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과거의 스팀펑크, 미래의 스페이스 오페라 본문
[게임 <오더 1886>의 컨셉 아트. 이런 장면을 바라볼 때, SF 독자들이 무엇을 느낄까요.]
사이언스 판타지를 미래와 과거로 나눈다면, 스페이스 오페라와 스팀펑크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이언스 판타지이고, 스팀펑크는 과거를 이야기하는 사이언스 판타지죠. 두 장르는 많은 논란을 일으킵니다. 하드 SF 독자들은 스페이스 오페라와 스팀펑크가 사이언스 픽션을 가장한 판타지에 불과하다고 일축해요. 두 장르 모두 우주선이나 비행선, 로봇이나 인조인간, 외계인이나 유사 인간을 이야기하나, 결국 그것들은 외삽법적인 상상이 아니라 활극을 뛰우기 위한 장치에 불과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과학적인 패러다임보다 영웅 신화에서 출발하고, 스팀펑크는 기괴한 과학과 으시시한 흑마법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런 스페이스 오페라와 스팀펑크에서 과학적인 담론을 이끌어내기는 어렵겠죠. 애초에 작가들이 그런 부분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에요. 스페이스 오페라나 스팀펑크에서 기술적 특이점이나 유전자 조작에 따른 생명 윤리를 탐구하는 독자들은 별로 없을 겁니다. 물론 모든 스페이스 오페라와 스팀펑크가 빈약한 사이언스 판타지라는 뜻은 아닙니다.
게다가 현대적인 스팀펑크 작품들 역시 그저 19세기 활극에만 치중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도 팀 파워스, 필립 리브, 키스 로버츠, 차이나 미에빌 같은 작가들이 쓴 멋진 소설들을 만나볼 수 있어요. 과학적인 담론을 끄집어내지 못한다고 해도, 이런 작가들이 쓴 소설들은 독자를 생경한 세상으로 안내하고, 독자는 아찔하고 황홀한 도시 속을 걸을 수 있죠. 팀 파워스가 묘사하는 음침한 지하실이나 키스 로버츠가 이야기하는 증기 트럭이나 차이나 미에빌이 공을 들이는 추레한 도시들은 그저 빈약한 사이언스 판타지와 다른 차원을 형성하죠.
스페이스 오페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장르 명칭 자체는 비아냥이고, 오랜 동안 평론가들은 각종 싸구려 우주 활극들을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모던 스페이스 오페라 작가들은 웅장하고 기괴하고 도발적인 우주 제국들을 창시했고, 스페이스 오페라는 싸구려 우주 활극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댄 시몬스나 존 스칼지, 켄 맥레오드, 앤 레키 등은 스페이스 오페라가 좀 더 거대하고 깊어질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솔직히 이제 SF 평론가들은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경멸적인 명칭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악명(?)을 떨쳤던 스페이스 오페라에 비해 스팀펑크는 별로 악명을 떨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스팀펑크라는 명칭 역시 자조에 가까우나, 스페이스 오페라에 비해 스팀펑크는 덜 비판을 받는 듯해요. 모던 스페이스 오페라들이 멋진 결과를 선보였음에도 여전히 스페이스 오페라는 멸시와 비웃음을 받습니다. 반면, 스팀펑크는 그런 면모가 부족하죠. 물론 저는 해외 SF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스페이스 오페라 못지않게 스팀펑크 역시 수많은 조롱들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예전에 찰스 스트로스가 요즘 다들 너무 스팀펑크 소설들을 많이 쓴다고 지탄한 적이 있어요. 영어권 출판 시장에는 스팀펑크가 지긋지긋하다고 열통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왜 찰스 스트로스가 그렇게 지탄했는지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스페이스 오페라처럼 스팀펑크는 사이언스 판타지이고, 상상 과학을 가장해 마법이나 악마나 유령이나 괴수를 이야기할 수 있죠.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우주 함선들이 구시대적인 함대 전투를 벌이는 것처럼 스팀펑크에서 전투 비행선들은 화끈한 쌈박질을 펼칠 수 있습니다. 자연 과학을 잘 알지 못한다고 해도 전투 비행선들의 공중전을 쓰기에 무리가 없겠죠. 그래서 다들 스팀펑크에 몰렸을지 모르겠습니다. 자연 과학을 잘 몰라도 로봇, 생체 개조, 비행선이나 잠수함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도 스팀펑크는 스페이스 오페라보다 비판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찰스 스트로스가 그런 것처럼 요즘 다들 스팀펑크를 조롱하거나 경멸하는지 모르겠으나, 스팀펑크는 스페이스 오페라처럼 전설적인 악명을 떨치지 않는 듯해요. 아마 그 이유는 사람들이 19세기 활극보다 우주 전쟁이나 우주 모험담에 더 열광했기 때문이겠죠. 그만큼 우주 전쟁을 이야기하는 싸구려 스페이스 오페라들이 많이 등장했고요. 사람들이 전투 비행선보다 우주 함선에 열광하는 이유는 우주 함선이 훨씬 화려하기 때문이고요. 전투 비행선과 우주 함선 모두 파괴 욕구를 충족하는 가상의 함선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작가가 전투 비행선을 치장해도 비행선은 구닥다리일 뿐입니다. 반면, 우주 함선은 인공 지능을 두뇌로 장착하거나, 위력적인 레일 건을 발사하거나, 번쩍거리는 광선을 뿜거나, 미래적인 겉모습을 자랑할 수 있죠. 전투 비행선이 대형 쇠뇌나 대포를 쏠 때, 우주 함선은 레일 건이나 광선을 쏠 수 있고, 당연히 사람들은 구닥다리 비행선보다 화려한 우주선에 열광하겠죠. <스타 워즈> 같은 영화는 온갖 스페이스 오페라들에게 뜨거운 불을 지폈을 테고요. 물론 정확한 근거는 없습니다. 그저 개인적일 추측일 뿐이에요. 하지만 똑같이 사이언스 판타지라고 해도 스페이스 오페라가 스팀펑크보다 훨씬 미래적이고 찬란하게 보이고, 사람들은 거기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