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육체의 연장선, 또 다른 육체로서 자연 본문
[자연 속에서 인류가 살기 때문에, 자연에서 인류는 비롯합니다. 심지어 외계 자연조차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에게는 타인이 필요합니다. 타인은 사랑하기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어쩌면 자기애(自己愛) 역시 마찬가지인지 모릅니다. 보편적인 인간에게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신적인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적인 측면입니다. 정신과 육체는 별개입니다. 정신과 육체가 별개이기 때문에, 정신은 육체를 의식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정신과 육체가 별개라고 해도, 정신은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바이오펑크 장르는 이것을 훨씬 강조합니다. 바이오펑크에게 정신과 육체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바이오펑크들은 어떻게 육체가 바뀌고 육체에서 정신이 비롯하는지 이야기합니다.
SF 소설 모음집 <얼터너티브 드림>에서 단편 소설 <사관과 늑대>는 인간이 군견에게 인격을 전송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육체는 군견이나, 인격은 군견병입니다. 현실에서 군견병과 군견은 다른 존재이나, <사관과 늑대>에서 군견과 군견병은 한 몸입니다. 군견(육체) 속에서 인격(정신)은 존재합니다. 소설 <스타십 트루퍼스>에서 군견 장교와 네오독 역시 한 몸 같은 존재이나, 이건 사이킥 현상에 가깝습니다. <스타쉽 트루퍼스>와 달리, <사관과 늑대>에서 인격은 군견 육체로 정말 들어갑니다. 이건 너무 비효율적인 군견 운영 방법인지 모르나, 단편 소설 핵심은 육체와 정신입니다.
군견(육체) 속에서 인격(정신)은 자신을 유지하기 원합니다. 하지만 육체는 정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군견병은 인격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합니다. <사관과 늑대>는 너무 진부한 설정과 내용 전개를 보여주나, 문제 제기 그 자체는 흥미롭습니다. 육체적인 측면이 정신적인 측면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자체로서 정신적인 측면이 존재한다고 판단하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비단 인격만 아니라 다른 정신적인 측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도덕을 중시하나, 도덕이 정말 중요한가요? 도덕은 육체적인 측면이 아닙니다. 도덕은 토대보다 상부 구조, 부차적인 측면입니다.
만약 어떤 여자가 상어 유전 형질을 받아들인다면, 여자는 일반적인 인간보다 상어 인간이 되고, 여자의 정신, 사고 방식 역시 바뀔 겁니다. 육체가 바뀌기 때문에, 정신 역시 바뀝니다. 많은 바이오펑크들은 그 자체로서 정신이 독립적이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그 자체로서 정신적인 측면이 존재한다고 간주하나, 육체적인 측면에서 정신적인 측면은 비롯합니다. 이건 육체적인 측면이 정신적인 측면을 완전히 장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신에게는 상대적인 자율성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측면은 정신보다 육체입니다. 육체에서 정신은 비롯합니다.
인간은 말할 수 있습니다. "이건 내 몸이야." 어떻게 인간이 이것을 말할 수 있나요? 정신적인 측면과 육체적인 측면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신에게 육체는 '타인'입니다. 정신과 육체는 둘입니다. 정신과 육체에게 서로는 타인입니다. 정신과 육체는 하나가 아닙니다. 정신과 육체는 별개입니다. 정신과 육체에게 서로가 타인이기 때문에, 인간은 말할 수 있습니다. "이건 내 몸이야." 정신은 육체가 별개라고 인식합니다. 정신이 육체가 별개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정신은 육체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육체에서 정신은 쉽게 떨어지지 못합니다. 상대적인 자율성 속에서 정신은 육체를 바라봅니다.
정신에게 상대적인 자율성이 있기 때문에, 정신은 육체가 '타인'이라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정신은 육체를 싫어할지 모릅니다. 바이오펑크 소설에서 여자는 소망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런 육체를 원하지 않아. 만약 내가 상어 유전 형질을 받아들인다면…. 만약 내가 육상 인간보다 수중 인간이라면…. 만약 내 하체가 두 인간 다리보다 상어 지느러미라면…. 만약 내가 하체를 바꿀 수 있다면…." 이런 가정에서 정신과 육체는 별개입니다. 만약 육체가 바뀔 수 있다면, 정신은 육체를 바꾸기 원할 겁니다. 정신에게 육체는 '타인'입니다. 정신이 육체에게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신은 육체를 바꾸기 원합니다.
