오염조차 경제 발전의 부수적인 결과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사람들의 잘못이 아닐 겁니다. 지배적인 관념이 사람들을 세뇌시킨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모순을 쉽게 깨달을 수 있나요? 사람들이 지배적인 관념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사회주의 운동권은 계속 극단적으로 저항해야 하고, 다시 사람들은 사회주의 운동권을 욕합니다. 또 다시 사회주의 운동권은 극단적으로 행동합니다. 이건 돌고 도는 악순환입니다. 우리가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우리는 무엇이 가장 거대한 수탈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물론 사회주의 운동권을 비롯해 피지배 계급이 휘두르는 폭력 역시 폭력이고, 폭력은 나쁜 것입니다. 사실 피지배 계급은 수많은 폭력들을 휘두릅니다. 남자가 여자를 폭행한다면, 여자는 돌멩이로 남자의 마빡을 후려갈길지 모릅니다. 이건 폭력입니다. 이런 폭력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미칠지 모릅니다. 여자가 돌멩이로 남자를 '폭행'하는 동안, 여자는 다른 사람들을 때릴지 모릅니다. 여자가 남자를 '폭행'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이런 폭력에 휘말린다면, 다른 사람들 역시 다칠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자가 '적당히'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할 겁니다. 하지만 어떻게 극심한 폭력 속에서 약자가 '적당히' 폭력을 조절할 수 있나요? 남자가 여자를 강간하는 상황에서 여자가 "폭력이 나쁘기 때문에, 나는 '적당히' 저항해야 해."라고 판단할 수 있나요?


저항하기 위해 여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미친다고 해도, 이게 여자의 근본적인 잘못인가요? 만약 여자가 저항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고 여자가 가해자가 된다면, 이 세상에서 피해자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피해자가 저항하는 순간,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기 때문에, 모든 저항은 공격이 될 겁니다. 오직 피해자가 '적당히' 저항할 때, 피해자는 피해자가 될 겁니다.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순간,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기 때문에, 피해자는 반드시 '적당히' 저항해야 합니다. 지배 계급은 이런 논리를 정말 좋아합니다. 이런 논리가 저항을 원천 봉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순간, 저항은 그저 추상적이고 사전적인 정의에 불과합니다. 국어 사전에는 저항이 있으나, 현실에는 저항이 없습니다.



"피해자가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는 똑같아." 이런 주장은 피해자에게 책임을 넘깁니다. 이런 주장은 저항을 원천 봉쇄합니다. 피해자가 격렬하게 저항할 때, 이런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기 때문에, 피해자가 되기 위해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적당히 저항하거나 굴복해야 합니다. 만약 피해자가 격렬하게 저항한다면, 피해자는 피해자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할 겁니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똑같아. 모든 인간은 탐욕스러워. 모든 인간은 똑같아." 이런 주장은 현실을 은폐합니다. 아무리 피해자와 가해자가 똑같다고 해도, 아무리 모든 인간이 탐욕스럽다고 해도, 현실에서 남자들은 압도적으로 여자들을 폭행합니다.


현실에서 흑인들과 인디언들과 원주민들보다 백인들은 압도적으로 부유합니다. 무엇보다 현실에서 무산자 민중 계급보다 자본가 계급은 압도적으로 강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모든 시간과 흐름과 순서와 과정이 사라지고, 오직 탐욕스럽고 폭력적인 인간들만 남을 수 있습니까? 이런 주장은 성별과 인종과 계급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똑같이 만듭니다. 이게 올바른 비판인가요? 우리가 모든 순서와 흐름과 과정을 무시해야 하나요? 결국 모두가 탐욕스럽고 모두가 폭력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오직 폭력과 탐욕이라는 범주만으로 모든 것을 묶어야 하나요?



