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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루이드는 노동자의 날을 기념하지 못한다 본문

SF & 판타지/대지 모신

드루이드는 노동자의 날을 기념하지 못한다

OneTiger 2019. 5. 1. 19:05

 

 

비디오 게임 <템플 오브 엘레멘탈 이블>은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 기반합니다. 대부분 <던전스 앤 드래곤스>가 그러는 것처럼, <템플 오브 엘레멘탈 이블>은 전형적인 던전 탐험 이야기입니다. 여러 모험가들은 일행을 이루고, 모험가 일행은 황야와 숲과 고성과 동굴을 탐험합니다. 모험가 일행은 온갖 괴물들과 언데드들과 싸우고, 귀중한 물품들과 보물들을 발견합니다. <템플 오브 엘레멘탈 이블>은 전형적인 <던전스 앤 드래곤스> 게임입니다. 당연히 이 게임에는 드루이드 클래스가 있습니다. 드루이드 클래스는 자연 친화적입니다. 게임 속에서 드루이드는 각종 동물들을 소환하고 치유를 담당합니다.

 

드루이드처럼,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자연 친화적인 세력은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어떤 중세 유럽 판타지에 드루이드가 없다고 해도, 이 중세 유럽 판타지에는 자연 친화적인 세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드루이드는 자연 친화적인 세력에 속할 수 있습니다. <템플 오브 엘레멘탈 이블>처럼, 비디오 게임 <토탈 워: 워해머>는 중세 유럽 판타지입니다. 하지만 <템플 오브 엘레멘탈 이블>과 달리, <토탈 워: 워해머>는 던전 탐험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 서사시입니다. 여기에는 드루이드가 없으나, 대신 여기에는 우드 엘프 세력이 있습니다.

 

 

<템플 오브 엘레멘탈 이블>의 드루이드가 <토탈 워: 워해머>의 우드 엘프 세력과 어울린다고 해도, 이건 별로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이건 드루이드와 우드 엘프 세력이 똑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양쪽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드루이드와 우드 엘프가 똑같이 자연 친화적이라고 해도, <던전스 앤 드래곤스>와 <워해머>는 서로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드루이드와 우드 엘프는 자연 친화적인 클래스이고 세력입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드루이드가 숲을 탐사하는 것처럼, <워해머>에서 우드 엘프 역시 숲을 좋아하고 숲을 지키기 위해 애씁니다. 양쪽 모두 자연 친화적입니다.

 

하지만 예전에 몇몇 게시글이 지적한 것처럼, 아무리 드루이드와 우드 엘프들이 자연 친화적이라고 해도, 드루이드와 우드 엘프들은 21세기 환경 오염을 비판하지 못할 겁니다. 오늘날에는 환경 오염이 극심합니다. 기후 변화, 미세 플라스틱, 핵 폐기물, 생물 다양성 감소. 모두 꽤나 심각한 문제들입니다. 그래서 21세기 인류 문명이 <템플 오브 엘레멘탈 이블>과 <토탈 워: 워해머>에게 뭔가를 배울 수 있나요? 드루이드와 우드 엘프들이 환경 오염들을 비판할 수 있나요? 어떤 사람들은 이런 중세 유럽 판타지들에서 우리가 뭔가를 배울 수 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드루이드와 우드 엘프들이 자연 친화적이라고 해도, 그들은 환경 보호를 위한 실마리를 제공하지 못할 겁니다.

 

 

게임 제작자들이 드루이드와 우드 엘프를 설정할 때, 게임 제작자들은 실질적인 환경 보호 대안을 고민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렇게 저렇게 게임 제작자들은 클래스와 세력을 설정해야 했고, 그래서 그들은 자연 친화적인 클래스와 세력을 집어넣었을 겁니다. 소설 <호비트>와 <반지 전쟁>에서 존 로널드 톨킨이 숲을 사랑하는 우드 엘프들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드루이드 클래스와 우드 엘프 세력은 그저 이런 설정을 따라갈 뿐입니다. 물론 드루이드 클래스는 톨킨 소설들과 많이 다릅니다. 어쩌면 톨킨 소설들보다 켈트 신화는 훨씬 커다란 영감을 미쳤을 수 있습니다. 여러 중세 유럽 판타지들에서 드루이드들은 사슴뿔 머리 장식을 이용합니다. 우드 엘프 세력의 포레스트 드래곤 역시 사슴뿔을 매달았습니다.

