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가부장적인 과학적 방법론과 생태학 본문
존 스칼지가 쓴 <유령 여단>에는 유전자 조작 병사들이 있습니다. 유전자 조작 병사들은 꽤나 특수한 병과입니다. 이름처럼 그들은 특수 부대입니다. 그래서 유령 여단 병사들은 독특하게 이름들을 짓습니다. 그들은 과학자들의 이름들을 땁니다. 주연 등장인물 제인 세이건은 칼 세이건에게서 이름을 땄습니다. 제인 세이건 이외에 수많은 유령 여단 병사들은 자연 과학자들의 이름들을 따릅니다. 왜 그들이 자연 과학자들의 이름들을 따를까요? 왜 이렇게 존 스칼지가 설정했을까요?
이건 자연 과학과 사이언스 픽션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는 뜻인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자연 과학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자연 과학이 패러다임을 바꿀 때, 사이언스 픽션 역시 패러다임을 바꿉니다. 천문학자들이 금성을 연구하고 새로운 사실들을 발표할 때마다, SF 소설들 역시 새로운 금성을 묘사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근대적인 진보에서 비롯했고, 자연 과학은 대표적인 진보입니다. 그래서 <유령 여단> 역시 자연 과학자들의 이름들을 언급했을 겁니다. 하지만 자연 과학자들은 '그냥' 자연 과학자들이 아닙니다. 제인 세이건은 여자이나, 칼 세이건은 남자입니다.
<과학자가 들려주는 과학 이야기>는 아이들을 위한 자연 과학 서적입니다. <과학자가 들려주는 과학 이야기>는 유명한 자연 과학자들을 이용해 자연 과학을 쉽고 흥미롭게 설명합니다. 과학자와 아이들이 함께 대화하기 때문에, 독자는 자연 과학 지식을 좀 더 수월하게 얻을 수 있어요. 일방적인 설명은 딱딱하고 지루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묻고, 과학자가 대답하고, 다시 아이들이 고민하고, 과학자가 설명하는 동안, 독자는 대화 속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일방적인 설명보다 여러 사람들의 대화는 훨씬 생생하고 역동적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제나 사상이나 지식을 논의하기 위해 많은 작가들은 일방적인 설명이 아니라 대화 장면들을 집어넣기 원합니다.
물론 일방적인 설명보다 이런 대화 장면은 훨씬 많은 분량을 요구합니다. 대화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보여줘야 하고, 배경 무대를 설정해야 하고, 특정한 사건을 전개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있을 때, 대화는 훨씬 생생해지고, 독자는 대화 속에 빠질 수 있습니다. 어떤 배경 무대나 사건 없이, 갑자기 등장인물들이 대화한다면, 그건 당황스럽거나 밋밋하거나 어색할 겁니다. 특히, 대화 장면이 소설과 비슷하다면, 소설 형식을 갖추기 위해 작가는 훨씬 공을 들여야 할 겁니다. 대화 장면에 이런 단점들이 있다고 해도, 일방적인 설명보다 대화는 생생하고, <과학자가 들려주는 과학 이야기> 역시 대화 장면을 활용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책은 자연 과학자들을 내세우나, 이런 대화 장면을 크게 활용하지 못합니다.
<과학자가 들려주는 과학 이야기>는 모두 130권이고 수많은 과학자들을 보여줍니다. 쥘 베른처럼, 어떤 사람은 과학자가 아닙니다. 쥘 베른은 자연 과학자보다 SF 작가입니다. 하지만 SF 소설이 자연 과학을 활용하기 때문에, <과학자가 들려주는 과학 이야기>는 쥘 베른을 인용했을 겁니다. 이런 현상은 자연 과학이 그저 자연 과학에 불과하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자연 과학은 다른 분야들에 영향을 미치고, 다른 분야들은 다시 자연 과학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자연 과학 서적은 SF 작가 쥘 베른을 인용합니다. 자연 과학을 이야기하기 위해 오직 자연 과학 속에만 우리가 머무를 이유는 없습니다.
