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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식스 웨이크>, 육체와 영혼, 진화와 재생산 과정 본문

감상, 분류, 규정/생태 사회주의, 에코 페미니즘

<식스 웨이크>, 육체와 영혼, 진화와 재생산 과정

OneTiger 2019. 12. 9. 20:39

[여자는 멋진 스테고사우루스 조각상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육체를 소유하지 못합니다.]



SF 울타리에서 인격 전송은 드문 소재가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사변 문학들이 인격 전송을 이야기한 것처럼, SF 사조에서 인격 전송은 빠진 적이 없습니다. 판타지는 주문을 이용하고 인격을 전송하나, 20세기 이후 사이언스 픽션들은 기계 장비를 이용합니다. 가상 현실이 인격을 다운로드할 수 있고, 유전 공학이 육체를 복제할 수 있기 때문에, 20세기 이후 사이언스 픽션에서 인격 전송은 훨씬 유물론적입니다. 사이버펑크 소설에서 누군가는 누군가가 아닐지 모릅니다. 이건 비유적인 표현이나, 사이버펑크 소설에서 육체와 영혼은 다를지 모릅니다. 육체와 영혼은 별개입니다.


사이버펑크 소설에서 재벌은 복제 육체를 주문하고, 인격을 업로드/다운로드하고, 새로운 육체로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영혼은 계속 존재하나, 영혼을 담기 위한 그릇들, 육체들은 계속 바뀝니다. 이렇게 재벌은 불멸을 누립니다. 필멸자 인간에게 죽음은 운명이나, 사이버펑크 소설에서 재벌은 운명을 바꾸고 불멸, 장수를 누립니다. 인격 전송 설정에서 노화, 죽음, 장수, 불멸, 영원한 청춘은 중요한 목표입니다.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인격 전송을 이야기했을 때, 이미 사이언티픽 로망스에서도 중요한 목표는 불멸이었습니다. 인격 전송은 필멸자 인간을 장수하는 인간으로 바꿉니다.



수많은 문학들에서 노화와 죽음, 장수와 불멸은 핵심 소재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인간이 필멸자이기 때문에, 노화와 죽음, 장수와 불멸은 핵심 소재가 됩니다. "영희는 죽는다. 철수는 죽는다. 히파티아는 죽는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 죽는다." 같은 논법처럼, 인간은 필멸자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보물들을 모은다고 해도, 운명에서 인간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래 옛날부터 권력자들은 신에게 제물을 바쳤거나, 불로초를 구했거나, 희귀한 물질을 복용했으나, 아무도 필멸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문학들은 장수, 불멸, 영원한 청춘을 중요하게 노래하고,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소설 <불사 판매 주식 회사>는 인격 전송 이야기입니다. 소설 속에서 재벌은 육체를 사고, 인격을 전송하고, 다시 태어납니다. 재벌은 장수를 누립니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장수를 누리지 못합니다. 부유함은 장수로 직접 이어지지 않으나, 부유한 사람들이 인격 전송 장비를 사용하기 때문에, 부유함은 장수를 뒷받침합니다. 문제는 하늘에서 부유함이 뚝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 재벌이 부유한가요? 재벌이 금수저이기 때문에? 재벌이 성실하기 때문에? 재벌이 유능하기 때문에? 하지만 이것들은 근본적인 원인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생산 수단과 잉여 노동/재생산 착취입니다.



자본가 계급이 생산 수단을 차지하고 잉여 노동/재생산 과정을 착취하기 때문에, 자본가 계급은 부유합니다. 그래서 부유한 재벌은 육체를 사고, 인격 전송 장치를 사용하고, 다시 태어납니다. <불사 판매 주식 회사>에서 불평등은 비단 계급과 성별만 아니라 사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앤 퍼거슨이 지적한 것처럼, 인류 문명에서 계급, 성별, 인종은 가장 대표적인 차별 기준이나, 인격 전송 설정에서 사후 역시 차별 기준이 됩니다. 부유한 남자 재벌은 장수를 누리나, 가난한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는 사후 세계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부유한 남자 재벌에게 영혼과 육체는 별개입니다.


남자 재벌과 달리, 가난한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에게 영혼과 육체는 별개가 아닙니다. 가난한 여자가 영혼(인격)을 전송하기 원한다고 해도, 육체에서 영혼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영혼은 육체를 인정해야 합니다. 영혼이 육체를 인정하기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영혼은 육체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건 내 몸이야." 이건 여자가 자신의 육체를 소유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자가 '내 몸'이라고 소유를 표현한다고 해도, 여자는 자신의 육체를 소유하지 못합니다. 육체에서 여자가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여자는 육체를 소유하지 못합니다. 여자에게 육체는 운명입니다. 여자는 육체적인 존재입니다.



