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소설 <쥬라기 공원>에서 엘리 새틀러의 제한적인 시점 본문
소설 <쥬라기 공원>에서 앨런 그랜트와 화석 발굴팀은 어떤 방문자와 만납니다. 방문자는 환경청 직원입니다. 환경청 직원은 존 해먼드가 수상한 짓거리를 꾸민다고 생각하고 앨런 그랜트와 면담하기 원합니다. 엘리 새틀러는 환경청 직원을 안내합니다. 환경청 직원은 남자이고, 그래서 남자는 엘리 새틀러를 보고 깜짝 놀랍니다. 젊은 여자로서 엘리 새틀러가 파격적인 복장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야외 화석 발굴 현장에서 고생물학 발굴팀은 격식을 따지지 않습니다. 물론 엘리 새틀러가 예쁘지 않았다면, 환경청 직원은 별로 놀라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가끔 소설 <쥬라기 공원>은 엘리 새틀러가 예쁘다고 암시합니다. 괴팍한 아이언 말콤은 노골적으로 각선미를 운운합니다. 심지어 어린 팀 머피조차 엘리 새틀러의 각선미를 바라봅니다. 남자들이 엘리 새틀러를 쳐다볼 때, 엘리 새틀러가 뭐라고 느끼나요? 젊고 예쁜 여자로서 엘리 새틀러가 이런 시선을 즐기나요? 아니면 엘리 새틀러가 이런 것이 성 차별이라고 느끼나요? 독자는 알지 못합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이 아무것도 서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쥬라기 공원>에는 여러 등장인물들이 있고, 소설은 여러 등장인물들의 시점들을 보여줍니다. 엘리 새틀러 역시 자신의 시점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남자들이 엘리 새틀러를 쳐다본다고 해도, 소설은 뭐라고 엘리 새틀러가 느끼는지 보여주지 않습니다. 왜 소설이 보여주지 않나요? 괴팍한 어른 아이언 말콤부터 성실한 소년 팀 머피까지, 여러 남자들은 엘리 새틀러를 쳐다봅니다. 엘리 새틀러는 영민합니다. 엘리 새틀러는 이런 시선들을 인식할 겁니다. 어쩌면 엘리 새틀러에게 이런 시선들은 일상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소설은 뭐라고 엘리 새틀러가 생각하는지 서술하지 않습니다. 왜 소설이 이것을 서술하지 않나요? 엘리 새틀러에게 아무 생각이 없나요? 아니면 소설이 의도적으로 이것을 서술하지 않나요? 아니면 작가 마이클 크라이튼이 이것을 잊었나요?
엘리 새틀러는 이런 시선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끼는지 모릅니다. 엘리 새틀러는 이런 시선들을 가볍게 무시하거나 넘어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소설은 뭐라고 엘리가 느끼는지 서술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여자들은 이런 시선들을 의식합니다. 남자들이 계속 여자를 쳐다본다면, 좋든 싫든, 여자는 시선들을 의식해야 합니다. 어떤 여자들은 이런 시선들을 반기고, 어떤 여자들은 이런 시선들을 싫어합니다. 어떤 여자들은 가부장 사회가 성 희롱, 성 폭행, 강간 문화를 조장한다고 비판합니다. 엘리 새틀러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소설은 아무것도 서술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마이클 크라이튼은 실수했는지 모릅니다. 마이클 크라이튼은 가부장 문화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가부장 문화가 여자를 왜곡한다고 해도, 그래서 여자들이 주변 시선들을 의식해야 한다고 해도, 마이클 크라이튼은 가부장 문화를 분석하지 않습니다. 술취한 로버트 멀둔이 "제기랄, 이 여자야! 빌어먹을!"이라고 엘리 새틀러를 욕한 것처럼, <쥬라기 공원>이 가부장 편견을 언급한다고 해도, 이건 그저 가벼운 문제 제기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엘리 새틀러는 주변 시선들이 부담스럽다고 느끼는지 모르나, 마이클 크라이튼은 이것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설은 뭐라고 엘리 새틀러가 느끼는지 서술하지 않았을 겁니다.
