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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야만인 코난>과 고대 기계 로봇 본문

SF & 판타지/스팀펑크, 사이언스 판타지

<야만인 코난>과 고대 기계 로봇

OneTiger 2018. 2. 5. 19:01

고대 신화와 기계 로봇은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아마 대부분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겁니다. 기계 로봇은 20세기에 비롯한 결과이고, 고대 사람들은 로봇을 만들지 못했어요. 그들은 공장조차 만들지 못했죠. 하지만 사이언스 판타지나 서사 판타지는 기계 로봇을 고대 신화 속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스팀펑크를 근대가 아니라 고대로 연장한 결과라고 부를 수 있겠죠. 원래 스팀펑크는 19세기와 어울리는 장르입니다. 그때 유럽이 산업 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이죠.


그래서 스팀펑크 작가들은 산업 혁명을 과장하고, 비행선이나 증기 잠수함, 인조인간을 늘어놓습니다. 장르 소설가들은 이런 설정을 더 머나먼 과거에 적용하기 시작했고, 스팀펑크는 중세나 고대를 물들입니다. 솔직히 저는 스팀펑크의 마지노선이 중세(대략 14세기)라고 생각해요. 고대 문명이 워낙 척박하기 때문에 장르 소설가조차 자동 기계가 존재했다고 뻥치기 어렵죠. 하지만 가끔 그런 시도를 감행하는 창작물이 있고, 그래서 저는 <야만인 코난>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야만인 코난>이 고대 기계 로봇을 이야기하는 판타지 소설이라고 착각한 적이 있습니다.



로버트 하워드는 <야만인 코난>으로 유명합니다. <야만인 코난>은 대표적인 검마 판타지들 중 하나이고, 가상의 고대 신화 속에서 활약하는 코난을 이야기하죠. 야만인이라는 제목처럼 소설 내용은 단순합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들이 <야만인 코난>을 다소 오해하는 것 같아요. 코난 자체는 무식하게 때려부수는 전형적인 전사이나, 소설 분위기는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아요. 음침하고 기이한 던전을 구현하기 위해 로버트 하워드는 많은 공을 들였고, 종종 건장한 코난보다 으스스한 던전이 더욱 돋보입니다. 아무리 코난이 무식한 전사라고 해도 소설 분위기는 그렇게 무식하지 않고, 독자를 가상의 고대 신화 속으로 조용히 밀어넣습니다.


저는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그렇게 던전을 묘사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신나게 썰고 베는 코난의 활약을 기대할 겁니다. 하지만 작가가 던전 분위기를 충실하게 구현했기 때문에 마침내 코난의 활약 역시 빛을 발할 수 있었어요. 어쩌면 제가 <야만인 코난>을 과대평가하는지 모르죠. 저는 검마 판타지를 쓰는 창작가가 싸움박질보다 이런 분위기 형성에 세심한 공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코난 이외에 또 다른 고대 전사를 창작한 작가로서 로버트 하워드는 유명합니다. 레드 소냐죠. 붉은 머리, 화끈한 싸움, 무엇보다 금속 비키니 갑옷…. 남정네들의 성적 환상을 듬뿍 충족하는 등장인물이죠. 이런 결과물을 볼 때마다 저는 SF 및 판타지가 무슨 길을 걸었는지 새삼스럽게 깨닫곤 합니다. (그래서 장르 소설가들이 아무리 많이 페미니즘과 정치적 올바름을 떠들어도 그건 부족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오랜 동안 성별과 인종을 상품으로 써먹었으면, 장르 소설가들은 다시 오랜 동안 반성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로버트 하워드가 설정한 레드 소냐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레드 소냐는 서로 다릅니다. 사실 금속 비키니 갑옷을 입은 레드 소냐를 본다면, 로버트 하워드는 크게 분통을 터뜨릴지 모릅니다. 이 양반은 그런 등장인물을 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키니 갑옷을 입은 레드 소냐는 만화가들이 재해석한 결과물이나, 만화가들은 로버트 하워드가 원작자라고 내세웠습니다. 로버트 하워드가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만화가들은 그게 판매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겠죠. 이후 <야만인 코난>을 영화로 만든 영화 회사는 <레드 소냐>를 만듭니다. 코난 역시 (이름을 바꾸고) 등장하죠.



<레드 소냐>를 처음 봤을 때, 저는 거대한 뱀 같은 살상 기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레드 소냐>를 함께 보는 가족은 "어떻게 저런 시대에서 기계 로봇을 만들 수 있지? 저건 엉터리야."라고 말하더군요. 저 역시 어떻게 가상의 고대 신화가 살상 기계를 만들 수 있는지 궁금했고, 훨씬 나중에 <야만인 코난>을 뒤적였습니다. 하지만 로버트 하워드는 살상 기계 설정을 구현하지 않았어요. 그건 영화 회사가 구현한 설정에 불과했죠. 영화에는 자세한 작동 원리나 설정이 나오지 않았고요. 아니, 어쩌면 만화가들이 만든 설정일지 모르겠어요.


누가 만들었든, 저는 이런 설정이 독특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대 신화와 기계 로봇은 서로 어울리지 않으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어요. <신들의 사회>나 <일리움> 같은 소설들 역시 이런 차이를 노리는 사례들이겠죠. 고대 신화와 첨단 과학. 서로 어울리지 않으나, 그래서 더욱 독특하고 재미있는…. 마법과 과학이 대결하는 설정 역시 이런 매력이겠죠. 물론 풍성한 필력이 뒷받침하지 않는다면, 그저 어설픈 조합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솔직히 <레드 소냐>에서 스팀펑크의 로망을 느끼는 관객은 별로 없을 거에요. 영화 회사가 그런 부분에 충실했으면 좋았겠으나, 영화 회사는 그저 코난을 이용해 대박만 터뜨리고 싶었겠죠, 뭐.



※ 요즘 사람들은 기이한 기술에 펑크를 붙이면, 펑크 장르 하나가 탄생한다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대충 여러 기술들에게 펑크라는 단어를 붙이고, 무슨 펑크라고 운운해요. 하지만 그건 아니죠. 원래 SF 소설들은 기이한 기술들을 선보였고, 그게 사회 구조를 바꾼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듄>이 스파이스펑크가 되고, <캔자스의 유령>이 섹스펑크가 되고, <쿼런틴>이 모드펑크가 되나요? 그러면 <어둠의 왼손>은 앤서블펑크가 되겠군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펑크를 갖다붙이는 현상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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