부유한 남자가 영혼(인격)을 다른 육체에게 전송하기 때문에, 부유한 남자는 육체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적어도 육체에서 남자는 어느 정도 자유롭습니다. 부유한 남자가 인격을 새로운 육체에게 전송한 이후, 부유한 남자가 "이건 내 몸이야."라고 말할 때, 이건 소유를 가리킬 겁니다. 남자는 육체를 버리고 새로 얻을 수 있습니다. 남자가 육체를 버리고 새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남자는 육체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소설 <불사 판매 주식 회사>와 달리, 소설 <야생종>은 인격 전송 이야기가 아니나, <야생종>에서 가부장적인 초인 남자 역시 인격을 전송할 수 있습니다. 남자는 육체를 소유합니다.


가부장적인 초인 남자는 자신의 인격을 새로운 육체에게 전송하고 육체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이건 소유입니다. 초인 남자는 육체를 강탈하고 소유합니다. "이건 내 몸이야." 이렇게 인 남자는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건 소유를 가리킵니다. <불사 판매 주식 회사>에서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는 육체를 소유하지 못하나, <야생종>에서 가부장적인 인 남자는 육체를 소유합니다. 육체에서 가난한 여자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건 내 몸이야. 여기에서 나는 벗어나지 못해." 이렇게 가난한 여자는 말해야 합니다. 반면, 인 남자는 소유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이건 내 몸이야. 나는 이것을 강탈했어."



<야생종>에서 초인 남자가 인격을 전송하기 때문에, 초인 남자는 장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 <불사 판매 주식 회사>와 <야생종>에서 재벌 남자와 초인 남자는 상당히 다르나, 양쪽에서 인격 전송과 장수는 모두 중요한 소재입니다. 재벌 남자와 초인 남자는 똑같이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건 내 몸이야. 나는 이것을 차지했어." 재벌 남자와 초인 남자는 똑같이 소유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여자는 소유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재벌 남자와 초인 남자가 육체적인 존재라고 해도, 가난한 여자는 훨씬 육체적인 존재입니다. 재벌 남자와 초인 남자에게 영혼과 육체가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해도, 가난한 여자에게 육체와 영혼은 완전히 똑같습니다.


소설 <식스 웨이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재벌들이 인격을 전송하고 육체를 바꾸기 때문에, 재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재벌들에게 죽음은 연례 행사와 비슷합니다. <식스 웨이크>에서도 부유한 재벌 남자는 인격을 업로드/다운로드하고, 새로운 육체를 얻고,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가난한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는 육체적인 존재이나, 부유한 재벌 남자에게 영혼과 육체는 어느 정도 별개입니다. 가난한 여자처럼, 육체에서 재벌 남자는 완전히 떠나지 못하나, 재벌 남자는 육체를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재벌 남자는 장수를 누립니다. <불사 판매 주식 회사>처럼, <식스 웨이크>에서 생산 수단 독점과 착취는 장수를 향해 이어집니다.



<불사 판매 주식 회사>와 <식스 웨이크>가 보여주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육체와 영혼이 별개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건 오직 사이언스 픽션만 육체와 영혼이 별개라고 주장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로맨스 드라마 <내 아이디는 강남 미인>에서 강미래는 육체를 바꾸기 원합니다. 육체에서 강미래는 벗어나기 원합니다. 강미래는 육체를 정말 바꾸고 새로운 인생을 누립니다. 강미래는 자신이 새로 태어난다고 느낍니다. <내 아이디는 강남 미인>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SF 팬들은 <내 아이디는 강남 미인>이 SF 드라마라고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내 아이디는 강남 미인>은 육체와 영혼을 분리합니다. <내 아이디는 강남 미인>과 <식스 웨이크>는 모두 서구 근대화에 기반합니다.


고대 문학은 고도의 성형 수술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고도의 성형 수술이 서구 근대화에 기반하기 때문에, 고도의 성형 수술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고대 문학은 이런 성형 수술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고대 문학이 젊음의 물약을 상상하고 과장하는 것처럼, <내 아이디는 강남 미인>에서 성형 수술은 어느 정도 과장입니다. <내 아이디는 강남 미인>이 생체 개조를 과장하기 때문에, 이 드라마와 <모로 박사의 섬>, <물고기 인간> 같은 바이오펑크 소설 사이에는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 아이디는 강남 미인>보다 <식스 웨이크>는 육체와 영혼을 훨씬 멀리 분리합니다. 심지어 <식스 웨이크>는 장수, 불사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고도의 성형 수술보다 장수는 훨씬 극적입니다.



