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야생종>과 엘프 드루이드 - 인간에서 동물로 본문
[이런 반인반수 외계인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인간과 동물을 연결하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만화 <바람의 검심>에는 타카니 메구미라는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타카니 메구미는 힐러입니다. <바람의 검심>에서 온갖 칼잡이들은 열심히 싸우고, 만화 주인공 히무라 켄신 일행 역시 온갖 싸움들에 휘말립니다. 히무라 켄신과 조력자들은 온갖 부상들을 입고,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힐러로서 누군가는 활약해야 합니다. 타카니 메구미는 힐러 역할을 맡고 히무라 켄신과 다른 사람들을 치료합니다. 재미있게도 타카나 메구미는 여자 의사입니다.
<바람의 검심>은 메이지 유신이 열리는 시대를 이야기하고, 새로운 시대에 여자 의사로서 타카니 메구미는 히무라 켄신을 열심히 치료하죠. 게다가 메구미는 꽤나 성숙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훤칠한 키, 길다랗고 풍성한 머리카락, 볼륨이 돋보이는 몸매, 길다랗고 가느다란 얼굴 선, 이지적이고 속이 깊은 눈매. 여자 주연 등장인물들 중에서 타카니 메구미는 꽤나 성숙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히무라 켄신을 사모하는 카미야 카오루에게 이건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이죠. 그래서 메구미가 켄신에게 다가갈 때마다, 카미야 카오루는 메구미를 '여우'라고 부릅니다. 카오루에게 메구미는 두 귀가 쫑긋 솟은 불여우입니다.
여우는 드물지 않은 별명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예쁘고 교활한 여자를 여우라고 부릅니다. "아유, 그 기지배는 정말 여우야." 이런 비유는 일상적이죠. 하지만 비유는 그저 비유일 뿐입니다. 아무리 카미야 카오루가 두 눈을 부라리고 메구미를 노려본다고 해도, 메구미는 진짜 여우가 아닙니다. 그저 만화적인 과장 때문에 메구미는 여우로 변할 뿐입니다. 타카니 메구미는 구미호가 아니고 동물로 변신하지 않죠. 만약 타카니 메구미가 정말 여우로 변하고 싶다면, <바람의 검심>은 무협 장르가 아니라 판타지 장르가 되어야 할 겁니다.
판타지 장르에는 동물로 변하는 온갖 등장인물들이 있습니다. 고대부터 인간은 동물들에게 다양한 영감들을 받았습니다. 인간은 동물이나, 인간은 동물과 자신을 구분합니다. 인간과 여우는 똑같이 동물이나, 인간은 자신이 여우와 다르다고 간주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과 여우가 똑같이 동물이기 때문에, 여우는 인간에게 영감을 미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동물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능력들이 있죠. 어떤 사람은 날렵하고 은밀하고 치명적인 표범에게 감탄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위풍당당하게 창공을 날아가는 검수리에게 반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웅장하게 수면으로 솟구치는 혹등고래에게 찬사를 보낼 겁니다. 그래서 고대부터 신화들과 전설들, 민담들은 여러 동물들을 과장했습니다.
여전히 판타지 세상 속에는 과장된 동물들이 많습니다. 때때로 판타지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마법으로 동물에 가까워지거나 아예 동물로 변합니다. 테이블 게임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드루이드는 흉포하고 거대한 다이어 타이거로 변신할 수 있고 해골 병사들을 날려버릴 수 있죠. 강철 골렘이 온갖 마법 공격들을 씹어먹고 전사들을 몰아낼 때, 드루이드는 거대한 코뿔소로 변신하고 강철 골렘과 치열하게 육탄전을 벌일 수 있습니다. <바람의 검심>에서 타카니 메구미가 여우로 변할 때, 그건 그저 만화적인 과장일 뿐입니다.