 

이건 켈트 신화를 반영하는지 모릅니다. 켈트 신화에서 풍요로운 자연의 신 케르눈노스는 사슴뿔 장식을 매달았습니다. 그래서 드루이드와 포레스트 드래곤 역시 사슴뿔을 매다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본문 위의 스크린샷이 보여주는 것처럼,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드루이드들은 엘로나를 섬깁니다. 자연의 여신 엘로나의 상징은 사슴보다 유니콘입니다. 엘로나의 상징이 유니콘임에도, 왜 드루이드가 사슴뿔을 장식하나요? 어쩌면 온대 삼림에서 사슴이 가장 크고 온순한 야생 동물이기 때문에, 드루이드와 포레스트 드래곤은 사슴뿔을 장식하는지 모릅니다. 지브리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 역시 위대하고 신비로운 시시가미(사슴신)가 자연을 치유하고 복원한다고 말합니다.

 

 

게임 <워해머: 토탈 워>와 달리,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는 중세 유럽 판타지가 아닙니다. <모노노케 히메>는 동아시아 스팀펑크 판타지입니다. 하지만 사슴뿔 포레스트 드래곤처럼, 시시가미 역시 숲을 지키는 사슴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사슴이 온대 삼림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단순히 사슴뿔이 멋지기 때문에, 케르눈노스와 드루이드와 포레스트 드래곤과 시시가미는 사슴뿔을 매달았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사슴뿔이 나뭇가지와 비슷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슴과 숲을 똑같이 간주하는지 모릅니다. 동화 속에서 사슴은 사슴뿔을 이용해 나무들 사이에 숨을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로스트 사가>에 나오는 드루이드처럼, 사슴뿔과 나뭇가지는 꽤나 비슷합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드루이드와 우드 엘프 세력이 무슨 설정을 따르든, 드루이드와 우드 엘프 세력의 자연 친화적인 사상은 21세기 환경 오염들을 비판하지 못합니다. 21세기 환경 오염들이 근대적인 진보에서 비롯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5월 1일은 (임금) 노동자의 날입니다. 노동자는 근대적인 진보에서 비롯했습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에는 근대적인 진보가 없고, 여기에는 (임금) 노동자가 없습니다. 드루이드와 우드 엘프는 노동자를 분석하지 못합니다. 소설 <우주 상인>에서 환경 보호 단체 콘지는 대기업을 공격하나, 드루이드는 영리 기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드루이드가 근대적인 진보를 비판할 수 있다고 해도, 드루이드는 그저 피상적으로 비판할 뿐입니다. 드루이드와 우드 엘프는 21세기 환경 오염들을 지적하지 못합니다.

 

 

[이런 나무 거인은 자연(숲)을 지키기 원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연은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과 다릅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연과 문명을 분리합니다. 사람들은 단순한 흑백 논리로 자연과 문명을 바라봅니다. 사람들은 얄팍한 이분법으로 자연과 문명을 분리하고 양쪽이 변증법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환경 운동가들이 환경 보호를 외칠 때, 사람들은 인류 문명이 중세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환경 운동가들이 환경 보호를 주장할 때, 사람들은 "환경 보호는 인류 문명이 중세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라고 반박합니다. (개인적으로 저 역시 이런 반박들을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지겹게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21세기 인류 문명이 자연 환경을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본주의가 극심한 환경 오염들을 일으킴에도, 사람들은 자본주의보다 인류 전체를 싸잡아 비난합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옳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자본주의 대신 인류 전체를 비난합니다. 인류 문명 속에서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착취하고 수탈하고 학살할 수 있음에도, 사람들은 억압적인 계급 구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옳기 때문에, 사람들은 문명이 자연을 일방적으로 해친다고 간주합니다. 자본주의가 옳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본주의보다 인류 전체에게 죄를 뒤집어씌웁니다.

