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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기독교의 본질>과 소외, 거대 괴수 본문

감상, 분류, 규정/생태 사회주의, 에코 페미니즘

<기독교의 본질>과 소외, 거대 괴수

OneTiger 2019. 12. 4. 19:58

[누군가는 공룡이 되기 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인가요? 왜 인간이 공룡을 동경하나요?]



"공룡 이외에 무엇이 되고 싶은가?" 이렇게 소년은 생각합니다. 소년은 공룡이 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상한 여러 사건들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소년은 공룡이 되기 원하고, 그래서 이상한 사건들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소년이 공룡을 동경하기 때문에, 이상한 사건들은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건 그저 사변 소설에 불과합니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단편 사변 소설을 썼고, 단편 소설 속에서 소년은 공룡을 동경합니다. 소년이 공룡을 동경하기 때문에, '동경'은 이상한 사건들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사변 소설과 달리, 현실 속에서 '동경'은 이상한 사건들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사변 소설 속에서 소년에게 공룡은 우상입니다. 소년이 동경하기 때문에, 공룡은 우상이 됩니다. 문제는 공룡이 비일상적인 우상이라는 사실입니다. 현실 속에 살아있는 공룡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 살아있는 공룡이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은 공룡이 되지 못합니다. 만약 인간이 공룡이 되기 원한다면, 인간은 증강 현실 장치를 이용하거나 고생물학 시뮬레이션 게임을 플레이해야 할 겁니다. <사우리안>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공룡을 생생하게 조종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공룡을 동경한다고 해도, 이런 방법들 이외에 인간은 공룡이 되지 못합니다.



어쩌면 공룡이 비일상적인 우상이기 때문에, 소년은 공룡을 동경하는지 모릅니다. "나는 캐롤린 머천트 같은 환경학 지식인이 될 거야!" 이렇게 어떤 소녀는 결심할지 모릅니다. 소년보다 소녀는 훨씬 현실적입니다. 캐롤린 머천트는 인간입니다. 소녀는 인간입니다. 만약 소녀가 환경 사회학을 열심히 공부한다면, 소녀는 정말 캐롤린 머천트 같은 지식인이 될지 모릅니다. 학계가 여자 지식인을 무시하기 때문에, 가부장적인 사회가 여자 지식인을 개무시하기 때문에, 소녀에게는 많은 어려움들이 있겠으나, 적어도 공룡보다 캐롤린 머천트는 훨씬 현실적인 우상입니다. 훌륭한 여자 지식인은 사변이 아닙니다.


사변 소설 속에서 소년은 공룡이 되기 원하고, 이건 이상한 사건들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소년이 공룡을 동경한다고 해도, 이건 이상한 사건들을 일으키지 않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소년이 그저 철부지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인간은 공룡이 되지 못합니다. 인간이 공룡이 되지 못함에도, 소년은 공룡이 되기 원합니다. 인간보다 공룡이 훨씬 대단하기 때문에, 이것 때문에, 소년은 공룡이 되기 원할 겁니다. 현실적인 우상 캐롤린 머천트와 달리, 스테고사우루스는 비일상적인 우상이나, 공룡이 비일상적이기 때문에, 소년은 공룡을 동경할 겁니다. 소년은 공룡에게 엄청난 가치를 부여합니다.



문제는 그 자체로서 공룡이 우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공룡은 그저 커다란 중생대 야수에 불과합니다. 소년은 공룡을 동경하나, 다른 많은 사람들은 공룡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겁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공룡은 그저 멸종한 커다란 야수에 불과합니다. "스테고사우루스? 커다란 골판들과 꼬리 가시들? 그래, 스테고사우루스는 독특해. 그래서 뭐?" 사람들이 공룡을 동경하지 않는다고 해도, 인생에는 아무 차질이 없습니다. 소년은 공룡이 되기 원하나, 오직 소년에게만 공룡은 가치가 있습니다. 소년은 공룡에게 가치를 부여합니다. 무엇보다 소년은 공룡에게 '후천적으로' 가치를 부여합니다.