반면,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드루이드에게 검은 줄무늬들이 생기고, 황갈색 털가죽이 생기고, 날카로운 이빨들과 발톱들이 생길 때, 그건 현실입니다. 적어도 판타지 세상 속에서 동물 변신은 현실입니다. 동물이 인간에게 영감을 미칠 때, 인간은 동물 변신 드루이드를 상상할 수 있죠. 안타깝게도 현실 속에서 인간은 다이어 타이거로 변신하지 못합니다. 레이 브래드버리가 쓴 어떤 단편 소설에서 어떤 소년은 공룡이 되기 원했습니다. 소설 속에서 소년은 공룡을 정말 좋아했고, 공룡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고, 정말 공룡이 됩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아무리 아이들이 BBC 다큐멘터리를 감명 깊게 본다고 해도, 아무리 아이들이 스테고사우루스나 파키리노사우루스가 되고 싶다고 해도, 아이들은 변신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동물이 되고 싶다면, 인간은 좀 더 현실적인 상상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19세기 진보 이후, 유럽 사람들은 새로운 의학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19세기 진보는 수많은 분야들에 영향을 미쳤고, 사람들은 19세기 진보가 새로운 의학을 부를 거라고 상상했습니다. SF 소설은 인간이 동물이 되거나 동물이 인간이 되는 의학을 묘사할 수 있었죠. 아서 코난 도일은 유인원처럼 인간이 벽을 탈 수 있을 거라고 썼고, 허버트 웰즈는 무인도의 반인반수들을 썼습니다. 나중에 이런 설정은 미하일 불가코프가 쓴 <개의 심장>이나 알렉산드르 벨야예프가 쓴 <물고기 인간>에게 영향을 미쳤을지 모릅니다. 물론 <모로 박사의 섬>은 인간이 동물로 변신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동물이 인간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모로 박사의 섬>은 인간과 동물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사이언스 픽션이고, 따라서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을 겁니다. 동물이 인간이 되든, 인간이 동물이 되든, 사실 <모로 박사의 섬>과 <개의 심장>과 <물고기 인간>은 비슷한 바이오펑크에 속할 수 있겠죠. 허버트 웰즈는 유전 공학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나, 새로운 의학으로 동물이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상상했습니다. 심지어 20세기 이후, 사이언스 픽션들은 인간이 동물적인 초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스테고사우루스로 '변신'한다면, 여전히 그건 너무 심한 비약일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20세기 이후, 사이언스 픽션들은 든든한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인간이 스테고사우루스로 변신한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들은 그걸 옹호하거나 변명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인간은 스테고사우루스로 변신하는 상황을 어느 정도 꿈꿀 수 있죠.
[이런 표지 그림처럼, 반인반수는 아주 강렬한 야성을 풍길 수 있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허버트 웰즈가 메리 셸리를 모방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썼고 과학자가 새로운 생명체를 만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모로 박사의 섬>에서도 과학자는 새로운 생명체를 만듭니다. 하지만 한쪽은 인조인간이고, 다른 한쪽은 반인반수입니다. 당연히 인조인간보다 반인반수는 훨씬 동물적입니다. 그래서 인조인간보다 반인반수는 훨씬 문명화에 야성적으로 저항할 수 있겠죠. 인간이 동물이 된다는 설정은 그저 상상 과학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동물이 될 때, 그건 아주 커다란 함의나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카미야 카오루가 타카니 메구미를 여우라고 부른 것처럼, 인간이 동물이 될 때, 그건 모욕이나 찬사가 될 수 있습니다. 소설 <동물 농장>에서 러시아 민중들은 가축, 개돼지가 됩니다. 조지 오웰이 러시아 민중들을 모욕하기 원했을까요? 그건 아니겠죠. 조지 오웰은 민주적 사회주의를 옹호했고 민중들을 믿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을 비난하기 위해 조지 오웰은 러시아 민중들을 개돼지로 격하했습니다. 조지 오웰은 의도하지 않았겠으나, 애석하게도 <동물 농장>은 모욕이 될 수 있습니다. <개의 심장> 역시 비슷하겠죠.
