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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과학에서 비롯하는 영성과 상상 과학 본문

감상, 분류, 규정/생태 사회주의, 에코 페미니즘

과학에서 비롯하는 영성과 상상 과학

OneTiger 2019. 3. 15. 19:02

[모스라는 여신입니다. 하지만 이런 블록버스터 속의 거대 괴수가 영성을 말할 수 있을까요?]



영화 <고지라: 괴수왕>은 '왕'을 강조합니다. 제목부터 예고편들, 포스터들, 각종 홍보 문구들까지, <고지라: 괴수왕>은 왕을 말합니다. 하지만 종종 모스라는 왕보다 다른 위상에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어떤 동굴 벽화는 모스라와 모스라를 숭배하는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모스라를 숭배하고, 이 벽화에서 모스라는 여왕보다 여신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모나크 괴수 과학자들 역시 '신성'을 말합니다. 모나크 과학자들은 여왕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나, 전반적으로 모스라 연구 보고서는 신성에 초점에 맞춥니다.


모스라가 화려한 광선을 사방에 뿌릴 때, 사람들은 그걸 여왕의 광선이 아니라 (여)신의 광선이라고 부릅니다. 감독 마이클 도허티 역시 모스라를 여신(true goddess)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인터뷰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모스라는 종교적인 숭배 대상입니다. 사실 원작 <모스라>에서도 모스라는 여왕보다 여신에 가까웠습니다. 특히, 모스라가 방사선 오염을 막고, 열대 밀림을 지키고, 산업 자본주의 도시를 파괴하고, 두 소미인과 어울리기 때문에, 모스라는 어머니 자연과 비슷합니다. 비록 <모스라>가 전형적인 가족 영화이고 심층적인 어머니 자연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모스라는 어머니 자연이 될 수 있어요.



네 주연 괴수들, 고지라, 라돈, 킹기도라, 모스라 중에서 모스라는 판타지 출신입니다. 고지라와 라돈과 킹기도라는 사이언스 픽션을 배경에 깔았으나, 모스라는 판타지를 배경에 깔았습니다. 모스라는 마법적인 존재이고, 그래서 모스라는 신성에 잘 어울리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모스라는 여러 <고지라> 시리즈에 나왔습니다. 게다가 <고지라: 괴수왕>은 SF 영화입니다. 사이언스 픽션 속에서 판타지 출신 모스라가 신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아니, 모스라가 사이언스 픽션 배경으로 바뀐다고 해도, 모스라가 여신이 될 수 있나요? 사이언스 픽션이 신성과 종교를 말할 수 있나요?


흔히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과 종교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과학과 종교가 서로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사실 계몽주의 역사는 과학과 종교가 갈등하는 역사와 비슷합니다. 대표적으로 19세기에 종교 세력은 진화 이론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종교 세력보다 산업 자본가 계급은 훨씬 강했습니다. 산업 자본가 계급은 진화 이론을 이용해 우생학 논리를 펼칠 수 있었습니다. 진화 이론(을 빙자하는 우생학)은 종교를 이깁니다. 그렇게 근대적인 진보는 신성보다 이성을 따릅니다. 이런 갈등 때문에 과학과 종교는 적대적입니다. 여전히 리처드 도킨스 같은 과학자는 종교를 향해 격렬하게 선전 포고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상상 '과학'이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종교와 적대적인 것 같습니다.