소년은 공룡이 되기 갈망합니다. 소년은 이른바 20세기 문명에 속합니다. 중세 유럽 소년은 공룡이 되기 원하지 못합니다. 중세 유럽 문명이 고생물학을 연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세 유럽 소년이 공룡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중세 유럽 소년은 공룡에게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고, 중세 유럽 소년은 공룡이 되기 원하지 못합니다. 분명히 스테고사우루스는 독특합니다. 커다란 골판들과 꼬리 가시들을 보세요. 대형 육상 동물들 중에서 스테고사우루스보다 무엇이 독특한가요? 하지만 소년이 스테고사우루스를 동경한다고 해도, 중세 유럽 소년이 고생물학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이건 '후천적인' 동경입니다.



어쩌면 인간에게는 우상이 반드시 필요한지 모릅니다. 생물종 호모 사피엔스에게 신, 초월적인 것, 영성, 우상은 반드시 필요한지 모릅니다. 영성에서 인간은 절대 벗어나지 못할지 모릅니다. 언젠가 인류가 유년기를 끝내고 훨씬 높은 차원을 향해 진화할 때, 인간은 영성을 버릴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은 영성을 다르게 투사할 수 있습니다. 스테고사우루스가 '후천적인 가치'가 되는 것처럼, 스테고사우루스가 원초적인 가치가 아닌 것처럼, 인간은 영성을 다르게 투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영성을 다르게 투사할 수 있다면, 소년은 공룡보다 다른 것들을 갈망할 수 있을 겁니다. 소년은 고생물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소년은 고생물학자보다 공룡이 되기 원할지 모르나, 왜 소년이 공룡이 되기 원하나요? 공룡이 거대하고 파괴적이기 때문에? 만약 거대하고 파괴적인 측면이 주된 목적이라면, 소년은 군대에 들어가고 MBT 조종수가 되거나 중장비 면허증을 따고 불도저 운전 기사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년이 전차를 조종해야 하나요? 소년은 왜 자신이 공룡이 되기 원하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소년은 공룡을 동경하나, 이런 동경에는 '배후'가 있을 겁니다. 특정한 원인 때문에, 소년은 공룡을 동경할 겁니다. 만약 소년이 거대하고 원시적이고 신비로운 자연 생태계를 동경한다면, 소년은 스테고사우루스가 되기보다 고생물학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소년은 생명체로서 거대하고 파괴적인 측면을 원할지 모릅니다. MBT 조종수는 이것을 충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소년은 MBT 조종수보다 공룡이 되기 원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스테고사우루스를 비롯해 생명체가 파괴적인 측면으로 이어져야 하나요? 왜 생명 현상이 감동적인가요? 생명 현상에게 육체, 신진 대사, 번성, 진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과 파괴적인 측면 사이에는 커다란 거리가 있습니다. 소년이 거대하고 살아있는 측면을 원하나요? 이미 지구는 아주 웅장한 생체 우주선입니다. 만약 소년이 거대한 생명 현상을 원한다면, 소년은 행성 생태학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소년은 영성을 다르게 투사할 수 있습니다.


왜 소년이 공룡을 동경하든, 이런 동경에는 '배후'가 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공룡 변신보다 '배후'입니다. 애니메이션 <우주용사 다이노서>와 달리, 소년에게 공룡 변신 장치가 없다고 해도, 소년은 공룡 변신보다 '배후'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소년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왜 내가 공룡이 되기 원하는가? 어떻게 이런 소망, 욕구, 동경이 나타났는가? 현실 속에서 인간이 스테고사우루스가 되지 못함에도, 왜 내가 이것을 원하는가? 하늘에서 이런 동경이 뚝 떨어졌는가? 만약 어떤 배후에서 이런 동경이 파생했다면, 배후가 무엇인가?" 소년은 '배후'를 의심하고 배후를 향해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공룡 변신보다 배후는 중요합니다.



