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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생태학 SF 덕질과 가부장적인 억압 본문

감상, 분류, 규정/생태 사회주의, 에코 페미니즘

생태학 SF 덕질과 가부장적인 억압

OneTiger 2019. 11. 27. 20:06

[거대 괴수와 약자, 돌봄, 평온은 얼마든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파괴적인 거대 괴수는 편견인지 모릅니다.]



1998년 영화 <갓질라>는 수많은 새끼 갓질라들을 보여줍니다. '고지라'가 거대 괴수임에도, 영화 <갓질라>는 작은 괴수들을 늘어놓습니다. 어떤 관객들은 왜 거대 괴수 영화가 작은 괴수들을 늘어놓는지 비판할지 모릅니다. 어떤 관객들은 새끼 갓질라들이 그저 벨로시랩터 짝퉁에 불과하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이런 비판들이 타당하든 틀리든, 어떻게 수많은 새끼들이 나타날 수 있나요? 영화 <갓질라>에서 갓질라는 수컷입니다. 왜 수컷이 알들을 낳아야 하나요? 거대 괴수 그 자체가 사이언스 판타지이기 때문에, 수컷 괴수가 알들을 낳는다고 해도, 이건 그저 설정에 불과합니다.


사이언스 판타지에서 수컷이 알을 낳는다고 해도, 이건 그저 설정에 불과합니다. 그 자체로서 이건 오류가 아닙니다. 하지만 왜 갓질라가 수컷인가요? 만약 영화 제작자들이 갓질라가 암컷이라고 설정했다면, 암컷 갓질라가 번식한다고 해도, 이건 훨씬 자연스러운 설정이 되었을 겁니다. 흔히 우리는 암컷이 알을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제작자들은 이런 상식을 반영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 제작자들은 상식을 거부했고 수컷이 알을 낳는다고 설정했습니다. 왜 영화 제작자들이 암컷보다 수컷을 설정했나요? 여기에 특정한 이유가 있나요? 갓질라가 반드시 수컷이어야 하나요?



고지라가 전통적으로 수컷이기 때문에, 1998년 갓질라 역시 수컷인가요? 왜 고지라가 전통적으로 수컷인가요? 고지라가 파괴신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거대 괴수가 남자의 로망이라고 말합니다. 거대 괴수가 파괴적이기 때문입니다. 거대 괴수는 크고 파괴적입니다. 크고 파괴적인 것은 남성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거대 괴수는 남자의 로망입니다. 거대 괴수가 남자의 로망이기 때문에, 거대 괴수는 수컷이 되어야 합니다. 거대 괴수가 남자의 로망이기 때문에, 남자는 거대 괴수에게 감정을 이입해야 하고, 거대 괴수는 수컷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남자가 암컷 괴수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나요?


그래서 고지라는 전통적으로 수컷이고, 1998년 갓질라 역시 이런 전통을 계승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수컷 고지라는 알을 낳아야 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해석이 타당한가요? 아니면 이런 해석이 그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추측에 불과한가요? 어쩌면 이건 그저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게 그저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하다고 해도, 분명히 현실 속에는 '남자-파괴-거대함' 공식이 있습니다. 남자와 거대함과 파괴는 잘 어울리는 항목들입니다. 그래서 영화 관객들이 남자-파괴-거대함 공식과 수컷 갓질라를 연결한다고 해도, 이건 그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왜 현실 속에 남자-파괴-거대함 공식이 있나요? 왜 사람들이 남자와 거대함과 파괴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나요? 왜 남자가 파괴적이어야 하나요? 이게 태생적인 이유인가요? 태생적으로 남자가 공격적이고 파괴적인가요? 많은 사람들은 이게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자는 활발하게 움직이고, 난자는 수동적으로 기다립니다. 정자는 적극적으로 들어가고, 난자는 정자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여자와 남자가 섹스할 때, 남자는 적극적으로 쑤시고, 여자는 남자를 받아줍니다. 남자는 적극적이고 활동적입니다. 반면, 여자는 수동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자가 공격적이고 파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자가 폭력적이라고 해도, 이건 태생적인 정체성입니다. 폭력, 공격, 파괴가 태생적인 정체성이기 때문에, 남자는 파괴적인 거대 괴수를 좋아합니다. 이건 대중적인 통념입니다. 문제는 섹스가 인간의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인간은 유전 형질을 퍼뜨려야 하고, 그래서 섹스는 아주 중요한 사항이나, 섹스는 전부가 아닙니다. 하지만 대중적인 통념은 섹스가 인간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건 대중적인 통념보다 대중적인 편견입니다. 여기에는 훨씬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인간에게 섹스가 아주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사항이라고 해도, 가부장 문화는 이것을 왜곡합니다.