반면, 신화 속에서 헤라클레스는 네메아 사자 가죽을 두릅니다. 그건 그저 갑옷에 불과하지 않았을 겁니다. 사자 가죽을 봤을 때, 사람들은 사자처럼 헤라클레스가 강하다고 생각했겠죠.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 <트로이>에서 아킬레우스가 자신과 미르미돈을 사자라고 부르는 것처럼, 인간이 동물이 될 때, 그건 강력한 비유가 됩니다. <모로 박사의 섬>은 동물을 이용해 강렬한 야성을 풍기고, 그래서 <모로 박사의 섬>은 <프랑켄슈타인>과 많이 다릅니다. 아무리 인조인간이 흉포하다고 해도, 결국 인조인간은 인간입니다. 반인반수와 달리, 인조인간에게는 강렬한 야성이 없죠.
<모로 박사의 섬>보다 올라프 스태플던이 쓴 <시리우스>는 훨씬 심합니다. 시리우스는 똑똑한 개조 동물입니다. <모로 박사의 섬>에서 반인반수는 어느 정도 인간에 가까우나, <시리우스>에서 시리우스는 아예 동물입니다. 시리우스는 똑똑하고 예의가 바르나, 종종 야성을 풍깁니다. 이런 개조 동물들과 함께 지낸다면, 인간은 야릇한 감성에 휩싸일지 모릅니다. 시리우스는 '인간이 동물이 되는 결과'가 아니나, 그런 결과와 비슷합니다. 어쩌면 어떤 인간 여자는 수컷 개조 동물에게 매력을 느낄지 모릅니다. 어떤 인간 남자는 암컷 개조 동물에게 매력을 느낄지 모릅니다. 인간이 동물로 변신하는 상상력보다 이건 훨씬 위험합니다.
이건 수간입니다. 인간과 반인반수가 섹스할 때, 그건 어느 정도 윤리적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수간은 인륜을 저버리는 금기입니다. 아니, 잠깐. 이게 정말 수간입니까? 분명히 개조 동물은 동물입니다. 하지만 개조 동물은 똑똑합니다. 개조 동물은 미적분을 풀고, 우주선을 조종하고, 유물론을 토론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미적분을 풀지 못하고, 우주선을 조종하지 못하고, 유물론을 토론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인간보다 똑똑한 개조 동물은 훨씬 나을지 모릅니다. 인간이 이런 개조 동물과 섹스한다면, 그게 인륜을 저버리거나 금기가 될까요? 소설 <시리우스>에서 어떤 인간 여자는 개조 동물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사랑합니다. 이게 금기입니까?
첨단 과학은 인간과 동물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첨단 과학 덕분에 인간은 동물적인 초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화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 스파이더맨은 거미 같은 초능력을 얻었습니다. 스파이더맨에게는 어느 정도 신화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고대 주술사들이 야생 동물들에게 영감을 받았을 때, 그들은 동물적인 초능력을 얻고 싶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첨단 과학 덕분에 스파이더맨은 그걸 이룩했죠. 물론 가끔 거미 능력이 지나칠 때, 피터 파커는 거미 괴수로 변신합니다. 게다가 '도마뱀' 코너스 박사처럼, 어떤 반인반수는 악당입니다. 영화 <플라이>가 증명하는 것처럼, 첨단 과학이 인간과 동물을 연결할 때, 그건 부정적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사이언스 픽션은 신화를 과학으로 포장할 수 있습니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소설 <야생종>에서 소설 주인공 안얀우는 표범이나 돌고래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상대를 은밀하게 처치하기 위해 안얀우는 표범으로 변신하고 바다에서 뛰어놀기 위해 안얀우는 돌고래로 변신합니다. 여기에는 첨단 과학이 없습니다. 적어도 스파이더맨은 형식적으로 첨단 과학을 떠듭니다. 비록 이게 형식적이라고 해도, 분명히 이건 첨단 과학이죠. 하지만 <야생종>은 아무렇지 않게 주술이 과학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 나오는 동물 변신 드루이드와 <야생종>에 나오는 안얀우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야생종>은 자세하고 물리적인 근거 없이 인간이 동물로 변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도입부 동영상에서 어떤 여자 나이트 엘프 드루이드를 보여줍니다. 나이트 엘프 드루이드는 흑표범으로 변신합니다. 이 장면은 꽤나 인상적이죠. 안얀우는 나이트 엘프 드루이드와 다르지 않습니다.