비단 공룡 변신만 아니라 많은 상황들에서 '배후'는 중요합니다. 하늘에서 뭔가가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뭔가가 불쑥 솟거나, 허공에서 뭔가가 번쩍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 근대 서구 문학들, 정전(正傳)들은 인간의 본질을 물으나, 중세 서구 문학들은 인간의 본질을 묻지 않았습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음에도, 왜 인간이 신을 의심하고 본질을 물어야 하나요? 하지만 19세기 서구(잉글랜드)에서 종교가 힘을 잃기 시작했고 계급 투쟁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보수 우파들은 당파성을 억눌러야 했습니다. 그래서 근대 정전들은 계급과 당파성보다 인간의 본질을 묻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본질 배후에는 보수 우파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이른바 정전들은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보수 우파가 당파성을 지우기 원했기 때문에, 문학 평론가라는 작자들은 정전들을 지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중립은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중립을 자처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전들을 읽고 인간의 본질을 운운합니다. 수두룩한 사람들은 그들이 당파성보다 중립을 추구한다고 말하나, 이런 중립들은 정전들을 읽고 인간의 본질을 운운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 '배후'에는 보수 우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중립들은 보수 우파를 향해 수렴합니다. 만약 중립이 인간의 본질을 운운한다면, 우리는 중립이 그저 우파 좀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야 할 겁니다.



'배후'는 어렵지 않은 개념입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자연 생태계를 보여줍니다. 어떤 게임은 샌드 박스(자연 생태계 조성)에 가깝고, 어떤 게임은 오픈 월드(자연 생태계 탐사)에 가까우나,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자연 생태계를 보여줍니다. 생태계 게임 <쉘터 2>는 자연 환경을 정말 웅장하고 감동적으로 표현합니다. 게임 주인공이 엄마 스라소니이기 때문에, 엄마가 아기들을 먹여야 하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여자와 자연이 비슷하게 착취를 당하기 때문에, <쉘터 2>는 훨씬 감동적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쉘터 2>가 자연 환경을 웅장하고 생태적으로 표현한다고 해도, 이건 기술적인 자연입니다. 현실 속에 자연 생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기술적인 자연은 파생합니다. 기술적인 자연에게 현실 자연 환경은 '배후'입니다.


'배후' 문제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배후' 문제가 중요하다고 해도, 레이 브래드버리 단편 소설이 사변 장르(Speculative Fiction)이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소년은 배후를 묻기보다 공룡을 동경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현실이 사변 장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현실 속에서 인간이 비일상적인 우상을 동경한다고 해도, 사변 소설 주인공과 달리, 인간은 비일상적인 우상이 되지 못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꼬꼬마 소녀입니다. 아랫집 수진은 모스라가 엄청나게 감동적이라고 느낍니다. 사변 소설 속에서 소년이 공룡을 동경하는 것처럼, 꼬꼬마 소녀 수진은 모스라를 동경합니다. 소년이 공룡이 되기 원하는 것처럼, 꼬꼬마 수진은 모스라가 되기 원합니다. 하지만 수진은 사변 소설 주인공이 아닙니다. 수진은 이상한 사건들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나는 공룡이 되기 원해!" 이렇게 소년이 생각하기 때문에, 사변 소설 속에서 소년은 비일상적인 사건들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꼬꼬마 소녀 수진은 사변 소설 주인공이 아닙니다. "나는 모스라가 되기 원해!" 이렇게 수진이 생각한다고 해도, 수진은 비일상적인 사건들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수진이 모스라가 되지 못한다고 타이릅니다. 꼬꼬마 수진은 실망합니다. 인간은 모스라가 되지 못합니다. 수진이 죽었다 깨어난다고 해도, 수진은 엄마 나방 괴수가 절대 되지 못합니다. 꼬꼬마 수진은 엉엉 웁니다. 수진은 모스라가 되기 원하나, 이건 불가능한 소원이고, 수진은 엉엉 웁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뒷동네 말자 할머니가 수진을 위로할 수 있나요?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하와 <기독교의 본질>과 유물론을 설명합니다.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다른 많은 생명체들처럼, 육체적인 존재로서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식량을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식량은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연 환경을 가공해야 합니다. 인간은 고구마를 캐고, 버섯을 줍고, 복숭아를 따고, 물고기를 낚아야 합니다. 자연 환경 없이, 인간은 절대 먹고 살지 못합니다. 게다가 인간은 후손을 낳고, 먹이고, 길러야 합니다. 하늘에서 아기는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장면에는 '배후'가 있습니다. 현실 속의 자연 생태계(배후)에서 기술적인 자연은 파생합니다.]