 

 

이런 얄팍한 이분법은 자본가 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수탈하는 범죄를 은폐합니다. 만약 우리가 환경 보호를 제대로 주장하고 싶다면, 우리는 이런 얄팍한 이분법을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가 얄팍한 이분법을 깨뜨리고 싶다면, 우리는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유럽 문명이 아메리카 식민지를 수탈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인클로저 사태가 농민들을 비참하게 내쫓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열대 밀림 파괴와 플랜테이션 농업과 노예 무역은 자본주의를 뒷받침했습니다.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생산 수단을 독차지하고 노동자 계급을 착취합니다. 노동자 계급은 노동보다 노동력을 판매해야 합니다. 언제나 자본주의 사회는 과잉 상품 생산에 빠지고 경제 공황을 뻥뻥 터뜨립니다. 사회적인 재생산과 돌봄 노동이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중요한 노동임에도, 더 많은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돌봄 노동에게 댓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돌봄 노동을 착취해야 합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가부장적인 편견에 빠지고 "집에서 여자는 아이를 돌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돌봄 노동이 인류 문명을 뒷받침함에도, 가부장적인 편견은 이걸 개무시합니다. 인류 사회에서 돌봄 노동이 사라진다면, 인류 문명이 이어질 수 있습니까?

 

 

환경 운동은 이런 것들을 지적하고 비판해야 합니다. 하지만 <템플 오브 이블 엘레멘탈>에서 드루이드는 이런 것들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토탈 워: 워해머>에서 포레스트 드래곤은 이런 것들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드루이드는 그저 자연 신성 주문들을 외우고 동물 동료를 부르고 다친 전사를 치료할 뿐입니다. 포레스트 드래곤은 그저 카오스 세력 유닛들에게 녹색 숨결을 뿜고 뱀파이어 바르굴프와 엎치락 뒤치락하고 비스트맨 몰구르를 째려볼 뿐입니다. 소설 <반지 전쟁>은 어떤가요? 환경 오염들을 해결하기 위해 존 로널드 톨킨이 대안을 제시하나요? 아니, 톨킨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톨킨은 꽃 이름을 언급하거나 무슨 나무가 있다고 신나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톨킨은 그저 산업 발전이 나쁘다고 비유할 뿐입니다. 심지어 존 로널드 톨킨은 환경 오염 문제를 소설에 반영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결국 수많은 중세 판타지들에서 다양한 드루이드들과 우드 엘프들이 자연 친화적이라고 떠든다고 해도, 이건 그저 생색에 불과합니다. 던전 탐험 이야기 속의 드루이드부터 거대한 전쟁 서사시 속의 포레스트 드래곤까지, 다들 그렇습니다. 게임 <토탈 워: 워해머>에서 아귈론(나무 거인 세력)은 드워프들과 치열하게 싸웁니다. 드워프들이 마구잡이로 벌목하기 때문입니다. 아귈론은 지성적인 나무들이고, 그래서 아귈론은 마구잡이 벌목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귈론은 드워프들과 박 터지게 싸웁니다. 아귈론은 태생적인 정체성을 중시합니다. 아귈론은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따지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따지지 않습니다. 아귈론은 계급과 이데올로기를 따지지 않습니다. 아귈론은 정체성(태생적으로 내가 누구인가)을 따집니다. 정체성 때문에 아귈론은 숲을 지키기 원합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들은 수많은 비인간 종족들을 늘어놓을 수 있고, 그래서 중세 유럽 판타지들은 정체성을 이야기하기에 좋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들 역시 비슷합니다.) 하지만 21세기 오늘날 환경 운동에게 정체성보다 계급과 이데올로기는 훨씬 중요합니다. 에코 페미니즘이 환경 운동을 이야기할 때, 에코 페미니즘은 정체성보다 계급과 이데올로기를 중시합니다.

