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F 생태주의

스팀펑크 소설이 좀비들을 만난다면…. 본문

SF & 판타지/스팀펑크, 사이언스 판타지

스팀펑크 소설이 좀비들을 만난다면….

OneTiger 2018. 1. 25. 19:56

치어리 프리스트가 쓴 <본쉐이커>는 스팀펑크 소설입니다. 좀비들이 우르르 등장하는 스팀펑크 소설이죠. 배경은 남북 전쟁 초기 같습니다. 북미 사람들은 추운 북부에 금광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고, 대박을 잡기 위해 다들 추운 북부로 떠납니다. 스팀펑크답게 굴착기를 이용해 사람들은 땅을 팝니다. 하지만 그때 지하에서 유독한 기체가 퍼졌습니다. 그 기체는 사람들을 죽이고 좀비들로 바꾸었죠. 저는 <본쉐이커>를 읽은 적이 없고, 그래서 자세한 내용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스팀펑크와 좀비 아포칼립스를 결합한 소설로서 <본쉐이커>는 꽤나 인기를 끄는 듯합니다. 출판 날짜는 2009년입니다. 흠, 2009년. 소설 <세계대전 Z>가 2006년에 나왔죠. 그 이후 좀비 아포칼립스가 크게 인기를 끌었고,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나 <웜 보디스> 같은 소설들 역시 2010년에 나왔고요. <본쉐이커>는 좀비 아포칼립스가 한창 인기를 끌었을 때 등장한 소설입니다. 치어리 프리스트는 여느 좀비 아포칼립스와 달리 스팀펑크와 좀비들의 결합이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세계대전 Z> 같은 소설들은 현대를 이야기하죠.



하지만 스팀펑크와 좀비 아포칼립스가 어울리는 조합일까요. 처음 이 소설을 봤을 때, 저는 뭔가 좀 어색하다고 생각합니다. 좀비 아포칼립스가 현대적인 SF 소설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리처드 매드슨이 쓴 <나는 전설이다>가 본격적인 좀비 아포칼립스를 성립했다고 평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허버트 웨스트 리애니메이터>를 언급하나, 사실 이 소설은 <프랑켄슈타인>의 정신적인 후손이죠. 소설 속에서 시체들이 걸어다니나, 이들은 좀비보다 인조인간에 가깝습니다. 허버트 웨스트 역시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의 정신적인 후계자이고요.


<나는 전설이다>는 현대적인 좀비 아포칼립스의 여러 요소들을 마련했습니다. 인류 문명이 무너졌습니다. 생존자들은 안전 가옥에서 간신히 목숨을 연명합니다. 하지만 엄청난 좀비들은 안전 가옥을 위협하고, 생존자들은 거기에서 버티고 버티고 또 버텨야 합니다. 좀비들은 인해 전술로 몰아붙이고, 언젠가 안전 가옥은 무너질지 모릅니다. 행운이 미소를 짓는다면, 생존자들은 치료약을 발견하거나, 좀비들을 쓸어버리거나, 다른 곳으로 탈출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행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안전 가옥도 무너지겠죠.



이런 이야기는 19세기 유럽에서 별로 인기를 끌지 않았습니다. 19세기에도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들은 많았습니다. 메리 셸리가 쓴 <최후의 인간>은 19세기 유럽의 대표적인 질병 아포칼립스 소설일 겁니다. 현대적인 좀비 아포칼립스는 좀비를 질병이라고 취급하고, 그래서 <최후의 인간>은 좀비 아포칼립스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었어요. 하지만 그건 가능성일 뿐이고, 메리 셸리는 좀비 아포칼립스 따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죠. 질병 때문에 사람들이 우르르 죽어나가나, <최후의 인간>은 생존자들이 안전 가옥에서 숨는 이야기와 거리가 멉니다.


스팀펑크 소설은 이른바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빅토리아 시대는 좀비보다 흡혈귀나 늑대인간, 유령을 이야기하는 시대입니다. (심지어 셜록 홈즈도 흡혈귀를 탐문했죠.) 아니면 개조 생명체나 인조인간이 있겠군요.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대표적인 19세기 악마는 좀비가 아니라 흡혈귀나 늑대인간이죠. 흡혈귀와 좀비는 똑같은 언데드(산송장)이나, 서로 위상이 다릅니다. 좀비는 생각 없이 우르르 몰려다닙니다. 반면, 흡혈귀는 영악하고 은밀하고 재주들이 많죠. 비단 드라큐라만 아니라 카르밀라 같은 흡혈귀 역시 그렇고요.



따라서 좀비 아포칼립스는 20세기 사이언스 픽션이 낳은 결과입니다. 19세기 소설이 아니라. 그래서 저는 스팀펑크 소설과 좀비 아포칼립스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는 개인적인 편견에 불과할 겁니다. 빅토리아 시대는 영악한 흡혈귀가 돌아다니는 고색창연한 시대입니다. 그건 빅토리아 시대의 일반적인 면모죠. 그렇다고 해도 스팀펑크 작가가 좀비들을 이야기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스팀펑크가 빅토리아 시대와 비슷하다고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스팀펑크 작가는 얼마든지 현대적인 소재들을 이야기할 수 있겠죠. 어떤 사람들은 스팀펑크가 과거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스팀펑크 작가에게 여러 제약들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저는 스팀펑크에게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팀펑크는 스페이스 오페라와 별로 다르지 않아요. 스팀펑크 작가가 우주선을 만들고 외계 행성으로 여행하는 이야기를 써도 그건 하등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그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겠죠.



뭐, 정말 중요한 점은 좀비나 우주선이 아닐 겁니다. 무엇을 쓰든, 작가가 그저 신나게 좀비나 외계 구축함을 때려잡는 이야기만 쓴다면, 작가가 그저 신나는 자극만 추구한다면, 그 소설은 시시한 블록버스터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