육아는 힘든 노동입니다. 많은 엄마들은 육아 후유증에 걸립니다. 하지만 가부장 문화는 육아가 노동이라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육아는 하찮은 것, 보조적인 것이 됩니다. 아이는 인류 사회의 미래입니다. 아무도 이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이건 정말 명백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들을 구태여 읽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아이가 인류 사회의 미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아무도 아이를 맡지 않는다면, 인류 사회는 무너질 겁니다. 육아는 미래 인류 사회를 책임집니다. 게다가 허공에서 아이는 번쩍 나타나지 않습니다. 황새는 아기 보따리를 운반하지 않습니다.


여자의 몸은 아기를 낳습니다. 아기를 건강하게 낳고 먹이기 위해 여자의 몸은 많은 것들을 준비합니다. 여자의 몸이 많은 것들을 준비함에도, 그래서 인류 사회가 번영할 수 있음에도, 가부장 문화는 여자가 약하다고 무시합니다. 분명히 남자 근력보다 여자 근력은 약합니다. 하지만 인류 번성을 위해 여자 근력은 약합니다. 이건 약함이 아닙니다. 이건 그저 차이에 불과합니다. 여자의 몸이 아기를 낳기 때문에, 여자의 몸과 남자의 몸은 그저 다를 뿐입니다. 하지만 가부장 문화는 여자가 약하다고 무시합니다. 여자의 몸은 약한 것이 되고, 육아는 하찮은 것이 됩니다. 여자는 보조적인 존재가 됩니다.



남자는 주된 존재이고, 여자는 보조적인 존재가 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까? 여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겠으나, 착취 경제 역시 이유가 될 겁니다. 아무리 여자의 몸이 아기를 낳는다고 해도, 아무리 육아가 힘든 노동이라고 해도, 가부장 문화는 댓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만약 여자들이 댓가를 받는다면, 육아 노동이 댓가를 받는다면, 가부장 문화는 잉여 생산물들, 사회적인 재화들을 여자들과 육아 노동에 분배해야 할 겁니다. 가부장 문화는 사회적인 재화들을 독차지하지 못할 겁니다. 가부장적인 권력은 약해질 겁니다. 잉여 생산물들에서 권력이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권력은 부유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부유함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은 잉여 생산물들을 독차지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여 생산물들을 독차지하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온갖 날조들을 짓습니다. 자본가 계급이 온갖 거짓말들을 퍼뜨리는 것처럼, 가부장 문화는 여자의 몸과 육아 노동을 무시합니다. 여자는 댓가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육아 노동은 댓가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가부장 문화는 사회적인 재화들을 분배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여자가 약한 존재, 보조적인 존재가 되고, 육아 노동이 하찮은 것이 된다면, 가부장 문화는 댓가를 지불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여자는 보조적인 존재가 되고, 힘겨운 육아 노동은 노동이 되지 못합니다.



여자가 보조적이기 때문에, 여자는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난자는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여자는 그저 남자를 받아줄 뿐입니다. 정자는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남자는 적극적으로 쑤십니다. 남자는 적극적이고 활발합니다. 남자는 공격적이고 거칩니다. 남자에게는 단단하고 길다란 무기, 자지가 있습니다. 태생적으로 남자에게 무기가 있기 때문에, 남자는 공격적입니다. 그래서 남자가 폭력을 휘두른다고 해도, 이건 당연합니다. 이렇게 가부장 문화는 편견을 조장하기 원합니다. 가부장 문화가 여자와 육아 노동을 무시하고 착취하기 때문에, 가부장 문화 속에서 여자와 수동성, 남자와 공격성은 쉽게 이어집니다.