육체적인 존재로서 인간은 후손을 낳고, 먹이고, 길러야 합니다. 자연 환경, 재생산은 '육체적인 측면'에 속합니다. 인간이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육체가 있기 때문에, 육체에서 인간이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 환경을 가공해야 하고, 인간은 후손을 길러야 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육체적인 측면'에 속합니다. 인간이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만약 누군가가 육체적인 측면을 차지한다면, 이 사람은 권력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권력자는 자연 환경을 차지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은 권력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권력자는 육아 노동에 댓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인류 사회에게 재생산이 필수적임에도, 이것을 위해 여자가 월경하고, 여자에게 젖꼭지가 있음에도, 권력자는 댓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만약 꼬꼬마 수진이 언니가 된다면, 성숙한 수진은 월경할 겁니다. 만약 성숙한 수진이 아기를 낳는다면, 수진은 젖을 먹일 수 있을 겁니다. 여자에게서 젖가슴은 가장 늦게 성숙합니다. 아무리 여자가 성숙하다고 해도, 여자가 아기를 낳은 이후, 마침내 젖가슴은 특정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렇게 여자의 몸이 가치를 만듬에도, 권력자는 이것을 무시하고 차별합니다. 사람들은 여자의 몸이 가치를 만든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여자의 몸을 차별합니다.



권력자가 여자의 육체를 차별하는 것처럼, 권력자는 육아 노동을 차별합니다. 육아 노동 없이, 인류 사회가 이어지지 못함에도, 권력자는 댓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육체로서 여자가 아기를 낳고 아기를 먹이기 때문에, 당연히 여자는 아기를 돌봐야 합니다. 당연히 여자는 육아 노동자가 되어야 하나, 육아 노동은 댓가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이건 당연한 현상입니다. 이건 자연의 섭리입니다. 권력자는 자연의 섭리를 외치고 육아 노동에 댓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이건 착.취.입니다. 권력자는 육아 노동을 착취하고, 여자는 보조적인 존재가 됩니다. 이렇게 누군가가 '육체적인 측면'을 차지하기 때문에, 착취와 억압은 나타납니다.


종종 사람들은 여자(어머니)와 자연을 연결합니다. 여기에서 유사성은 육체적인 측면입니다. 자연은 생명체를 낳고 생명체를 먹입니다. 여자(어머니)는 생명체를 낳고 생명체를 먹입니다. 꼬꼬마 수진 역시 성숙하고 생명체를 낳고 먹일 수 있습니다. 먹고 살고 번성하기 위해 육체적인 측면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권력자는 육체적인 측면을 차지합니다. 성숙한 수진이 월경하거나 아기에게 젖을 먹인다고 해도, 권력자는 댓가를 지불하지 않을 겁니다. 수진과 달리, 철수는 남자이나, 만약 하루 종일 철수가 아기를 힘들게 돌본다고 해도, 권력자는 댓가를 절대 지불하지 않을 겁니다. 권력자는 육체적인 측면을 차지/착취해야 합니다.



"아니, 왜 당신이 육체적인 측면을 차지합니까? 왜 우리 모두가 육체적인 측면, 자연 환경, 재생산 노동을 공유하지 못합니까?"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물을지 모릅니다. 여기에 대답하기 위해 권력자는 자신에게 신성을 부여합니다. 권력자는 신이 자신을 점지했다고 말합니다. 신이 권력자를 점지했기 때문에, 권력자는 자신이 자연 환경을 차지하고 재생산 과정을 착취한다고 말합니다. 권력자는 신을 만듭니다. 자연 환경을 차지하고 재생산 과정을 착취하기 위해 권력자는 신을 만듭니다. 권력자는 신을 대충 만들지 않습니다. 만약 신이 허접하다면, 사람들은 신성을 의심할 겁니다.