사실 여러 SF 소설들은 종교를 비웃고 놀립니다. 기독교 <성경>은 외계인을 말하지 않으나, 숱한 SF 소설들은 외계인들을 이야기합니다. 만약 성직자가 외계인에게 설교하고 싶다면, 뭐라고 성직자가 말해야 할까요? 성직자가 외계인에게 설교할 수 있을까요? 외계인들이 지구 종교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외계인들과 지구인들 사이에는 엄청난 생물적이고 문화적인 차이점들이 있을 겁니다. 성직자가 그것들을 뛰어넘고 교리를 전달할 수 있을까요? 로렌스 왓에반스가 쓴 <Keep the Faith>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지구인 선교사는 선교 활동을 원하고, 외계인들은 선교 활동을 허락합니다. 하지만 외계인들에게는 종교가 없습니다. 왜 외계인들에게 종교가 없음에도, 그들이 선교 활동을 허락했을까요? 선교 활동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능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보는 것처럼, 외계인들은 선교 활동이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구인 선교사는 열심히 떠들고 신앙을 간증하나, 외계인들은 그게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룩한 신앙 간증은 그저 어릿광대 노릇에 불과합니다. SF 울타리 안에는 이렇게 종교를 조롱하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메리 도리아 러셀이 쓴 <참새>는 가장 대표적일 겁니다.



21세기 오늘날은 첨단 과학 시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과학 기술이 중요하다고 떠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는 쉽게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합니다. 종교 따위가 중요하나요? 인류 문명은 과학 기술을 이용해 생명체를 복제하거나, 인공 지능과 대화하거나, 우주 탐사선을 띄우거나, 보행 로봇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달빠(DARPA)는 온갖 로봇들을 만들고, 심지어 로봇들은 자연 생태계를 대신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자연 생태계가 사라진다고 해도, 인류 문명은 로봇들을 이용해 계속 살아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과학 기술이 놀랍다면, 왜 인류가 신성을 숭배해야 합니까?


인류는 종교를 버리고 과학을 추구해야 합니다. 첨단 과학 시대에서 종교는 그저 거치적거리는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종교는 힘을 잃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상상 '과학'을 강조하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이 온갖 첨단 과학 기술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 역시 종교를 밀어내는 것 같습니다. 종교는 구닥다리이고, 더 이상 종교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종교는 보수이고, 인류는 진보적인 과학을 추구해야 합니다. 전깃불이 가스등을 밀어내는 것처럼, 진화 이론이 기독교를 밀어내는 것처럼, 인류는 진보를 추구하고 보수를 밀어내야 합니다. 21세기 오늘날에서 이런 신조들은 계속 늘어납니다. 앞으로 이런 신조들은 계속 늘어날 것 같습니다.



[이런 기계 로봇들은 자연 생태계를 대신할지 모릅니다. 여기에 아무 문제가 없을까요?]



여기에는 한 가지 함정이 있습니다. 문제는 과학이 만능 황금 열쇠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과학은 인류 문명에 엄청난 빛을 주었습니다. 과학 기술들은 수많은 복지들과 혜택들로 이어졌습니다. 미래 인류 문명이 풍족하게 살아가고 싶다면, 유전 공학과 인공 지능과 우주 진출은 정말 중요할 겁니다. 인류가 첨단 과학 기술들을 버리고 중세 시대로 돌아가기 위한 이유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과학 기술은 만능 열쇠가 아닙니다. 과학 기술은 편리한 도구이나, 무소불위가 아닙니다. 과학 기술에는 많은 한계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인류가 과학을 추구한다고 해도, 과학은 모든 것을 대신하지 못할 겁니다.


첨단 과학 기술은 우주를 완전히 밝히지 못할 겁니다. 과학에게 한계들이 있음에도, 우리가 과학을 맹신한다면, 이건 과학 만능주의로 흘러갈 겁니다. 과학 만능주의는 또 다른 종교가 될 겁니다. 우리는 그저 종교라는 권좌에서 신을 내쫓았을 뿐이고 권좌 그 자체를 치우지 않았습니다. 과학 만능주의는 권좌에 앉고 또 다른 신이 됩니다. 이미 인류는 우생학이라는 종교를 창시한 적이 있습니다. 억압적인 가부장 문화 속에서 우생학은 또 다른 종교가 되었습니다. 과학이 과학 만능주의로 흘러갈 때, 과학은 종교가 됩니다. 과학 만능주의는 전통 종교를 밀어내고 새로운 종교가 됩니다. 21세기 오늘날에 이런 풍경은 낯설지 않습니다.