여자가 보조적이고 하찮고 수동적이기 때문에, 여자는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여자는 딸이거나 연인이거나 아내이거나 엄마이거나 할머니입니다. 여자는 인간보다 부속적인 뭔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들이 "나는 아내나 엄마보다 '내'가 되기 원해!"라고 소리친다고 해도, 여자들이 '내'가 될 수 있나요? 가부장 문화가 심각한 편견을 조장함에도, 이런 편견 속에서 여자들이 당당한 주체가 스스로 될 수 있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노예 제도 사회에서 당당한 주체가 되기 위해 흑인은 노예 제도를 타파해야 합니다. 가부장 문화 속에서 당당한 주체가 되기 위해 여자는 가부장 문화를 타파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런 문화 해석은 그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추측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어쩌면 자지가 무기이기 때문에, 남자는 정말 태생적으로 폭력적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히 육아 노동 착취는 현실이고, 다른 무엇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자본주의는 가부장적이고, 가부장 경제로서 자본주의는 육아 노동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육아 노동이 인류 사회를 '원초적으로' 뒷받침함에도, 사회적인 재화들을 독차지하기 위해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육아 노동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만약 가부장적인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여자들은 주체보다 부속적인 딸, 연인, 아내, 엄마, 할머니가 되어야 할 겁니다.


착취 경제가 명백한 현실이기 때문에, 명백한 현실은 창작물들에 영향을 미칠 겁니다. 명백한 현실, 착취 경제 속에서 우리는 말하고, 느끼고, 생각합니다. 명백한 현실, 착취 경제 속에서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만들고 즐깁니다. 어떻게 사이언스 픽션이 명백한 현실에서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나요? 어떻게 사이언스 픽션이 명백한 현실에서 독립적으로 떨어질 수 있나요?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만들고 즐김에도, 사이언스 픽션이 가부장적인 편견을 완전히 떨칠 수 있나요? 이 블로그 <SF 생태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블로그는 가부장 편견 덩어리인지 모릅니다.



제가 가부장적인 편견 덩어리이기 때문에, 저는 자연과 여자를 계속 연결하고 어머니 행성을 주장하는지 모릅니다. 만약 제가 정말 순수한 마음과 의도로 어머니 행성을 떠든다고 해도, 가부장적인 편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어머니 행성을 오해할지 모릅니다. 가부장 문화 속에서 여자가 인간보다 엄마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어머니 행성 개념은 가부장적인 편견에 일조할지 모릅니다. 어머니 행성 개념은 성 착취에 일조할지 모릅니다. 이건 너무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생태학 SF 장르에게 모성이 아주 유용한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이 게시글에서 첫째 문단은 수컷 갓질라가 알을 낳는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수컷 갓질라가 알을 낳는다고 해도, 수컷 갓질라는 모성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영화 관객들은 수컷 갓질라가 모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어떤 생명체가 많은 알들을 낳는다고 해도, 그 자체로서 이건 모성이 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여기에는 '돌봄'이 없습니다. 수컷이 알을 낳든, 암컷이 알을 낳든, 모성은 그저 기계적인 번식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모성은 돌봄을 포함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지구를 어머니 행성이라고 부릅니다. 풍요로운 자연 환경 속에서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14년 영화 <고지라>는 고지라, 쓰나미가 '자연의 힘'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만약 365일 지구가 쓰나미를 몰아친다면, 아무리 쓰나미가 '자연의 힘'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쓰나미 행성을 어머니 '자연'이라고 부르지 않을 겁니다. 자연 생태계가 어머니 자연이 될 때, 여기에는 돌봄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1998년 갓질라가 많은 알들을 낳는다고 해도, 갓질라는 돌봄 존재가 아닙니다. 영화 <에일리언 2>에서 여왕 에일리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여왕 에일리언이 많은 알들을 낳는다고 해도, '여왕'은 지배자입니다. 오히려 엘렌 리플리가 돌봄을 맡기 때문에, 엘렌 리플리와 여왕 에일리언이 너무 처절하게 대립하기 때문에, 여왕 에일리언은 모성이 되지 못합니다.


여러 시리즈들에서 모스라는 많은 알들을 낳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스라는 알을 하나 낳습니다.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 3부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갓질라 및 여왕 에일리언과 달리, <괴수 행성> 3부작에서 모스라는 모성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돌봄, 보호, 치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작 소설 <고지라: 괴수 묵시록>에서도 모스라는 약자(인디언, 여자, 밀림)를 보호하고 돌봅니다. 1998년 갓질라와 여왕 에일리언과 모스라가 똑같이 알(들)을 낳는다고 해도, 모스라는 어머니 자연이 될 수 있으나, 갓질라와 여왕 에일리언은 되지 못합니다. 모스라에게는 풍성한 함의들이 있습니다.