소설이 서술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자는 알지 못합니다. 팀 머피가 엘리 새틀러의 각선미를 바라보는 동안, 엘리 새틀러는 이것을 의식하고 뭔가를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엘리는 심지어 소년조차 자신을 예쁘게 여긴다고 즐거워하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엘리는 이런 시선들에 넌더리를 내는지 모릅니다. 소설은 뭐라고 엘리가 느끼는지 서술하지 않고, 그래서 독자는 뭐라고 엘리가 느끼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소설이 서술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현실을 이용해 뭐라고 엘리가 느끼는지 추측하고 연상하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수많은 여자들이 주변 시선들을 의식하기 때문에, 독자는 현실을 이용해 추측하고 연상하고 해석합니다.
이렇게 소설이 시점을 감추거나 서술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추측하고 연상하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반드시 소설 시점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독자는 소설 시점을 거부하고 의심할 수 있습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은 가부장 문화를 별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숱한 기업 경영자들이 남자들이고, <쥬라기 공원>이 과학 기술 상업화를 비판함에도, <쥬라기 공원>은 가부장 문화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여자로서 엘리 새틀러가 뭐라고 느끼는지 서술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렇게 독자가 해석한다고 해도, 이런 해석은 틀리지 않을 겁니다. 이런 해석에는 논리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이게 완전하게 옳은 해석이 아니라고 해도, 독자는 <쥬라기 공원>이 가부장 문화를 비판하지 않고 엘리 새틀러 시점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소설 시점이 모든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독자는 소설 시점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엘리 새틀러는 브래지어와 생리대가 불편하다고 느끼는지 모릅니다. 여자들에게 브래지어와 생리대는 너무 성가십니다. 월경이 뱃속을 뒤집고 난리법석을 치기 때문에, 여자들은 필수적으로 생리대를 챙겨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뱃속이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된다고 해도, 여자들이 생리대를 함부로 운운한다면, 가부장 문화는 이것을 왜곡할 겁니다.
월경 때문에 뱃속이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된다고 해도, 여자들은 이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가난한 여자들은 생리대조차 제대로 구입하지 못합니다. 뱃속이 뒤집어지든, 아랫도리가 핏물을 줄줄이 흘리든, 가난한 여자들은 이런 것들을 참아야 합니다. 가난이 남자와 여자를 똑같이 괴롭힌다고 해도, 가난한 여자는 월경 문제에 부딪혀야 합니다. 하지만 가난한 여자들이 월경 문제에 부딪힌다고 해도,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굶어뒈져야 하는 것처럼, 가난한 여자들은 그저 아래로 핏물을 쏟을 뿐입니다.
여자들이 이런 것들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심지어 가부장 문화는 이런 것들을 성 희롱과 성 폭행으로 연결할 겁니다. 브래지어 역시 문제입니다. 브래지어가 신체를 압박한다면, 여자들은 소화 불량에 걸리고 위장약과 함께 살아야 할 겁니다. 여학생들에게 브래지어 경험이 미숙하기 때문에, 어떤 여학생들은 왜 그들이 수족 냉증에 시달리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브래지어와 이런 증상들 사이에 관계가 없다고 해도, 분명히 브래지어는 불편합니다. 하지만 여학생들이 브래지어를 풀거나 느슨하게 관리한다면, 당장 이건 성 희롱으로 이어질 겁니다. 가부장 문화 속에서 여자로 살아가기는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엘리 새틀러가 이것을 비판하나요?
이슬라 누블라로 떠나기 위해 엘리가 짐을 꾸릴 때, 엘리가 생리대를 챙기나요? 야외 발굴 현장에서 어떻게 엘리가 월경 문제를 해결하나요? 무더운 사막 발굴 현장에서 엘리가 브래지어를 불편해하지 않나요? 운동권 학생들이 농성하는 동안, 농성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어떤 여학생들은 노브라를 선택합니다. 노브라가 성 희롱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이런 여학생들은 노브라를 선택합니다. 농성과 브래지어와 월경이 함께 스트레스가 되고 압박한다면, 심지어 여학생들은 밥 한 숟가락조차 제대로 넘기지 못할 겁니다. 여학우와 남학우가 똑같이 운동권이라고 해도, 운동권 여학우는 이런 고충들에 부딪힙니다.