새로운 종교 과학 만능주의는 자신이 전지전능하다고 주장합니다. 달빠 로봇 꿀벌(DARPA Robobee)들은 이런 사례가 됩니다. 달빠는 온갖 로봇들을 개발하고, 분명히 온갖 로봇들은 훨씬 풍족한 삶을 뒷받침할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달빠가 온갖 로봇들을 개발한다고 해도, 정말 로봇들이 자연 생태계를 대신할 수 있을까요? 군집 붕괴 현상 때문에 꿀벌들이 사라진다고 해도, 과학자들은 달빠 로봇 꿀벌들이 진짜 꿀벌들을 대신할 거라고 주장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달빠 로봇 꿀벌들이 진짜 꿀벌들을 대신할 수 있나요? 누가 그걸 장담합니까? 이게 자연 생태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요?


꿀벌들은 꽃들과 공진화했습니다. 만약 꿀벌들이 사라진다면, 꽃들은 무엇이 됩니까? 꽃들은 그저 꽃가루와 꿀을 생산하는 생체 공장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꽃들은 자연 생태계에 속했고 수많은 생명체들과 상호 작용합니다. 달빠 로봇 꿀벌들이 이런 공진화와 상호 작용을 대신할 수 있나요? 이렇게 기계 로봇들이 자연 생태계를 대신할 수 있나요? 게임 <엔들리스 스페이스>에서 기계 로봇 오토마톤들은 자연 생태계를 돌봅니다. 하지만 심지어 오토마톤들조차 기계들이 자연 생태계를 완전히 대신하지 못한다고 주장할 겁니다. 만약 누군가가 기계들이 자연 생태계를 완전히 대신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사이비 종교일 겁니다.



사람들이 과학 만능주의라는 사이비 종교를 추구할 때, 사람들은 그저 수치 계산기에 불과합니다. 이런 수치 계산에는 그저 냉철한 폭력만 있습니다. 근대적인 진보가 과학을 말했을 때, 그건 가부장적인 과학이고 자본주의를 뒷받침하기 위한 과학이었습니다. 캐롤린 머천트와 마리아 미스는 프랜시스 베이컨에서 비롯하는 근대적인 자연 과학이 가부장적이라고 비판합니다. 이런 과학은 자연 생태계를 들쑤시고, 식민지 지역들을 침략하고, 제3세계 인민들을 학살하고, 여자들을 폭행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유럽 백인 남자들이 똑똑하고 잘났기 때문에 유럽이 계몽주의 시대를 열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유럽 강대국들이 식민지 지역들을 착취하지 않았다면, 가격 혁명과 세계적인 금은 유통과 자본주의 발달은 없었을 겁니다. 마리아 미스는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이런 폭력이 어머니 자연을 공격한다고 비판합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과학과 자연을 설명했을 때, 베이컨은 남자들(과학)이 마녀들(자연)을 심문하는 이미지들을 빌렸습니다. 사실 근대적인 마녀 사냥은 그저 마녀 사냥에 불과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가부장적인 폭력이었습니다. 근대적인 진보는 마녀 사냥과 다르지 않습니다. 과학이라는 폭력이 어머니 자연을 들쑤실 때, 폭력은 생명력과 번성과 치유와 영성을 짓밟습니다. 여전히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자연 과학은 생명력과 번성과 치유와 영성을 짓밟습니다.



물론 우리가 첨단 과학을 추구한다고 해도, 우리는 영성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과학 만능주의가 영성을 무시한다는 사실입니다. 과학 만능주의는 숫자 계산을 중시하고 영성이 없다고 말합니다. 치밀한 숫자 계산에는 영성이 없습니다. 숫자 계산기는 영성에 감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말 영성이 없나요? 영성이 무조건 나쁜가요? 우리가 영성을 버려야 하나요? 영성은 이 세상에 인간을 뛰어넘는 위대하고 경이로운 것들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영성은 이 세상에 인류보다 거대한 것들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보고 감동에 젖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감동할 때, 우리는 그것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사랑은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고 기쁘게 끌어안을 겁니다.