첨단 과학 덕분에 피터 파커는 거미 초능력을 얻었습니다. 인간이 벽을 기어오르는 장면은 황당할지 모르나, 피터 파커는 그게 첨단 과학이라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 드루이드 주문 덕분에 나이트 엘프 드루이드는 흑표범으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나이트 엘프가 흑표범으로 변신하는 장면은 인상적이고, 나이트 엘프는 드루이드 주문이 이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안얀우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안얀우가 표범으로 변신할 때, 그건 과학이 아닙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야생종>이 SF 초인 소설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래서 표범 변신 능력은 상상 과학이 됩니다. 어쩌면 미래에 누군가는 초인으로 각성하고 정말 은밀하고 치명적인 표범으로 변신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너무 낮은 가능성이겠죠. 타카니 메구미가 정말 여우가 되지 않는 것처럼, 미래 인간 역시 표범이 되지 못할 겁니다. 레이 브래드버리 소설에서 소년은 간절히 원했고 공룡이 될 수 있었으나, 미래 인류에게 그건 불가능하겠죠. 그래서 안얀우는 나이트 엘프 드루이드와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SF 독자들이 <야생종>을 SF 소설이라고 간주한다고 해도, 안얀우와 나이트 엘프 드루이드는 비슷합니다. 만약 여기에 차이점이 있다면, 그건 변신 능력이 아니라 사상일 겁니다.
[안얀우와 나이트 엘프 드루이드는 똑같이 표범으로 변신할 수 있으나, 여기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겠죠.]
안얀우는 아프리카 흑인 여자입니다. 아프리카. 흑인. 여자. 안얀우에게는 위험한 측면들이 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 이전에 유럽 백인들은 아프리카 대륙을 수탈했습니다. 그들은 노예 무역으로 상업을 확장했고 흑인 노예들을 거래했습니다. 유럽 백인들에게 흑인 노예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흑인 노예는 그저 물건에 불과했죠. 비좁은 노예 수송선에서 노예들은 그저 짐짝에 불과했습니다. 택배 기사가 창고에 상품들을 적재하는 것처럼, 노예 수송선은 노예들을 '적재'했습니다. 노예가 물건이었기 때문에 손해 보험은 노예를 상품으로 간주했고, 손해 보험금을 타기 위해 노예 수송선 선장은 노예들을 일부러 바다에 버릴 수 있었습니다.
유럽 백인들에게 흑인 노예는 물건이었고, 흑인 여자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백인 남자가 흑인 여자를 폭행한다고 해도, 그건 별로 부끄럽거나 시끄러운 소동이 아니었죠. 백인 남자는 흑인 여자를 아무렇지 않게 폭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노예 무역은 초기 상업 자본주의를 뒷받침했고, 이후 미국 자본주의에서 흑인 노예들은 주력이 되었습니다. 서구 자본주의가 발달했을 때, 극심한 인종 차별은 자본주의를 뒷받침했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인종 차별과 떨어지지 못하고, 아직 인류 문명은 인종 차별을 멀리 밀어내지 못합니다. <앵무새 죽이기> 같은 소설은 그저 감동적인 옛날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안얀우는 이런 역사를 거칩니다. 안얀우는 이런 역사를 인식합니다. 반면, 나이트 엘프 드루이드는 그렇지 않습니다. 두 여자가 똑같이 표범으로 변신하고 은밀하게 상대를 해치울 수 있다고 해도, 안얀우는 인종 차별과 가부장 문화와 자본주의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반면, 나이트 엘프 드루이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중세 유럽 판타지가 되고, <야생종>은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습니다. 안얀우가 동물로 변신할 때, 그건 그저 주술적인 영감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그건 서구 자본주의라는 문명에 저항하는 야성적인 행위일지 모르죠.