만약 사람들이 신성을 의심한다면, 권력자는 자신에게 명분을 부여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권력자는 위대한 신을 만들어야 합니다. 신은 아주 위대합니다. 신은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위대합니다. 신이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위대하기 때문에, 인간은 신을 숭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을 닮기 원합니다. 하지만 신이 너무 위대하기 때문에, 신이 비일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신을 닮지 못하고 신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슬퍼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인간은 신 대신 권력자를 숭배할 수 있습니다. 신이 권력자를 점지했기 때문에, 인간은 위대한 권력자를 숭배할 수 있습니다.



권력자가 재생산 노동을 착취한다고 해도, 이건 신의 뜻입니다. 권력자가 여자들을 차별한다고 해도, 여자들은 권력자를 숭배해야 합니다. 이건 그저 고대 신화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에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재생산 노동을 착취한다고 해도, 여자들은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너무 너무 좋아합니다. 자본주의는 너무 너무 신성합니다. 자본주의는 절대적으로 신성합니다. 임금 노동 제도는 '임금 노예 제도'이나, 여자들은 노예가 되기 원합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가 돌봄 노동을 개무시한다고 해도, 여자들은 '노예 근성'을 발휘하고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떠받들기 원합니다. 돌봄 노동 사회화는 그저 악랄한 빨갱이 망상에 불과합니다.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하와 <기독교의 본질>이 유물론을 정리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자 할머니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유물론을 계승하고 역사 유물 이론을 만듭니다. 물론 역사 유물 이론은 재생산 과정을 빼먹었습니다. 재생산 과정이 필수적이고 원초적임에도, 역사 유물 이론은 재생산 과정을 빼먹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그저 19세기 서구 백인 놈팽이에 불과했습니다. 서구 놈팽이로서 카를 마르크스는 재생산 과정에 관심을 별로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훨씬 나으나, 엥겔스 역시 그저 서구 놈팽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역사 유물 이론은 유용한 도구입니다.



역사 유물 이론에는 커다란 한계들이 있으나, 우리는 역사 유물 이론을 개량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유물론을 설명하나, 꼬꼬마 수진은 왜 말자 할머니가 유물론을 강조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육체적인 측면'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육체적인 측면에서 신(정신적인 측면)은 파생합니다. 현실 속에서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신을 만듭니다. 인간이 신을 만듬에도, 인간은 신을 숭배합니다. 신이 너무 위대하기 때문에, 인간은 신을 닮기 원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것을 숭배합니다. 인간은 자신보다 자신이 만든 것이 위대하다고 느낍니다. 이건 너무 심각한 착각입니다.


신성이 정신적인 측면이고, 육체적인 측면에서 정신적인 측면이 파생함에도, 육체적인 측면이 훨씬 원초적임에도, 인간은 육체적인 측면보다 정신적인 측면을 중시합니다. 권력자가 신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권력자가 자연 환경을 차지한다고 착각합니다. 가부장 문화가 성실한 자본가 계급을 미화하기 때문에, 여자들은 노예 근성을 열심히 발휘합니다.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하는 이런 현상을 '소외'라고 부릅니다. '소외'는 심각한 착각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측면, 신성, 미화보다 육체적인 측면, 원초적인 측면, 자연, 재생산입니다. 꼬꼬마 수진은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꼬꼬마 수진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육체적이고 원초적인 측면'과 '모스라'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나요?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모스라가 수진을 소외시킨다."고 말합니다. 수진이 모스라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꼬꼬마 수진은 엉엉 웁니다. 이건 '소외'입니다.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하는 꼬꼬마 수진이 소외를 당한다고 지적할 겁니다. 현실 속에서 모스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스라는 그저 사이언스 판타지 속의 거대 괴수에 불과합니다. 모스라가 그저 사이언스 판타지에 불과함에도, 왜 수진이 엉엉 우나요? 사이언스 판타지, 모스라는 육체적이고 원초적인 측면이 아닙니다. 사이언스 판타지, 모스라는 후천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입니다.