우리는 사랑에 기댈 수 있고, 사랑으로 우리는 더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영성에는 놀라운 기적이 있어요. 이건 우리가 사이비 종교를 떠받들고 신을 숭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첨단 과학에게서 영성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생명 진화 역사는 무려 35억 년입니다. 무려 35억 년. 어쩌면 35억 년보다 생명 진화 역사는 훨씬 길지 모릅니다. 진화 역사는 38억 년이나 42억 년에 닿을지 모릅니다. 지구는 45억 살이고, 42억 살은 정말 엄청난 숫자입니다. 우리가 이런 엄청난 숫자를 인식할 때, 우리는 경이에 젖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이로움 속에서 우리는 생물 다양성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건 과학이고 동시에 영성입니다.



[심지어 이런 기계 로봇들조차 기계가 자연 생태계를 완전히 대신하지 못한다고 말할 겁니다.]



반다나 시바는 어머니 자연과 주술적인 감성을 중시합니다. 레이첼 카슨은 자연적인 굴레에 치유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에드워드 윌슨은 인간이 생명애(바이오필리아)를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제인 구달은 기계적으로 동물 행동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반다나 시바와 레이첼 카슨과 에드워드 윌슨과 제인 구달은 세계적인 과학자들입니다. 마가렛 앳우드는 과학자 데이빗 스즈키를 호평하고 동시에 소설 <홍수>에서 신의 정원사들이라는 종교 집단을 묘사했습니다. 신의 정원사들은 팔리 모왓 같은 생태 연구자들을 언급하고 자연 생태계에서 영성이 우러나온다고 믿습니다.


레이첼 카슨이 <센스 오브 원더>를 썼을 때, 레이첼 카슨은 그저 숫자 계산이 자연 과학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니스트 톰슨 시튼이 늑대들을 그렸을 때, 어니스트 시튼은 자연 과학자의 시선과 함께 야생을 사랑하는 시선을 담았습니다. 분명히 인류보다 자연 생태계는 위대하고 경이롭습니다. 미래 과학 기술은 자연 생태계를 완전히 대신할지 모르나, 아무도 그걸 장담하지 못합니다. 인류는 계속 자연 생태계에 의존해야 합니다.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빠는 것처럼, 인류 문명은 어머니 자연의 품에서 떠나지 못합니다. 아기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처럼, 인류 문명은 어머니 자연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인류가 이런 영성과 사랑을 추구할 때, 삶은 풍요로워질 겁니다.



하지만 과학 만능주의는 이런 영성과 사랑을 조롱합니다. 과학 만능주의는 영성과 사랑을 모욕하고 그런 것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과학 만능주의는 오직 인간이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수치들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억압적이고 수직적인 사회 구조에서 과학 만능주의는 나타납니다. 레이첼 카슨이 자연 생태계의 신비로움을 언급했을 때, 영리 기업들은 여자가 히스테리를 부린다고 모욕했습니다.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영리 기업들은 영성과 사랑을 짓밟았습니다. 이런 풍경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여전히 세계화 자본주의 체계는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고 도처에서 영성과 사랑을 짓밟습니다.