어쩌면 무덥고 거친 야외 발굴 현장에서 여자 대학원생들은 비슷한 문제들에 부딪힐지 모릅니다. 소설 <공룡과 춤을>에서 고생물학자와 지질학자는 현장 답사가 거칠고 힘들다고 언급합니다. 사실 <쥬라기 공원>에서도 화석 발굴 지역에서 앨런 그랜트는 조난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거칠고 힘든 야외 발굴 현장에서 브래지어와 월경 때문에 여자 대학원생들은 고생할지 모르나, 소설 <쥬라기 공원>은 이것을 서술하지 않습니다. 사실 많은 SF 소설들은 이런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듀나님은 많은 SF 남자 작가들이 여자 문제에 너무 무심하다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에서 여자 고등학생과 남자 고등학생이 서로 바뀐다고 해도, 성 반전이 핵심 소재라고 해도, 이 애니메이션은 얼마나 힘들게 여자 고등학생이 살아가는지 보여주지 않습니다. <너의 이름은>에는 브래지어 압박과 뒤집어지는 월경과 폭력적인 시선들이 없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한자 성어 및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라는 노래 가사와 달리, 남자 고등학생이 여자 고등학생으로 바뀐다고 해도, <너의 이름>은 그저 여학생의 몸을 이용해 남성 판타지를 충족할 뿐입니다.
이건 <쥬라기 공원>이 반드시 이런 것들을 서술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소설 작가에게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있습니다. 공룡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쥬라기 공원>은 의도적으로 엘리 새틀러 시점을 제한했는지 모릅니다. 솔직히 공룡 바이오펑크 소설에서 무엇이 중요한가요? 브래지어 압박 문제와 되살아난 스테고사우루스 중에서 무엇이 중요한가요? 당연히 대답은 스테고사우루스입니다. 비디오 게임 <쥬라기 공원: 오퍼레이션 제네시스>에서 게임 플레이어들이 경영 관리보다 공룡 관람에 흠뻑 취하는 것처럼, 공룡 바이오펑크 소설에서 브래지어 압박 문제보다 되살아난 스테고사우루스는 훨씬 중요합니다.
갑갑한 브래지어 때문에, 화석 발굴팀의 여자 대학원생이 땀띠에 시달린다고 해도, 공룡 바이오펑크 소설은 이것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쥬라기 공원>이 엘리 새틀러 시점을 제한한다고 해도, 이건 범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가부장적인 현실에서 여자들이 온갖 고충들을 겪기 때문에, 소설이 서술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현실을 이용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소설 외부에서 독자는 이야기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소설 외부에서 독자가 이야기를 비판한다면, 독자는 비단 이야기만 아니라 다른 문학 장치들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시점, 문체, 단락 구성, 단어 선택, 장면 전환, 비유, 의식의 흐름, 추상적인 표현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서 이야기는 소설이 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소설은 여러 문학 장치들을 동원합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비단 이야기만 아니라 여러 문학 장치들을 함께 읽습니다. 그래서 독자는 비단 이야기만 아니라 문학 장치들을 함께 비판합니다. 수두룩한 소설들은 등장인물들에게 췌장이 있다고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스미노 요루가 쓴 10대 성장 소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와 달리, 수두룩한 소설들은 췌장을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설들이 췌장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소설들 속의 등장인물들에게 췌장이 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이 엘리 새틀러의 췌장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분명히 엘리 새틀러에게는 췌장이 있을 겁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현실 속에서 인간에게 췌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에서 야마우치 사쿠라와 달리, <쥬라기 공원>이 엘리 새틀러의 췌장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엘리 새틀러에게 췌장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니야! 이건 엉터리 해석이야! <쥬라기 공원>이 엘리 새틀러의 췌장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독자는 엘리 새틀러에게 췌장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할 거야! 엘리 새틀러에게는 췌장이 없을지 몰라!" 이렇게 어떤 독자들은 반박할지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런 독자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독자들은 근본주의 토라 해석자들과 비슷합니다.
이런 반박은 너무 제한적인 시각입니다. 독자는 이런 제한적인 시각을 피해야 할 겁니다. 초등학생은 췌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지 모릅니다. 이런 초등학생이 소설을 쓴다면, 소설 속의 등장인물에게 췌장이 없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초등학생 작가가 췌장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독자는 (초등학생이 쓴) 소설 속의 등장인물에게 췌장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작가가 알지 못하거나 소설이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해석할 수 있습니다.