아니, 이건 너무 편파적인 범주입니다. 이게 너무 편파적인 범주이기 때문에, 우리는 편협한 함정에 빠질 겁니다. 우리는 이런 편협한 함정에서 벗어나고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만약 열대 밀림 밀렵꾼들이 야생 동물들을 죽이거나 가둔다면, 밀렵꾼들이 범죄자, 가해자인가요? 언뜻 밀렵꾼들은 범죄자, 가해자 같습니다. 하지만 왜 열대 밀림 밀렵꾼들이 야생 동물들을 죽이고 가둬야 했습니까? 이유가 무엇인가요? 현실을 외면하는 편협한 시각은 밀렵꾼들이 폭력적이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기 때문이라고 나불거릴 겁니다. 편협한 시각은 밑도 끝도 없이 탐욕스러운 인간을 나불거릴 겁니다.


밀렵꾼들에게 굶주리는 아이들이 있고, 밀렵꾼들이 필사적으로 돈을 벌어야 했음에도, 밀렵꾼들은 탐욕스러운 인간이 됩니다. 열대 밀림 밀렵꾼들은 가해자가 아닙니다. 먹고 살기 위해 밀렵꾼들은 야생 동물들을 죽였습니다. 열대 밀림 밀렵꾼들이 너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왜 열대 밀림 밀렵꾼들이 가난합니까? 서구 자본주의 경제가 열대 밀림을 엄청나게 벌목함에도, 왜 밀렵꾼들이 쫄쫄 굶어야 합니까? 열대 밀림에서 서구 자본주의가 엄청난 부를 얻음에도, 왜 (이른바) 열대 민족들이 굶어야 하나요? 이렇게 우리가 단계를 거치고 거치고 거치고 거친다면, 우리는 가장 거대한 지배 계급에게 닿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장 거대한 수탈을 비판해야 합니다. 가장 거대한 수탈이 문제를 일으킴에도, 우리가 다른 폭력들을 비난한다면, 이런 비난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나요? 아니, 이런 비난은 그저 얄팍한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이런 비난은 서구 대기업 사장과 가난한 열대 밀림 밀렵꾼들이 똑같이 폭력적이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라고 간주합니다. 가난한 밀렵꾼이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정말 단 한 번이라도 사치를 누리지 못함에도, 부유한 대기업 사장과 가난한 밀렵꾼은 똑같은 존재가 됩니다. '결과적으로' 대기업 사장과 열대 밀렵꾼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각은 '결과적으로' 모든 순서와 흐름과 과정을 개무시하고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동일한 선상이라고 간주합니다.


이런 시각은 20세기 러시아에서 대숙청이 있었다고 강조하나 17세기부터 자본주의가 훨씬 악랄하게 식민지들을 수탈했고 환경 오염들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은폐합니다. 이런 시각은 19세기 후반부터 연이어 사회주의가 2차 세계 대전을 비롯해 자본주의 공세들을 필사적으로 처절하게 막아야 했다는 사실을 은폐합니다. 이런 필사적이고 처절한 저항들 속에서 어떻게 사회주의가 제자리를 유지할 수 있나요? 자본주의가 탄압하는 상황에서 사회주의가 탈선한다고 해도, 이게 사회주의 세력의 잘못인가요? 어른이 아이를 학대하고 아이가 삐뚤게 자란다면, 이게 아이의 잘못인가요? 아, 이런 편협한 시각은 어른과 아이가 똑같이 폭력적이라고 비난할 겁니다. 심지어 이런 시각은 어린 아기가 잠재적인 가해자라고 비난할 겁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탐욕스럽기 때문에,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 '결과적으로' 아기는 '잠재적인 가해자'가 됩니다. 우와아아아앙~, 이건 너무 천재적인 논리입니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아기는 '결과적으로' 아주 폭력적이고 위험하고 탐욕스러운 가해자가 됩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인간이 탐욕스럽다면, 경찰들은 모든 아기를 체포해야 할 겁니다. 경찰들은 헤롯 왕의 근대적인 병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응애응애 우는 아기 앞에서 경찰은 "아기야, 너에게는 묵비권이 있어."라고 미란다 원칙을 읊어야 할 겁니다. 아니, '결과적으로' 아기가 탐욕스러운 인간이기 때문에, 미란다 원칙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왜 법규가 필요한가요? '결과적으로' 모두 탐욕스럽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아무도 법규를 지키지 않을 겁니다. 이게 너무 천재적인 논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천재적인 논리를 우주 너머로 버려야 할 겁니다. 우리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고 가장 거대한 수탈, 가장 거대한 지배 계급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탐욕스러운 인간,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 폭력적인 인간 본성을 운운할 겁니다. 이런 시각은 수직적인 계급 구조를 무시하고 '결과적으로' 모든 인간이 똑같다고 간주합니다. 대기업 사장이 열대 밀렵꾼을 착취하기 때문에 대기업이 부유해짐에도, 편협한 시각은 이런 중대한 차이들을 지웁니다.



