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F 생태주의

숲 속 종족들과 행성 공학 SF 본문

SF & 판타지/대지 모신

숲 속 종족들과 행성 공학 SF

OneTiger 2018. 4. 28. 18:50

[우드 엘프 진영에 속한 포레스트 드래곤. 이게 자연 환경 보호를 말할 수 있을까요.]



중세 판타지 게임들에는 이른바 숲 속 종족들이 등장합니다.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이나 <배틀 포 웨스노스>나 <엔들리스 레전드> 같은 중세 판타지 게임에는 숲 속 종족들이 하나의 세력을 이루죠. 드루이드, 우드 엘프, 나무 정령, 유니콘, 장난꾸러기 요정, 녹색 드래곤, 신성한 사슴이나 지성적인 곰 같은 존재들은 대표적인 숲 속 종족입니다. 그들은 울창한 숲 속을 자유롭게 누비고, 언데드 군단이나 악마 군단이나 오크 군단에 맞서 풍성한 자연을 지킵니다. 설정마다 숲 속 종족들은 약간 차이를 드러낼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드 엘프는 이런 종족들을 이끌고 엮는 구심점이 될 수 있습니다. 엘프가 유사 인간 종족이고 사람들이 감정을 이입할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나무 정령이나 녹색 드래곤이나 신성한 사슴은 인간이 아니고, 그래서 주인공 역할을 자치하지 못하겠죠. <배틀 포 웨스노스> 같은 중세 판타지에서 (우드 엘프들을 비롯해) 숲 속 종족들은 서로 연합하고, 풍성한 자연을 지키고, 흡혈귀나 악마나 오크를 몰아냅니다. 전반적으로 숲 속 종족들은 빠른 기동력과 원거리 공격과 숲이라는 지형적인 장점과 치유 능력을 자랑합니다.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이나 <배틀 포 웨스노스>나 <엔들리스 레전드> 같은 게임들에서 숲 속 종족들은 여러 차이점들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저는 숲 속 종족들에게 전반적인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마 가장 큰 공통점은 그들이 숲이라는 지형에서 여러 이득을 얻는다는 특징일 겁니다. 울창한 숲은 다른 종족들에게 살아있는 미궁입니다. 하지만 이런 복잡하고 뒤엉킨 미궁 속에서 우드 엘프나 드루이드나 나무 정령이나 드라이어드는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적들을 농락할 수 있습니다.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같은 게임에서 숲 속 종족들은 지형을 이용하지 않으나, <배틀 포 웨스노스>는 그런 특성을 잘 드러내죠. 숱한 중세 서사 판타지에 등장하는 우드 엘프들이나 나무 정령들을 고려한다면, <배틀 포 웨스노스>가 소설을 좀 더 제대로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런 특성이 거꾸로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숲 속 종족들이 숲을 벗어난다면, 오히려 그들은 약해질지 모릅니다. 사실 우드 엘프나 나무 정령이나 녹색 드래곤이 말하는 자연은 (다른 지형이 아니라) 숲입니다. 자연계에는 숲 이외에 여러 지형들이 존재하나, 중세 판타지는 오직 숲만 자연을 상징한다고 간주하는 듯합니다.



저는 이런 숲 속 종족들이 관념적인 자연관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연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립니다. 하지만 자연이 뭘까요? 무엇이 자연일까요? 자연이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을까요? 거대 도시 안에 산이 존재한다면, 그 산이 자연일까요? 도시 사람들이 텃밭을 가꾸거나 꿀벌을 친다면, 그런 텃밭들이나 벌집들이 자연일까요? 사람들은 꿀벌이 가축이라고 생각하나, 꿀벌들은 끊임없이 야생 식물들과 깊은 관계를 맺습니다. 야생 식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양봉 꿀벌들 역시 쉽게 꿀을 생산하지 못할 겁니다. 양봉 꿀벌이 정말 완전히 문명적인 가축일까요? 생태 건물이나 생태 도시가 등장한다면, 그런 건물이나 도시는 얼마나 자연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쉽게 원시적인 자연 운운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원시적이죠? 대략 40억 년 전에 원시적인 생명체들이 등장한 이후, 자연 환경은 계속 바뀌었습니다. 자연 생태계는 주기적으로 무너지고 다시 복원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원시적인 자연을 찬미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원시적인가요? 우리가 지구를 40억 년 전으로 되돌려야 할까요? 우리가 멸종한 검치 호랑이를 다시 살려내야 하나요? 그게 올바른 행위일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왜 사람들은 원시적인 자연 운운할까요?



