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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만약 <두 번째 변종>이 스팀펑크 소설이라면…. 본문

SF & 판타지/스팀펑크, 사이언스 판타지

만약 <두 번째 변종>이 스팀펑크 소설이라면….

OneTiger 2018. 2. 1. 19:03

[게임 <오더 1886>의 컨셉 아트. 이런 스팀펑크는 냉전 분위기를 쉽게 풍기지 못하겠죠.]



만약 필립 딕이 스팀펑크 소설을 썼다면? 가령, <두 번째 변종>이나 <사기꾼 로봇>이나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가 스팀펑크라면? 솔직히 저는 기술적인 부분에서 별로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필립 딕이 저런 소설들을 가상의 19세기에 집어넣는다고 해도 저는 기술적인 부분에서 크게 바뀌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두 번째 변종>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로봇들입니다. 살상 로봇들은 사방팔방을 돌아다니고 사람들을 살해합니다. 사람들은 참호 속에 숨고 간신히 목숨을 건지죠. 달은 인류의 마지막 보루 같으나, 지구에는 이미 희망이 없는 듯합니다.


심지어 살상 로봇들은 인간과 닮은 로봇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겉보기에 이런 로봇은 인간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로봇을 부수고 부품들을 확인하기 전까지, 인간들은 인간형 로봇을 구분하지 못해요. 이런 이야기를 스팀펑크로 구현할 수 있을까요. 네, 구현할 수 있겠죠. 스팀펑크 소설에서 온갖 로봇들은 드문 소재가 아닙니다. 19세기 SF 작가들은 로봇을 상상하지 못했으나, 현대적인 스팀펑크 소설들은 로봇을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어요. 로봇이 필요한가요? 스팀펑크 작가들은 숱한 로봇들을 내보낼 수 있습니다.



인간과 닮은 로봇? 이것 역시 문제가 없습니다. 이미 19세기 작가들은 <미래의 이브> 같은 소설을 썼습니다. 인간과 닮은 기계, 인조인간은 고전적인 사이언티픽 로망스에서 낯선 소재가 아니었어요. 당연히 현대적인 스팀펑크 소설 역시 인조인간을 이야기할 수 있죠. 달 기지는 스팀펑크 소설에서 익숙하지 않은 소재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스팀펑크 소설에서 인류가 달에 기지를 차렸다고 해도, 저는 그게 하등 이상하지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만약 그게 이상하다면, 작가는 달 기지 대신 다른 보루를 마련할 수 있겠죠. 작가는 로봇들이 대부분 지역들을 차지했고 인류가 대륙 하나에 몰렸다고 설정할 수 있어요.


오스트레일리아처럼 그 대륙은 섬입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면, 사람들은 증기선이나 비행선을 타야만 합니다. 이렇게 <두 번째 변종>은 스팀펑크로 변할 수 있겠죠. 그리고 그렇게 변한다고 해도, 소설 주제는 크게 변하지 않을 테고요. 다른 두 소설 역시 변할 수 있을 겁니다. <사기꾼 로봇>은 외계인과 인류가 전쟁하는 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작가가 이 외계인이 다른 차원에서 건너온 종족이라고 설정해도, 별로 무리가 없겠죠. 필립 딕은 외계인을 하드하게 그리는 작가가 아니에요.



스팀펑크는 다른 판타지와 합칠 수 있고, 그래서 스팀펑크는 다른 차원의 종족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다른 차원의 종족과 인류가 서로 싸운다면, 그건 외계인과 인류가 싸우는 전쟁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아니, 사실 사람들끼리 서로 싸운다고 해도, 소설 주제는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외계인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전쟁 때문에 인간과 닮은 로봇이 등장한다는 상황입니다. <두 번째 변종>이 그런 것처럼 그리고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이 그런 것처럼, <사기꾼 로봇>은 인간이 인간을 로봇이라고 오해하는 상황을 그립니다. 이는 필립 딕의 주특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한다고 해도 그 대상을 확실히 인식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겉모습이나 일부분만 파악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게 전부라고 오해하는지 모르죠.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사기꾼 로봇>은 그런 상황을 표현합니다. <미래의 이브>는 이미 인간이 로봇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을 묘사했고요. 따라서 <사기꾼 로봇>이 스팀펑크로 바뀐다고 해도 소설 주제나 분위기는 바뀌지 않을 겁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은 디스토피아 소설입니다. 거대한 참사 때문에 환경 오염은 인류 문명을 수렁 속으로 밀어넣었습니다. 부자들은 살기 좋은 다른 행성들로 도망치고, 약자들만 지구에서 살아갑니다. 숱한 동물들이 죽었기 때문에 진짜 동물은 아주 희귀합니다. 대신 동물 로봇들이 대세입니다. 게다가 도시에서 인간과 비슷한 인조인간들이 설치고, 그걸 뒤쫓는 인조인간 사냥꾼들 역시 존재합니다. 이것 역시 스팀펑크로 구현할 수 있는 이야기죠. 요즘 사람들은 중국만 욕하고 런던 스모그를 고대 전설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런던 스모그를 고려한다면, 스팀펑크가 환경 오염을 이야기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인조인간은 이미 충분히 거론한 소재고요.


따라서 필립 딕이 스팀펑크를 썼다고 해도, <두 번째 변종>이나 <사기꾼 로봇>이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이 크게 바뀌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스팀펑크가 된 <두 번째 변종>과 원래의 <두 번째 변종> 사이에는 아무 차이가 없을까요. 스팀펑크 소설과 원래 소설은 그저 똑같은 소설일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스팀펑크 소설보다 원래 소설이 현대 문명의 모순을 더 여실히 드러낼 수 있겠죠. 적어도 독자들은 그렇게 느낄 겁니다. 20세기 문명과 스팀펑크 설정은 서로 겉모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필립 딕은 냉전 시대를 살아간 작가였습니다. 그리고 억압적인 자유 민주주의나 자본주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얼마나 필립 딕이 그런 사상 투쟁을 깊이 인식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에 필립 딕 소설들이 많고, 어쩌면 그 소설들에 사상 투쟁적인 측면이 나오는지 모르죠. 저는 필립 딕이 쓴 소설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솔직히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소설들을 많이 읽지 않았어요. (<화성의 타임 슬립>이나 <닥터 블러드머니> 같은 소설들은 진짜….) 하지만 가끔 필립 딕이 자유 민주주의나 자본주의에 혐오를 드러내는 듯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두 번째 변종> 같은 소설은 자유 민주주의가 현실 사회주의와 한창 대립하는 감성을 짙게 나타내고요.


스팀펑크는 이런 시대적인 감성, 사회적인 감성을 풍길 수 있을까요. 아마 가능하겠죠. 하지만 가상의 19세기는 그런 대립을 강렬하게 풍기지 못할 겁니다. 로봇이 인간과 똑같다는 기술적인 소재가 비슷하다고 해도, 사이버펑크와 스팀펑크에서 시대적인 감성은 서로 다르죠. 흔히 사람들은 SF 소설에서 기술적인 부분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좀 더 다르게 생각합니다. SF 소설에서 사회적이고 시대적인 감성 역시 중요해요. 그래서 <두 번째 변종>을 스팀펑크로 바꾸면, 강렬함이 다소 희미해질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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