발터 벤야민은 문화 기록이 야만의 기록이라고 말했습니다. 안얀우가 돌고래로 변신할 때, 안얀우는 서구 문화에서 벗어나고 야생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안얀우는 서구 문화라는 야만에서 벗어날 수 있죠. 안얀우는 인종 차별, 가부장 문화, 자본주의 경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이걸 의도했을까요? 옥타비아 버틀러가 서구 문화라는 야만을 강조하기 위해 표범 변신 능력을 설정했을까요? 옥타비아 버틀러에게는 이런 의도가 없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안얀우가 돌고래로 변신하고 야생으로 돌아갈 때, 독자는 (서구 문화와 대조적인) 야성을 느낄 수 있겠죠. 아무리 나이트 엘프 드루이드가 바다 표범으로 변신한다고 해도, 드루이드에게는 이게 없습니다.
문학 비평 서적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에서 테리 이글턴은 그 자체로서 상상력이 대단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스컹크로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알지 못하지만, 스컹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흥미로운 단편 소설이 이 점에서 제약을 극복하게 해줄지 모르지요. 그러나 스컹크로 살게 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되더라도 특별한 가치는 없습니다." 이렇게 테리 이글턴은 말했습니다. 인간이 동물이 된다고 해도, 그 자체로서 이런 상상력에는 특별한 가치가 없죠. 안얀우와 나이트 엘프 드루이드는 모두 해양 동물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안얀우는 여자이고 가부장 문화에서 벗어나기 위해 돌고래로 변신합니다.
하지만 여자 나이트 엘프는? 가부장 문화를 비판하기 위해 여자 나이트 엘프가 바다 표범으로 변신할까요? 국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서버들에서 얼라이언스가 호드를 압도했을 때, 호드 드루이드들은 얼라이언스 유저들을 피해야 했습니다. 특히, 가시덤불 골짜기처럼 다수 얼라이언스 유저들과 소수 호드 유저들이 뒤섞일 때, 얼라이언스 유저들은 호드 유저들을 학살할 수 있었죠. 무법항 주변에는 호드 유저들의 골격들이 널렸습니다. 다행히 가시덤불 골짜기에는 바다와 해안들과 강물들이 있습니다. 타우렌 드루이드는 바다 표범이 되고 얼라이언스 유저들을 쉽게 피할 수 있었죠. 노움 흑마법사가 수중 호흡을 버프하고 쫓아온다고 해도, (열심히 스스로 치유하는 동안) 타우렌 드루이드는 깊은 바닷속으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가시덤불 골짜기의 깊은 바닷속에서 타우렌 드루이드 유저는 안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롬골 주둔지에서 벗어날 때, 타우렌 드루이드는 바다 표범으로 변신하고 강물 밑으로 헤엄칠 수 있습니다. 얼라이언스 공격대가 돌아다닌다고 해도, 바다 표범 변신으로 타우렌 드루이드는 강물 속에 들어갈 수 있고 얼라이언스 공격대를 피할 수 있죠. 강물이 없다고 해도, 타우렌 드루이드는 표범으로 변신하고, 은밀하게 밀림 속을 돌아다니고, 연속 퀘스트들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플레이하는 동안, 타우렌 드루이드 유저는 이런 것들을 느낄 겁니다.
이건 <야생종>과 다릅니다. 여자 타우렌 드루이드가 바다 표범으로 변신한다고 해도, 그건 안얀우와 다릅니다. 안얀우와 여자 타우렌 드루이드가 돌고래와 바다 표범으로 변신하고 바닷속으로 뛰어든다고 해도, 양쪽은 서로 다릅니다. 사이언스 픽션과 중세 유럽 판타지는 똑같이 인간이 동물로 변신한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타카니 메구미는 여우로 변신하지 못합니다. 타카니 메구미는 그저 성숙하고 아름답고 교활한 여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안얀우와 여자 타우렌 드루이드는 동물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양쪽은 똑같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서 동물로 변신하기 위한 상상력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안얀우와 여자 타우렌 드루이드에게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죠. 모든 상상력은 똑같은 상상력이 아닙니다.