정신에게 자율성이 있기 때문에, 정신은 육체를 바꾸기 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상대적인 자율성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바이오펑크 소설에서 생체 개조 기술이 존재하기 때문에, 여자는 자신의 육체를 바꿀 수 있습니다. 언젠가 여자는 두 다리를 지느러미로 바꾸고, 상어 유전 형질을 받아들이고, 수중 인간이 되고, 멋지게 헤엄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여자가 자신의 육체를 바꿀 수 있다고 해도, 아무리 여자가 상어 인간이 된다고 해도, 결국 여자는 말해야 합니다. "이건 내 몸이야." 육체에서 정신은 완전히 떨어지지 못합니다. 정신에게 육체는 그릇입니다.
정신에게 상대적인 자율성이 있기 때문에, 정신에게 육체는 '타인'입니다. 그래서 정신은 육체를 바꾸기 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육체에서 정신은 완전히 떨어지지 못합니다. 바이오펑크처럼, 언젠가 과학 기술은 또 다른 육체를 만들고, 육체에서 정신은 완전히 떨어질지 모릅니다. 만약 유전 공학, 생체 개조 기술이 발달한다면, 정말 바이오펑크는 꿈이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첨단 과학 기술 없이, 육체에서 정신은 완전히 떨어지지 못합니다. 정신과 육체는 하나이고, 동시에 정신과 육체는 둘입니다. "이건 내 몸이야."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정신과 육체는 하나입니다.
동시에 정신은 육체가 별개라고 인식합니다. 아무리 정신이 육체가 별개라고 인식한다고 해도, 육체에서 정신이 완전히 떨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정신은 육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만약 정신이 육체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정신은 견디지 못할 겁니다. 아무리 정신이 육체를 싫어하고, 정신에게 육체가 불편한다고 해도, 정신은 육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건 내 몸이야. 내 몸에서 나는 떨어지지 못해." 이렇게 인간은 운명을 느껴야 합니다. 정신과 육체는 운명입니다. 정신은 육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건 내 몸이야. 나는 내 몸을 아껴야 해." 아무리 정신이 육체를 싫어한다고 해도, 정신은 육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정신에게 육체는 그릇입니다. 육체 없이, 정신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정신이 육체를 싫어한다고 해도, 육체라는 그릇 없이, 정신이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신은 육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적어도 육체를 사랑하기 위해 정신은 노력해야 합니다. 어쩌면 '자기애'는 이런 것에 가까운지 모릅니다. 이건 우리가 운명에 순응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쩌면 과학 기술은 육체 해방에 기여할지 모릅니다. 과학 기술 덕분에, 육체에서 정신은 해방할지 모릅니다. 여러 사이언스 픽션들은 인류가 유년기를 넘어가고 새로운 존재가 되거나 인류가 정신 공동체를 이룩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건 육체 해방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과학 기술이 육체 해방에 기여한다고 해도, 만약 이게 정말 해방이라고 해도, 여기에는 커다란 걸림돌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첫째 문단부터 넷째 문단까지, 이 게시글은 보편적인 인간을 이야기했습니다. 보편적인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사회 속에서 인간은 존재합니다. 인간은 무인도가 아닙니다. 인간이 무인도가 아니기 때문에, 순수한 개인은 얄팍한 관념론에 가깝습니다. 정신이 육체를 타인이라고 의식하는 것처럼, 사회 속에서 인간은 다른 인간들을 의식합니다. 사회 구조는 인간상을 형성합니다. 문제는 사회 구조에 수직적이고 억압적인 계급 차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언어는 사회적인 기호입니다. 사회적인 기호로서 언어는 인간상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어떻게 언어가 나타납니까? 허공에서 언어가 번쩍 나타납니까? "서사시는 남성적이고, 서정시는 여성적이다." 이건 언어 표현입니다. 이 표현에서 서사시, 거칠고 웅장하고 힘찬 기백은 남자가 됩니다. 부드럽고 섬세하고 약한 감성은 여자가 됩니다. 남자는 거칠고 강합니다. 여자는 부드럽고 약합니다. 문학 교과서들은 이런 표현을 지껄여대고, 학생들은 이런 표현을 배웁니다. 문학 강사는 이런 표현이 성 차별이라고 비판할 수 있으나, 이런 표현은 사회적이고, 문학 강사 개인은 이 표현을 쉽게 바꾸지 못합니다.