소설은 문학 장치들을 이용해 현실을 부분적으로 반영합니다. 소설 속에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있음에도, 소설은 오직 몇몇 사람의 시점만 이용할지 모릅니다. 만약 로맨스 소설이 가난한 여자 주인공과 재벌 도련님과 다른 몇몇 사람의 시점을 이용한다면, 독자는 왜 로맨스 소설이 다른 시점들을 이용하지 않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농성 장소에서 여학우들이 고충들을 겪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사회주의 운동권이 있습니다. 사회주의 운동권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뒤엎고 싶어합니다. 로맨스 소설이 가난한 여자와 재벌 도련님을 이야기하기 원한다면, 로맨스 소설은 사회주의 운동권을 제외해야 할 겁니다.
로맨스 소설은 사회주의 운동가의 시점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만 재벌 기업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로맨스 소설 남자 주인공이 재벌 기업 경영자 2세라면, 이런 소설은 사회주의 운동가를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할 겁니다. 재벌 기업과 사회주의 운동권은 공존하지 못합니다. 둘 중에서 하나는 사라져야 합니다. 자본가 지배 계급이 사회주의 운동권을 짓밟고 탄압하고 학살하는 것처럼, 둘 중에서 하나는 사라져야 합니다. 로맨스 소설에서 재벌 기업 2세 도련님이 남자 주인공이라면, 로맨스 소설은 사회주의 운동권을 제외하거나 왜곡해야 합니다.
흠, 어쩌면 로맨스 소설은 운동권 남자 등장인물을 비열하고 적대적으로 묘사할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점은 아주 유용한 장치가 됩니다. 로맨스 소설이 사회주의 운동권의 시점을 제외하거나 감춘다면, 사회주의 운동권은 소설을 들여다보기 위한 창문이 되지 못할 겁니다. 독자는 사회주의 운동권보다 재벌 도련님의 창문(시점)으로 소설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로맨스 소설은 재벌 도련님에게 명분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로맨스 소설이 사회주의 운동권 시점을 서술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이것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사회주의 운동권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하기 때문에, 독자는 현실을 이용해 소설 시점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소설 시점이 어떤 것을 감춘다고 해도, 독자는 현실을 이용해 그것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많은 독자들은 그 자체로서 소설이 선험적이라고 착각합니다. 현실 속에서 작가는 현실을 이용해 소설을 쓰나, 많은 독자들은 현실과 소설이 별개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작가가 소설 속의 세상을 창조한다고 해도, <쥬라기 공원>처럼, 심지어 작가가 멸종한 자연 생태계를 복원한다고 해도, 결국 작가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현실에는 살아있는 스테고사우루스가 없습니다. 그래서 <쥬라기 공원>이 스테고사우루스를 묘사한다고 해도, 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들이 머나먼 외계 자연 생태계를 묘사한다고 해도, 이런 묘사는 지구 자연 생태계를 뻥튀기하거나 짬뽕해야 합니다.
현실 속에서 사이언스 픽션은 현실을 이용해 멸종한 중생대 생태계를 복원하고 외계 자연 생태계를 묘사합니다. 어떤 독자들은 이 게시글이 이야기 그 자체보다 너무 현실을 강조한다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분명히 독자가 이야기 속에 빠지는 동안, 독자는 현실을 잊을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서 이야기는 중요합니다. 독자가 공룡 사파리 속의 여자 고식물학자를 읽고, 가난한 여자와 재벌 도련님이 럭셔리하게 연애한다고 읽고, 활기찬 여학생과 방콕 남학생을 읽는 동안, 독자는 이야기 속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이야기는 끝납니다. 이야기가 끝난 이후, 독자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합니다.
심지어 독자가 소설을 읽는 동안, 현실이 독자를 그냥 놔두지 않는다면, 독자는 소설에서 벗어나고 현실에 참여해야 합니다. SF 소설이 외계 행성 심해 생태계를 묘사하고, 독자가 거기에 빠질 수 있다고 해도, 독자는 (소설 속의) 외계 행성 심해 생태계보다 현실에 속합니다. 소설보다 현실은 훨씬 거대합니다.