[이런 게임을 플레이할 때, 게임 플레이어는 야생 동물이 되고 야생을 활보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에서 테리 이글턴은 스컹크 단편 소설을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야생 동물이 되기 위해 인간은 다른 방법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은 아주 현실적인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배미주가 쓴 소설 <싱커>에서 아이들은 야생 동물들을 느낍니다. 야생 동물들에게 '접속'할 수 있기 때문에 야생 동물들의 시각들로 아이들은 자연 생태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정보 기술 혁명 덕분에 인간은 동물이 될 수 있습니다. 온갖 사이버펑크 소설들에게 이런 설정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싱커>는 특별한 소설이 아니죠. 심지어 현실 속에서 우리는 비슷한 체험을 만날 수 있습니다.
1994년 게임 <울프>를 플레이했을 때, 게임 플레이어들은 그들이 늑대가 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평가했습니다. 게임 표지 그림은 아예 인간의 시선과 늑대의 시선을 절반씩 겹쳤습니다. 이건 인간이 늑대로 변신한다는 느낌을 풍깁니다. <울프>를 플레이할 때, 게임 플레이어는 정말 그걸 느꼈을 겁니다. 인간 사냥꾼이 늑대를 쏴죽일 때, 게임 플레이어는 자신이 총에 맞았다고 느꼈을 겁니다. 소설 <싱커>에서 아이들이 자연 생태계를 보호하는 것처럼, <울프>를 플레이한 이후, 게임 플레이어는 늑대 생태에 관심을 기울일지 모릅니다. <울프>처럼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에는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 인간은 '전자 드루이드'가 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전자 드루이드들'은 훨씬 늘어날 겁니다. 증강 현실 기술이 발달한다면, 훨씬 생생한 전자 드루이드들은 늘어날 겁니다. <쉘터 2>처럼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은 기술적 자연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서 이런 기술적 자연들은 사이언스 픽션과 비슷합니다. 사이버펑크 문학 운동이 인터넷 세컨드 라이프를 만난 것처럼, 기술적 자연들은 사이언스 픽션과 만날 수 있겠죠. SF 팬들이 생태학 SF 설정을 중시한다면, <쉘터 2> 같은 비디오 게임은 중요할 수 있습니다.
고대 주술사들이 표범을 모방하기 원했을 때, 고대 주술사들은 이런 기술적 자연과 전자 드루이드를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했을 겁니다. <쉘터 2>에는 상상 과학이 없으나, 그 자체로서 <쉘터 2>는 전자 드루이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정보 기술 혁명 이후, 이런 기술적 자연과 전자 드루이드는 가능해졌습니다. 현실 속에서 인간이 동물이 되는 느낌을 받기 원할 때, 이런 전자 드루이드는 가장 간편하고 효율적일지 모릅니다. 물론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 이외에도 인간이 동물이 되는 게임들은 있습니다. <수왕기>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겠죠. 아니면 <프라이멀 카니지> 같은 게임을 플레이할 때, 게임 플레이어는 스피노사우루스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프라이멀 카니지>가 동물 생태보다 액션을 중시한다는 사실입니다.
<프라이멀 카니지>에서 동물 생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자연 생태계와 생물 다양성과 먹이 그물망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미약합니다. 자연 생태계 속에서 야생 동물은 진화했습니다. 따라서 게임 플레이어가 동물이 되는 느낌을 받고 싶다면, <프라이멀 카니지>보다 <사우리안>은 훨씬 좋은 선택이 될 겁니다. <사우리안>을 플레이한 이후, 게임 플레이어가 <싱커>를 읽는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소설 설정에 훨씬 몰입할 수 있겠죠.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 <싱커>와 비슷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따라서 <싱커>에서 아이들이 자연 생태계를 보호하기 원한 것처럼, 현실 속에서 우리 역시 자연 생태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겠죠.