 

에코 페미니즘이 공유지를 주장할 때, 이건 정체성 문제보다 계급 문제(누가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가)입니다. 그래서 아귈론과 에코 페미니즘이 똑같이 숲을 지키기 원한다고 해도, 양쪽은 다르게 주장합니다. 아귈론보다 드루이드 클래스는 낫습니다. 적어도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드루이드 '클래스'는 태생적인 정체성을 따지지 않습니다. 인간과 엘프와 노움은 모두 드루이드 주문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심지어 (비록 이런 사례가 드물다고 해도) 드워프 역시 자연의 여신을 숭배하고 울버린 동료를 사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드워프 드루이드가 자연의 여신을 숭배한다고 해도, 에코 페미니스트들과 달리, 드워프 드루이드는 누가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지 따지지 않습니다.

 

 

 

 

에코 페미니스트들이 공유지를 주장할 때, 그들은 누가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지 따집니다. 인도 에코 페미니즘 여자와 스웨덴 급진 좌파 남자가 다르다고 해도, 양쪽은 똑같이 공유지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왜? 양쪽이 정체성(태생적으로 내가 무슨 국적인가)보다 계급(누가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가)을 따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코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는 국적을 부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코 페미니즘은 여자들에게 국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마르크스주의는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건 우리가 당장 근대 민족 국가 문제를 모두 무시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심각한 사회 문제를 고민할 때, 우리는 국적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트와이스 사나를 보세요. 트와이스 사나가 헤이세이 시대를 언급했기 때문에, 어떤 남한 사람들은 사나를 비난합니다. 남한 사람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꽤나 민감합니다. 문제는 일본 제국주의가 서구 제국주의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서구 제국주의를 모방했음에도, 남한 사람들은 서구 제국주의를 추종합니다. 남한 사람들이 욱일기를 비난하고 유니언 잭을 추종할 때, 남한 사람들은 폭력 문제를 따지지 못합니다. 남한 사람들은 그저 정체성 문제(근대 민족 국가)를 따질 뿐입니다.

 

 

하지만 서구 제국주의는 정체성보다 계급 문제입니다. 에코 페미니즘이 제3세계 생태 마을들을 옹호하고 서구 제국주의를 비판할 때, 에코 페미니즘은 정체성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이런 에코 페미니즘과 달리, 트와이스 사나를 비난하는 남한 사람들은 그저 정체성에 매달릴 뿐입니다. 이런 남한 사람들은 제국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하지 못합니다. 아니, 남한 사람들이 사나를 긍정하든 비난하든, 자랑스러운 세계 최고의 반공 국가 대한민국은 제국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하지 못합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 역시 계급 문제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아귈론 세력은 정체성에 매달리고, 드루이드는 계급을 따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중세 유럽 판타지는 근대적인 환경 오염들을 근본적으로 비판하지 못합니다. 아귈론과 드루이드가 바라보는 자연, 21세기 인류 문명이 바라보는 자연은 다릅니다.

 

우리가 양쪽을 똑같다고 간주한다면, 우리는 심각한 오류에 빠질 거에요. 이건 포레스트 드래곤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거대한 나무 종족이 반드시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비롭고 울창한 숲 속의 포레스트 드래곤과 나무 거인 종족을 재미있게 바라보고 소비할 수 있습니다. 포레스트 드래곤과 나무 거인 종족에게는 미학이 있습니다. 이런 미학을 즐기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자본주의를 언급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나무 거인 종족은 어떻게 우리 인간이 자연 환경에 감탄하는지 보여줍니다. 인간이 풍성하고 울창한 숲에 감탄할 때, 인간은 그걸 멋지게 표현하기 원할 겁니다. 감성을 직접 표현하기 위해 인간은 예술을 만들고 싶어할 겁니다. 예술에는 비유와 과장과 상상이 있습니다.