현실 속에 모스라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어떻게 사람들이 모스라를 이야기할 수 있나요? 영화 <고지라: 괴수왕> 홍보 영상은 모스라가 어머니 자연, 자연의 수호자라고 말합니다. 어머니 자연은 상징입니다. 현실 속에 모스라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현실 속에서 어머니 자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 어머니 자연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어떻게 사람들이 어머니 자연을 이야기할 수 있나요? 육체적인 측면 때문입니다. 어머니 자연은 대지모신, 신성입니다. 모스라 역시 자연의 여신, 신성입니다. 하지만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하는 육체적인 측면에서 신성, 정신적인 측면이 파생한다고 지적합니다.



육체적인 측면에서 정신적인 측면이 파생하는 것처럼, 하늘에서 뭔가는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버섯이 떨어지지 않고, 하늘에서 아기가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하늘에서 뭔가는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현상, 사물, 존재, 상황에는 '배후'가 있고, 배후에서 현상, 사물, 존재, 상황은 비롯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사고 방식을 거부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배후'를 파악하기 시작한다면, 사람들은 신성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테고, 가부장 문화는 자신을 미화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신성이 사라진다면, "댓가 없이, 여자는 아기를 반드시 돌봐야 해!" 이렇게 가부장 문화는 주장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가부장 문화는 하늘에서 뭔가가 뚝 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믿고 하늘에서 뭔가가 뚝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부유하고 자유로운 미국은 뚝 떨어졌습니다. 악랄한 독재 국가 북한은 뚝 떨어졌습니다.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성 폭행 문화는 뚝 떨어졌습니다. 조신하고 수동적인 여자는 뚝 떨어졌습니다. 열등하고 무식한 흑인은 뚝 떨어졌습니다. 고상하고 세련된 백인은 뚝 떨어졌습니다.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은 뚝 떨어졌습니다. 고결하고 우월한 유럽 문화는 뚝 떨어졌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은 뚝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존나게 부당한 거.짓.말입니다. 여기에는 '배후'가 있습니다.



<쉘터 2>에 '배후'가 있는 것처럼, 어머니 자연에게도 '배후'가 있습니다. 육체적인 측면, 자연 환경, 재생산 노동은 '배후'입니다. 그 자체로서 어머니 자연은 그저 상징에 불과합니다. 육체적인 측면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에, 어머니 자연은 얼마든지 바뀔지 모릅니다. 가부장 문화는 어머니 자연을 왜곡하고 댓가 없이 여자가 육아를 반드시 맡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 자연은 여자의 육체를 왜곡하기 위한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어머니 자연보다 어머니 자연 '배후'입니다. 중요한 것은 고작 어머니 자연 따위보다 자연 생태계와 재생산 과정입니다. 중세 유럽 소년이 스테고사우루스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자연 생태계와 재생산 과정 없이, 우리는 어머니 자연을 말하지 못합니다.


모스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시리즈들에서 엄마 괴수 모스라는 알을 낳습니다. 모스라는 자연 환경을 보호합니다. 모스라에게는 자연 생태계와 재생산 과정이 있습니다. 자연 생태계와 재생산 과정을 과장하기 위해 사람들은 모스라를 말합니다. 그 자체로서 모스라는 그저 상징에 불과합니다. 모스라 '배후'는 자연 생태계와 재생산 과정입니다. 만약 꼬꼬마 수진이 오직 모스라 그 자체만 바라본다면, 꼬꼬마 수진은 배후, 자연 생태계, 재생산 과정을 간과하고 외면할 겁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수진이 모스라보다 모스라 배후(재생산 과정자연 생태계)를 중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배후'에서 모스라가 파생하기 때문입니다. 꼬꼬마 수진은 모스라보다 모스라 '배후'에 영성을 투사할 수 있습니다.