사람들은 북아메리카 부족민들이 낭만적인 자연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북아메리카 부족민들 역시 인간입니다. 그들은 절대 낭만적인 자연주의자가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해도 북아메리카 부족민들은 지속 가능성을 고려했고, 그래서 현대 문명에게 소중한 교훈을 가르칠 수 있겠죠. 우리는 그런 교훈을 대안 사회에 적용할 수 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낭만적인 자연주의가 아니라 현실적인 지속 가능성입니다. 중세 판타지의 숲 속 종족들 역시 이런 낭만적인 자연주의를 상징할지 모릅니다. 우드 엘프나 나무 정령이나 유니콘이나 녹색 드래곤은 자신들이 풍성한 자연을 지킨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풍성한 자연이 무엇을 뜻할까요? 나무 정령들이 악마들을 숲 밖으로 몰아낸다면, 그게 자연 보호일까요? 사람들이 나무들을 벤다면, 나무 정령들은 화를 낼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손을 대지 않아도, 자연 생태계는 꾸준히 바뀌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무 정령들이 상상하는 이상적인 자연이 무엇일까요? 여러 중세 판타지 설정들은 이런 부분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가끔 숲 속 종족들이 생태 철학을 떠들어도, 그건 얄팍한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지구에서 자연 생태계는 계속 바뀌었고, 이상적이고 원시적이고 완전한 자연은 존재하지 않아요.



[이런 설정은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이런 설정은 진짜 자연 생태계를 말하지 못하죠.]



저는 구조적으로 중세 판타지가 이런 부분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중세 판타지는 급진적인 변화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중세 판타지는 세상이 고정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중세 판타지들은 아주 열심히 귀족들을 미화합니다.) 이런 판타지 설정이 현실과 충돌한다면, 그건 형이상학적인 망상으로 돌변할 겁니다. 현실은 계속 바뀝니다. 현실의 자연 생태계 역시 계속 바뀝니다. 하지만 중세 판타지는 그런 변화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현실의 독자가 중세 판타지의 숲 속 종족들을 바라볼 때, 현실의 자연관과 중세 판타지의 자연관은 서로 충돌할 겁니다. 중세 판타지는 고정적이고 이상적인 자연 환경을 그립니다. 따라서 이런 자연관을 현실에 적용할 때, 독자는 모순을 넘어가지 못할 겁니다.


가령, 중세 판타지의 숲 속 종족 설정은 현실의 환경 오염을 비판하지 못합니다. 현실의 환경 운동은 그저 완벽하고 이상적이고 싱그러운 녹색을 지키는 운동이 아닙니다. 환경 오염은 착취적인 계급 구조에서 비롯했고, 따라서 자연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우리는 착취적인 계급 구조를 깨뜨려야 합니다. 밑바닥 사람들이 저항할 수 있도록 우리는 그들을 지지하고 응원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평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평등은 밑바닥 계급의 저항일 겁니다. 기본 소득처럼 밑바닥 사람들은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얻어야 합니다. 환경 보호는 이런 것들과 이어집니다. 하지만 우드 엘프나 나무 정령이나 녹색 드래곤은 여기에 관심이 없겠죠.



이는 중세 판타지 설정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중세 판타지 설정을 좋아하고 <에라곤> 같은 소설을 읽는다고 해도, 저는 그런 현상을 비판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그저 중세 판타지가 고정적인 세계관을 드러낸다고 지적할 뿐입니다. 그런 고정적인 세계관은 고정적인 자연관으로 이어지고, 그래서 중세 판타지는 형이상학적으로 고립된 설정이 됩니다. 중세 판타지에는 외삽법이 없습니다. 중세 판타지는 보수적인 사회 구조, 보수적인 자연관 그 자체입니다. 종종 중세 판타지 작가들은 이런 경향을 뛰어넘고 싶어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장르 명칭처럼 중세 판타지는 중세적인 분위기를 벗어나지 않아요.