어제 11월 26일 게시글은 모스라가 자연의 여신, 어머니 자연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만약 모스라가 기계라면, 기계 모스라가 자연의 여신, 어머니 자연이 될 수 있나요?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는 메카 고지라가 있습니다. 거대 괴수 팬들은 메카 고지라가 거대 괴수라고 간주할지 모릅니다. 메카 고지라는 크고 파괴적입니다. 메카 고지라 형태는 동물(구식 복원 수각류 공룡) 형태입니다. 그래서 거대 괴수 팬들은 메카 고지라가 거대 괴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괴수는 생명체입니다. 생명체에게 번성은 중요한 목표입니다. 생명체에게 크고 파괴적인 측면보다 풍요로운 번성은 훨씬 중요한 목표입니다.


우리가 생명체에게 감탄할 때, 왜 우리가 감탄하나요? 생명체가 크고 파괴적이기 때문에? 하지만 많은 과학자들은 생명체가 엔트로피 현상을 (국지적으로) 늦춘다고 감탄합니다. 결국 우주 만물은 엔트로피 평형 상태를 향해 흐르나, 잠시 동안 생명 현상은 이것을 멈출 수 있습니다. 생명 현상이 문자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에, 생명 현상은 감동적입니다. 하지만 메카 고지라는 살아있지 않습니다. 만약 모스라가 기계라면, 메카 고지라보다 메카 모스라는 기계 특성을 훨씬 두드러지게 드러낼 겁니다. 메카 모스라는 알을 낳지 않을 겁니다. 메카 모스라가 알을 낳지 않음에도, 이게 '어머니', '자연'이 되나요?



고지라가 파괴신이기 때문에, 고지라가 기계가 된다고 해도, 이건 별로 어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스라가 어머니, 자연이기 때문에, 만약 모스라가 기계가 된다면, 메카 모스라는 어색한 설정이 될지 모릅니다. 어제 11월 26일 게시글은 모스라에게 다른 무엇보다 재생(산)이 가장 중요한 특성인지 모른다고 설명했습니다. 기계, 메카 모스라는 재생(산)하지 않습니다. 재생(산) 없이, 어떻게 메카 모스라가 어머니, 자연이 될 수 있나요? 생물 다양성이 계속 번성하고 재생산하기 때문에, 지구는 어머니 행성이 됩니다. 만약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한다면, 외계 행성은 제2의 어머니 행성이 될 겁니다.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하기 위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는 바이오 돔이 있을 겁니다. 만약 자연이 어머니라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역시 어머니가 되나요? SF 독자들이 바이오 돔을 어머니 자연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SF 작가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어머니 자연이라고 설정해야 하나요? 뭐라고 우주선 승무원들이 생각할까요? 바이오 돔이 폐쇄 인공 생태계이기 때문에, 어쩌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어머니 자연보다 소녀 자연이 되어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게 우스꽝스러운 표현이 아닌가요? SF 작가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소녀 자연이라고 설정할 수 있나요? 이런 용어가 타당한가요, 아니면 엉터리인가요?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자연'을 고찰한다면, 이런 기술적인 자연 역시 경이로운 영성이 될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파괴적인 거대 괴수가 남자의 로망이라고 말하나, 거대함은 파괴로 반드시 이어지지 않습니다. 비디오 게임 <워크래프트 III>에서 드라이어드가 "아~, 그뤠잇 아웃도어!"를 찬미하는 것처럼, 어머니 자연은 '그뤠잇'할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서브머지드>는 소녀와 고래 상어를 보여줍니다. 모스라가 열대 밀림 인디언들을 돌보는 것처럼, <서브머지드>에서 소녀는 전형적인 서구 백인이 아닙니다. 소녀는 제3세계 원주민과 비슷하고, 물에 잠긴 메트로폴리스에서 원주민 소녀는 웅장한 고래 상어와 만납니다. 고래 상어는 파괴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게임 분위기는 평온하고 관조적입니다. 원주민 소녀는 약자 3종 세트(원주민, 아이, 여자)이고, 이런 소녀는 평온한 고래 상어를 목격합니다.