수많은 문학들은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장수와 불멸처럼, 수많은 문학들에게 아름다움은 중요한 소재입니다. 하지만 육체적인 측면에서 아름다움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육체적인 측면에서 아름다움이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탄합니다.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장수가 모두 중요한 문제라고 해도, 육체적인 측면에서 아름다움이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아름다움보다 장수는 훨씬 커다란 범주입니다. 아름다움은 장수에게 종속됩니다. <내 아이디는 강남 미인>에게 바이오펑크 같은 속성이 있다고 해도, <내 아이디는 강남 미인>은 장수, 불멸을 말하지 못합니다.


<내 아이디는 강남 미인>과 달리, <식스 웨이크>는 장수, 불멸을 말할 수 있습니다. <식스 웨이크>는 영혼과 육체를 훨씬 멀리 떨어뜨리고, SF 독자는 육체와 영혼을 훨씬 깊게 고민할 수 있습니다. 아랫집 수진에게는 예쁜 몸매와 예쁜 스테고사우루스 인형이 있습니다. 엔트로피 현상에서 우주 만물이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언젠가 예쁜 몸매는 늙을 테고, 예쁜 스테고사우루스 인형은 낡을 겁니다. 아랫집 수진은 낡은 인형을 버리고 새로운 스테고사우루스 인형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랫집 수진은 늙은 육체를 버리지 못합니다. 심지어 첨단 과학 기술조차 노화, 죽음을 막지 못합니다.



심지어 첨단 기술조차 노화, 죽음을 막지 못하기 때문에, <내 아이디는 강남 미인>보다 <식스 웨이크>는 훨씬 극적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훨씬 극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할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육체와 영혼이 별개라고 훨씬 극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 도시에서 여자들이 월경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노화처럼, 월경은 육체적인 측면입니다. 만약 과학 기술이 노화를 막을 수 있다면, 월경은 일도 아닐 겁니다. 바이오펑크 기술은 월경을 없앨지 모르고, 월경 후유증과 통증에서 여자들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식스 웨이크>에서 가난한 여자가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지 못하는 것처럼, 바이오펑크 소설에서 가난한 여자는 월경 통증을 분리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식스 웨이크>에서 부유한 남자에게 육체와 영혼은 별개이나, 가난한 여자에게 육체와 영혼은 별개가 아닙니다. <식스 웨이크>처럼, 바이오펑크 소설에서 재벌 여자에게 육체와 영혼은 별개이나, 가난한 여자에게 육체와 영혼은 별개가 아닐 겁니다. 재벌 여자는 첨단 과학 기술을 이용하고 월경 통증을 없앨지 모르나, 가난한 여자는 월경 통증을 겪어야 할 겁니다. 현실 속에서 가난한 여자들은 좋은 생리대들을 쉽게 구하지 못합니다.



현실 속에서 좋은 생리대가 차별, 불평등이 되는 것처럼, 바이오펑크 소설 속에서 생체 공학은 차별, 불평등이 될 겁니다. 하지만 생체 공학이 월경 통증을 없앤다고 해도, 결국 호모 사피엔스 여자는 월경해야 합니다. 아무리 생체 공학이 발달한다고 해도, 여자는 월경해야 하고, 이것 그 자체는 바뀌지 않습니다. 만약 여자가 월경하지 않고, 임신하지 않고, 수유하지 않기 원한다면, 호모 사피엔스 생물종 그 자체는 바뀌어야 할 겁니다. 아무리 바이오펑크 소설이 놀라운 생체 공학 기술을 떠든다고 해도, 만약 호모 사피엔스 생물종 그 자체가 바뀌지 않는다면, 여자, 월경, 임신, 수유는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 바이오펑크 소설에서조차 여자, 월경, 임신, 수유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이건 훨씬 문제가 됩니다. 평생 동안 여자가 임신하지 않는다고 해도, 여자는 월경 통증을 겪어야 합니다. 아내와 남편이 2세를 합의한다고 해도, 아내는 임신해야 합니다. 임신은 낡은 스테고사우루스 인형이 아닙니다. 아내는 낡은 스테고사우루스 인형을 버릴 수 있으나, 아내는 임신을 버리지 못합니다. 아내는 육체적인 존재이고, 여기에서 아내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내가 임신하기 때문에, 아내가 제대로 활동하지 못한다고 해도, 남편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측면에서 남편은 자유롭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똑같이 육체적인 존재라고 해도, 적어도 아내보다 남편은 훨씬 자유롭습니다. 아내에게 영혼과 육체는 별개가 아니나, 남편에게 영혼과 육체는 (어느 정도) 별개입니다. "나는 자유롭게 활동하기 원해. 남편아~, 나 대신 임신하고 출산하고 수유해." 이렇게 아내는 말하지 못합니다. 남편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동안, 아내는 임산부가 되고 제약을 겪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다시 문제는 사회 구조입니다. <식스 웨이크>에서 사회 구조 때문에 육체가 구속/차별이 되는 것처럼, 사회 구조 때문에, 아내에게 육체는 구속/차별입니다. 남편은 자유롭게 활동하고 임금을 법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임금 노동이 중요하다고 떠벌이고, 남편은 중요한 존재가 됩니다.