자연 생태계 속의 위대한 감동은 냉철하고 기계적인 회계사에게 도전하지 못합니다. 냉철하고 기계적인 회계사는 모든 것을 수치 계산으로 바꿉니다. 심지어 경이로운 어머니 자연을 바라볼 때조차 인간은 기계적인 수학과 경제학과 회계학을 따져야 합니다. 과학 만능주의가 종교를 밀어내기 때문에, 사람들이 종교를 더 이상 믿지 않기 때문에, 신이 죽었기 때문에, 첨단 과학 시대에서 영성과 사랑은 하찮은 것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자연이 선사하는 경이로움 역시 하찮은 것이 됩니다. 우리는 꿀벌들에게 감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꿀벌들이 만드는 경제적인 이익에 감탄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인 이익 없이 감탄은 없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이익이 전부인가요? 수치 계산이 전부인가요? 우리가 우주 만물을 수치 계산으로 바꾸고 오직 수치 계산만을 바라봐야 할까요? 우리는 우주 만물을 수치화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주 만물을 비용 및 편익 계산으로 바꾸지 못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지구 자연 생태계조차 수치 계산으로 바꾸지 못합니다. 인간이 감동을 돈으로 사지 못한다는 어떤 광고 문구는 다소 얄팍하나, 이런 광고 문구처럼, 감동은 수치 계산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르주아 경제학은 한계 효용 법칙을 운운하고 영성과 사랑을 수치화하느라 애씁니다.


영성이 수치가 될 때, 부르주아 경제학은 영성에 가격을 매기고 판매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모든 것을 시장 경제에 끌어들이고 상품화해야 합니다. 상품에게는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가 있습니다. 교환 가치는 가격으로 이어집니다. 상품에게는 가격이 있어야 합니다. 가격 없이 상품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르주아 경제학은 모든 것에게 가격을 붙이기 원하고, 영성과 사랑은 예외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꿀벌들을 상품화해야 합니다. 거대하고 살아있는 상호 작용 속에서 꿀벌들은 경이롭게 진화했으나, 이런 '과학적인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경이로움에는 가격이 없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게 가격 없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19세기 근대적인 진보가 종교보다 과학에 손을 들어줬기 때문에, 흔히 사람들은 종교보다 과학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과학은 냉철하고 기계적인 계산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진화 이론이 약육강식, 정글의 법칙, 치열한 생존 투쟁,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이라고 생각합니다. 식민지들을 수탈하기 위해 산업 자본가 계급이 과학에 손을 들어줬기 때문입니다. <종의 기원>에서 찰스 다윈은 수많은 생물종들을 언급했습니다. 찰스 다윈이 축축 늘어지는 문체를 구사함에도, 수많은 생물종들 덕분에 <종의 기원>은 재미있습니다. 찰스 다윈은 생물 다양성이라는 용어를 알지 못했으나, 용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개념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김춘수가 쓴 <꽃>에서 인간이 꽃을 꽃이라고 부를 때 꽃은 꽃이 됩니다. 하지만 인간이 꽃을 꽃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꽃이 되기 위한 뭔가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찰스 다윈은 생물 다양성을 알지 못했으나, 생물 다양성이라는 용어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찰스 다윈은 생물 다양성이 진화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종의 기원>을 읽을 때, 독자는 온갖 다채로운 생물종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산업 자본가 계급은 다채로운 생물종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본가 계급에게 약육강식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약육강식을 이용해 자본가 계급이 약자들을 착취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책들은 가부장적이지 않은 과학을 말합니다. 영성과 여신은 과학에서 비롯할 수 있습니다.]



이런 냉철하고 기계적인 수치화는 21세기를 장악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영성과 사랑을 말할 때, 지배적인 관념은 그게 순진하거나 낭만적이라고 조롱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경이로운 영성과 위대한 사랑은 순진하고 낭만적인 조롱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조롱을 피하기 위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우리는 영성과 사랑을 버리고 기계적인 수치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여러 부르주아 경제학 서적들은 인간이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시장 참가자라고 말합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인간은 이기적이어야 하고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은 영성과 사랑을 추구하지 못합니다. 영성과 사랑에 가격이 없다면, 어떻게 시장 참가자가 그걸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영리 기업들이 레이첼 카슨을 비방한 것처럼, 심지어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영성과 사랑을 짓밟고 학살합니다. 제3세계에서 환경 운동가들이 영성과 사랑을 외칠 때, 지배 계급은 그들을 두들겨패거나 감옥에 집어넣거나 죽입니다. 해방 신학 운동이 "예수는 수고하고 짐을 진 아나빔을 편들었다."라고 말할 때, 지배 계급은 해방 신학 운동을 조롱하고 가난한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죽입니다.