왜 이런 언어 표현이 나타납니까? 대답은 사회 구조, 가부장 제도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보세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돌봄 노동은 댓가를 받지 못합니다. 만약 돌봄 노동이 댓가를 받는다면, 사람들은 빌어처먹을 회사를 때려치우고, 좆 같은 사장 얼굴에 사표를 내던지고, 육아에 치중할지 모릅니다. 만약 사람들이 빌어처먹을 회사들을 때려치운다면, 영리 기업들은 이윤을 극대화하지 못할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일무이한 목표는 이윤 창출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돌봄 노동들에 댓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돌봄 노동은 인류 문명을 원초적으로 뒷받침하나, 자본주의는 이걸 착취해야 합니다.
돌봄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여자가 육아에 헌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기 때문에, 육아는 여자 영역입니다. 여자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때문에, 육아는 노동보다 태생적인 의무가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 창출이 유일무이한 목표이고, 돌봄 노동이 댓가를 받지 못하고, 여자가 돌봄 노동에 헌신하기 때문에, 여자는 이윤 창출에 기여하지 못합니다. 여자가 이윤 창출에 기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윤 창출 사회에서 여자는 보조적이고 열등한 존재가 됩니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는 가부장 제도이고, 이런 사회 구조에서 '서정시는 여성적'이라는 표현은 비롯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자가 약하고, 보조적이고, 열등하다고 간주합니다. 이렇게 사회 속에서 인간은 존재합니다. 사회 속에서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 구조에서 정신과 육체 관계 역시 자유롭지 못합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정신과 육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정신과 육체가 있고, 사회 속에서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사회, 정신, 육체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이런 시각은 비단 정신과 육체만 아니라 인류와 지구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유물론 관점에서 육체적인 측면은 자연 환경으로 이어집니다. 자연 환경은 정신적인 측면보다 육체적인 측면에 속합니다.
육체적인 측면이 자연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자연은 인간 육체의 연장선입니다. 분명히 인간은 자연이 인간 육체의 연장선이라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육체에서 정신이 비롯하는 것처럼, 자연에서 인간은 비롯합니다. 육체 없이, 정신이 존재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연 없이, 인간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육체가 먹고 살기 때문에, 육체 속에서 정신은 존재합니다. 자연 속에서 인간이 먹고 살기 때문에, 자연 속에서 인간은 존재합니다. 심지어 SF 우주 개척들조차 이것을 인정합니다. 다소 진지한 <언클레임드 월드>부터 우스꽝스러운 <산소 미포함>까지, 우주 개척 과정에서 자연은 가장 근본적인 요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구 자연 환경을 하나의 동물이라고 간주합니다. 지구는 동물이 아니나, 이런 표현은 생태학에서 총체적인 시각이 필수적이라고 뒷받침합니다. 지구가 동물이 될 때, 우리는 훨씬 총체적으로 고찰할 수 있습니다. "인류에게 지구는 연장된 육체이다. 인류와 지구는 '우리'이다. 인류와 지구는 한 배를 탔다." 이런 수사적인 표현은 자연과 문명을 새롭게 고찰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비유가 말장난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포장지보다 알맹이일 겁니다. 하지만 포장지는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포장지는 알맹이를 위한 매개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유를 버리지 못합니다.
"35억 년 전부터, 생명 진화 역사는 장대한 경로를 걸어왔다." 이 전형적인 문구는 진화 역사를 예찬합니다. 자연 다큐멘터리들은 이런 문구들을 읊조리곤 합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이상한 표현입니다. 진화 역사에게 두 다리가 있나요? 역사에게는 다리가 없습니다. 수많은 동물들에게는 네 다리들이 있으나, 진화 역사에게는 두 다리가 없습니다. 역사에게는 두 다리가 없으나, 이 전형적인 문구는 진화 역사가 걷는다고 표현합니다. 게다가 왜 진화 역사가 걸어야 하나요? 캄브리아기 대폭발처럼, 바다에서 생명 현상이 비롯했기 때문에, 진화 역사는 걷기보다 헤엄쳐야 합니다. 헤엄친다는 표현은 진화 역사에 훨씬 부합합니다.