자연 과학을 이야기하기 위해 우리가 오직 자연 과학만 늘어놓을 이유는 없습니다. 자연 과학과 SF 소설과 다른 것들은 함께 뒤섞일 수 있어요. 사실 우리가 정말 자연 과학을 제대로 이야기하고 싶다면, 우리는 자연 과학에서 벗어나고 어떻게 과학적 방법론이 나타는지 파악해야 할지 모릅니다. 자연 과학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자연 과학자보다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과학자가 들려주는 과학 이야기>는 대부분 과학자들을 보여줍니다. 라플라스는 천체 물리학을 설명하고, 찬드라세카르는 별을 설명하고, 멘델레예프는 주기율표를 설명합니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를 설명하고, 로렌츠는 동물 행동을 설명하고, 볼츠만은 열역학을 설명하고, 엥겔만은 광합성을 설명하고, 페르미는 핵 융합을 설명하고, 코리올리는 대기 현상을 설명하고, 베게너는 대륙 이동을 설명하고, 란트슈타이너는 혈액형을 설명하고,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을 설명하고, 치올콥스키는 우주 비행을 설명합니다. 심지어 콜럼버스는 바다를 설명합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콜럼버스는 자연 과학자가 아닙니다. 쥘 베른은 자연 과학자들에게 꽤나 많은 영향을 미쳤으나, 콜럼버스는 쥘 베른과 다릅니다. 하지만 흔히 사람들은 콜럼버스가 굉장한 탐험가라고 생각하고 과학적이고 학구적인 호기심이 탐험을 이끌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과학자가 들려주는 과학 이야기>는 콜럼버스를 인용했을 겁니다. 비단 <과학자가 들려주는 과학 이야기>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자연 과학 서적들 역시 콜럼버스가 학구적인 탐험가라고 말할 겁니다. 물론 현실 속에서 콜럼버스는 그저 식민지를 수탈하기 원했을 뿐입니다. 콜럼버스를 비롯해 수많은 유럽 백인 남자들은 식민지들을 수탈했습니다. 너무 끔찍하게. 하지만 우리는 콜럼버스가 학구적인 탐험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서구 제국주의가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인디언들을 학살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SF 소설가나 우주 비행사를 포함하는) 과학자 130명 중에서 여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마리 퀴리와 레이첼 카슨처럼 여자 과학자들은 없지 않으나, 여자 과학자들은 극소수입니다. 대부분 과학자들은 남자들입니다. <과학자가 들려주는 과학 이야기>는 남자 과학자들을 늘어놓습니다. 제인 세이건이 칼 세이건에게서 이름을 따는 것처럼, 여자 병사는 남자 과학자에게서 이름을 따야 합니다. 숱한 자연 과학자들이 남자들이기 때문에, 여자 병사들은 쉽게 여자 과학자의 이름을 따지 못할 겁니다. 만약 사람들이 (130권에 달하는) <과학자가 들려주는 과학 이야기> 목록을 바라본다면, 사람들은 오해할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오직 남자만 과학자가 될 수 있고 여자가 과학자가 되지 못한다고 오해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여자는 얼마든지 과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레이첼 카슨은 위대한 환경 운동가이고 과학자이나, 레이첼 카슨은 우연한 사례가 아닙니다. 여자들은 얼마든지 또 다른 레이첼 카슨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여자들이 사회적으로 쉽게 진출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래 전부터 자연 과학은 남자들의 영역, 가부장적인 영역이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자연 과학이 발달했을 때, 남자 지식인들은 자연 과학을 독차지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프랜시스 베이컨이 자연 과학적 방법론을 본격적으로 제시했다고 여깁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자연 과학적 방법론을 제시했을 때, 베이컨은 과학자가 자연 환경을 들쑤시고 괴롭히고 심문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남자 이단 재판관이 마녀(여자)를 들쑤시고 괴롭히고 심문하는 것처럼, 과학자는 자연을 파헤쳐야 합니다. 생태계 환경은 수동적인 것이고, 자연 과학은 공격적인 것입니다. 자연 과학이 생태계 환경을 들쑤시지 않는다면, 생태계 환경은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지 않을 겁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자연 환경을 여자에 비유하고, 남자가 여자를 들쑤시는 것처럼, 베이컨은 과학이 자연을 들쑤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머니 자연이 여자와 자연을 긍정적으로 연결하는 것과 달리, 베이컨은 여자와 자연을 부정적으로 연결했습니다. 어쩌면 이건 그저 비유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저 자연 과학자가 적극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비유하기 원했을 뿐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베이컨이 그저 비유하기 원했을 뿐이라고 해도, 왜 구태여 베이컨이 자연 환경을 수동적인 여자에 비유했나요? 계몽주의 시대가 가부장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베이컨은 과학적 방법론을 말했고, 그래서 베이컨에게 나쁜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베이컨은 성 차별을 저질렀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 이후, 서구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계속 이런 시각을 유지합니다. 자연 과학자들은 사회 구조가 문제이고 여자들이 과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에드워드 윌슨처럼, 자연 과학자들은 성 차별에 크게 일조했습니다. 여전히 많은 남자 과학자들은 이론적으로 일상적으로 여자들을 무시합니다. <과학자가 들려주는 과학 이야기>처럼, 자연 과학 서적들이 오직 득실거리는 남정네들만 늘어놓는다고 해도, 남자 과학자들은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런 상황 속에서 여자 학생들은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포기할지 모릅니다. 자연 과학 서적들이 오직 위대한 '남자' 과학자들만 늘어놓기 때문에, 여자 학생들은 주눅이 들고 자연 과학에 쉽게 도전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사회 구조와 사회 분위기는 개인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자들은 과학자가 되지 못하고, 남자 과학자들은 계속 가부장적인 시선을 유지할 겁니다. 이런 과학이 정말 과학인가요? 오직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자연 과학이 정말 자연 과학인가요? 과학자들은 과학이 회의하는 학문이라고 말하나, 얼마나 많은 남자 과학자들이 가부장적인 시선을 회의하나요?