리처드 도킨스처럼, 많은 과학자들은 전투적인 무신론자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전투적인 무신론자들이 정말 무신론자입니까? 리처드 도킨스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하나요? 종교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것처럼, 리처드 도킨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나요? 아니, 리처드 도킨스는 입도 뻥긋하지 않습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그저 인간이 생존 기계이고 이기적인 유전자가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말할 뿐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기후 변화를 일으키고 생물종들을 파괴한다고 해도, 리처드 도킨스는 그저 종교를 열심히 까고 이기적인 유전자를 열심히 주장할 뿐입니다. 이런 과학자들은 그저 그럴 뿐입니다.


하지만 해방 신학 운동은 서구 제국주의에 저항하고 가난한 민중들을 응원합니다. 21세기 오늘날에 리처드 도킨스 같은 과학자와 해방 신학 운동 같은 종교 중에서 무엇이 밑바닥 계급을 이야기합니까? 리처드 도킨스 같은 과학자들이 정말 밑바닥 계급을 이야기합니까? 전투적인 무신론 과학자들은 종교를 격렬하게 비판하나, 해방 신학 같은 종교 운동이 밑바닥 계급을 응원할 때, 전투적인 무신론 과학자들은 밑바닥 계급을 입도 뻥긋하지 않습니다. 전투적인 무신론 과학자들은 무신론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전통 종교를 밀어내고 자본주의 경제와 가부장 문화와 과학 만능주의를 새로운 종교라고 떠받듭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유신론자이고 신앙인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계몽적이고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나, 우리는 합리와 이성과 계몽과 과학을 종교로 치환하고 숭배하는 중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성적이고 계몽적인 시대를 살아간다고 생각하나, 여전히 우리는 믿음과 신앙의 시대를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이성과 계몽은 그저 또 다른 믿음과 신앙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만약 우리가 믿음과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가 무슨 신앙을 선택해야 할까요? 지배 계급을 숭배하고 밑바닥 계급을 외면하는 신앙? 아니면 저항과 투쟁을 응원하고 영성과 사랑을 추구하는 신앙?


모든 사람에게는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선택하기 전에 사람들은 무슨 신을 따를지 고민해야 할 겁니다. 사람들이 지배 계급을 숭배하고, 자본주의를 숭배하고, 가부장 문화를 숭배하고, 상품화와 물신화를 숭배할 때, 그들은 이런 신앙에 영성과 사랑이 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이런 신앙에 영성과 사랑이 있습니까? 상품화와 가부장 문화에 영성과 사랑이 있습니까? 상품화와 영성이 공존할 수 있습니까? 연인이 서로 사랑할 때, 두 연인이 가격을 매깁니까? 그게 사랑입니까? 가격을 매기는 행위, 상품화가 사랑이 됩니까? 아, 자본주의는 이런 상품화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계화 자본주의 속에서 사람들은 사랑이 상품화라고 생각합니다. 결혼 정보 사이트들은 스펙과 학력과 연봉을 늘어놓습니다. 청춘들이 열정적이고 끈적거리고 쾌락적인 사랑에 빠지고 싶다고 해도, 청춘들은 사랑에 빠지지 못합니다. 그들은 스펙을 쌓아야 합니다. <야성의 사랑학>에서 목수정 작가가 한탄하는 것처럼, 스펙을 쌓느라 바쁘기 때문에, 청춘들은 사랑을 추구하지 못합니다. 물론 사랑에는 여러 유형들이 있고, 이렇게 사람들이 스펙을 이용해 사랑할 때, 이것 역시 사랑이 될지 모릅니다. 사랑에는 오직 한 가지 유형만이 있지 않을 겁니다. "너는 학벌이 좋아.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해." 이것 역시 사랑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엄마는 부유해. 그래서 나는 엄마를 사랑해." 이렇게 아이는 엄마를 사랑할 수 있을 겁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인간이 어머니 자연을 사랑할 때, 인간 역시 어머니 자연이 부유한지 가격을 계산할 수 있겠죠. 그래서 인간이 어머니 자연을 바라볼 때, 인간은 상품화된 영성과 물신화된 사랑을 받아들일 겁니다. 어머니 자연이 젖가슴을 내밀고 젖을 먹일 때, 인간은 그게 얼마짜리 젖인지 계산할 겁니다. 합리와 이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인간은 물신화를 숭배하고 상품화된 영성과 상품화된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어머니 자연을 바라볼 때, 반다나 시바와 레이첼 카슨과 마가렛 앳우드가 그런 것처럼, 인간은 또 다른 경이로움과 위대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건 또 다른 영성이고 또 다른 과학입니다.