반면,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를 전망하고, 미래가 바뀔 수 있다고 말하죠. 네, 미래는 바뀔 겁니다. 인류 사회 역시 바뀔 테고, 자연 생태계 역시 바뀔 겁니다. 어떻게 그것들이 바뀔지 아무도 알지 못하나, 지금까지 바뀐 것처럼 분명히 그것들은 바뀔 겁니다. 세계는 고정적이지 않아요. 그리고 세상의 변화를 파악하고 싶다면, 사이언스 픽션이 아주 유용한 창문이 될 겁니다. 그래서 생태 철학을 제대로 살펴보고 싶다면, 사람들은 중세 판타지가 아니라 행성 공학 SF를 선택해야 할 겁니다.



저는 중세 판타지 소설들을 잘 모릅니다. 중세 판타지 게임과 중세 판타지 소설은 엄연히 다를 겁니다. 프랭크 허버트가 쓴 <듄> 연대기와 웨스트우드가 만든 게임 <듄 2000>이 다른 것처럼. SF 게임을 이용해 SF 전체를 평가한다면, 그건 우둔한 행위일 겁니다. 소설 <듄>은 장대한 생태 철학을 이야기합니다. 몇몇 부분에서 프랭크 허버트는 한계를 드러냈으나, 생태 철학과 행성 공학을 깊고 감동적으로 그렸어요. <붉은 화성> 같은 소설 역시 행성 공학을 이용해 자연과 문명을 깊게 고찰하죠. 행성 공학을 둘러싸고 과학자들이 벌이는 논쟁은 <붉은 화성>의 백미일 겁니다. 저는 이런 논쟁이 SF 소설을 읽는 재미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SF 게임은 어떨까요. 아무리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나 <스텔라리스>가 거대한 게임이라고 해도, SF 게임은 저런 생태 철학을 이야기하지 않죠. 판타지 게임과 판타지 소설 역시 비슷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판타지 소설들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제가 착각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중세 판타지 소설들 역시 생태 철학을 제대로 이야기할지 모르죠. 하지만 저는 중세 판타지보다 사이언스 픽션이 훨씬 제대로 생태 철학을 설명한다고 생각합니다. 헛소리를 떠드는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너무 많으나, 근본적으로 사이언스 픽션은 중세 판타지보다 낫습니다. 그리고 사이언스 픽션이 생태 철학을 더욱 제대로 고찰하고 싶다면, 밑바닥 계급과 좌파 사상을 고민해야 할 겁니다.



이런 관점을 (이틀 전에 이야기한) <붉은 별> 같은 소설에 적용시킬 수 있겠죠. <붉은 별: 어떤 유토피아>는 화성의 공산주의 사회를 묘사합니다. 화성인들은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켰고, 모두 행복하게 살아가는 유토피아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저 겉모습에 불과하고, 내부에 아주 심각한 모순을 품었어요. 화성인들은 진보와 생산력 증가, 경제 성장을 굳건하게 믿고, 절대 그것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화성인들은 그것들이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떠받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자연 생태계는 무한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화성인들은 진보와 생산력 증가와 경제 성장을 멈춰야 할 겁니다. 만약 화성인들이 이런 것들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다른 행성으로 진출해야 할 테고, 분명히 여러 문제들을 겪을지 몰라요. 제한적인 자연 생태계와 지속 가능성과 착취와 학살은 절대 멀리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붉은 별>은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묘사하나, 그런 자원 고갈과 환경 오염이 공산주의를 망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중세 판타지의 드라이어드나 작은 요정이나 지성적인 곰이 지속 가능성과 계급 구조를 논의할까요. 아니죠.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소설 <오로라> 홍보 영상의 한 장면. 진짜 생태 철학과 생물 다양성은 이런 것이겠죠.]