어쩌면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적 방법론은 과학적 방법론이 아닐지 모릅니다. 이건 그저 지배적인 관념을 옹호하는 기술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윌슨이 들려주는 생물 다양성 이야기>에서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생물 다양성의 파괴는 인간에게 경고를 보내나, 지구의 운영자 인간은 무감각하다." 아, 그래요? 지구의 운영자 인간? '지구의 운영자' 인간이 무슨 인간을 가리킵니까? 굶주리는 흑인 엄마들이 지구의 운영자인가요? 보호 구역에서 성 폭행에 시달리는 인디언 소녀들이 지구의 운영자인가요?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착취를 당하는 열대 밀림 원주민들이 지구의 운영자입니까?
와, 대단합니다. 이건 대단하고 탄복할 만하고 놀라운 주장입니다. 흑인 엄마들이 지구의 운영자이기 때문에, 흑인 엄마들은 굶주립니다. 인디언 소녀들이 지구의 운영자이기 때문에, 인디언 소녀들은 성 폭행을 당합니다. 열대 원주민들이 지구의 운영자이기 때문에,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원주민들은 착취를 당해야 합니다. 이런 흑인 엄마들, 인디언 소녀들, 열대 밀림 원주민들은 정말 굉장한 '지구의 운영자'입니다.
지구의 운영자 인간이 잘못이기 때문에, 이렇게 산업 자본가 계급은 외칠 수 있겠죠. "그래, 흑인 엄마들과 인디언 소녀들과 열대 밀림 원주민들 때문에, 자연 환경은 심각하게 오염되었어! 우리에게 잘못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흑인 엄마들과 인디언 소녀들과 열대 밀림 원주민들과 똑같이 잘못했어! 문제는 자본주의가 아니야!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해도, 굶주리는 흑인 엄마들과 성 폭행을 당하는 인디언 소녀들과 착취를 당하는 열대 밀림 원주민들 역시 못되처먹은 것들이야!"
이건 헛소리입니다. 이건 망상입니다. 이건 거짓말입니다. '지구의 운영자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자본가 계급이 막대한 이득을 챙길 때, 흑인 엄마들과 인디언 소녀들과 열대 밀림 원주민들은 고통을 받습니다. 하지만 '지구의 운영자 인간' 이론은 이런 사실을 은폐하고 무조건 밑도 끝도 없이 인간에게 화살을 돌립니다. 자연 과학 서적들이 이런 헛소리와 망상과 거짓말을 떠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헛소리와 망상과 거짓말을 믿습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모든 인간이 똑같은 인간이 아님에도, 성 폭행을 당하는 인디언 소녀들은 자랑스럽고 위대한 '지구의 운영자'가 됩니다.
인디언 소녀들이 피해자임에도, 산업 자본가들처럼, 인디언 소녀들은 자랑스럽고 위대한 가해자가 됩니다. 이렇게 자연 과학 서적들은 피해자를 가해자로 몰아붙입니다. 이렇게 자연 과학 서적들은 지배적인 관념의 앞잡이가 되고 지배 권력의 나팔수가 됩니다. 물론 자연 과학자들은 정말 생물 다양성을 지키기 원할 겁니다. 그들은 절대 지배 권력의 나팔수가 되고 싶어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체계는 자연 과학자들을 세뇌시키고, 그들은 저도 모르게 지배적인 관념의 앞잡이가 됩니다. 이런 상황은 너무 서글프고 안타깝습니다.
<윌슨이 들려주는 생물 다양성 이야기>는 부유한 강대국들과 약소한 남반구 국가들을 대조합니다. 이 책은 부유한 강대국들이 가난한 남반구 국가들에 들어가고 생물 다양성을 연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남반구 국가들에 엄청난 생물 자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유한 강대국들이 가난한 남반구 국가들에 들어간다면, 그들은 남반구 국가들을 착취할 겁니다. 식민지 수탈이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윌슨이 들려주는 생물 다양성 이야기>는 식민지 수탈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 책이 식민지 수탈을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들은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가난한 열대 국가들에 들어가고 연구소들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것들이 제국주의 침략이라고 해도, <윌슨이 들려주는 생물 다양성 이야기>는 그걸 지적하지 않아요. 이렇게 <윌슨이 들려주는 생물 다양성 이야기>는 식민지 수탈을 합리화합니다. 자연 과학 서적이 식민지 수탈을 합리화한다면, 이게 정말 자연 과학이 될 수 있나요? 이건 그저 또 다른 우생학, 21세기 우생학에 불과합니다. 자연 과학 서적들은 아무렇지 않게 21세기 우생학을 떠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적 방법론은 과학적 방법론이 아닐지 모릅니다.
우리가 말하는 자연 과학은 자연 과학이 아닐지 모릅니다. 자연 과학이 가부장적인 시각을 버리고 지배 계급의 앞잡이가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자연 생태계를 제대로 관찰하고 관리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정말 자연 생태계를 제대로 바라보고 싶다면, 우리에게는 비단 생태학만 아니라 생태 사회주의와 에코 페미니즘이 필요할 겁니다. 에코 페미니즘은 어머니 자연을 이야기하고, 그래서 어머니 자연이라는 개념은 그저 단순한 비유에 불과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생태학을 비롯해 자연 과학에게 어머니 자연은 정말 필요한 밑거름인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