[상상 과학 역시 영성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영성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이게 신화적인 회귀인가요? 이게 인간이 과학을 버리고 신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뜻인가요? 신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인간은 인간을 믿어야 합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주체는 인간입니다. 신이나 외계 문명이나 인공 지능이나 똑똑한 개조 생명체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나요? 단편 소설 <사막의 눈>처럼, 언젠가 완전무결한 도덕성을 품은 상급 인공 지능은 인류를 구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걸 장담하지 못합니다. 신화적인 회귀는 인류를 구원하지 못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어머니 자연을 숭배할 때, 여기에는 '과학'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건 진짜 '과학'일지 모릅니다.


만약 이게 신화적인 회귀라고 해도, 인간은 과학과 함께 신에게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웹소설 <뜨거운 동토>는 20세기 초반의 핀란드 사회 민주당 당원들을 이야기합니다. 이 소설에서 사회 민주당 당원들은 과학적인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를 따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무신론이나, 어떤 사민당 소녀는 자신이 영성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사민당 소녀에게 과학적인 사회주의와 영성은 대립하지 않습니다. 사민당 소녀가 과학과 영성을 함께 품는 것처럼, 과학과 영성은 무조건 대립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압주> 같은 게임이 놀라운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인간은 과학에서 영성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심해 잠수정이 해저 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경이로움에 젖고 영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과 영성은 공존할 수 있습니다. 과학과 영성은 무조건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상상 과학과 영성 역시 무조건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상상 과학과 영성이 무조건 적대적이라면, 마가렛 앳우드는 소설 <홍수>와 신의 정원사들을 쓰지 못했을 겁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은 어떨까요? 영화 <고지라: 괴수왕>이 모스라에게 영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요? 영화 속에서 모스라가 정말 어머니 자연이 되고 삶을 풍요롭게 끌어안을 수 있을까요? 어머니로서 모스라가 사랑을 인간들에게 퍼뜨릴 수 있을까요? 이것들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은 그저 신나게 도시를 때려부술 뿐인지 모릅니다.


<고지라: 괴수왕>은 그저 전형적인 블록버스터 영화에 불과하고 위선적인 자유주의 박애 정신을 부르짖을지 모릅니다. 모스라는 위대하고 경이로운 어머니가 아니라 그저 신나게 싸움박질하는 거대 절지류 괴수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고지라: 괴수왕>은 지배적인 관념, 과학 만능주의를 거부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모스라에게는 가능성이 아주 없지 않습니다. 만약 창작물이 모스라에게 영성을 부여하기 원한다면, 창작물은 위와 같은 사항들을 고민할 수 있을 겁니다. 상상 과학은 영성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스라 역시 영성을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 그림 <Mons - The insect Queen Mothra - 2019> 출처: aryaplus9, http://fav.me/dd3ex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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