[이건 시기상조입니다. 지구와 인류는 운명입니다. 인류는 지구를 넘기보다 사회를 선택해야 합니다.]
"생명 진화 역사는 장대한 경로를 걸어왔다." 이 문구는 수사적입니다. 이 문구는 역사가 생명체, 동물이라고 간주합니다. 특히, 이 동물은 수중 동물보다 육상 동물입니다. 우리 인간이 생명체, 육상 동물이기 때문에, 자연 다큐멘터리들은 진화 역사를 육상 동물에 비유합니다. 자연 다큐멘터리들은 진화 역사가 아주 오래 되었다고 알맹이를 직접 말할 수 있으나, 이런 알맹이는 시시하고 밋밋합니다. 종종 알맹이보다 포장지는 낫습니다. 자연 다큐멘터리가 알맹이에 포장지를 씌우고 수사적인 표현을 동원할 때, 사람들은 생명 진화 역사를 훨씬 감동적으로 바라볼 겁니다. 이 게시글에서 자기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알맹이를 직접 말할 수 있으나, 많은 사람들은 포장지를 두르기 원하고 이런 포장지를 문학성이라고 부릅니다. 아무리 이 게시글이 말장난이라고 해도, 말장난에는 문학성이 있습니다. 인류에게 지구가 연장된 육체이기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 사람들은 지구 환경이 소중하다고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이런 사고 방식은 장엄하고 감동적이나, 진정한 유물론 관점은 오직 이것에만 만족하지 않을 겁니다. 인류가 지구를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류 문명에는 계급 구조가 있고, 지배 계급은 피지배 계급을 수탈합니다. 21세기 초반 인류 문명에서 가장 지배적인 계급은 거대 자본가 계급입니다.
거대 자본가 계급은 지구 환경에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흔한 상식처럼, 가난한 인류 절반보다 상위 소수 자본가들은 엄청난 온실 가스들을 뿜습니다. 환경 전문가들은 너무 많은 무역량들이 자연 생태계들을 교란한다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거대 자본가 계급이 지배 계급이기 때문에, 이윤을 지속적으로 축적하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무역량들을 줄이지 않습니다. 이건 엄청난 생태 재앙이 될지 모릅니다. 최근에 코로나 19 사태가 보여주는 것처럼, 대대적인 재앙 속에서 피지배 계급은 사회적인 고통을 감당해야 합니다. 국가 정부는 자본가 계급을 편들고 사회적인 고통을 피지배 계급에게 떠넘깁니다.
아무리 유치원들이 문들을 줄줄이 닫는다고 해도, 국가 정부는 돌봄 노동 위기를 입도 뻥긋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악랄한 착취 경제입니다. 어쩌면 코로나 19 사태는 예고편일지 모릅니다. 만약 또 다른 생태 재앙이 터진다면, 돌봄 노동들은 훨씬 심각한 문제에 부딪힐지 모릅니다. 자본주의는 피지배 계급에게 극심한 고통들을 떠넘길 겁니다. 생태 재앙 속에서 시장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피지배 계급을 탄압하고 억압할 겁니다. 우리는 코로나 19 사태가 예고편이라고 경계할 수 있습니다. 예고편으로서 코로나 19 사태는 앞으로 훨씬 무서운 재앙이 다가온다고 경고하는지 모릅니다.
또 다른 생태 재앙이 터지기 전에, 만약 우리가 자본주의를 없애지 않는다면, 예고편은 훨씬 무서운 본편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생태학 SF 덕후 역시 자본주의에 찬성하지 못합니다. 유물론 관점, 전체론 관점, 육체의 정치학, 또 다른 육체로서 자연, 어머니 자연 개념에서 언제나 생태학 SF 덕후들은 자본주의에 반대해야 합니다. 만약 생태학 SF 덕후가 자본주의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이 덕후들은 진정한 덕질이 되지 못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