지속 가능성이나 생태 철학을 논의하고 싶다면, 창작가는 총체적인 자연 생태계를 설정해야 합니다. 총체적인 자연 생태계를 설정하고, 거기에서 창작가는 생태 철학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두루뭉실한 자연 생태계에서 창작가는 두루뭉실한 생태 철학을 뽑을 겁니다. <듄>이나 <붉은 화성>이나 <붉은 별>은 어떻게 장기적으로 행성이 변하는지 살펴봅니다. 덕분에 이런 소설들에는 총체적인 자연 생태계가 존재합니다. 당연히 프랭크 허버트와 킴 스탠리 로빈슨과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깊고 풍부한 생태 철학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반면, 중세 판타지 세상에서 자연 생태계는 희미합니다. 중세 판타지에 생물 다양성이나 진화 역사가 존재할까요? 어떻게 그것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나무 정령이나 드라이어드나 유니콘이 진화했나요? 나무 정령이나 드라이어드나 유니콘이 정말 진화하나요? 중세 판타지 설정들은 간단하게 신이 그것들을 만들었다고 대답합니다.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중세 판타지에서 자연 생태계는 고정적이고, 창작가는 총제적인 자연 생태계를 상정하지 못합니다. 그런 자연 생태계 설정은 생태 철학을 제대로 내놓지 못합니다. 작가가 생태 철학을 고찰하고 싶다면, 작가는 신을 내쫓고 생명이 걸어온 역사와 밑바닥 계급을 살필 수 있어야 해요.



저는 너무 중세 판타지를 몰아붙이고 싶지 않습니다. 우드 엘프나 나무 정령이나 지성적인 곰이나 녹색 드래곤. 저 역시 이런 설정이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세 판타지 속에서 드루이드가 야생 동물들을 치료하거나, 나무 정령들이 흡혈귀들의 엉덩이를 걷어차거나, 녹색 드래곤이 녹색 가스를 뿜거나, 드라이어드가 대자연을 뛰어다니는 장면들은 멋지고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이런 설정을 잠시 고민하면, 곧바로 커다란 한계에 부딪힙니다. 우드 엘프나 나무 정령이나 녹색 드래곤은 형이상학적이고 고립된 관념 속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숲 속 종족들이 자연 보호를 떠들어도, 그런 자연 보호는 우리가 사는 현실과 아무 관계가 없겠죠.


하지만 사람들은 관념적인 자연관을 현실과 중세 판타지 양쪽에 투영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숲 속 종족 설정이 사람들에게 형이상학적인 관념들을 퍼뜨린다고 생각해요. <워해머>에 등장하는 우드 엘프들을 볼 때,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이 자연을 사랑하고 지킨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할 때, 사람들은 무엇이 자연인지 생각하지 않아요. 생태주의는 착취적인 계급 구조를 넘어서는 사상이나, 중세 판타지에는 그런 사상이 끼어들지 못하죠.



우드 엘프들은 형이상학적인 관념에서 파생했고, 다시 그런 관념을 재생산합니다. 기후 변화가 심각한 현대 문명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우드 엘프 같은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이는 숲 속 종족 설정이 일부러 현실의 자연관을 왜곡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중세 판타지 설정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런 창작물들을 너무 많이 접한다면, 무엇이 진정한 자연관인지 헛갈릴지 모르죠. <워해머>나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이나 <에이지 오브 원더스> 같은 중세 판타지들은 꽤나 유명합니다. 그런 창작물들을 접하는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형이상학적인 자연관을 받아들이고, 그걸 다시 현실에 투영할지 모르죠. 판타지 설정을 그저 판타지 설정으로 즐기지 않고, 현실에 투영할지 모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환경 보존 운동을 관념적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환경 보존 운동이 밑바닥 계급을 지지하는 운동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해요. 이런 상황에서 <배틀 포 웨스노스> 같은 판타지 설정은 형이상학적 자연관을 더욱 부채질할지 모르죠. 반면, <붉은 화성> 같은 행성 공학 SF는 그런 관념을 비판하고 진짜 생태 철학을 제시할 수 있겠죠.



어쩌면 누군가는 이런 분석이 유치하거나 조야하다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아마 그런 야유는 틀리지 않을지 모릅니다. <배틀 포 웨스노스>는 그저 전략 게임에 불과합니다. 구태여 생태 철학을 전략 게임에 들이밀 필요가 있을까요. 이런 중세 판타지 설정을 비판한다면, 거기에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그럴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에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해야 할지 모르죠. 하지만 우드 엘프나 나무 정령 같은 설정은 꽤나 유명하고, 사실 대부분 중세 판타지들은 이런 숲 속 종족을 빼먹지 않습니다. 숲 속 종족은 중세 판타지를 떠받치는 거대한 기둥입니다. 따라서 이런 숲 속 종족들을 비판해도, 그게 완전히 헛된 작업은 아닐 겁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