 

 

어슐라 르 귄은 모든 문학이 비유라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모든 예술은 비유인지 모릅니다. 풍성한 숲을 비유하기 위해 예술은 나무 거인이라는 상상력을 덧붙일 수 있습니다. 울창한 숲이 신비롭기 때문에, 신비로운 자연을 강조하기 위해 예술은 포레스트 드래곤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심해 어류가 외계 생명체라고 비유하고 과장합니다. 그래서 이질적인 생명 현상을 강조하기 위해 스페이스 오페라는 외계 자연 생태계를 이야기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외계 자연 생태계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중세 유럽 판타지는 포레스트 드래곤을 상상할 수 있어요.

 

우리는 이런 생태적인 상상력을 즐길 수 있습니다. 현실에는 포레스트 드래곤이 없습니다. 현실에 포레스트 드래곤이 없음에도, 왜 중세 유럽 판타지가 포레스트 드래곤을 이야기하나요? 판타지 작가들이 과대망상 환자들인가요? 판타지 작가들이 우리를 속이기 원하나요? 아니, 그건 아닙니다. 인간이 감성을 표현하기 원할 때, 인간은 허구와 과장과 비유를 동원합니다. "어머, 최근에 미정이 얼굴에서 복숭아꽃이 피는 것 같아. 솔직히 말해. 미정이 너, 누구와 사귀는 중이지? 누구니?" 일상에서 우리는 이런 문구를 아무렇지 않게 말합니다. 하지만 이게 가능합니까? 어떻게 여자 얼굴에서 복숭아꽃이 개화할 수 있나요?

 

 

뭐, 여자 드루이드는 자연 신성 마법으로 얼굴에서 복숭아꽃을 틔울 수 있는지 모릅니다.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드루이드가 신속한 치유 주문을 시전(이른바 신속힐)할 때, 드루이드는 주변에 예쁜 꽃밭을 피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호모 사피엔스 여자는 얼굴에서 복숭아꽃을 틔우지 못합니다. 여자가 복숭아꽃을 틔우지 못함에도, 우리는 여자 얼굴에서 꽃이 피었다고 말합니다. 이건 여자의 외모가 화사하다는 비유이고 과장입니다. 우리는 비유와 과장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비유와 과장을 확대하기 원할 때, 우리는 본격적으로 예술 매체를 만듭니다. 그래서 중세 유럽 판타지는 포레스트 드래곤을 말합니다.

 

포레스트 드래곤 없이, 우리는 숲이 울창하고 신비롭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포레스트 드래곤을 이용해 자연을 훨씬 웅장하게 예찬할 수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울창한 숲은 중세 판타지 포레스트 드래곤을 낳습니다. 문제는 현실 속에서 자본주의가 숲을 거덜낸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현실 속에서 얄팍한 이분법이 지배적인 관념이라는 사실입니다. 숱한 사람들은 지배적인 관념을 따르고 환경 운동이 중세 시대를 추구한다고 오해합니다. 얄팍한 이분법은 우리의 사고 방식을 장악합니다. 그래서 온갖 창작물들은 유기농 토마토를 맛있게 먹는 행위가 자연 친화적이라고 말합니다.

 

 

[울창한 숲을 예찬하는 감성은 포레스트 드래곤을 낳으나, 현실 속에서 울창한 숲은 사라지는 중이에요.]

 

 

소설 <빼앗긴 자들>에서 타크베르는 생태학자입니다. 타크베르는 살아있는 원대한 상호 작용을 중시합니다. 동시에 타크베르는 노동자 평의회 사회를 지지합니다. 타크베르처럼, SF 생태학자들이 살아있는 상호 작용에 감탄하고 노동자 평의회 사회를 지지하나요? 소설 <듄>에서 리에트 카인즈는 행성 생태학자입니다. 동시에 리에트 카인즈는 프레멘 원주민 해방을 이끄는 운동권입니다. 하지만 리예트 카인즈는 계급 문제보다 정체성 문제를 중시합니다. 리예트 카인즈의 아버지 파도트 카인즈는 계급 문제를 의식했으나, 정체성 문제에 훨씬 많이 매달렸습니다.

