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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솔라리스>와 <노변의 피크닉> - 모호한 이야기들 본문

감상, 분류, 규정/소설을 읽다

<솔라리스>와 <노변의 피크닉> - 모호한 이야기들

OneTiger 2018. 2. 4. 18:59

"결론도 없고, 설명도 없고, 해답도 없고…. 누가 그런 소설을 읽나? 왜 그런 갑갑한 소설을 읽지?" SF 세상에는 이런 평가를 받는 소설들이 있을 겁니다. 솔직히 대부분 SF 소설들은 모든 설정에 명쾌한 설명을 붙이지 못해요. (그래서 SF 소설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SF 소설이 황당하다고 비난하죠.) 요란한 사이언스 판타지부터 묵직한 하드 사이언스 픽션까지, SF 소설들에서 설정은 상상의 영역입니다. 사이언스 판타지 소설에서 작가는 온갖 인공 지능, 로봇, 돌연변이 괴물, 개조 생명체, 외계인을 늘어놓을 수 있으나, 어떻게 그런 것들이 작동하거나 살아있는지 말하지 못할 겁니다.


그런 작동 원리가 궁금한 독자는 소설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겠죠. 작가가 어떤 인조인간이나 돌연변이 괴물을 제시하면, 독자는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하드 SF 소설은 다를까요. 숱한 하드 SF 소설들은 우주선이나 외계 문명이나 궤도 승강기를 내놓습니다. 하지만 작가조차 어떻게 우주선이나 궤도 승강기가 작동하는지 알지 못하죠. 하드 SF 작가는 사이언스 판타지 작가보다 더 많이 설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종종 독자는 설정이 논리적이지 않다고 시비를 따질 수 있으나, 그 논리조차 상상 속의 논리죠. 이는 암묵적인 규칙입니다. 하지만 어떤 소설은 그런 모호함을 넘어 아예 불가항력을 밀어붙입니다.



소설 <솔라리스>에서 주인공 크리스는 프로메테우스를 떠나고 솔라리스 정거장으로 향합니다. 솔라리스 정거장에 무사히 도착했으나, 크리스는 예상하지 못한 사태를 만나요. 자신이 만나기 원하는 과학자는 사라졌고, 어떤 이상한 여인이 그 과학자와 함께 있고, 정거장에 머무는 다른 두 과학자는 헛소리를 지껄이거나 아예 방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크리스는 예전에 죽은 아내를 만납니다. 이 모든 사태는 솔라리스라는 기이한 행성 위에서 벌어졌어요. 솔라리스는 언뜻 지적 존재 같으나, 인간이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입니다. 과연 솔라리스를 존재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요.


의문을 풀기 위해 크리스는 우주 정거장에 비치한 여러 기록물들을 뒤적이나, 마음에 드는 해답을 찾지 못합니다. 다른 과학자는 계속 답답한 소리들만 늘어놓고, 크리스는 부활한 아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크리스는 우주 정거장에서 사태를 수습하는 동시에 솔라리스를 연구해야 합니다. 덕분에 <솔라리스>는 이야기를 평범하게 끌고 가지 않습니다. <솔라리스>는 두꺼운 책이 아닙니다. 하지만 꽤나 혼란스럽고 독자가 편하게 읽을 책이 아니죠.



<솔라리스>는 흔히 사람들이 바라는 개연성이 있고 명쾌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야기에 어떤 질서가 있고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이어지기 바랍니다. 그리고 끝에서 여러 갈등들이 풀리고 딱 떨어지는 해답을 찾기 바라죠. 여러 대중적인 소설들, 만화들, 영화들, 게임들은 그런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그런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개연성이 없다고 비판합니다. 가끔 저는 사람들이 개연성을 우주적인 진리라고 여기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창작물이 추구해야 하는 최고 가치가 개연성인 것처럼 다들 이야기해요.


당연히 작가가 이야기를 쓴다면, 어느 정도 개연성을 갖춰야 할 겁니다. 하지만 개연성은 이야기가 갖추어야 하는 일부분일 뿐이고, 최고 가치가 아닙니다. 분위기나 주제를 위해 작가는 얼마든지 개연성을 희생하거나 날려버릴 수 있어요. 특히, SF 소설처럼 인간이 비일상적인 뭔가와 마주치는 소설에서 개연성은 다른 것들보다 뒤로 밀릴 겁니다. 비일상적인 존재 앞에서 어떻게 작가가 순차적으로 질서 있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겠어요. 그런 하드 SF 소설들 역시 존재하나, 스타니스와프 렘은 <솔라리스>를 그렇게 쓰지 않았습니다.