'결과적으로' 대기업 사장과 열대 밀렵꾼이 똑같기 때문에, 열대 밀렵꾼이 굶어뒈지든 쓰레기통을 뒤지든 질병에 걸리든, '결과적으로' 열대 밀렵꾼은 탐욕스러운 인간이 됩니다. 가난한 밀렵꾼을 비롯해 수두룩한 가난한 사람들은 탐욕스러운 인간이 됩니다. 아니, 그렇게 보수 우파들이 모든 인간을 똑같이 간주하고 싶다면, 제발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밥 한 숟가락이라도 먹이고 탐욕을 운운해야 하지 않습니까? 왜 밥 한 숟가락을 먹기 위해 쓰레기 더미를 뒤져야 하는 사람들이 탐욕스럽고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나요? 그렇게 탐욕 탐욕 탐욕을 지껄이고 싶다면, 제발 밥이라도 먹이고 탐욕을 주장하라니까요?


굶주림이 탐욕입니까? 굶주리는 사람의 속성이 '결과적으로' 탐욕으로 귀결해야 합니까? 왜 다들 가난을 개무시합니까? 중세 수도원 운동부터 21세기 열대 지역 좌파들까지, 왜 언제나 가난 사상이 코뮤니즘의 전유물이 되어야 하나요? 그래서 우리가 파생적인 폭력들을 비판한다고 해도, 근본적인 비판은 가장 거대한 지배 계급을 향해야 할 겁니다. 우리가 지배 계급을 비판하지 않는다면, 지배 계급은 저항을 원천 봉쇄할 겁니다. 가난한 열대 밀렵꾼들은 쫄쫄 굶주리는 밑바닥 계급보다 피에 미친 학살자가 될 겁니다. 피골이 상접한 아이들은 '결과적으로' 탐욕스럽고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악당이 될 겁니다.



우리는 저항을 국어 사전에서 이끌어내고 현실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밀렵꾼이 가해자보다 피해자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빈부 격차를 만들고 기후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가난한 밀렵꾼이 야생 동물을 죽인다고 말해야 합니다. 아무리 피해자가 폭력을 휘두르고, 이런 폭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우리는 가장 거대한 수탈을 구분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늑대들은 작은 과격함이 될 겁니다. 분명히 폭력은 나쁩니다. 하지만 행성급 환경 오염들 속에서 어떻게 폭력 없이 저항이 나타날 수 있나요?


소설 <홍수> 이외에 수많은 디스토피아들과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이런 과격한 저항들을 묘사합니다. 현실 속에서 좌파 운동권들이 과격해지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과격한 운동권들을 묘사합니다. 특히, 사이언스 픽션이 비인간 존재들을 묘사할 수 있기 때문에, 영화 <콩: 해골섬>에서 킹콩이 군대 헬리콥터들을 날려버리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에서 '과격한 저항'은 훨씬 두드러집니다. 하지만 그들은 진짜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폭력은 진짜 폭력이 아닙니다.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에서 테라 살붐이 전차들을 생산한다고 해도, 이건 가장 거대하고 선천적인 과격함이 아닙니다.



지구 자연 생태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상황에서 테라 살붐이 전차들을 생산한다고 해도, 이사야의 늑대들이 폭력적으로 저항한다고 해도, 이건 과격함이 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경제가 훨씬 거대하고 심각한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파생적인 폭력들보다 선천적인 폭력을 먼저 비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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