반면, 임신이 임금을 벌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가 인류의 미래라고 해도, 임신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편 소설 <일곱 번째 남편>을 비롯해 여러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아이는 인류의 미래입니다. 하지만 아이를 낳기 위해 아내가 임신한다고 해도, 아내는 중요한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아내는 제약들에 부딪혀야 합니다. 만약 임산부가 자유롭게 활동한다면, 수구 꼴통 할배들은 혀를 차고 임산부에게 개입할 겁니다. 심지어 국가 정부조차 임산부에게 개입하고, 국가 정부는 가임 여자 자료를 만듭니다. 뭐, 통계 자료는 중요합니다. 그 자체로서 통계 자료는 문제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왜 국가 정부가 가임 여자 통계 자료를 만드나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 노동은 가장 중요합니다. 만약 임금 노동이 사라진다면,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망할 겁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 노동은 가장 중요합니다. 임신과 상관없이, 남편은 임금을 벌고, 그래서 남편은 중요한 존재가 됩니다. 반면, 임신은 임금을 벌지 못합니다. 아무리 아내가 무거운 육체를 끙끙거리고 움직인다고 해도, 임신은 임금을 절대 벌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재생산 과정에 댓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구 꼴통 할배들은 임산부에게 참견합니다. 아내, 임산부는 중요한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아내, 임산부는 보조적인 존재가 됩니다.


만약 국가 정부가 임산부들에게 댓가를 지급하고, 이런 댓가 덕분에, 평생 동안 여자들이 자유롭게 살아간다면, 재생산 과정은 엄청난 가치를 자랑할 겁니다. 만약 산업 노동이 아무 댓가를 받지 못한다면, 남자들이 12시간 이상 일한다고 해도, 남자들이 댓가를 절대 받지 못한다면, 영리 기업들이 이윤을 단 한 푼도 벌지 못한다면, 아무도 재벌을 부러워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남자들은 기도할 겁니다. "왜 제가 남자인가요? 다음 생애에서 저 역시 풍만하고 젖을 잘 먹이는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요~!" 하지만 현실에서 남자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현실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이기 때문입니다.



임산부가 회사 업무를 맡지 못하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여자가 골칫거리라고 취급합니다. 수유 시간이 잉여 노동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수유 시간은 이윤을 창출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윤 창출에게 수유 시간은 방해가 됩니다. 아내는 보조적인 존재, 골칫거리, 방해입니다. 아내가 젖을 먹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내가 아기를 돌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내가 휴직을 신청하기 때문에, 아내가 육아에 치중하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아내를 싫어합니다. 만약 아내가 이윤 창출보다 육아에 치중한다면, 자본가들은 아내를 내쫓기 원할 겁니다. 물론 인류 사회가 임산부에게 댓가를 지급한다고 해도, 오직 여자만 임신하기 때문에, 여자에게 임신은 너무 부당한 차별인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댓가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에, 임신은 훨씬 극심한 차별이 됩니다. 임신과 육아가 인류 문명을 뒷받침함에도, 아이가 인류의 미래임에도, 자본주의는 재생산 과정을 개무시합니다. 재생산 과정이 인류 문명을 뒷받침함에도, 자본주의가 재생산 과정을 개무시하기 때문에, 이건 '착취'가 됩니다. 자본주의는 재생산 과정을 착취합니다. 자본주의는 착취입니다. 단편 소설 <일곱 번째 남편>이 보여주는 것처럼, 재생산 과정은 중요합니다. <일곱 번째 남편>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이나, 재생산 과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기 위해 SF 팬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이외에 다른 하위 장르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생태학 SF 장르 역시 재생산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심지어 이런 아기자기한 생태계 게임조차 생식, 번성, 진화, 재생산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다른 여러 SF 하위 장르들보다 생태학 SF 장르는 재생산 과정을 가장 강조할 겁니다. 생태학 SF 장르가 유물론에 기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 환경 속에서 야생 동물들은 먹고 삽니다. 인간은 동물이고, 야생 동물들처럼, 자연 환경 속에서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야생 동물들이 재생산하는 것처럼, 인간은 동물이고, 인간은 재생산해야 합니다. 유물론 관점, 육체적인 측면에서 야생 동물들과 인간은 똑같이 먹고 살아야 하고 재생산해야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처럼, 재생산 과정은 중요합니다. 아니, 어떤 관점에서 먹고 사는 문제, 식량 생산 노동보다 재생산 과정(섹스, 임신, 출산, 양육)은 훨씬 중요합니다.