[이런 피규어처럼, 인간은 모스라를 만듭니다. 수진은 모스라보다 모스라 '배후'를 주목해야 할 겁니다.]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하는 모스라가 신성, 정신적인 측면이고 '배후'가 훨씬 근본적이고 원초적이라고 지적할 겁니다. 문제는 '배후'가 착취를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돌봄 노동을 착취하고 여자의 육체를 왜곡합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자연 환경을 착취하고 생물 다양성을 파괴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여자의 육체를 왜곡하고 생물 다양성을 파괴함에도, 여자들은 자본주의를 떠받듭니다. 이것 역시 '소외'입니다. 만약 소외에서 인간이 벗어나기 원한다면, 인간은 '배후'를 파악해야 할 겁니다. 만약 소외에서 수진이 벗어나기 원한다면, 수진은 배후, 육체적인 측면을 파악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수진은 자연 생태계를 연구하고 돌봄 노동 사회화를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꼬꼬마 소녀 수진은 "나는 캐롤린 머천트 같은 환경학 지식인이 될 거야!"라고 결심합니다. 여전히 꼬꼬마 수진은 모스라를 동경하나, 모스라보다 모스라 '배후'가 훨씬 중요하기 때문에, 꼬꼬마 수진은 육체적인 측면, 자연 환경, 재생산 과정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수진은 환경학 지식인이 되기 원하고 돌봄 노동 사회화를 주장합니다. 어쩌면 언젠가 수진은 모스라를 동경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꼬꼬마 수진이 모스라에게 '후천적으로'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모스라가 정신적인 측면이기 때문에, 정신적이고 후천적인 측면은 바뀔지 모릅니다.



하지만 육체적인 측면은 바뀌지 않습니다. 수진이 모스라를 동경하든, 동경하지 않든, 자연 환경 속에서 인간은 식량을 얻어야 하고, 인간은 후손을 돌봐야 합니다. 이런 육체적인 측면은 바뀌지 않습니다. 나중에 수진이 모스라를 동경하지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자연 생태계 연구와 돌봄 노동 사회화는 중요하고 근본적이고 원초적입니다. 만약 미래에 과학 기술이 아주 발달한다면, 육체적인 측면은 상당히 바뀔지 모릅니다. 여자에게 임신이 너무 커다란 부담이기 때문에, 임신은 영원히 사라져야 할지 모릅니다. 과학 기술은 성별을 없애고 인공 자궁을 만들어야 할지 모릅니다. 여자와 남자 구분은 영원히 사라져야 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인류는 정말 신이 되고, 정신적인 측면에서 육체적인 측면은 파생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직 과학 기술은 육체적인 측면을 크게 바꾸지 못합니다. 아직 인류는 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머니 자연, 모스라, 신성 그 자체보다 자연 생태계 연구와 돌봄 노동 사회화는 훨씬 중요하고 근본적이고 원초적입니다. 심지어 수진은 자신의 젖가슴을 바라보고 어머니 자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머니 자연이 풍성한 먹거리를 상징한다고 해도, 이건 그저 상징에 불과합니다. 수진은 자신의 육체를 이용하고 정말 아기를 위한 식량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수진이 아기를 갖지 않는다고 해도, 수진에게는 잠재력, 가능성이 있고, 수진은 여기에 감탄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 자연보다 수진의 육체는 원초적이고 근본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징으로서 어머니 자연보다 육체적인 측면으로서 수진의 젖가슴입니다.



만약 가부장 폭력이 수진의 육체, 월경, 임신, 수유, 육아를 왜곡한다면, 아무리 수진이 골백번 모스라를 좋아한다고 해도, 소외에서 수진은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수진은 상징보다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고 가부장 폭력을 타파해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가부장적이기 때문에, 수진은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소외는 다소 어려운 개념이고, 꼬꼬마 수진은 유물론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나, 그렇다고 해도 수진은 이것을 인식합니다. 이제 소외에서 꼬꼬마 수진은 벗어나기 시작할 겁니다. 수진이 모스라 '배후'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 스크린샷 <Movie Universe Pack Gallery: Stegosaurus> 출처: T-Joe,

https://www.deviantart.com/t-joe/art/Movie-Universe-Pack-Gallery-Stegosaurus-34001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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