약자, 돌봄, 평온과 거대 괴수는 얼마든지 어울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태학 SF 장르는 비일상적인 자연들을 이용해 '자연'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SF 팬들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엄마 거대 괴수, 환경 아포칼립스, 원주민 소녀, 돌연변이 야생 동물을 이용해 '자연'이 무엇인지 새롭게 고찰할 수 있습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소녀 자연을 인식한다면, 심지어 평범한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조차 경이롭고 원초적인 영성이 될지 모릅니다. 생태학 SF 장르는 '자연'이 무엇인지 새롭게 고찰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존재로서 우리가 먹고 살고 섹스하기 때문에, 생태학 SF 장르는 정말 매력적입니다. (그리고 이 블로그는 정말 매력적인 생태학 SF 장르를 기발하고 독창적으로 논의합니다.)



목수정 작가는 여자(의 육체)가 생태적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비단 목수정 작가만 아니라 많은 작가들은 여자와 자연을 연결합니다. (그래서 좌파는 돌봄, 여성적입니다.) 목수정 작가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소녀 자연이라고 동의할까요? 만약 목수정 작가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소설을 읽고 소녀 자연이라는 용어를 듣는다면, 뭐라고 목수정 작가가 생각할까요? 목수정 작가는 피식 웃을지 모릅니다. "아니, 뭐야?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소녀 자연? 이건 너무 엉뚱해." 아니면 목수정 작가는 깊게 공감할지 모릅니다. 아니면 목수정 작가는 분노할지 모릅니다. 소녀 자연이라는 개념은 가부장적인 편견과 성 착취에 일조할지 모릅니다.


소녀 자연이라는 개념이 가부장 편견을 부추기는 것처럼, 이 블로그 <SF 생태주의>는 가부장 편견을 부추길지 모릅니다. 그래서 생태학 SF 덕질은 불안합니다. 모름지기 덕질은 즐거워야 하나, 생태학 SF 덕질은 불안합니다. 자연이 원초적이기 때문에, 육체적인 존재로서 우리가 먹고 살고 섹스하기 때문에, 자연 환경, 생명 현상에서 우리가 비롯하기 때문에, 다른 덕질들보다 생태학 SF 덕질은 훨씬 불안합니다. 아무리 여자가 생태학 SF 덕질한다고 해도, 여자라는 정체성은 가부장 편견에서 절대 자유롭지 못합니다. 노천명이 <부인 근로대>를 쓰고 파쇼주의를 지지한 것처럼, 편견에 굴복하기 위해 여자는 정체성을 이용할지 모릅니다.



이건 정체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인종, 성별, 민족, 생물종 같은 정체성이 만능 보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백인 권력 앞잡이가 되기 위해 흑인은 흑인 정체성을 내세울지 모르고, 가부장 앞잡이가 되기 위해 여자는 여자 정체성을 내세울지 모릅니다. 심지어 영화 <블레이드>처럼, 인간은 흡혈귀 앞잡이가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정체성보다 사상은 훨씬 중요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가?"보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라고 물어야 할 겁니다. 심지어 여자라는 정체성조차 가부장적인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생태학 SF 덕질은 너무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어떤 강연에서 여성학자 최형미는 자신이 에코 페미니즘을 오해한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에코 페미니즘에게 돌봄, 모성, 자연은 핵심 용어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용어들이 옳은가요? '돌봄'이 성 역할을 고정시키지 않나요? '모성'이 여자가 인간보다 엄마라고 몰아붙이지 않나요? '자연'이 여자를 열등한 착취 대상으로 전락시키지 않나요? 여성학자가 에코 페미니즘을 오해하는 것처럼, 어머니 행성 개념은 가부장적인 편견에 빠질지 모릅니다. 어머니 행성 개념에도 돌봄과 모성과 자연이 있습니다. 만약 생태학 SF 덕질이 이런 용어들을 말한다면, 이건 가부장적인 편견에 빠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생태학 SF 덕질은 불안합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왜 덕질이 불안해야 하나요? 즐거운 생태학 SF 덕질을 위해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성 해방 없이, 즐거운 생태학 SF 덕질 따위는 없습니다. 이 블로그에서 저는 여러 이야기들을 떠드나, 솔직히 박애 정신이고 선행이고 윤리고 나발이고, 이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덕질입니다. 그리고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생태학 SF 덕질을 가로막습니다.



※ 게임 <서브머지드> 스크린샷: "Whale Shark", Mollified Bathysa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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