 

프레멘 정체성으로서 폴 무앗딥은 제국 황제와 싸웠습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에서 엘리 새틀러는 고식물학자입니다. 소설 <소멸의 땅>에서 여자 생물학자는 생물 다양성을 중시합니다. 영화 <아바타>에서 그레이스 오거스틴은 외계 식물학자입니다. 2014년 영화 <고지라>에서 세리자와 박사는 우수 생물종(티타누스)을 연구합니다. 이런 등장인물들은 SF 생물/생태학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이런 등장인물들이 정말 얄팍한 이분법에서 벗어나나요? 이런 SF 생물/생태학자들이 자연과 문명이 변증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파악하나요? 이런 SF 생물/생태학자들이 총체적으로 사고하나요?

 

 

수많은 자연 과학자들은 탐욕스러운 인류 문명이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헛소리들을 나불거립니다. 수많은 자연 과학자들은 자유 시장 경제가 민중들과 자연 환경을 함께 파괴한다고 절대 지적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체계가 학교 교육들, 언론 매체들, 문화 예술들을 이용해 사람들을 세뇌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뇌 속에서 자연 과학자들은 연구합니다. 이미 어릴 때부터 자본주의 체계가 사람들에게 정체성 문제를 주입시키기 때문에, 정체성 문제에서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왜 국가 정부가 존재하는지 묻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지식인들조차 왕권 신수설처럼 하늘에서 국가 정부가 뚝 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사회화 과정과 제도권 교육은 충성스러운 자본주의 노예들을 양산합니다. SF 생물/생태학자들 역시 이런 오류에 빠집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드루이드는 생물학자, 생태학자와 비슷합니다. 엘리 새틀러와 그레이스 오거스틴과 세리자와 박사가 자연 환경을 조사하고 탐사하고 연구하는 것처럼, 드루이드 역시 자연 환경을 조사하고 탐사하고 연구합니다. 하지만 드루이드는 아예 근대적인 진보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드루이드는 이분법(선한 자연과 악한 문명)을 이야기합니다. 비단 중세 유럽 판타지만 아니라 <모노노케 히메> 같은 스팀펑크 판타지 역시 이분법을 쉽게 극복하지 못해요. 만약 우리가 얄팍한 실증주의 이분법을 깨뜨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중세 유럽 판타지 속의 드루이드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겁니다.

 

 

솔직히 아귈론 세력은 정체성 문제에 매달려야 할지 모릅니다. 아귈론 세력에서 드라이어드들, 트리킨들, 트리맨들, 포레스트 드래곤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종족들과 투닥투닥 싸워야 할지 모릅니다. 반면, 현실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인간입니다. 현실 속에서 다른 종족들이 없음에도, 사람들은 애국심을 부르짖거나 계급 문제를 깨닫지 못합니다. 노동 운동과 성 해방 운동 역시 이분법 함정에 빠질지 모릅니다. 사실 수많은 노동 운동들과 성 해방 운동들은 이분법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남한 사회에서 숱한 노동 조합들은 파업을 시도합니다.

 

이런 파업들이 계급 문제를 직시하고 자유 시장 경제를 뒤집기 원하나요? 아니, 이런 파업들은 그저 임금 상승과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할 뿐입니다. 노동 조합 총연맹이 그저 임금 상승만을 외친다면, 노동 운동은 노동자의 권리를 얻지 못할 겁니다. (물론 노동 운동 상황이 너무 열악하기 때문에, 의도와 상관없이, 노동 운동은 임금 상승에 매달립니다.) 환경 운동 역시 정체성 함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자연과 문명을 총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드루이드와 나무 거인과 포레스트 드래곤과 자연의 여신을 즐겁게 감상한다고 해도,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현실을 경계하고 직시하고 비판해야 할 겁니다.

 

 

※ 사진 출처: 민주 노총, http://nodong.org/statement/7435951,

민주 노총 인천 지역 본부, http://www.inodong.org/home2012/bbs/board.php?bo_table=new03&wr_id=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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