비디오 게임 <Equilinox>는 아기자기한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입니다. 하지만 심지어 이런 아기자기한 게임조차 게임 플레이어가 유전 형질을 선택하고 새로운 생물종을 진화시킬 수 있다고 표현합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새로운 생물종을 만들고 새로운 진화 역사를 쓰기 때문에, 어떤 관점에서 <Equilinox>는 생태학 SF 게임과 비슷합니다. 사실 생태학 SF 장르에서 '진화'는 너무 단골 메뉴입니다. 수많은 생태적인 상상력들은 진화를 마르고 닳도록 우려먹습니다. <제노블룸> 같은 인디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부터 2014년 <고지라> 같은 거대 괴수 블록버스터 영화까지, 진화는 사골 중의 사골입니다.



그리고 진화는 재생산 과정에 속합니다. 진화가 무엇인가요? 생명체들은 후손들을 낳고 낳고 낳고 다시 낳고, 이런 과정에서 유전 형질은 바뀝니다. 이런 진화 덕분에, 생물 다양성은 번성하고, 호모 사피엔스 역시 나타납니다. 생태학 SF 장르는 진화를 이용하고 온갖 외계 생태계들, 거대 괴수들, 초인들을 떠듭니다. <다섯 번째 계절>에서 여자 오로진이 아기를 낳는 것처럼, <모스라>에서 엄마 거대 괴수가 알을 낳는 것처럼, <니치>에서 암컷들이 새로운 동물들을 낳는 것처럼, 생명체가 후손을 낳기 때문에, 진화는 나타납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진화는 재생산에 속합니다. 생태학 SF 장르에서 재생산은 핵심입니다.


생태학 SF 장르는 재생산 덕분에 생명 현상이 놀랍다고 말합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을 보세요. 왜 공원 관계자들이 놀라나요? 라이신 예방(먹는 문제) 때문에? 그건 아닙니다. 라이신 예방 문제는 중요하나, 소설 <쥬라기 공원>은 라이신 예방을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원 관계자들은 재생산에 주목합니다. 재생산 수치가 초과하기 때문에, 공원 관계자들은 놀랍니다. 고생물학자는 새로운 먹이를 찾지 않습니다. 고생물학자는 새로운 알, 새로운 둥지를 찾습니다. 새로운 알, 새로운 둥지 때문에, 공원 관계자들은 대경실색합니다. <쥬라기 공원>은 먹고 사는 문제보다 재생산 과정에 초점을 맞춥니다.



아기자기한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부터 공룡 사파리 소설까지, 생태학 SF 장르에서 재생산은 아주 중요합니다. 생태학 SF 평론가는 수많은 비슷한 사례들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인류 문명에게도 재생산은 아주 중요합니다. 야생 동물들이 먹고 사는 것처럼, 인류 문명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야생 동물들이 재생산하는 것처럼, 인류 문명은 재생산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재생산 과정을 개무시하고 착취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생태학 SF 평론가는 자본주의를 그냥 놔둬서는 안 됩니다. 생태학 SF 장르에서 재생산이 핵심이기 때문에, 진정한 생태학 SF 평론가는 재생산 과정에 주목하고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생태학 SF 평론가가 재생산 과정에 주목하고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하기 때문에, 진정한 생태학 SF 평론가는 "돌봄 노동 사회화(의무화)가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생태학 SF 평론가가 돌봄 노동 사회화를 무시하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찬양한다면, 이런 평론가는 그저 허접한 불쏘시개 글쟁이에 불과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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