<솔라리스>에서 스타니스와프 렘은 솔라리스 행성에 관한 설정들을 여기저기 늘어놓습니다. 때때로 한 장을 통째로 설정에 할애합니다. 가끔 <솔라리스>에서 설정은 이야기보다 앞서 나갑니다. 설정이 이야기보다 중요해 보이죠. 그렇다고 해도 설정이 이야기를 잡아먹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초보 작가 지망생들은 거창한 설정에 매달리느라 그런 실수를 저지르나, <솔라리스>는 그런 소설이 아닙니다. 하지만 솔라리스에 관한 난해하고 학구적인 설정들은 충분히 독자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이야기를 좀 더 유연하고 쉽게 이끌어가기 위해 스타니스와프 렘은 다른 방법들을 고안해야 했을지 몰라요. 스타니스와프 렘은 글을 무조건 어렵게 쓰는 작가가 아니죠. 하지만 이 양반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을 마주쳤을 때 인간이 어떤 관념을 형성할 수 있는지 그리기 원했습니다. 그렇게 쓰고 싶다면, 유연하고 쉬운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을 테고요. 스타니스와프 렘은 함부로 명쾌한 해답을 던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해답을 감추고, 어떤 독자는 열통을 터뜨릴지 모릅니다. (특히 다른 두 방문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아요. 그들이 누구일까요.)



스타니스타와프 렘은 어느 비평서에서 <노변의 피크닉>을 호평했습니다. 깐깐한 양반답게 비판적인 호평이었으나, 이 양반은 <노변의 피크닉>과 스트루가츠키 형제에게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솔라리스>에서 어떤 영감을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솔라리스>처럼 <노변의 피크닉>은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을 다룹니다. 솔직히 <솔라리스>는 SF 소설이나, <노변의 피크닉>은 SF 울타리를 슬슬 벗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을 떠나 초현실주의 소설에 열심히 수렴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장르는 중요하지 않겠죠. 중요한 점은 이 소설이 외계인 이야기임에도 외계인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솔라리스>는 외계 행성을 보여주고 지적 존재(?)를 묘사했습니다. 그저 묘사했을 뿐이죠. 크리스는 이상한 물결이나 조각이 무엇인지 절대 알지 못합니다. 이상한 물결과 접촉하려고 시도했으나, 그건 수포로 돌아갔죠. <노변의 피크닉>은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외계인들은 아예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남긴 물건들만 등장하죠. 그리고 스토커들이나 과학자들은 왜 외계인들이 그것들을 남겼는지 몰라요.



과학자들은 외계인들이 남긴 물건들을 열심히 연구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연구해도 그들은 수박의 겉표면만 핥을 뿐입니다. 왜 외계인들이 지구에 왔을까요. 왜 그들이 이상한 물건들을 남겼을까요. 이상한 물건들의 용도가 무엇일까요. 지구인들은 나름대로 외계 물건들을 이런저런 목적에 사용하나, 진짜 용도를 알지 못합니다. 게다가 외계인들이 방문한 구역은 기괴한 현상들이 발생하는 출입 금지 구역이 되었습니다. 구역에는 온갖 진귀한 외계 물건들이 널렸습니다. 동시에 거기에서 기괴한 현상들이 발생합니다.


아무도 그게 무슨 현상인지 알지 못합니다. 왜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과학자들이나 스토커들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기괴한 현상을 피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죽기 전까지 아무도 그런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요. 따라서 과학자들이나 스토커들은 값비싼 시행착오를 거쳐야 합니다. 누군가를 고기 방패로 내밀어야 하죠. 그렇게 그들이 고생해도 그들은 왜 외계인들이 방문했는지 절대 모릅니다. 과학자들은 여러 가설들을 지었고, 노변의 피크닉 가설은 그것들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게 진실일까요.



스타니스와프 렘이 그런 것처럼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절대 해답을 쉽게 던지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해답은 존재하지 않아요. 탐정 소설에서 탐정이 멋지게 범인을 잡는 카타르시스는 <노변의 피크닉>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실 <노변의 피크닉>보다 <솔라리스>가 보다 명쾌하고 보다 개연성이 있을 겁니다. 적어도 크리스는 이상한 물결을 봤고 만졌습니다. 반면, 스토커들이나 과학자들은 그것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건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그들은 왜 자신들이 죽었는지 몰라요. 다른 사람들 역시 모르죠.