이런 기술적 자연과 전자 드루이드는 별로 전통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1990년대에 <울프> 같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쉘터 2>와 달리, 1990년대 중반까지, 비디오 게임들은 멋진 3D 그래픽을 쉽게 구현하지 못했죠. 새로운 기술 덕분에 인간은 전자 드루이드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전통적인 방법들은 커다란 인기를 끕니다. 인간이 동물이 되기 원할 때, 인간은 반인반수를 머리속에 떠올릴 수 있습니다. 소설 <모로 박사의 섬>은 험악한 수술이 반인반수를 만든다고 묘사했으나, 사이언스 픽션은 태생적인 반인반수 종족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게임 <마스터 오브 오리온>에서 불라시는 곰-인간 종족입니다. 곰이 강력한 야생 동물인 것처럼, 불라시는 뛰어난 지상 전투 능력을 자랑합니다.
불라시처럼, 사이언스 픽션에게 반인반수 종족은 간편한 상상력입니다. 인간과 야생 동물을 합치기 위해 사이언스 픽션은 반인반수 외계인을 설정할 수 있죠. 여전히 온갖 스페이스 오페라들에서 반인반수 외계인들은 넘쳐날 겁니다. 앞으로 이런 반인반수 외계인들은 계속 인기를 끌겠죠.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동물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쇼베 동굴 벽화의 붉은 표범을 간직했을지 모릅니다. 인간이 동물을 모방하고 싶을 때, 사이언스 픽션은 다양한 상상력들을 발휘합니다.
어떤 것은 그저 상상력에 불과하고, 어떤 것은 가능성으로 이어집니다. 어떤 것은 자극적인 재미를 추구하나, 어떤 것은 급진적인 사상을 담을 수 있습니다. 타카니 메구미는 여우가 아닙니다. 타카니 메구미는 그저 여우 같은 아가씨일 뿐입니다. 팬 서비스 공연에서 트와이스가 동물 잠옷들을 입는다고 해도, 트와이스는 동물들로 변신하지 못합니다. 미나는 펭귄이 아니고, 다현은 공룡이 아니고, 사나는 햄스터가 아니죠. 사나에게는 햄스터 개인기가 있습니다. 원스 팬들은 햄스터처럼 사나가 예쁘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나는 햄스터로 변신하지 못하죠. 우리가 인간을 동물에게 대입할 때, 그건 그저 대입과 비유에 불과합니다.
[아쉽게도(?) 사나는 햄스터로 변신하지 못합니다. SF 소설들은 인간과 동물을 연결하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은 인간과 동물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들 속에서 인간은 다양한 방법들로 다양한 동물들이 될 수 있죠. 이 게시글은 몇몇 사례를 언급했으나, 이것들 이외에 다른 방법들은 많습니다. 소설 <알테어의 바람> 같은 사례들 역시 드물지 않겠죠. SF 팬들은 이런 상상력들에서 여러 가치들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싱커>처럼, 그것들 중에는 환경 보호가 있겠죠. 사이언스 픽션에는 생태적인 상상력들이 있습니다. 거대 괴수와 인공 생태계와 생체 우주선처럼, 인간이 동물이 되는 상상력은 생태적인 상상력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생태적인 상상력은 환경 오염을 비판할 수 있죠.
인간이 유전 공학으로 스테고사우루스를 만들 수 있다면, 인간은 스테고사우루스의 머릿속에 기계를 심고 스테고사우루스에게 의식을 전송할 수 있습니다. 의식 전송이나 육체 교환은 별로 특별한 설정이 아닙니다. <얼터드 카본>이나 <유령 여단>처럼, 인간은 얼마든지 스테고사우루스에게 의식을 전송하고 스테고사우루스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야생 동물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인간은 자연 생태계를 새롭게 의식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인간이 야생 동물이 되고 생물 다양성 위기나 동물 학대를 직접 겪는다면, 이런 설정은 환경 보호나 동물 권리를 강렬하게 옹호할 수 있겠죠. 기후 변화가 심각한 재앙이기 때문에, 현대 인류 사회에서 동물들이 가장 밑바닥 계급이기 때문에, 이런 상상력은 아주 중요할지 모릅니다.
※ 사나 이미지 출처: TheGsd (https://www.youtube.com/watch?v=RY4izhA87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