어쩌면 누군가는 구역 안에 괴물들이 산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구역은 괴물들이 살기에 알맞은 장소입니다. 고지라 같은 거대 괴수가 존재할지 모르고, 제노모프 같은 흉악한 절지류 기생충들이 돌아다닐지 모르죠. 그것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도 괴물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절대 괴물을 묘사하지 않아요. 어쩌면 형제 작가는 괴물이 소설의 주제나 분위기를 해칠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솔직히 거대 괴수가 등장했다면, 독자들은 스토커들보다 거대 괴수를 주목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저 그런 이유 때문에 형제 작가가 두루뭉실하게 이상한 현상을 묘사하지 않았을 겁니다.



여러 평론가들은 <노변의 피크닉>이 소비에트 연방을 비판하는 이야기라고 해석합니다. 어쩌면 그럴 수 있겠죠. 작가는 자신이 사는 환경을 반영하곤 하고, 따라서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소비에트 연방을 비판했을 겁니다. 하지만 <노변의 피크닉>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스토커들은 불법적인 침입을 저지릅니다. 스토커들은 위험한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다르지 않아요. 주인공 스토커 레드는 아예 자본주의를 직접 겨냥하는 것 같은 발언을 내뱉습니다.


하지만 <노변의 피크닉>은 소비엔트 연방과 자본주의를 떠나고 보다 거대한 이야기를 내놓습니다. 그건 호모 사피엔스, 생각하는 동물, 이성적인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대상이죠. 그런 대상을 이해하는 과정은 지난하고 개연성 따위가 없습니다. 이 소설에서 개연성 따위는 쓰레기통에 들어가야 할지 모릅니다. 만약 이 소설이 순차적이고 논리적인 구성을 보여줬다면, 그게 분위기를 희석했을지 모르죠. 수많은 사람들은 기이한 구역을 둘러싸고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고 갈등하나, 심지어 소설은 그들을 모두 보여주지 않습니다.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독자에게 많은 것을 맡깁니다.



사실 <노변의 피크닉>은 별로 긴 소설이 아닙니다. 이는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쓴 다른 소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길다란 제목과 달리 이 소설은 별로 길지 않아요. 하지만 이런 짧은 소설에서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아주 거대한 담론을 던지고, 자세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환상 소설들은 많고, 그런 소설들은 어떤 논리를 내세웁니다. <솔라리스>나 <노변의 피크닉>, <세상이 10억 년>은 그렇지 않아요.


<솔라리스>나 <노변의 피크닉>은 한층 더 치열한 상상력을 요구합니다. 개연성 따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명쾌한 해답이나 순차적인 사건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독자는 왜 개연성이나 명쾌한 해답이나 순차적인 이야기들이 없는 소설이 흥미로운지 물을지 모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게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불가항력적인 사태 앞에서 인간은 좌절할 겁니다. <솔라리스>나 <노변의 피크닉>은 그런 모습을 그립니다.



하지만 좌절하는 인간을 그리기 위해 작가가 반드시 SF 소설을 쓸 필요는 없겠죠. <솔라리스>나 <노변의 피크닉>은 그저 불가항력을 넘어 인간이 범접하지 못하는 대상을 그립니다. 만약 19세기 작가가 그런 대상을 쓰고 싶었다면, 구태여 외계인을 불러올 이유가 없었을 겁니다. 19세기 작가는 향유 고래 같은 대상을 쓰고, 인식의 한계를 이야기할 수 있었겠죠. <백경>은 그런 소설이고요. 하지만 스타니스와프 렘이나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20세기 작가이고, 향유 고래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보다 거대하고 우주적인 뭔가가 필요했겠죠.


그런 대상과 마주칠 때, 인간이 그런 대상을 뭐라고 생각할까요. 저는 그런 관념이 궁금합니다. 그래서 <노변의 피크닉>은 재미있는 소설이죠. 그리고 SF 세상에는 <노변의 피크닉>처럼 명쾌하지 않으나 흥미로운 소설들이 많습니다. SF 소설은 탐정 소설이 아닙니다. SF 작가는 모든 것을 말끔하게 설명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실 하드 SF 작가조차 모든 것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죠. 어쩌면 이런 모호함 때문에 사람들이 SF 소설을 꺼리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방점을 외계인이 아니라 관념의 변화에 찍는다면, 그건 어려움이 아니라 재미가 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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